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달빛 한점 없는 그믐밤이였다.

가을하늘의 뭇별들은 깜빡거리며 졸고있었다.

사방은 고요하였다.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숲속의 말라붙은 가랑잎들을 다쳐놓아 와슬랑, 와슬랑 소리를 낼뿐이다.

신계땅 학소봉밑에 자리잡은 마방집은 먹물같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김막동일행은 무원골을 떠나 이 마방집에 림시로 자리를 잡았다.

학소봉밑으로는 여러 갈래의 길이 뻗어있었다.

그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곡산땅에 이르고 서쪽으로 가면 서흥땅이 나진다. 남쪽으로 가면 평산땅에 이르고 북쪽으로 가느라면 수안땅에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학소봉밑에 자리잡은 마방집에는 한해치고 길손이 끊기는 날이 거의 없었다.

수안이가 누이처럼 따르는 박순과 류다른 인연으로 만난 그의 남편인 김영봉은 5년전에 여기에 세칸짜리 주막집을 차려놓았다.

이태를 넘기지 않아 열두칸짜리 숙식방에 마구간까지 잇닿아놓은 마방집으로 번창해졌다.

근간에는 밑천이 더 생겨 열두칸짜리 집을 따로 더 지어 마방집을 늘구었다.

옛날에 학두루미가 떼를 지어 둥지를 틀고살아서 학소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밑에 자리잡은 마방집에는 초저녁까지 사처에서 모여든 길손들로 하여 벅적 끓더니 지금은 깊은 정적속에 잠겨있었다.

마방집 별채에 자리잡은 막동이네는 얼핏 보면 이 집에 잠간 머무르는 길손같이 보여서 그들이 숨어살기에는 비록 무원골만 못해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무원골에서 란리를 당한 이후 지금까지 두달째 변변히 잠도 자지 못하던 그들은 오늘에야 처음으로 발편잠을 잤다.

막동은 그동안 쌓였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와 저녁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잠에 곯아떨어졌다.

자정이 훨씬 넘어 새벽닭이 목을 빼들고 홰를 칠무렵이였다.

막동이네가 자고있는 방안으로 웬 사내가 방등을 켜들고 들어갔다.

마방집 주인 김영봉이였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겨서인지 방안에 들어간 그는 방등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쳐보면서 누군가를 찾았다.

방안구석쪽에서 네활개를 펴고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고있는 막동의 얼굴이 보이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손으로 그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막동은 어찌도 깊은 잠에 들었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깨여나지 못하였다.

김영봉이 옆사람이 깨여나지 않게 여러번 조용히 부르면서 흔들었다.

《이보시오. 첫째형님, 좀 일어나시우.》

그제야 막동은 어렴풋이 눈을 떴다.

《주인어른이 이 밤중에 어떻게… 무슨 일이 생겼소?》

영봉은 조용하라는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막동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고 끌어당겼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주인이 끄는대로 밖으로 따라나온 막동은 또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소?》

《내 긴히 자네와 의논할 일이 생겨서 찾았네. 잠을 깨워서 미안하네.》

김막동보다 열살이나 우인 김영봉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우. 숱한 인총을 끌고와서 페를 끼치는 제가 오히려 죄송스러운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제 먹을걸 다 지고 와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옹색해지질 않나.》

막동은 여기에 와서 아직까지 집주인인 영봉과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도 채 터놓지 못했던참이라 마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동은 영봉에게 물었다.

《주인어른, 그런데 무슨 일때문에 그러시우?》

《우리 건너집에 들어가서 의논하자구.》

영봉은 방등을 들고 앞서걸었다.

막동은 두팔을 뻗쳐올려 기지개를 마음껏 켰다.

청신한 새벽공기가 허파에 스며들자 막동은 짓눌렸던 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머리가 거뜬해졌다.

막동은 영봉의 뒤를 따라 주인들이 살고있는 건너집으로 갔다.

