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날밤이였다.

림시로 지은 초막앞에서는 우등불이 활활 타올랐다.

불주위에는 막동과 윤산을 비롯한 살아남은 무원골사람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하늘을 옥물어 찢을듯 불길은 높이 솟아올랐다.

요며칠사이에 하늘이 무너져내린것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무원골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란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모두가 제 나이보다 십년은 더 산 늙은이들처럼 얼굴이 꺼칠해졌다.

탁…탁 불찌를 튕기면서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

터진 머리를 처매고 흰 수건을 쓴 한씨가 저녁쯤에 정신을 차린 윤산의 입에 좁쌀미음을 떠넣어주었다.

윤산은 자리에 누운채 한씨가 떠넣어주는 미음을 조심히 받아넘겼다.

그옆에서 막동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둘러앉아 걱정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입술이 터갈라진 윤산을 지켜보는 막동의 심중은 무거웠다.

(도대체 윤산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가. 이순이는 또 어떻게 되구…)

그의 눈앞에는 이 무원골에서 이순이를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이며 며칠전에 언진산 불각사로 떠나가던 이순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수집음을 잘 타기는 해도 오돌차고 깐진 이순이였다.

《어머니, 나를 좀… 일으켜주시와요.》

가까스로 말하는 윤산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막동은 제 생각에서 깨여났다.

막동은 윤산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윤산아, 그냥 누워있어라.》

《형님, 며칠 굶다가 오랜만에… 낟알물을 먹었더니 이젠 일…》 하며 윤산은 제혼자 몸을 일으키려고 모지름을 썼다.

막동은 황급히 윤산의 허리를 껴안아 일으켜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윤산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씨가 치마자락으로 윤산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주었다.

《어머니, 고마와요.》

《무슨 그런 소릴 다해, 제 에미보구. … 그래, 이젠 정신이 좀 드냐?》

윤산은 주위에 모여앉은 봉옥이와 을녀, 봉산이와 수안을 둘러보면서 어줍게 말하였다.

《나때문에 모두들 걱정을 하게 해서 안됐어요.》

봉산과 수안은 윤산의 두팔을 잡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형님-》

《둘째형님-》

《자네들이 란리를 겪느라고 고생했겠어.》

막동은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옆에서 봉옥이와 을녀도 눈굽을 찍었다.

막동은 윤산에게 물었다.

《윤산아, 이순인 어떻게 됐어? 절간에 두고왔니?》

그 물음에 윤산의 얼굴이 이지러지더니 머리를 푹 수그리고 어깨를 떨었다.

막동은 윤산의 두어깨를 잡아흔들었다.

《왜 말이 없니? 살았니, 죽었니?》

윤산은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이순인… 이순인… 죽었…》

막동은 펄쩍 놀라 일어섰다.

《뭐라구? 이순이가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윤산이 혼자 나타났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하였지만 정작 윤산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나오자 막동은 막 미칠것만 같았다.

…무원골을 떠난 윤산이네가 언진산 불각사에 당도한것은 한가위날 한낮이 좀 기울어서였다.

그들은 인적도 없는 산골길을 걷다나니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였다. 마침 시주를 받으러 갔다가 오는 불각사의 사미승을 한명 만나게 되여 그를 따라갔다.

뽀얀 물안개를 일으키며 사품치며 흘러내리는 폭포우에 불각사가 자리잡고있었다.

울긋불긋한 단청에 기와를 얹은 불각사는 방금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잘 어울려있는데 보기만 해도 황홀하였다.

윤산에게서 불각사를 찾아오는 사연을 들은 젊은 사미승은 말우에 앉아오는 이순을 피끗 보고나서 윤산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주인집 마님이시우?》

윤산은 엉겁결에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사미승은 또 한번 이순을 쳐다보고나서 피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주지님이 부처의 령험을 타고났으니 아마 마님병을 뚝 고쳐줄거우다. 하긴 이 불각사 약사여래는 유명하기로 이 아근에 소문났지요.》

그 말에 윤산이도 말우에 앉아가는 이순이도 귀가 항아리만 해졌다.

