제 1 장
2
《이게 백씨 아닌가?》
자기 집쪽을 바라보며 제 생각에 옴해 서있던 백씨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점잖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구동 골짜기길로 내려오던 통량갓을 쓴 세 량반이 천한 아낙네를 아는체 하는통에 백씨는 홀지에 당황해났다.
풍채좋은 40대 장정은 평양일판에서도 이름이 난 선비인 장규현이고 그뒤를 따르는 젊은 두 량반중 한사람은 그의 아들 장명학인데 창전쪽에 서당을 내온 훈장이다. 장명학의 곁에 선 체격이 장대하고 첫눈에도 사내다워보이는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자 백씨는 황황히 고개를 숙이였다.
《나리님들, 그사이 편안하셨습니까?》
상놈들은 량반들에게 항용속에 없는 문안인사를 개여올리기가 일쑤이지만 평소에 장규현 부자의 인격에 끌려 무척 공경해오던 백씨인지라 진심어린 인사를 정중히 드렸다.
장규현의 향목서원은 서도지방에서 널리 알려진 교육기관이였고 그의 문하에서 배운 청렴결곡한 선비들중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자무식인 백씨지만 알고모르게 서원과 인연을 맺고 종이며 먹과 붓 같은것을 행상길에 날라다 헐값이나 한가지로 넘겨주군 했다.
돈벌이하는 녀인과 학문을 론하는 서원이 교제를 한다는 자체가 기이한 일이라 하겠지만 그 시작은 장명학이 뗀것이다. 그는 백씨가 평양바닥을 맴도는 행상이 아니기에 함흥의 붓과 해주의 유매먹 같은것을 부탁했다.
백씨는 행상길에 부탁한것들을 꼭 가져다 그 지방의 본전으로 주군 하였다. 그는 먼곳에서부터 가져온 귀한 물건들이였지만 향목서원에만은 아깝지 않게 내놓았다. 구태여 까닭을 밝힌다면 향목서원의 선비들이 비천한 자기를 다른 량반, 부자들처럼 하대하지 않은데서 오는 고마운 감정에서였다.
《백씨가 이번에도 숱한 길을 걸었군그래.》
고개를 숙인채 백씨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먼지투성이인 무명치마, 코등을 기운 검정고무신… 천리길을 헤맸으니 그 꼴이 오죽해보이겠는가.
《돈보다 귀한것은 사람의 몸이라 너무 혹사하지 말게. 그리구 돈이란게 물론 벌기도 힘들지만 지켜내기도 힘들고 바로 쓰기는 더 어려운 법일세. 전란에 죽은 사람보다 돈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네. 그 돈이라는게 어느 하루 사람목숨을 앗아가지 않는 날이 없으니 정말 무서운것이지. 물론 살아가자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많으면 자기뿐만아니라 남에게까지 화를 입힌다네. 백씨가 꼭 알아둬야 할 한가지 금언이 있는데… 허허, 길가에서 내 주책없이 긴소리를 하는구만.》
장규현을 따라서던 잘 생긴 선비가 백씨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색한 웃음과 야릇한 암시를 보내는 눈길에 마주친 백씨의 가슴은 금시 방망이질을 했다. 저 눈빛, 저 웃음… 팽팽해진 온몸은 부르르 떨렸다. 녀자들을 위해 생겨난듯 한 저 눈길은 한순간에 쓸어주고 벗겨내고 덮어서 애무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벼슬길을 차버린 사나이, 그는 룡강사람 유양점이다.
유양점의 매혹적인 눈웃음이 사라지자 백씨는 금시 터질듯이 뻐근해지며 쿵당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서둘러 걸음을 돌려세웠다.
고삭은 벼짚이영에 눌리워 모로 기울어진 집마당에 들어선 백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찔뚝거리며 다니던 오라비도, 동이를 이면 물동이에 발이 달린듯 찬바람을 일구던 그의 처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집같이 느껴진다.