영봉을 따라 웃방으로 들어선 막동은 약간 주저했다.

주인 혼자만 있는줄 알았는데 방에는 고을군졸차림을 한 웬 사람이 앉아있었던것이다.

주춤거리는 막동을 본 영봉은 빙그레 웃었다.

《안심하라구, 내 사촌동생일세.》

그제야 막동은 마음을 놓았다.

영봉은 머리를 푹 숙이고앉아 발톱만 매만지고있는 동생에게 말했다.

《이사람, 어서 인사를 하게, 내가 말하던 첫째형님이란 사람일세.》

그제야 머리를 든 동생은 그자리에 넙적 엎디여 절을 하였다.

《안녕하시우. 김막봉이요.》

막동이도 머리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절까지야 뭘… 난 김막동이요.》

그들의 인사말을 듣고있던 영봉이 한마디 하였다.

《그러고보니 자네들의 이름은 꼭 형제이름같구만. 하나는 막봉이, 하나는 막동이 허허…》

군사차림을 한 막봉이 의아해서 물었다.

《이자 분명히 김막동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소.》

《그럼 혹시 수안사람 김막동이 아니요?》

《예, 난 수안에서 왔소.》

그러자 막봉은 펄쩍 놀랐다.

《아니, 그럼 일전에 방아역리의 목을 벤것도 형님네가…》

그 말에 막동은 속이 뜨끔했다.

(이 집주인인 영봉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했는데…)

막동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막봉은 재차 물었다.

《형님은 혹시 내가 그걸 어떻게 알가 하고 의심하는것 같은데… 내 그걸 말하겠수다.》

막동은 말없이 그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막봉은 솥뚜껑같은 손바닥을 썩썩 비볐다.

《일두 참, 난 이미 3년전부터 형님의 선성을 들어 알구있지요.》

막봉의 말은 사실이였다.

3년전 어느날 방아역 역졸인 털보가 재령고을 군졸인 막봉을 막동으로 헛갈려 붙들어놓고 야료를 부리다가 역리 리악이 나와 보고서야 돌려보냈던 일이 있었다.

그때의 막봉이 지금 막동의 앞에 앉아있는것이다.

막봉은 계속 말하였다.

《그후엔 몇년동안 형님이름을 듣지 못했었는데 보름전에 우리 군영에 수안사람 김막동이네를 잡으라는 임금님의 어명이 내려왔지요. 내 그래서 형방더러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수안고을 최형방이 형님네가 방아역리 리악의 목을 베는것을 직접 목격하구서 임금께 장계를 올렸다고 하더구만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사실이요?》

일이 이쯤되고보니 막동은 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막동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주인어른, 방금 동생이 말한것이 죄다 사실이요. 그놈이 우리가 살고있는 무원골에 들어와 아녀자들을 닥치는대로 죽였지요. 그래서 우린 그 복수를 한것이요. 그때 최형방이란 놈도 함께 있었는데 그놈이 생쥐같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지 못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소문이 난것이요. 내 차차 주인어른께 이야기하자고 했던것인데…》

김영봉은 막동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이사람 그만하라구. 난 벌써 방아역리의 목을 친 사실을 듣구 자네들이 했을것이라고 생각했네.》

《예-에?》

막동은 놀라운 눈길로 영봉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길손들의 주머니를 털면서 산다구 물건밖에 모르는 용렬한 놈으로는 보지 말게, 사실은 나도 자네들과 같은 상놈일세. 량반부자들이 거들먹거리면서 사는것이 꼴보기 싫어서 내 어떻게 하든 재물을 모아서 그놈들을 콱 짓뭉개놓자구 늘 생각하는 사람일세. 그러니 우리 서로 방법이 다를뿐이지 목적은 같단 말일세.》

막동은 영봉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주인어른, 고맙수다. 난 사실 주인어른이 우리 마음을 오해할것 같아서…》

《자네들때문에 이 마방집에 불티가 튈가봐 걱정할것 같아서 그랬겠지.》

《옳수다. 그래서 우리가 딴 곳에 자리를 잡구 갈적에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지요.》

《사람두 참, 덩지는 큰데 사람을 가려보는데선 난쟁이 한가지군.》

《그런가보우다.》

두사람은 손을 맞잡고 껄껄 웃었다.