《그렇소? 정말 병을 고쳤으면 얼마나 좋겠소.》

사미승은 서로 마주보며 좋아하는 윤산과 이순을 바라보면서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불각사 조계문앞에 이르자 사미승은 좀 기다리라고 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 안있어 다시 나온 사미승은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미승을 따라 부처가 있다는 대웅전앞에 이르니 중년나이가 되보이는 까까머리중이 붉은 가사를 걸치고 대돌앞에 앉아 불경을 들여다보고있었다.

그앞에 다가간 사미승은 두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였다.

《스님의 분부대로 길손들을 데려왔소이다.》

앉아있던 중은 어깨에 흘러내리는 붉은색가사를 추슬러올리고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였다.

《원로에 수고로이 오셨소이다. 난 이 절의 주지오이다. 법명은 보은이니 그렇게 불러주시오이다.》

윤산과 이순은 주지에게 허리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보은대사님, 부처님의 령험을 내려 우리 마님의 병을 고쳐주사이다.》

윤산이 자기 안해를 《마님》이라고 말한데는 생각한바가 있어서였다.

주지는 머리를 숙여 답례를 하였다.

《부처님이 법은을 베풀어주실것이오이다. 나무아미타불.》

사미승은 윤산이네를 데리고 절간에 찾아오는 길손들이 류숙하는 법당으로 갔다.

이순은 《마님》으로 존대를 받아 따로 지은 자그마한 암자에 들게 하고 윤산은 사미승이 있는 방에서 함께 류숙하기로 하였다.

윤산은 말거지게에 시주하려고 담아온 좁쌀을 사미승에게 넘겨주면서 물었다.

《대관절 부처님의 령험은 언제 내리오?》

사미승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저녁밥을 먹은 다음에 할것이오다.》

《그러면 밤에?》

윤산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놀라시우? 절에 처음 오시우?》

윤산은 그렇다는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여기선 부처님의 령험을 주로 밤에만 받지요. 이제 그집 주인마님이 목욕재계를 하구서 부처님앞에 가서 령험을 내려달라고 빌것이니 거기선 마음놓구 쉬우다. 내 인차 저녁밥을 지어드리지요.》

그제야 윤산은 마음이 좀 놓이는지 빈 거지게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초경이 다될무렵이였다.

그동안 사미승이 가져다주는 더운물에 목욕재계를 하고난 이순은 알몸에 가사를 걸치고 방등을 켜든 주지승을 따라 부처가 있는 대웅전으로 갔다.

대웅전안으로 들어서던 이순은 깜짝 놀랐다.

마주선 벽에는 여러곳에 초불을 켜놓았는데 그 불빛이 벽에 걸어놓은 치레거리들에 비쳐서 번쩍거렸다.

번쩍거리는 벽면가운데에 부처가 거룩하게 앉아있었다.

이순은 너무도 놀라 선자리에서 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새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떨고있는 이순을 지켜보던 주지승은 이순의 팔을 당겨 부처님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두손으로 빌라고 가르쳐주었다.

이순은 주지승이 시키는대로 무릎을 꿇고앉아 두손을 떨면서 싹싹 빌었다.

옆에 선 주지는 목탁을 가락맞게 두드리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이순은 눈을 꼭 감은채 두손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한편 이순이가 가사를 걸치고 주지승을 따라 대웅전으로 들어가는것을 뒤에서 눈길로 바래워준 윤산은 방으로 들어와 우두커니 그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당반에 얹은 이부자리를 내려서 자리를 펴던 사미승이 윤산을 보고 말을 비쳤다.

《뭘 그렇게 보고있소? 어서 잠이나 자우다.》

《거 부처님의 령험을 오래 받아야 하우?》

사미승은 옷을 벗어 구석에 펼쳐놓고 자리에 누우면서 말했다.

《아마 장밤 걸려야 할거우다.》

《장밤?》

자리에 누운 사미승은 이상하다는듯 머리를 기웃거렸다.

《아니, 마님이 걱정돼서 그러우?》

《…》

《난 이 절에 온지 얼마 되진 않지만 거기같이 자기 마님을 걱정하는 하인은 처음 보우다.》

《엉?》

윤산은 놀라면서 열적게 웃었다.