여름 한철이면 토방우에 멍석을 깔고앉아 손자와 세월을 보내던 어머니의 모습을 다신 볼수 없는 썰렁한 집이다.
열평도 되나마나한 터밭귀퉁이에선 대추나무 한그루가 꽃진 뒤 열매를 달고 바람결에 뒤척인다.
백씨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니 자기라는 사람은 이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신세나 같이 돼버렸다.
렴치없는 새암바리년한테 시달림을 당할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난다. 입만 열면 돈소리고 돈내놓으라는 수작질이니 백씨의 결곡한 성미에 참으며 살기가 죽기보다 힘들었다.
헌데 오륙쓰기 싫어하는 이들 부처간이 대체 어데로 갔는가?
백씨는 집안에 들어가기 싫어 마당에 선채 집꼴을 둘러보기만 했다.
《누이, 왔소?》
등뒤에서 더위먹은 놈 침 흘리며 말하는것 같은 백길복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백씨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절름발이 뒤로 앙큼한 그의 처가 어린 아들애의 손목을 잡아채며 들어서는데 꼭 독이 오른 고추상이였다.
《오마니 팔자두, 돈 잘 버는 딸을 둬서 호강도 했지. 흥, 이제 천벌을 받지 않나 두고보라!》
침까지 퉤퉤 뱉으며 되는대로 지껄여댄 길복의 처는 궁둥이를 횅횅 휘두르며 마당을 꿰지르더니 부엌문을 부서져라 후려닫고 사라졌다.
어이없는 광경에 부닥친 백씨는 속통이 못돼먹은 년과는 마주서기조차 역스러워 그냥 외면한채 백길복에게 물었다.
《어델 갔다오는 길이우?》
부실한 찔뚝이는 학춤을 추듯 두팔을 쳐들고 기우뚱거리며 걸어가더니 토방에 주저앉는다.
《저… 관가… 아니, 그… 처가에…》
《반편같은 소리는 그만하구 들어와 아궁에 불이나 지피라구요.》
《어- 그러지… 헤헤… 누이, 들어가우.》
백길복은 녀편네 호통질에 덜미잡혀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신것도 모르고 장례를 지낸 다음에야 행상길에서 돌아온 백씨는 험한 소리란 험한 소리는 다 들었다. 딸자식이라는게 한집에서 살면서 어머니의 림종도 지켜주지 못하고 제사까지 받들지 못했으니 불효막심한 죄를 지은지라 참고 견디는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던걸 생각하면 장례라고 변변히 치르었을리 만무하건만 자식도리는 자기들이 다한것처럼 생색을 내며 달려들었다. 그때도 그악스러운 저년의 입에서는 돈소리뿐이였다.
백씨는 쓰거운 웃음을 지으며 자기 방문을 열려다말고 행상꾸레미를 깔고 토방에 앉았다.
뒤늦게 어머니 산소를 찾아보고 돌아와 백길복의 부처와 마주 앉았던 일이 떠올랐다.
…
《어머님이 림종에 남기신 말씀은 없으셨나?》
천생 부실한 백길복은 더수기만 벅벅 긁는데 암상맞은 처가 삼복에 부채질하듯 설쳐댔다.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았는데 왜 말이 없었겠나요? 누이 욕을 오죽했게요.》
《그랬을테지.》
눈길도 마주하기 싫은 녀자라 백씨는 뚝뚝한 말투로 대꾸하고는 백길복을 넘겨다보았다.
《오라비 생각은 어떻수? 이 집안이래야 뻔한 살림인데 나눔질할것도 없을것 같은데.》
《그야… 누이 생각하는대로지요.》
백길복의 대꾸가 끝나기 바쁘게 입빠른 그의 처가 안달이 나서 말꼬리를 물어챘다.