이 순간 막동의 가슴은 막혔던 물목이 터지는것 같이 후련하였다. 정작 싸움의 길에 나서기는 했지만 자기 마음을 리해하여줄 사람이 없어서 생각이 많았던 그였다.

그래서 요즈음엔 앞으로 벌릴 일을 두고 고심을 하느라고 가슴속에 걱정의 《물》이 한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뜻을 같이하는 집주인을 만나게 되였으니 그 《물목》이 순식간에 터졌던것이다.

막동은 영봉에게 물었다.

《주인어른, 이렇게 우리 마음을 알아주어서 고맙수다. 그런데 이말이나 하자고 찾지는 않았겠지요.》

영봉은 머리를 쓱쓱 긁었다.

《그건 사실일세. 실은 내 동생일을 의논해보자구…》

《무슨 일이요?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수다.》

《고맙네. 우선 내 얘기를 들어보구 결심을 내리게.》 하고 영봉은 동생 막봉이 당한 일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영봉의 4촌동생인 막봉은 원래 서흥 가마소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금껏 살아오고있었다.

막봉이네의 구차한 살림을 옆에서 지켜보던 영봉은 자기네 마방집이 번창해지자 안면있는 재령관가의 병방에게 무명필을 찔러주고 막봉을 고을군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막봉의 어머니는 마방집에 데려다가 길손들의 동자질을 해주면서 함께 살았다.

그런데 막봉이에게는 한마을에 살던 두 집 부모들이 어릴적부터 혼인을 맺어준 려아라는 처녀가 있었다.

막봉과 려아는 수수대말을 타고 뛰여다닐적이나 산에 나무를 하고 산나물을 뜯으러 다닐적이나 늘 함께 있었다. 그때 그들에게는 그 어떤 불행이 자기들앞에 부닥치리라는것도 몰랐다.

또 막봉은 그의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고 려아의 아버지가 부역에 나가 성을 쌓다가 성돌에 맞아죽은 다음부터 두가정의 주인이 되였다.

막봉은 군졸노릇을 하면서 달마다 얼마 안되는 료미를 타서는 두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려아는 려아대로 어려서부터 배운 길쌈질을 부지런히 하여 두 집 어머니들을 봉양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두 젊은이의 지극한 효성에 혀를 차군 하였다.

막봉의 어머니가 마방집에 들어와 입에 밥술을 떨구지 않고 살게 되였을 때에도 그에 대한 려아의 정성은 지극했다.

그런데 몇달전부터 려아의 어머니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였다. 막봉과 려아는 힘을 합쳐 어머니를 정성껏 간호했다. 그러다나니 남의 빚도 어지간히 지게 되였다.

그러나 려아의 어머니는 며칠전에 끝내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막봉은 졸지에 홀로 남은 려아를 그대로 둘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려아와 혼례를 치르려고 관가에서 말미를 받고 어제 려아를 찾아갔으나 그는 집에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그에게 한마을에 있는 강부자가 어머니 약값으로 진 빚대신에 려아를 끌어갔다는것이다.

강부자네 집으로 달려간 막봉은 하소연은 해보지도 못하고 그집 가병들에게 죽도록 매만 맞고 문전거절을 당했다.

그 가슴아픈 사연을 어디에 가서 터놓을데 없는 막봉은 어제밤에 사촌형인 영봉을 찾아왔던것이다. …

여기까지 말한 영봉은 한숨을 푸-내쉬였다.

그 말을 들은 막동은 저도모르게 주먹을 부르쥐였다.