《상놈이란거야 별게 있소. 그저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건데… 자, 마음 푹 놓고 잠이나 자우다. 아마 새벽쯤에는 계시를 받고 나오는 마님을 볼수 있을거우다.》

그때 윤산의 심중은 딱하기 그지없었다. 처음부터 이순을 마님이라 한것을 이제 와서 제 색시라고 말할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기 혼자 편안히 자자니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윤산은 할수없이 사미승이 펴준 자리우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절간의 밤은 고요하였다.

앞에서 흐르는 시내물소리가 들려오고 이따금 산짐승들의 울음소가 들려올뿐이였다.

윤산은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으나 어쩐지 눈앞에 이순의 모습만 얼른거리는게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중천에 뜬 한가위달도 기울어져 언진산밑에 자취를 감추자 사위는 온통 어둠바다에 잠기였다.

대웅전안에서 똑딱똑딱 울려오던 목탁소리도 인제는 들려오지 않았다.

윤산은 혹시나 해서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옆에 누운 사미승은 먼길을 걸어서인지 네활개를 쭉 펴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았다.

부처님앞에서 빌고있는 이순의 곁에서 목탁을 두드리면서 주문을 외우던 주지는 문득 목탁소리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순에게 다가서서 웅얼거렸다.

《부처님이 곁으로 부르시니 그곳으로 가시오이다.》

이순은 어쩔줄 몰라 주지승만 빤히 쳐다보았다.

방등을 든 주지승은 벽쪽으로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을 들은 이순은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였다. 꼭 죽음의 구뎅이에 빠지는것 같아서였다.

이순은 후들후들 다리를 떨면서 주지승을 따라갔다.

주지승은 부처가 앉은 벽 한쪽옆에 붙어있는 문을 열고 그곳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였다.

이순은 문가에 서서 방등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두사람이 겨우 누울만 한 비좁은 방이였다.

주지승은 이순의 잔등을 슬며시 떠밀어주었다.

《방에 들어가 기다려주시오이다. 좀 있으면 부처님이 오시오이다.》

주지승이 문을 닫자 방안은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칠칠흑야였다.

이순은 너무도 놀라 앞가슴을 부여안고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얼마 안있어 방등을 손에 든 주지승이 들어왔다.

이순은 겁에 질린 눈길로 주지승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게 웬일인가, 알몸뚱이에 가사만을 걸친 주지승이 들어서고있지 않는가.

주지승은 방등을 문밖에 내놓고 문을 꼭 닫았다.

방안은 또다시 캄캄한 어둠속에 잠겨들었다.

주지승은 손더듬으로 몸을 옹크리고있는 이순에게 다가와 그러안으면서 웅얼거렸다.

《이건 부처님이 내리시는 령험이오이다.》

이순은 자리에 앉은채 주지승의 가슴을 떠밀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주지승은 그러는 이순을 품에 더 꼭 그러안으면서 또다시 중얼거렸다.

《여기서 소리를 치시면 부처님의 령험의 넋이 빠지오니 내가 하는대로 해야 하오이다. 마님!》

주지승은 안깐힘을 쓰면서 항거하는 이순을 꼭 부여안은채 구렝이 개구리를 녹이듯 하였다.

이순은 절망에 잠겼다가 그만 까무라치고말았다.

이순은 새벽하늘이 훤히 밝아올무렵까지 이런 곤욕을 당하였다.

윤산은 잠들지 못하고 자리에 누운채 궁싯거렸다.

밤새껏 코를 골면서 단잠을 잔 사미승은 새벽잠이 없는지 눈을 떴다. 그가 안절부절하면서 잠들지 못하고있는 윤산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몸을 반쯤 일으키고 물었다.

《아니, 여직까지 자지 않았소?》

《그저 잠이 오지 않는구만.》

사미승은 정색해서 일어나 앉았다.

《도대체 저 마님과 무슨 관계가 있어 그러시우?》

윤산은 입술을 감빨았다.

《실은 내 색시요.》

《뭐라구요? 그걸 왜 지금껏 숨기우.》

《…》

사미승은 허거프게 웃었다.