《정신이 나간게 아니요? 오마니가 숨지며 뭐라고 했나요?! 집안재산이 천냥은 넘으니 그리 알구 의리가 상하지 않게 하라구 당부하지 않았수.》
어머니 입에서 천냥소리가 나왔다니 백씨로서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옛날부터 어미딸이라는 말이 있다. 며느리를 얻고나면 아들자식보다 딸과 속이 통하는 어머니여서 모녀간의 뒤말은 비밀이나 같다고 했는데 어찌 어머니가… 그런즉 어머니는 양자와 며느리를 친딸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머니가 알고있는 자기 수중의 천냥은 행상길에 흘린 고혈이고 목숨과 같은것인데 그걸 나누라고 유언했단 말인가?
좀해서 자기의 속마음을 겉에 내비칠줄 모르는 백씨였지만 그의 두눈에서 서슬푸른 빛이 번뜩이였다.
《무슨 소린지. 나래야 보짐장사나 해온 녀잔데 어데서 그 많은 돈을 모았겠나? 모친이 정녕 그런 말을 했다면 아마 돈이 그리워 로망을 한거겠지.》
백씨는 놀라는 기색없이 범상한 말로 넘기려 했지만 검질긴 길복의 처는 끝까지 물고늘어질 잡도리로 그냥 천냥타령만 곱씹어 댔다.
《글쎄 집안이 지금같이 돼버렸으니 그렇게 뭉그려치우자고 하겠지만 어머니 재산이 천냥은 넘는다는걸 온 동네가 다 알고있으니 그건 어쩌려우?》
한집안에서 산지 5년이 지나오지만 백씨는 오레미라고 불러야 할 녀자를 처음 면바로 바라보았다. 이마빡이 톡 튀여나오고 눈꼬리가 쳐들린게 어느 한 귀퉁이도 편안해보이는데가 없다. 체통은 조그마한게 먹이를 노리는 도적고양이같은 눈알을 무시로 깜짝거리며 암팡진 빛을 뿜어댄다.
오레미라고 대접해주면 좋겠건만 속에 내키지 않는 소리를 못하는 올곧은 성미인지라 백씨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임자의 말은 어머니 재산 천냥이 나한테 있다는건데 내가 그 많은 돈을 물려받아 장사를 했다면 지금같이 행상으로 지낼것 같은가? 그리구 양자와 며느리를 그리도 중히 여긴분인데 한푼도 주지 않았다니 이게 어디 리치에 맞는가? 천냥소린 전혀 동닿지 않는 말일세.》
처와 누이틈에 끼여앉은 백길복은 그들의 말속에 천냥돈이 오고가는데도 천치모양으로 히득히득 웃어대기만 한다.
길복의 처는 백씨앞으로 다가앉으며 오금이나 박듯이 말했다.
《누인 오마니 딸이 아니우? 딸이 번 돈이자 오마니 돈이니 백씨가문의 재산이 아니란 말인가요? 천냥소리가 늙은이의 로망이라고 하는데 그 천냥을 형제간이 나누어쓰는게 세상떠난 오마니의 소원을 풀어주는 일인줄은 왜 모르오?》
백씨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쥐였다.
과시 간특한 년이다. 저 주둥이에서 나오는 천냥소리는 내 염통을 뽑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이 꾀바르고 미련한 년아, 네 앙탈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는 초상치른 집에서 입방아를 마주 찧어야 상서롭지 못한 뒤소리만 생겨날것 같아 말머리를 돌리였다.
《허망한 소리말구 이제부터 살아갈 상론이나 하지. 나야 줄창 나다니구 또 홀몸이니 뭐라나. 이 집은 거기서들 쓰고살라구.》
백씨가 일어나 웃방으로 올라가버리자 길복의 처는 그냥 앙칼진 소리를 내질렀다.
《하늘이 굽어봅네다. 나라에 법이 있다는걸 몰라요?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석삼년 봉양했는데도 그렇게 무심하면 되겠소? 죄는 지은데로 간다는걸 알라구요!》
백씨는 고약한 계집년의 수작질을 한낱 화풀이로만 여기며 귀등으로 스쳐들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쓸쓸해난 백씨는 뜨락으로 나와 집을 휘둘러보았다.
내가 정말 미련한 년이다. 한처마아래서 이렇게는 못산다. 그래도 집이라고 찾아든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가.