어딜 가도 량반부자들에게 천대받고 구박받고 멸시받는 사람들뿐이였다.

자기네만이 아닌 수백수천의 선량하고 어진 백성들모두가 량반부자들의 발길에 채워 길가에 나딩구는 말똥과도 같은 하바닥인생길을 살아가고있었다.

막동은 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주인어른은 장차 어떻게 할 작정이시우.》

영봉은 한숨을 푹 내쉬였다.

《글쎄 이사람은 당장 강부자네 집에 넘어들어가 려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업어내오겠다고 하는데 그거야 섶을 지고 불에 뛰여드는 격이지. 그렇다고 우리 집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자 해도 아마 강부자 그놈한테는 통하지 않을거네.》

《어째서요?》

《그놈이 아마 꾸어준 빚때문이 아니라 려아를 노리고 끌어갔을거네.》

《예?》

막동은 놀라운 눈길로 마주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주앉은 막봉은 틀어쥔 주먹으로 이마를 쳤다.

《에익, 그놈을 그저…》

막동은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도대체 그 강부자란 놈이 어떤 놈이기에 남의 련인을 막 끌어간다는거요?》

영봉이 대답했다.

《그 강부자로 말하면 이 황해도땅에선 제일 가는 세줄을 가지고있는 놈이네. 듣자니 그의 증조부가 태조와 처남매부 사이였다누만.

강부자 증조부의 누이동생이 태조의 후실이 되였는데 그때부터 별로 이름이 없던 곡산 강씨네가 번창해져서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네. 말하자면 조상뼈다귀를 울쿼먹구있는셈이지.

지금 그놈은 쉰칸이 훨씬 넘는 집을 궁궐같이 지어놓구 조상대대로 식읍으로 받은 가마소아근의 사방 50리되는 땅을 독차지하구서 백성들의 등껍질을 벗겨먹으며 살고있네. 그러다나니 고을관리들도 감히 강부자만은 어쩌지 못하고있네.》

막동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영봉은 계속 말하였다.

《그러니 이놈한테는 나라의 법도 안중에 없구 그저 제마음 내키는대로 하는것이 법이 되구말았네. 그런 놈이니 자기 집에 가병들까지 두구 별의별짓을 다하구 있네. 려아와 같은 처녀들을 끌어다가 수욕을 채우고는 말을 곰상곰상 들으면 제 집 종으로 두구 그렇지 않을 땐 가병들을 시켜 죽여버리고만다네. 이런 일이 한두번 아닐세.》

곁에서 듣고있던 막봉이가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 내리쳤다.

《형님, 그만하시우. 그놈이 만일 려아를 털끝 하나라도 다쳐놓았으면 내 그놈을 찢어죽이고말겠소.》

막동은 영봉의 손을 잡았다.

《주인어른, 그 짐승같은 놈을 내 가만 두지 않겠소. 내 동생들과 이길로 당장 가서 그놈들을 족치구 려아를 구원해오겠수다.》

영봉은 윽윽거리는 막봉의 어깨를 눌러앉히고 막동에게 말했다.

《이사람, 그렇다구 마구잡이로 덤벼선 일이 안되네. 좀 더 생각해보자구. 다른 묘책이 없을가?》

막봉이 푸들쩍거렸다.

《이판에 무슨 생각이요 뭐요 할새가 있어요? 난 이길루 떠나겠소.》

막동은 막봉의 편에 서서 응수했다.

《당장 눈섭에 불이 당겼는데 그 불부터 꺼야 하지 않을가요?》

영봉이 말했다.

《물론 불부터 꺼야지. 그렇다구 마구 헤덤비다간 오히려 불도 끄지 못하구 다 녹을수 있네. 그놈네 집에 가병이 얼마나 되는줄 알기나 해. 자그만치 서른명이나 되네. 그것도 힘꼴이나 쓰는 장정들이 말이야.》

막동은 빙그레 웃었다.

