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외동포들을 통일애국의 한길로

빛나는 삶

 

조국통일상수상자들가운데는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을 하던 림창영선생도 있다.

재미교포 림창영선생으로 말하면 해방후 미군정청의 비서관으로, 유엔주재 남조선대표로도 있었으며 미국의 학계, 언론계, 종교계에도 관여하였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잘못 살아온 지난날을 뉘우치고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운동에 뛰여들었으나 그의 과거경력으로 해서 그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로 해서 림창영선생의 심중은 복잡하였다.

이러한 때 조국에서는 평양에서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론의를 허심탄회하게 가지자는것을 제의하고 해외의 여러 교포인사들과 함께 그도 초청하였다.

이렇게 되여 림창영선생이 주체81(1992)년 4월 조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어느날 그는 뜻밖에도 그토록 그리며 흠모하여마지 않던 민족의 태양 김일성주석과 함께 위대한 장군님을 한날한시에 처음으로 만나뵙는 최상최고의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장군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그에게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다가가시였다.

그이께서는 년로한 몸으로 먼곳에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다고, 선생님과 같은분들이야말로 해외조국통일운동의 원로이고 선각자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흠모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이렇게 말씀올렸다.

《온 겨레가 운명과 미래를 맡기고 사는 어버이장군님께서 분초가 새로운 국사를 미루시고 무상의 영광을 베풀어주시니 송구한 마음을 달랠길 없습니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보다 더한 국사가 어디에 있겠는가고 하시며 7천만겨레의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위업앞에서는 모두가 심신을 바칠줄 아는 전사가 되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통일성업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자고 하시며 그의 손을 다시금 굳게 잡아주시였다.

림창영선생은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그이를 우러러 보았다.

환하신 모습, 자애로운 미소, 다정하신 음성…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그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통일보다 더한 국사가 어디에 있겠는가고, 조국통일위업앞에서는 모두가 심신을 바칠줄 아는 전사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장군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가슴을 파고들었기때문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조국방문기간 그에게 성대한 환영연회도 조직해주시고 가족친척들과 만나 즐겁게 지낼수 있도록 해주시였으며 그의 건강을 념려하여 유능한 의료진의 치료를 받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림창영선생은 장군님의 믿음과 은정속에 인생고목에 꽃을 피운 자신을 새롭게 느끼며 참된 인생의 좌표와 신심을 갖게 되였다.

새로운 희망과 각오를 안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교포들속에서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을 널리 선전하고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다.

주체84(1995)년 11월 28일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 선출된 림창영선생은 교포들속에 들어가 민족대단결로 통일성업을 이룩해나가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고령의 몸으로 통일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하던 림창영선생은 주체85(1996)년 1월 25일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장례를 교회에서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르며 유해는 화장하여 조국이 통일된 후 평양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해외조국통일운동의 원로들이 떠나가는것이 못내 가슴아프다고 하시면서 림선생은 가족장만으로는 안된다고, 조국에서 추도회를 크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화환까지 몸소 보내주시였다.

림창영선생의 생애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이야말로 조국통일위업에 한몸바친 애국자들의 삶을 영원히 빛내준 태양의 품이라는 고귀한 진리를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깊이깊이 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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