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없이 넓은 도량으로

 

《우리는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의 길에서 변함없이 광폭정치를 실시하여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그와 단결하며 조국통일의 한대오에서 손잡고 나갈것입니다.》

김 정 일

 

통일축구경기

주체79(1990)년 가을 북남사이에 축구경기가 조직될 때에 있은 일이다.

 

새롭게 생겨난 명칭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들로부터 한가지 이례적인 사실에 대하여 보고받으시였다.

그것은 북과 남사이의 축구경기와 관련한것인데 이 문제가 장군님께 보고되기까지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그해 중국의 베이징에서는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가 진행되였는데 대회가 끝난 후 북의 체육관계부문 일군들은 뜻밖에도 남측으로부터 북과 남사이에 축구경기를 하자는 제의를 받게 되였다.

북측은 이미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조국통일의 열망으로부터 출발하여 북과 남이 하나의 팀으로 경기대회에 참가하자고 거듭 제의하였고 유일팀구성에서 나서는 문제들에서 대범하고 통이 큰 양보도 하였었는데 남측은 당치않은 구실을 대면서 북측의 제의를 거부하고 끝내 별개의 팀으로 참가하고말았다.

그러던 남측이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북남축구경기를 하자고 들고나왔던것이다.

일군들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의 도발책동으로 하여 북남사이의 정치군사적대결도 해소되지 않고 긴장상태가 계속되고있는 형편에서 어떻게 체육교류부터 하겠는가고 생각하면서 장군님께 보고드리였던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장군님께서는 생각이 깊어지시였다.

남측은 1950년대부터 하나된 민족을 세상에 시위하기 위하여 국제올림픽경기대회를 비롯한 국제경기때마다 유일팀으로 참가할데 대한 북측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 분렬주의세력의 책동의 결과였다.

력대적으로 북측이 제기한 체육교류를 그처럼 한사코 반대해오던 남측이 이번 축구경기를 하자고 하는데는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북과 남사이에 접촉과 교류를 마다한다면 그것은 민족분렬의 고통을 강요하는 외세의 책동에만 유리하게 될것이고 조국통일을 열망하는 민족의 한결같은 념원을 외면하는것으로 될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번 체육교류도 끊어진 혈맥을 잇고 통일분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되게 할것을 결심하시고 해당 일군에게 이렇게 일깨워주시였다.

… 우리는 축구경기를 통해서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통일열기를 고조시켜나가는 계기를 조성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기를 하는것이 좋습니다.

마침내 북과 남의 체육관계자들이 모여앉아 축구경기를 위한 실무적문제들을 토의하게 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하나의 난문제가 제기되였다.

그것은 축구경기의 명칭을 어떻게 부를것인가 하는것이였다.

남측이 제안한 경기명칭은 《경평축구경기》였다.

일군들은 그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신통한 대안이 없어 쌍방사이에 락착을 짓지 못하고있었다.

이 사실을 아신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일제식민지통치때 쓰던 《경평축구경기》란 이름을 그대로 되살려 쓰는것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는것은 물론이거니와 통일지향적인 측면도 없고 북남대결을 조장하는 기운만 강하다고 하시면서 축구경기의 명칭을 북남통일축구경기로 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일군들은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통일축구경기, 정말 듣기만 해도 민족의 통일념원을 그대로 담은 명칭이였다.

북남사이의 축구경기를 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하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의 인민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수많은 남녘동포들도 《통일축구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 마음에 꼭 드는가. 축구경기도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통일의 뜻으로 한다는데는 정말 심장이 동하고 눈물이 쏟아진다.》고 하면서 눈굽을 적시였다.

이렇게 되여 북과 남사이의 첫 통일축구경기가 성대히 진행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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