《주인어른, 내 생각이 다 있수다. 이제 얼른 차비를 하구 동생들과 함께 가서 려아를 업어올테니 걱정마시우. 그런데 이 막봉이만은 집에 있게 하시우.》

막봉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 그건 무슨 소리요?》

막동은 막봉의 손을 잡았다.

《그놈들이 우린 낯도 코도 모르니 일없지만 자네 얼굴은 알터이니 안되네. 오늘만 날인가, 앞날도 생각해야지.》

영봉은 막동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쩔려구 그러나?》

막동은 그 말을 못 들은체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날이 밝기 전에 하는것이 좋을것 같으니 주인어른은 려아를 맞이할 준비나 하시우.》

그길로 별채로 달려온 막동은 잠에 곯아떨어진 윤산과 수안이, 봉산이를 두들겨깨웠다.

동켠 하늘에서 동전잎만 한 새벽해가 떠오를무렵이였다.

신계에서 한양쪽으로 가는 행길로는 네필의 말이 달리고있었다.

새벽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말우에는 농민복차림을 한 김막동형제들이 타고있었다.

언듯언듯 지나가는 산골짜기마다에서는 장막같이 짙은 안개가 꾸역꾸역 밀려나와 길을 메우고있었다.

그들이 보리밥 두솔기쯤 지을만큼 내달려 가마소가 한눈에 보이는 둔덕우에 올라서자 아래켠 마을쪽에서 어느 집의 부지런한 수닭이 꼬끼요-하고 길게 홰를 쳤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빛이 안개속에 싸여 허우적거리는 강부자네 집 지붕을 비쳐주고있었다.

막동은 곁에 선 동생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약속한대로 봉산이와 나는 가병놈들을 막을테니 윤산이는 수안이와 함께 려아를 찾아서 업어내와야 하겠다. 모든 일을 이놈들이 미처 깨기 전에 감쪽같이 해치워야 하겠다.》

윤산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어느덧 그들은 강부자네 집 대문앞에 이르렀다.

막동의 손짓에 따라 모두 말에서 내린 그들은 집앞에 있는 느티나무아래에 말고삐들을 매여놓았다.

대문앞에 다가선 윤산이 주먹으로 대문을 쿵쿵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윤산이 또다시 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윤산과 봉산은 대문옆에 붙어섰다.

덜그럭거리면서 빗장을 벗기는 소리가 났다.

찌그덩 소리를 내면서 대문이 열리더니 칼을 찬 가병 한놈이 목을 내밀고 《거 누구야. -》 하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찰나에 대문에 붙어서있던 윤산은 그놈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손에 들었던 보자기로 아가리를 틀어막았다.

곁에 섰던 수안은 그놈의 팔목을 잡아 뒤로 비틀어 묶어가지고 느티나무아래에 있는 막동에게 끌어왔다.

찍소리 못하고 끌려온 놈은 너무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여 얼음판에 자빠진 황소처럼 눈알만 뒤룩거렸다.

윤산이 그놈의 아가리에 틀어박은 보자기를 뽑자 그놈은 모두숨을 푸-하고 내쉬였다.

막동은 칼을 들어 그놈의 모가지에 가져다댔다.

《이놈아, 난 수안화적패 두령이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면 살려주구 그렇지 않으면 당장 목을 칠테다.》

그놈은 굽신거렸다.

《예, 알겠소이다. 제발 목숨만…》

막동은 그놈을 쏘아보았다.

《네놈들이 어제 이 마을에 사는 려아라는 계집을 끌어왔지?》

《예, 그렇소이다.》

《그 계집은 우리가 가져갈려고 했는데 네놈들이 선손을 썼단 말이다. 지금 그 계집이 어디 있어?》

《그건 나두 잘 모르오이다.》

《뭐라구? 죽고싶어?》

막동은 칼등으로 그놈의 모가지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놈은 덴겁해서 펄쩍 뛰였다.