《내 이런 꼴을 보지 않으려고 하루에도 이 절간을 뜨자구 열두번넘어 생각했다가도 넓은 세상천지에 이 작은 몸 하나 담을 곳 없어서 붙박혀있는데…》

《…》

《실은 나도 거기와 같은 상놈이였지요. 그러다가 주인이 너무도 나를 못살게 굴어서 그놈을 때려죽이고 이 절간에 와서 사미승이 되였지요.》

《사미승이란건 무슨 소리요?》

《그건 아직 불도를 깨치지 못한 중이라는 소리이지요. 그건 그렇구 여기로는 왜 오시우. 주지승이 내린다는 부처님의 령험이란건 다 거짓이요.》

《왜 그 말을 이제야 하우?》

《젠장, 잘사는 마님이라니 말을 하지 않았지요, 까짓거 상놈들한테 그까짓 부자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밤새껏 주지승한테 곤욕을 당했을거우다.》

윤산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도대체 그건 무슨 소리요? 》

사미승은 제 무릎을 툭 내리쳤다.

《왜 엊저녁에 내가 물을 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소. 그걸 알았으면 이런 봉변을 안 당하는건데…》

윤산의 얼굴은 험악하게 이지러졌다.

그는 무작정 사미승의 멱살을 움켜잡고 따져물었다.

《그렇게 알쑹달쑹한 소릴랑 말구 사실대로 말해라, 어서!》

사미승은 윤산의 팔을 잡았다.

《이거 숨이 가빠… 말이나 하겠소? 이걸 놓소.》

윤산은 사미승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사미승은 막혔던 숨을 푸- 하고 내보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내 여기 와서 몇달 지내보니 부처님의 령험이라는건 비단보자기에 싼 개똥 한가지요. 실은 거기 색시를 저 주지승은 밤새껏 주물러놓았을거우다.》

《뭐라구? 그게 사실이야?》

윤산은 끓어오르는 흥분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미승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제라도 빨리 가보우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산은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내달렸다.

단숨에 대웅전까지 달려간 윤산은 문을 벌컥 잡아챘다.

윤산은 방에 대고 소리쳤다.

《이순이- 이순이 어디 있어?》

벽쪽의 문이 열리더니 가사를 등에 걸친 주지승이 나와서 윤산에게 엄하게 말하였다.

《거룩하신 부처님앞에서 이게 무슨 망동이요. 그러면 부처님이 천벌을 내리시오.》

방안으로 뛰여든 윤산은 앞을 막는 주지승을 밀어던지고 그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이순이, 이순이, 어디 있어?》

컴컴한 방안에서 울음섞인 이순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여보- 흐흑》

윤산은 무작정 이순을 껴안았다.

윤산은 아무말도 못하고 이순을 이윽토록 지켜보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윤산의 품에 안겨 울던 이순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문밖으로 뛰여나갔다.

《이순이- 어딜 가, 서라!》

윤산이 소리를 치며 따라갔다.

밖으로 달려나간 이순은 윤산이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절간앞에 있는 날벼랑에 자기 몸을 내던졌다.

《이순이-》

윤산이 목놓아 불러도 이순은 아무런 대답도 없고 산울림만 울려올뿐이였다.

황급히 절벽아래로 에돌아 달려간 윤산은 내물이 고여있는 못가에서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진 이순을 안아냈다.

너럭바위우에 이순을 눕힌 윤산은 그를 애타게 찾았다.

《이순이- 내가 왔어. 이순이 눈을 뜨라구, 이순이-》

윤산은 이순을 부여안고 한동안 몸부림쳤다.

이순을 바위우에 눕힌채 자리에서 일어선 윤산은 두주먹을 그러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기앞에 그 흉물스러운 주지승이 있기나 한듯 헤덤비며 앞을 보다가 종주먹을 부르쥐고 절간으로 달려올라갔다.

그는 주지승이 거처하고있는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잡아챘다. 그러나 방안에는 주지승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서서 이놈이 어디 갔는가 하고 찾던 윤산의 눈앞에는 절간뒤산에 있는 암자로 황급히 올라가는 주지승의 몰골이 보였다.

성난 사자와도 같이 단숨에 주지승을 따라잡은 윤산은 그의 멱살을 잡아쥐고 주먹으로 면상을 후려쳤다.

《이놈아, 네놈은 사람을 잡아먹은 악마다. 죽어라.》

윤산의 드세찬 주먹세례를 받고 주지승은 그자리에 꼬꾸라졌다.

윤산은 그놈을 번쩍 들어 산골짜기로 힘껏 내동댕이쳤다.

다시 절간으로 내려온 윤산은 대웅전으로 뛰여들어갔다.

