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숭고한 의리와 뜨거운 동포애를 지니시고
《우리가 펴나가는 광폭정치는 만사람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는 숭고한 인간애의 정치이며 민족의 모든 계급, 계층을 나라와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굳게 묶어세우는 가장 폭넓은 애국애족의 정치입니다.》
애국으로 빛나는 청춘
주체49(1960)년 봄 남조선에서 4. 19인민봉기가 일어났을 때에 있은 일이다.
여러 신문, 방송들은 련일 남조선인민들의 4월인민봉기소식을 전하고있었다.
어느날
신문에는 이렇게 씌워져있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운 4월 19일, 그 항쟁의 거리에서 자유와 민주의 꽃봉오리로 쓰러진 진영숙학생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 없는줄 압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저의 마음은 이미 거리로 나가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해서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건강히 계셔요. …》
진영숙학생은 이 편지를 남기고 시위대오의 선두에서 싸우다가 원쑤들의 총탄에 맞아 붉은 선혈로 항쟁의 마당을 적시며 쓰러졌던것이다.
신문을 읽고나신
살벌한 땅에서 태여난탓에 조국의 하늘을 밝게 비치는 따사로운 해빛 한번 마음껏 받아보지 못하고 민주와 통일을 목이 타도록 웨치다가 너무도 짧은 한생을 마친 소녀를 생각하니 가슴아프시였던것이다.
이튿날 아침이였다.
일찌기 학교로 나가신
그러자 교직원, 학생 누구라 할것없이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항쟁의 거리에서 용감히 싸우다 쓰러진 그의 영웅적소행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나어린 그를 앗아간 원쑤들을 규탄하며 진영숙을 살려내라고 웨치기까지 하였다.
순식간에 온 학교가 남조선파쑈정권을 절규하는 성토장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던
피의 광장에 쓰러진 그가 삭막하고 매정한 남녘땅에서 고결한 생의 흔적마저 짓밟히도록 그냥 둘수 없다는
교직원, 학생들은 크게 감동되여
그때부터 진영숙학생의 이름은 교내의 일상생활과 여러 행사들에서 산 사람처럼 호명되였고 그때마다 남녘겨레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지지성원하는 청년학생들의 가슴은 의로운 련대감으로 높뛰였다.
하여 그들의 이름과 넋은 오늘도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남아 조국통일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