《고간에 가두었는데… 대장이 열쇠를 가지고있어서 난…》

《대장? 그놈이 어디 있어?》

《예, 나와 함께 숙직당번이 돼서 지금 당번칸에서 자고있수다.》

《그게 정말이야?》

《예, 사실이오이다.》

막동은 윤산에게 손짓했다.

윤산은 그놈에게 다시 아가리를 틀어막고 목덜미를 잡아일으켜 세워가지고 대문쪽을 향해 끌어갔다.

그들은 가병놈을 따라 소리없이 대문안으로 들어갔다.

가병놈은 대문곁에 붙어있는 행랑방앞에 가서 대장이 그안에 있다고 눈짓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윤산은 방바닥에서 네활개를 펴고 자고있는 대장놈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놈은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윤산은 그의 동가슴을 콱 짓밟아놓고 장검으로 목을 겨누었다.

《이놈아, 찍소리 냈다간 죽여버릴테다. 가만히 있어.》

대장은 황소숨을 씩씩 쉬면서 윤산을 노려보았다.

그옆에 다가간 막동이 물었다.

《이놈아, 어제 업어온 계집은 어떻게 했어?》

대장은 눈을 떡 감고 말했다.

《이걸 놔라, 가슴답답하다.》

윤산은 그놈의 동가슴을 더 힘있게 짓밟았다.

《어서 묻는 말에 대답해.》

막동은 윤산에게 비켜서라는듯 어깨를 툭 쳤다.

윤산이 그놈의 가슴에서 발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넘어졌던 그놈이 일어나며 윤산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팔이 뒤틀린 윤산은 갑자기 넘어지며 벽에다 머리를 짓찧었다.

막동은 주먹으로 대장놈의 면상을 호되게 후려갈겼다.

그러자 놈은 악 소리를 치면서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때 놈의 허리에서 열쇠뭉치가 철렁 떨어졌다.

뜻밖에 얻어맞은 윤산은 머리를 한손으로 주무르고나서 칼등으로 자빠진 대장놈의 대가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놈의 입에서 괴상한 짐승소리가 찍 나더니 사지를 쭉 뻗었다.

그러자 윤산은 놀라운 눈길로 막동을 쳐다보았다.

한방망이 먹인다는것이 그놈을 그만 죽여버린것이다.

이때 밖에서 새벽닭이 길게 두번째 홰를 치고있었다.

《꼬끼요-》

대장놈한테서 열쇠뭉치를 빼앗아낸 막동은 마당에서 두팔이 묶이운채 벌벌 떨고 서있는 놈에게 다가와 내보였다.

《어느것이 고간열쇠냐?》

두손이 묶이우고 아가리까지 막히운 그놈은 눈만 껌뻑거렸다.

윤산이 아가리에 막은것을 뽑자 그놈은 중얼거렸다.

《그 가운데 제일 긴것이오이다.》

막동에게서 열쇠를 받은 윤산은 그놈의 어깨를 툭 쳤다.

윤산과 수안은 가병놈을 끌고 려아가 갇혀있는 고간쪽으로 갔다.

막동은 봉산이와 함께 대문곁에 서서 강부자네 본채쪽을 예리하게 살폈다.

또다시 새벽닭이 길게 세번째 홰를 쳤다.

이때였다.

본채에 붙어있는 부엌쪽에서 찌그덕 하고 문소리가 났다.

대문곁에 몸을 붙인 막동은 차고온 주머니에서 돌을 하나 꺼내들었다.

아마 부엌데기가 깨여나 물을 길러 나오는것 같았다.

문이 열리자 뜻밖에도 유들유들한 몸집에 흰 명주저고리를 입은 녀자가 머리를 풀어헤친채 밖으로 나오는것이였다.

그는 길게 하품을 하고나서 앞쪽에 있는 행랑방을 향해 앙칼지게 소리쳤다.