그는 어머니 제사나 지내고는 영 집을 나가고말리라 마음먹었다. 속에 걸리는건 돈 벌어들이는 정신에 어머니를 생전에 잘 위해드리지 못한것이다. 한뉘 가난살이에 허덕여온 늙으신 어머니에게 거친 음식만 대접했으니 돈에 환장한 계집이라 손가락질한들 변명할 말도 없다.
다시 방안에 들어가앉은 그의 머리에 길가에서 만났던 선비로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돈이라는게 뭔가? 그것때문에 가난에 울고 집안이 싸움질이고 장터에서는 목이 쉬도록 아우성이다. 돈이 사람을 죽인다. 돈이 없어서 평생 의지인 남편이라는 기둥을 졸지에 잃은 내가 아닌가. 전란이 죽인 사람보다 돈이 죽인 사람이 더 많다고, 그 돈이 어느 하루 사람목숨을 앗아가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한 장규현의 말이 옳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왜 꼭 자기에게 그 말을 해준건지 알쑹달쑹했다.
너그러운 타이름이였지만 백씨로서는 뜻을 다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장사속은 좀 알아도 세상물정에는 어둡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였다.
내가 돈을 벌자고 남에게 죄되는 일을 한적은 없던가. 자기로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지만 속에 걸리는바가 전혀 없는것도 아니다. 돈을 벌자니 얼마나 무정했던가. 행상길에서 거지들이 동냥을 할 때면 동전 한잎은 고사하고 중태기안에 넣어둔 강냉이떡조차 내주지 않았다. 거지로 빌어먹으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편이 낫다, 살려거든 제 뼈를 갈아 돈을 벌거라, 그는 모진 마음을 먹고 외면하며 이렇게 되뇌이군 하였다.
세상에 어느 누가 가난뱅이에게 덕을 베푼 일이 있는가. 모진 세상, 무정한 인간살이다. 제것이 없으면 사람값에 못가고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나 같다. 백씨의 인생관은 이렇게 굳어진것이였다.
밤깊도록 뒤척이며 잠 못들던 그는 이상한 꿈속을 헤매다 삼경이 지나서야 벌떡 깨여 일어나 앉았다.
푸르스름한 달빛만 방안으로 스며든다. 접동새가 분주스러운 밤벌레들과 더불어 짧은 여름밤을 지새우고있다.
《접동, 접동…》
밤새의 처량한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시같은 꿈속길을 다시 더듬어갔다.
심심산골 오솔길로 그는 무엇엔가 이끌려 정처없이 가고있었다. 길옆에 선 나무도 밟고 지나는 돌도 모두 금은보화였다. 옛말에 나오던 하늘나라의 보물동산이 분명한데 사방은 끝없이 고요했다. 은비단을 늘인 층계를 오르니 옥을 다듬어세운 문루가 나타났다.
《네가 평양에서 산다는 백씨가 옳으냐?》
금빛안개속에서 신령스러운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렇노라고 대답했지만 웬일인지 제 목소리는 들리지조차 않았다.
신비한 바라소리가 진감하더니 보석대문이 열리였다. 백씨의 눈앞에는 금산, 은산이 솟아 황홀하고 신기한 빛을 뿜었다.
《이 보물들을 너에게 주려고 하니 사양말고 받거라.》
백씨는 눈을 감고 두손을 모은채 간신히 대답했다.
《비천한 이 계집에게는 너무도 큰 재물이고 쓸줄은 더욱 모르매 도저히 받을수 없소이다.》
《여적 재물을 다뤄온다면서도 바로 쓰는 법조차 아직 모르고있다니 보물을 가진대도 돌덩이와 다를바 없겠거늘 참, 한심하기 그지없노라.》
눈앞의 금은보화는 구름같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뿔달린 지옥의 사자가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다가왔다. …
복이 오려다가 화가 닥친 몹시 불길한 꿈이다. 눈앞에서 그냥 얼른거리는것은 금덩이가 아니라 사납게 노려보던 뿔달린 저승사자의 시뻘건 눈알이다.