거기에는 아직도 주지승이 버리고간 방등이 켜져있었다.

윤산은 방등을 주먹으로 까부시고 아직까지 타고있는 기름등잔을 꺼내여 방안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삽시간에 타올랐다.

윤산은 이순이 있던 방으로 달려가 그의 옷가지를 들고 마당에 매여놓았던 말을 끌고 조계문밖을 나섰다.

이때 등뒤에서 사미승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여보시오.》

윤산은 뒤따라오는 사미승을 본체도 안하고 이순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곧장 내려왔다.

거기까지 따라온 사미승은 말없이 이순에게 옷을 입혀주는 윤산의 일을 도와주었다.

윤산은 자기의 옷자락으로 이순의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주고 점도록 그를 쳐다보았다.

이순의 얼굴을 쳐다보는 윤산의 얼굴에선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한참후에 이순의 시신을 말우에 정히 얹혀놓은 윤산은 불길에 휩싸여있는 불각사를 뒤에 남기고 산을 내렸다.

언진산을 내려 골바닥 펑퍼짐한 곳에 당도하였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함구무언이던 사미승이 윤산에게 말했다.

《이대로 집에까지 가시겠소?》

《…》

《그러지 말구 색시를 저 양지바른 곳에 정히 묻고 가시우다.》

그 말에 윤산은 말없이 사미승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던것이다.

이순의 시신을 가지고가면 그를 그토록 위해주던 무원골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아마 복통이 터질지도 모를것이다.

윤산의 눈앞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할 한씨와 녀인들 그리고 막동과 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술을 감빨면서 생각에 잠겼던 윤산은 말을 끌고 양지바른 둔덕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무작정 손으로 땅을 파헤쳤다.

사미승도 막대기를 주어가지고 와서 윤산을 도와서 땅을 팠다.

손끝이 터져나오는것도 모르고 땅을 파헤친 윤산은 자기의 저고리를 벗어 이순에게 덮어주고 봉분을 쌓아주었다.

그제야 윤산은 사미승에게 한마디 하였다.

《수고가 많았소.》

사미승은 두손을 맞잡고 사양하였다.

《아니오이다. 이놈때문에… 날 용서해주시우다.》

윤산은 너무도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사미승은 윤산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나두 이길로 절을 떠나 속세에 가겠수다. 이제 한가위절에 시주받으러 갔던 중들이 돌아오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거우다. 더우기는 고리타분한 중생활이 진저리가 나우다.》

윤산은 먼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량반부자놈들만이 아니라 주지와 같은 놈들은 다같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짐승 한가지요.》

그들은 말없이 헤여져 제갈길을 갔다. …

윤산의 말을 들은 한씨는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내가 이순이를 죽였구나, 내가 죽였어. 그렇게두 가기 싫어하는것을 등을 떠밀어보냈으니… 아이구 가슴이야.》

수안은 윤산의 손을 잡고 흐느꼈다.

《형님, 내가 미친놈이였소. 내가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어두… 이순누이는 내가 죽였소, 내가…》

윤산은 수안의 잔등을 어루만졌다.

《아니다. 이순인 아마 마을에 있어두 저 흉악한 원쑤놈들한테 죽었을게다. 울음을 그쳐라. 우리가 울면 좋아할건 저 량반부자놈들과 그와 한동아리가 된 놈들뿐이다.》

막동은 모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윤산이 말이 옳다. 이제부터 울음을 그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원쑤를 갚아야 한다. 난 이제부터 손에 칼을 잡고 이 무원골과 같이 량반부자놈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 결심이다. 그래 동생들생각은 어떤가?》

윤산이며 봉산이, 수안이는 이구동성으로 찬동했다.

《형님, 그렇게 하자요.》

《나두 찬성이요.》

그날밤 막동이네는 무원골을 떠났다.

림시로 수안이가 누이처럼 따르는 신계에 있는 박순누이네 집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무원골이 바라보이는 둔덕우에 올라선 그들은 한동안 서서 자기들이 지나온 행복한 생활을 그려보았다.

정녕 그들에게 있어서 무원골에서 보낸 3년세월은 일생토록 잊지 못할 뜻깊은 나날이였다.

이날은 갑진년(1484년) 음력 8월 스무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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