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봄이 왔다.

하늘에 둥실 솟은 해는 제몸을 깡그리 불태우며 대지우에 따뜻한 볕을 한껏 뿌려주었다.

그 볕을 받아안고 온 겨우내 언땅속에서 제몸을 옹크리고 추위에 떨던 만물이 이제야 살때를 만났다는듯 저마끔 아귀다툼을 하면서 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들판에는 눈이불을 덮고 땅속에서 한겨울동안 잠자던 새싹들이 뾰족이 얼굴을 내밀었다.

겨우내 우악스러운 눈바람, 찬바람속에서 시달림을 받으며 고생하던 나무아지들에서도 파란 물기가 오르더니 어느새 새싹들이 다닥다닥 돋아났다.

이렇듯 만물의 아귀다툼이 한창 벌어지는 속에서 기유년(1489년)의 봄이 무르익어가던 4월 스무닷새째날이였다.

온갖 꽃들로 만화방창한 한양궁성안은 아침부터 흥성거렸다.

오늘이 바로 성종이 즉위한지 스무해째 되는 날이였던것이다.

근정전안에서 문무백관들의 축하를 받으며 룡상에 오른 성종은 흐뭇한 눈길로 자기앞에 주런이 서있는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자기를 받들어 스무해동안 일해온 미더운 신하들이였던것이다.

1품이상의 왕족일가와 돈녕부 령사이상 의정부, 6조, 한성부의 관리들, 당직 장수들, 승정원, 홍문관, 의금부 예문관의 관리들이 모인 대궐뜨락은 울긋불긋한 관복들로 차고넘쳤다.

축하모임을 주관하는 례빈사의 지시에 따라 매미날개같은 옷을 입은 궁녀들이 매 사람에게 술잔을 권했다.

시녀가 날라온 금술잔을 손에 잡은 성종은 신하들을 향하여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마당에 모여선 백관들도 잔을 쳐들었다.

성종은 단숨에 한잔을 쭉 들여마셨다.

백관들은 일제히 합창하였다.

《만세무궁하옵소서. -》

만세 삼창을 마친 백관들은 저저마다 잡고있던 술잔들을 쭉 들여마셨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있던 성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들이 이렇게 축하를 해주니 감개무량하다. 앞으로 짐을 받들어 일을 더 잘해주기를 바란다.》

성종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백관들은 또다시 머리를 숙이면서 합창하였다.

《황공무지로소이다. -》

백관들속에 끼여서서 인사를 하는 리철견은 성종과 눈을 마주칠가봐 속이 한줌만 해졌다.

그사이 임금의 특명을 받고 황해도체찰사로 나가있던 리철견은 전탄수관개공사를 겨우 마무리짓고 올해초에 의금부의 종2품인 동지사로 올라왔다.

의금부로 말하면 왕명에 따라 나라의 대역부도죄와 기타 신소처리를 맡은 관청으로서 국왕의 특별한 관심속에 있었다.

오늘아침에 있은 일이다.

아침 일찌기 관사에 나갔던 리철견은 전날밤 숙직번을 선 도사 홍자하에게서 황해도감영에서 올려보낸 급보를 받아보았다.

급보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도안의 강도 김막동 등이 패거리를 지어 돌아치면서 로략질을 일삼고있습니다. 지난 4월 초삼일에는 봉산관가에 달려들어 군수이하 관리들을 묶어놓고 심히 야료질하였으며 창고문을 부시고 환자쌀로 내줄 곡식을 모두 털어갔습니다. 이 강도들로 말하면 지금까지 몇년째 도안의 여러곳을 돌아치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로략질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여 민심을 소란하게 하고있습니다. 지금 도안의 백성들은 이놈들때문에 몇년째 고통을 겪고있습니다. 더우기 이놈들은 량반관료들을 무엄하게 야료질하는것을 밥먹듯 하고있습니다. 몇년전에 수안군수이하 관리들이 모두 이 강도들에게 피살되였는데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을번 한것을 마침 군사를 풀어서 겨우 수습하였습니다.》

급보를 읽어보던 리철견은 속이 덜컥하였다.

언제부터 잡으라던 김막동을 잡지 못한것이 께름직하였던것이다.