《어멈 있어? 어멈-》

행랑쪽에서 부스럭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예-나가겠소이다.》

뚱뚱보녀편네가 어멈이라고 불러서 파파 늙은 로인인가 했더니 삼십대의 젊은 녀자가 행랑방에서 나왔다.

마루우에 팔을 끼고 서있던 녀편네가 또다시 앙칼지게 소리쳤다.

《다른것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만 나와?》

《이제 나오나이다.》

《야, 이 쌍년들아, 네년들은 내가 매일 이렇게 찾아야 일어나냐? 이 죽일년들아-》

강부자녀편네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마루바닥을 탕탕 굴렀다.

강부자녀편네의 고아대는 소리에 조용하던 온 집안에 소동이 일어났다.

행랑방의 심부름군들이 눈을 비비며 나오고 가병들이 들어있는 방에서도 당번인듯 한 두세명의 사내들이 떨쳐나왔다.

그들은 마당에 나와서 주인집마누라가 부엌데기들한테 야단질을 하는것을 보고는 자기들은 상관이 없다는듯 어슬렁어슬렁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때 등뒤로 마누라의 째지는듯 한 악청이 그들의 잔등에 쿡 박혔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은 왜 들어가는거냐? 어서 마당을 쓸지 못해? 밤낮 밥이나 축내는 등신같은것들.》

그 소리에 흠칫 놀란 가병들은 오늘아침 재수없이 걸려들었다는듯이 입을 삐죽 내밀고 창고쪽으로 갔다.

마루우에 올라선 녀편네는 더욱더 승이 나서 마루바닥을 쾅쾅 굴렀다.

《이 밥처먹구 게트림하는것들아! 어서 빨리 하지 못해!》

그 소리가 늘 듣는 소리여선지 부엌데기녀인들은 들은둥마는둥 하면서 제 할일을 하는데 좀처럼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웃방문이 벌컥 열렸다.

녀편네의 악쓰는 소리에 깨여난 강부자가 꽥 소리쳤다.

《새벽부터 왜 이리 고아대면서 야단이야, 야단이!》

강부자녀편네는 령감을 한번 피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잘난 계집을 끼고 자지 못해서 나보고 야료질이야?》

《뭣이 어째?》

《왜 내 못할 말을 했어? 어서 그 계집한테 가란 말이야. 수개같은것.》

《뭘? 내가 수개라구? 이년을 그저.》

강부자가 마루우에 달려나와 녀편네를 때릴듯이 주먹을 쳐들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녀편네는 가병들쪽에 대고 소리쳤다.

《야, 거기 대장이 있어? 어서 나와 고간에 가둔 그년을 업어다가 이 수개한테 콱 안겨주어라! 어서!》

녀편네가 악을 쓰면 죽은 시어머니도 땅속에서 머리털을 뽑는다더니 강부자는 녀편네의 악쓰는 소리에 입이 쓰거운듯 입만 쩝쩝 다셨다.

일은 이때에 벌어졌다.

려아가 갇혀있는 고간쪽에서 터벅터벅 발자국소리가 났다.

막동이 그쪽을 살펴보니 자루에 넣은 려아를 등에 업은 윤산은 앞에 서고 오라줄로 묶은 가병을 끌고 수안은 뒤에서 오고있었다.

마루우에서 악을 쓰던 녀편네가 그들을 먼저 보고 소리쳤다.

《웬놈들이냐?》

그 소리에 윤산이도 수안이도 흠칫 놀라 멈춰섰다.

강부자도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소리쳤다.

《누구야? 대장이냐?》

그래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막동은 손에 잡고있던 돌을 휙 날렸다.

그러자 강부자가 어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우에 넘어졌다.

곁에 있던 녀편네가 어안이 벙벙하여 령감을 쳐다보는데 또다시 날아간 돌멩이가 그의 뒤통수를 스치면서 날아가 벽을 맞히고 딱 소리를 냈다.