괴이쩍은 꿈을 꾸고난 백씨는 가슴이 활랑거리여 동창이 훤히 밝아오도록 다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아침밥을 대충 먹고난 백씨가 어머니 산소를 찾아 떠나려는데 난데없이 감영의 관리와 아전무리가 집마당에 쓸어들었다.
《예가 백씨집이 옳으냐?》
감영의 관리가 위엄을 차려 묻자 백길복과 그의 처는 마치도 기다리기나 한듯 제창 달려나가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하옵니다.》
《오셨소이까.》
뜻밖의 일앞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는듯 한 대답이며 간사스러운 인사말이 백씨에게 의문을 자아냈다.
《길복이가 누구냐?》
《예, 저올시다.》
《송사에 대한 판결이 있으니 어서들 가자.》
생뚱같은 송사란 말에 백씨는 영문을 알수 없어 덤덤히 지켜보기만 했다. 백길복이네 부부는 고개를 조아리며 황공해마지 않는데 그 꼴이 백씨에게는 더 미심쩍었다.
《소인도 가야 합니까?》
무슨 송사인지 자기와는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백씨가 무심결에 이렇게 묻자 관리의 얼굴에 금시 노기가 어리더니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방자하게 무슨 말버릇인고? 감영의 령을 알렸는데 귀구멍이 막혔느냐?!》
백씨성을 가진 가난뱅이들이 박석골안에 산다는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감영에서까지 찾는단 말인가?
아전들의 불같은 성화를 받으며 백씨네가 평양감영으로 갔을 때에는 관가의 조회가 끝난 뒤였다.
걸어서 들어섰다가 누워서 들려나온다는 감영의 형장이 무시무시하게 펼쳐져있었다. 대청마루로 오르는 거밋거밋한 돌계단조차 피비린내를 풍기는것만 같았다.
기가 질린 백씨네는 상놈들이라 맨땅에 무릎을 꿇고앉아 한동안 기다렸다. 감영의 관리가 나와서 감영의 문서를 위엄있게 읽을 때에야 백씨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듣거라. 룡덕면 량인 백길복의 송사에 대한 판결을 다음같이 한다.
길복은 비록 양자이지만 어미에게 효도했고 사후에는 상주의 도리를 다했은즉 가산을 상속받을 명분이 당당하다.
친딸인 백씨는 모친의 병환이 위독함을 모르지 않지만 돈벌이에 환장하여 림종조차 모르고 지냈으니 불효죄로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으나 아직은 상중이므로 가긍히 여기여 용서하겠다.
길복은 백씨가문의 재산인 천냥을 상속받으며 딸 백씨는 집과 가장집물을 넘겨받되 관가의 판결을 어기여 더 큰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행실을 바로하라.》
백씨는 온몸이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듯 한 착각과 함께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관가의 판결에 황공하오이다.》
백길복은 큰절을 연방 하며 감개한 소리로 아뢰였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해본 백씨다. 목숨같은 천냥금을 관가의 판결로 내놓게 된 마당에 와서야 한가마밥을 먹으며 산 년놈들이 작당을 하여 오늘같은 변괴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무어라 항변했댔자 달라질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것이 확실하다. 양자라 할지라도 가문의 아들이 분명하고 제 뼈심을 놀려 피땀으로 벌어들인 돈이라지만 백씨가문의 재산일수밖에 없다.
대청우의 관리들이 사라지고 백길복이 제 처와 함께 쾌재를 올리며 찔룩찔룩 걸어가는 모양을 백씨는 바라보았다. 천생 모자라는 바보, 백치로 여겼지만 돈앞에서는 결코 머저리도 천치도 아니였다.
하루아침에 10년세월 피가 나게 번 돈을 짐승만도 못한것들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게 된 백씨는 너무도 기가 막혀 앞이 캄캄했고 하루에 2백리길도 힘든줄 모르던 억센 두다리의 맥이 다 뽑혀 걸음조차 떼지지 않았다.
