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외동포들을 통일애국의 한길로

동포작곡가의 행복

 

주체72(1983)년 5월 어느날 풍치 아름다운 모란봉기슭에 자리잡은 모란봉극장에서는 윤이상음악회의 첫막이 열렸다.

음악회무대에는 국립교향악단과 함께 내외에 널리 알려진 이름있는 가수들이 출현하였다.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가요들은 청중의 심금을 흔들었다.

가요 《민주련합가》의 노래소리는 청중의 가슴속에서 우리 조국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으려는 내외분렬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게 하였으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이 더욱 끓어번지게 하였다.

련이어 무대에는 가요 《락동강》, 《달무리》 등이 올랐다.

노래들에서는 지난날 일제의 식민지기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한숨소리만이 아니라 해방자의 탈을 쓰고 우리 조국의 절반땅을 강점한 미제의 피묻은 구두발밑에서 신음하는 남녘인민들의 원한의 목소리와 함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억세게 싸우고있는 겨레의 웨침소리가 절절히 울렸다.

청중은 노래를 들으면서 비록 멀리 해외에 있지만 나라의 분렬로 인한 민족의 불행과 고통을 가슴사무치게 안고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는데 자기의 음악적탐구와 창작적열정을 바치는 윤이상선생의 사상감정을 더 잘 알게 되였다.

특히 청중은 이 음악회를 통하여 해외에 있는 한 애국적인 작곡가에게 깊은 은정을 베푸시며 조국통일의 길에서 그의 음악활동을 끝없이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고결한 사랑에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했다.

한해전 여름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친히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를 록음으로 들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 교향곡에는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나라의 통일을 열렬히 바라는 작곡가의 사상감정이 잘 반영되였다고 하시면서 이 교향곡연주회를 조직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 평양에서는 조국통일을 념원하는 우리 인민들과 수많은 음악애호가들의 깊은 관심속에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에 대한 연주회가 진행되였다.

연주회는 청중들의 가슴마다에 광주인민들의 영웅적투쟁위훈을 다시금 새겨주었으며 그와 동시에 살인마들에 대한 끝없는 증오의 불길이 타번지게 하였다.

그후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지난 시기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노래들을 소개선전하는 사업을 벌리도록 가르쳐주시였다.

그리하여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윤이상선생이 음악활동초기에 작곡한 《편지》, 《나그네》, 《달무리》를 비롯한 좋은 노래들이 속속 발굴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본인의 기억에서도 사라져가던 작품들이 소생의 빛을 안고 다시 세상에 태여난것을 못내 기뻐하시며 몸소 그 가요들을 들어주시고 발굴된 가요들을 가지고 그의 음악회를 진행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고 음악회에 출연할 배우들과 반주악단까지 선정해주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윤이상음악회는 주체89(2000)년까지 무려 19회에 걸쳐 진행되였다.

윤이상선생에 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가 부인과 함께 조국을 방문한 기회에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은 석상에서 평양에 민족음악연구소를 내왔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자 수령님께서는 그의 소청을 쾌히 승낙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새로 내오는 음악연구소를 윤이상음악연구소로 부르도록 하시고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청사와 윤이상음악당까지 건설하여 나라의 음악예술발전과 조국통일위업에 적극 기여하는 통일음악교류기지로 튼튼히 꾸려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하여 윤이상선생은 장군님의 품속에서 조국통일상 수상자로 통일애국의 길에 삶의 자욱을 뚜렷이 남기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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