순간 그의 눈앞에는 전탄수공사장과 장수산성 등지에서 목격한 사실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이제 이 사실이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날엔 자기에게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임금에게 그대로 보고하자니 제 목이 무사치 못할것 같고 또 보고하지 않고 깔아뭉갠다면 어느때든지 들장이 나서 책임추궁을 받는것도 불보듯 뻔했다.

리철견은 말없이 홍자하를 바라보았다.

자기와 함께 종사관으로 황해도에 나갔다가 함께 의금부에 들어와 종5품인 도사벼슬을 하고있는 홍자하도 밤에 숙직번을 서느라고 잠을 못잤는지 아니면 황해도에서 올라온 급보를 보고 속이 께름해서 잠을 못잤는지 눈두덩이 부석부석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끙끙 벙어리랭가슴앓듯 하고있는데 궁성으로 들어와 축하모임에 참가하라는 전갈이 왔다.

리철견은 당상관들의 뒤에 서서 몸을 웅크리고 진땀을 뽑았다.

드디여 축하모임을 끝낸다는 례빈사의 목소리가 궁궐뜨락에 울려왔다.

그제서야 리철견은 안도의 숨을 푸-하고 내쉬고는 무엇에 쫓기우는듯 궁성의 남문인 광화문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가 광화문을 막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그의 뒤를 따라 달려온 내시가 그를 멈춰세웠다.

《저 동지사어른.》

《…》

내시는 리철견에게 약간 허리 굽혀 읍을 하고나서 말하였다.

《지금 상감마마께서 어른을 부르시오이다.》

《상감마마께서?》

《그렇소이다. 어른을 모시고 경회루로 오시라 하였소이다.》

《알겠다.》

리철견은 할수없이 앞서가는 내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경회루는 사정전 서쪽에 있는 못가우에 있는 루정이다.

넓은 바다마냥 푸른 물이 출렁이는 못가에는 련꽃잎들이 새순을 내돋았고 못가안에 있는 두개의 섬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게 피여나서 섬이라기보다 두개의 꽃바구니가 둥실 떠있는듯 하였다.

못가의 주변에는 푸르청청한 소나무며 실실 늘어진 실버들이 바람결에 하느적거리고있었다.

울긋불긋 단청을 한 경회루우에서 참대발의자에 앉은 성종은 시녀들이 들고 서있는 먹이그릇에서 먹이를 집어들고 못가에 한가로이 떠다니는 물오리들에게 던져주고있었다.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회루의 경치는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1년 사시절 장관이였다.

오죽하면 이곳을 찾은 다른 나라 사신들도 경치가 너무도 황홀하여 발걸음을 떼지 못했으랴.

그러나 이곳으로 오는 리철견은 언제 못가의 황홀한 경치를 감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경회루밑에 다가가서 엉거주춤 서있었다.

내시의 보고를 받았는지 루정우에서 약간 석쉼한 성종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철견이, 이리 올라오라구.》

리철견은 두손을 모아잡고 허리를 푹 꺾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리철견이 루정우에 올라가자 내시가 참대발의자를 그의 앞에 가져다놓았다.

너무도 황송하여 리철견은 머뭇거렸다.

성종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너그럽게 말했다.

《어서 거기에 앉으라구. 어려워하지 말구.》

그제야 엉거주춤 참대발의자에 앉은 리철견은 머리를 들고 성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원스레 벗어진 이마, 먹물을 찍어 그려놓은듯 한 눈섭, 약간 작을사하면서도 초리가 째여진 눈, 두툼한 코와 발쭉한 귀, 얄팍한 입술… 얼핏 보기엔 이목구비가 막 붙은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개개가 다 남자답게 생겼다.

성종의 얼굴에는 노상 웃음이 어려있고 눈에서는 정기가 빛나고있었다.

성종은 자리에 앉은 관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짐이 오늘 경들을 이렇게 부른건 다름이 아니라 경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싶어서이다.》

그제야 리철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대발로 엮은 탁상을 마주하고 자기말고도 시독관 강경서, 특진관 신승선, 도승지 한건 등 여러 관리들이 앉아있었다.

신통히도 그들모두는 한때 성종의 특명을 받고 여러 도들에 선전관 또는 체찰사 등 명목으로 다녀온 사람들이였다.

아직 40대에도 이르지 못한 그들은 중앙관리들속에서는 총명하기로 소문난 축들이였다.

성종은 그들을 보면서 계속 말하였다.