녀편네는 머리를 싸쥐고 주저앉아 악을 썼다.

《아이구! 나죽는다!》

이때라고 생각한 윤산과 수안은 막동이네가 있는 대문쪽으로 황급히 달려왔다.

막동은 또다시 굳은 차돌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마루우에 옹크리고 앉은 강부자녀편네쪽으로 던졌다.

이번에는 정통을 맞혔는지 녀편네쪽에서 《악-》 하는 비명소리가 나더니 잠잠해졌다.

려아를 자루에 넣고 업은 윤산은 밖으로 나와 말우에 올랐다. 그뒤로 수안은 오라줄에 묶은 가병을 끌고 말을 탔다.

뒤따라나온 막동은 그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강부자네 집쪽에서 따라나오는 놈이 없는가를 잠시 살폈다.

그들이 탄 말들은 수안쪽으로 향하는 길가로 한동안 달렸다.

한동안 달리던 그들은 오라줄에 묶이워 엎어지고 자빠지며 정신없이 따라온 가병놈을 풀어주었다.

막동은 그놈에게 오금을 박았다.

《이놈아, 너희 주인한테 가서 일러라. 이 계집은 수안 언진산 화적패두령이 데리고갔으니 정 찾고싶거든 무명 백필을 지구 언진산밑에 와서 나를 찾으라고 말이다. 알겠어?》

《예, 예. 알겠소이다.》

《당장 사라져.》

그 소리가 떨어지기도 바쁘게 가병놈은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 모양을 바라보면서 막동이네는 한바탕 웃어댔다.

그제야 막동은 려아생각이 나서 윤산에게 말했다.

《윤산아, 이젠 그 자루를 풀어주어라.》

《알겠어요.》 하고 윤산이 말에서 뛰여내려 자기 말에 실었던 자루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매듭을 풀었다.

자루를 벗기자 처녀의 머리가 쑥 솟아났다.

윤산이 조심히 처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여보시오.》

자루속에 있던 려아는 황급히 일어나 겁에 질린 눈길로 자기와 마주선 남정들을 쳐다보았다.

막동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놀라지 마시우. 우린 막봉이가 보내서 온 사람들이요.》

《예?》

려아는 더욱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 어서 가야겠소. 지금 막봉이가 마방집에서 기다리고있수다.》

《그럼 화적패라는건?》

려아가 의심스레 물었다.

윤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저놈들을 속이자구 그런것이요.》

그제야 려아는 마음이 놓이는지 안도의 숨을 호 하고 내쉬였다.

윤산은 머리를 쓱쓱 긁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이젠 날이 거의 밝아오니 녀인과 한말우에 같이 탈수도 없구.》

윤산의 말에 막동도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날이 밝아 사람들의 눈에 띄우면 재미없는것도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려아를 또 자루속에 넣을수도 없었다.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있는데 봉산은 무릎을 쳤다.

《윤산형님, 내 웃저고리를 입히면 될게 아니요?》

《체, 그럼 쌍태머리와 치마는 어쩐다는거야?》

윤산이 퉁을 놓는 바람에 봉산은 이마를 툭 쳤다.

《쟈, 이걸 어쩌면 좋아요. 날이 점점 밝아오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려아가 어줍게 말했다.

《저… 내가 다시 자루속에 들어가면 안되나요?》

《아니, 생사람을 자루속에야 어떻게… 그건…》

려아가 고집을 부렸다.

《이제껏 자루속에 넣어왔는데 또 넣는다고 일이 나겠어요?》

그러고보니 려아도 어딘가 모르게 이순이와 같이 도담하고 야무진데가 있는 처녀였다.

막동은 려아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됐어. 윤산아, 어서 자루를 씌워라.》

려아를 자루속에 넣은 그들은 수안쪽으로 가는 길로 얼마쯤 가다가 신계쪽으로 향하는 지름길에 들어섰다.

동켠하늘에서 둥근해가 빠끔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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