어떻게 벌어들인 돈인가. 뜨물장사, 콩나물장사, 나무장사, 약초장사… 험한 일이란 험한 일은 다하며 한푼두푼 모은 돈이다. 그 장사길에 젊은 녀자로서 당한 천대와 굴욕을 무슨 말로 다 한단 말인가.
아, 돈없는 설음을 이겨보자고 무슨 봉변인들 당하지 않으며 행상길을 걸었던가. 도적무리에 걸려들어 뭇매를 맞으면서도 내놓지 않은 돈이고 강도패의 칼끝이 멱을 겨눌 때도 죽으면 죽었지 빼앗길수 없었던 돈이였다.
차라리 그 돈으로 하루한시라도 편안히 살며 호의호식했더라면 이다지는 원통하지 않으리라. 엄동에도 얼음같은 수수떡을 갉아먹으며 행상길을 걸었고 비바람치는 궂은날에조차 려인숙의 뜨뜻한 잠자리가 아니라 썰렁한 마소우리에서 짐승과 같이 누워자며 로독을 풀었다.
이제는 살길이 없다. 살아남는대도 금수보다 못한 인생이고 앞날이 없으니 죽은 목숨이 아니고 뭔가.
백씨는 절망에 빠져 구천으로 이어진 길을 가고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오순못근처의 검정다리어구에 이르렀다.
《내가 잘못 봤나 했더니 백씨가 옳구만.》
앞에서 웬 남자가 알은체 했지만 백씨는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말이 아니구만. 나도 그 사연을 두루 들었네.》
동정어린 목소리에 멎어선 백씨는 장규현을 알아보자 솟구치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어르신께서 저같은 년의 일을 어떻게 아십니까?》
《평양감영이란 온통 탐관오리판일세. 임자 오라비와 처가 자네돈이 욕심나서 관가와 짜고 꾸민짓이라더군. 그러니 천냥중의 절반이상은 벼슬하는 놈들의 입에 들어갔을거네.》
《머저리중의 상머저리는 이 미련한 계집이였소이다.》
장규현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이 약한자가 제일 쉽게 찾는것이 죽는 길이고 강직한 사람은 천길함정에 빠져서도 살아서 할 일을 생각한다네. 내 백씨가 부정한 마음을 가지고 장사길에 나선 녀인이 아님을 아는지라 권고하네만 스스로 물러앉을 생각을 말게. 그대에겐 대동과 순안쪽에 사둔 땅마지기가 있지 않나. 10년은 앗겼어도 30년, 40년을 생각하며 일어서라구.》
《어르신님, 저같은것을 자식같이 여겨 깨우쳐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우연히 장규현을 만나 각근한 위안을 받았으나 백씨는 막막한 생각을 거두지 못하며 집으로 지축지축 걸어갔다.
백길복과 처는 온다간다는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렸다. 떳떳한 재산상속을 받았다면 도적고양이같이 꼬리를 사릴리가 있겠는가.
마당복판에 우두커니 선 백씨는 허울만 남은 집을 불이 황황 이는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 원한이 서리서리 자리잡고있었다.
녀자는 사람취급도 안해주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내 이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냐! 이렇게 짓밟혀살다 죽어야겠으니 원통하구나.
부엌에 들어가 도끼를 들고나온 백씨는 터밭모서리에 선 대추나무를 노려보다 이를 사려물고 도끼질을 해댔다. 백씨집과 더불어 30년 가깝게 산 나무다. 수원에서 이사와 집터를 잡고 아버지가 심었다.
도끼질소리에 이웃집 사람들이 나와 백씨의 거동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 열매가 가득 달린 나무가 소리를 내며 넘어지자 조무래기들이 와- 소리를 지르며 몰려와 설익은 대추를 승벽내기로 따기 시작하는것을 멀거니 지켜보던 백씨는 이윽해서야 집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왔다. 방등앞에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은 백씨는 살아갈 앞일을 생각하며 끝없는 한숨속에 밤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