《그동안 경들은 짐의 특명을 받구 여러 도들에 나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임금이란 만백성의 어버이〉라고 했다만 임금 혼자서야 어떻게 만백성의 하정을 일일이 알수 있겠느냐. 다 경들과 같은 사람들이 짐의 뜻을 받들고 지방에 나가서 일을 잘했기때문에 짐도 임금으로 떠받들리고있는것이 아니냐.》

자리에 앉았던 관리들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황송하오이다.》

《황송하나이다.》

그때 시녀들이 탁상우에 갖가지 음식들을 담은 그릇들을 가져다가 펴놓았다.

넙적한 접시우에 담아있는 고려밤떡, 골무떡, 밤단자, 부꾸미 등 갖가지 떡들과 꽃전, 떡가래 등 각종 지짐들이 김을 몰몰 피워올렸다.

상 한가운데 은으로 만든 신선로가 놓여있는데 숯불우에서 씩씩 김을 뿜으며 끓고있었다.

상이 다 차려지자 성종은 앞에 앉은 관리들에게 어서 다가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반회장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은 시녀가 술주전자를 들고나와 상우에 놓인 술잔들에 국화주를 부었다.

그속에 끼여앉은 리철견도 남들이 하는데 따라 수저를 들고 음식을 들었다.

술이 몇순배 돌아가자 경회루아래에 있는 넓은 마당에서는 궁녀들의 무용이 펼쳐졌다.

칭챙 울리는 북소리, 징소리와 퉁소, 저대, 피리, 장구의 가락소리에 맞춰 궁녀들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아침에 시작된 이날의 잔치는 정오를 지나 나절가웃이 다 되여서야 끝났다.

성종은 잔치를 파하면서 참가한 관리들에게 매 사람당 호피방석 하나와 비단 열필, 호두 스무말, 산꿀 한단지, 국화주 한단지씩 하사하였다.

차례를 기다리다가 성종앞에 다가선 리철견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상감마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종은 선물품목이 적힌 봉투를 리철견에게 주면서 물었다.

《철견이, 금년부터는 재령벌에서 흰쌀이 쏟아지게 되겠지.》

리철견은 엉거주춤 대답을 하였다.

《예, 아마 그렇게 될것 같소이다.》

《음, 뭐니뭐니해도 근간에 경의 수고가 제일 컸어.》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성종은 리철견을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경이 참 수고했어. 수고했어.》

그럴수록 리철견은 더더욱 황송하여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성종은 그러는 리철견을 바라보며 또다시 물었다.

《그래, 새 벼슬자리는 마음에 들겠지?》

《그렇소이다. 상감마마.》

《의금부는 짐의 오른팔이나 같은 곳이야. 그러니 맡은 일을 실수없이 해야겠다.》

그 말에 리철견은 불꼬챙이로 속을 찌른것 같이 띠끔했다.

어쩐지 이 자리가 어울리지는 않아도 어제밤에 황해도에서 올라온 급보에 대해서는 아뢰여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만일 이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아뢰지 못하면 자기를 그토록 믿어주고 내세워주는 임금의 하해같은 사랑을 배반하는것 같은 느낌이 온몸에 휩쓸었다.

리철견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레 말했다.

《성은에 충성을 고여 보답하겠소이다. 저 그런데…》

성종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경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리철견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뢰였다.

《사실은 저… 어제밤에 황해도감영에서 급보가 올라왔소이다.》

《무슨 급보이냐?》

《예, 아뢰기는 황송하오이다. 황해도 도적 김막동이란 놈이 몇년째 제패거리들과 함께 도적질을 하고있는데 지난 초삼일날 봉산관가를 들이치고 환곡을 모조리 털어갔다 하오이다.》

성종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니 그놈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겠어.》

《그렇소이다. 상감마마, 이건 다 소인의 불찰로 이렇게 된것이오니 처벌하여주시오이다.》

성종은 껄껄 웃었다.

《그까짓 도적 몇놈때문에 경을 처벌할텐가. 짐은 경의 그 솔직함과 책임을 느끼는것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하거라. 경은 이제 곧 황해도감영에 지시를 내려보내라. 도적두목에게는 무명 100필을 그리고 도적패당 한명당 무명 40필을 상으로 걸도록 하라. 그러면 그놈들은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될건 뻔하다.》

《명심하겠소이다. 상감마마.》

리철견은 성종앞에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광화문을 벗어났다.

참으로 이날은 그의 한생에서 참으로 잊지 못할 길한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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