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일년치고 제일 큰 명절중의 하나인 한가위날이 왔다.

산에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고 들에서는 봄내, 여름내 땀흘려 농사지은 이삭들이 알찬 열매를 맺어 싱긋한 낟알향기를 풍겼다.

예로부터 이날이 오면 햇곡식을 찧어서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가지고 먼저 간 조상들을 찾아가 《맛보이고》 하루를 즐기는것이 상례로 되여왔다.

원래 한가위날이면 햇쌀로 찰떡이나 송편을 빚어먹었지만 그것은 벌방 량반들이나 즐기는것이였고 쇠부리마을과 같은 산골사람들은 햇수수나 조로 떡과 밥을 지어놓고 한가위를 보내군 하였다.

동산에 해가 토끼꼬리만큼 솟아올랐을무렵이였다.

막동이네는 밤새워 마련한 음식보따리를 들고 외삼촌 김의겸, 익선이네와 함께 봉옥이 부모들의 산소를 찾았다.

봉긋하게 솟은 봉분우에 잔디들이 누렇게 변색되여가는데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해볕에 반짝이고있었다.

봉옥은 입술을 깨문채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도 오래간만에 찾아온 딸을 반겨맞는 부모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같이 보여서였다.

상돌앞에 차려놓은 음식앞에서 봉옥은 흐느껴울었다.

밑구멍이 째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속에서도 외동딸인 자기에게 그늘 한점 질세라 애지중지 사랑해주던 부모님들이였다.

그처럼 소박하고 어질던 부모들이 언제한번 락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지지리 억눌리고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다가 한많은 세상을 떠나갔다.

세상에 고생이란 고생을 다한 부모들에게 옷 한벌 지어드리지 못하고 밥 한그릇 변변히 대접하지 못한 봉옥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봉옥은 허리에 띠고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속에는 그가 짬짬이 마련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옷이 들어있었다.

봉옥은 부모들의 제상앞에 옷가지들을 놓고 목메여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늦게나마 이 딸의 성의를 받아주세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막동이도 외삼촌 김의겸도 익선이도 함께 온 김의겸의 처를 비롯한 녀인들도 모두 눈굽을 찍었다.

허나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를 부드득 갈고있는 놈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리악이였다.

어제저녁 털보에게서 봉옥의 이름을 들은 다음부터 어떻게 하면 저것들을 잡아족칠것인가 궁냥을 하던 리악은 밤중으로 털보를 고을관가에 련락을 띄워보내고 새벽부터 봉옥이네 부모들의 묘소가 있는 숲속에 나와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있었던것이다.

이렇듯 운명의 두억시니가 뒤에서 지켜보고있는줄도 모르고있는 막동이네는 제상앞에서 물러앉아 음식들을 나누었다.

봉옥은 부모들의 봉분 한옆을 파헤치고 그안에 자기가 마련한 옷가지들을 성의껏 묻었다.

옷을 묻은 봉옥의 얼굴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누렇게 변해가는 잔디우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윽고 그들은 봉분주변을 말끔히 거두고 산을 내렸다.

봉옥은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였다.

말없이 다가온 막동의 손에 잡혀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짚으면서 산을 내렸다.

막동이네는 한낮이 좀 지나서야 쇠부리마을을 떠났다.

돌아갈 때도 올 때처럼 군사차림을 하고 김의겸을 비롯한 마을사람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눈 후 길을 떠났다.

저녁까지 무원골에 가닿으려고 그들은 부지런히 걸음을 다그쳤다.

막동이 타고가는 말에는 익선이네가 벼려준 말편자며 김의겸이 마련해준 낫과 호미 등 쇠붙이들이 들어있는 자루가 매달려있었다.

무원골이 가까와질수록 어서빨리 달려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귀여운 무남이 그리고 다정한 형제들을 만날 마음이 더 앞서고있었던것이다.

쇠부리마을에 와서 못 잊을 사람들을 만나고나서도 막동이나 봉옥의 가슴속에 자리잡은것은 량반부자가 없는 무원골의 생활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쇠부리마을에서 밤새워가면서 자기들이 사는 고장을 자랑했고 앞으로 외삼촌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을 몰래 빼돌려 무원골에 가서 함께 살자고 약속까지 했던것이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무원골은 세상에 둘도 없는 정다운 보금자리였고 자기들의 모든 행복이 자리잡고있는 요람이였다.

그러니 무원골을 앞에 둔 그들의 마음이 왜 설레이지 않으랴.

행길에서 벗어나 숲속에 들어선 막동의 얼굴에서는 노상 웃음이 떠날줄 몰랐고 싱글벙글 웃는 막동의 얼굴을 바라보는 봉옥의 얼굴에도 기쁨이 남실남실 넘쳐나고있었다.

《봉옥이, 이제 가을이나 끝내놓고는 쇠부리마을에 가서 외삼촌이랑 동네사람들을 아예 모셔와서 함께 살자구.》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 가서 집을 여라문채 더 지어놓자구. 그래서 금년 동삼엔 모두 모여서 살자구, 봉옥이 어때?》

《어쩌면… 고마와요. 》

막동은 짐짓 눈을 부릅뜨고 봉옥을 쳐다보았다.

《저런, 말하는것 보지, 내가 뭐 남인가? 남들처럼 고맙다는건 또 뭐야.》

《아이참…》

봉옥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막동은 봉옥의 그 모습을 사랑스레 쳐다보다가 손으로 봉옥의 볼을 살짝 눌러주었다.

봉옥은 막동의 그 손을 꼭 잡은채 말이 없었다.

막동은 봉옥에게 손을 맡긴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청청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제라도 돌덩이를 던지면 첨벙 소리를 낼듯 한 푸른 하늘은 그들의 소박한 꿈을 축복이라도 해주는듯 하였다.

앞날에 대한 꿈으로 하여 부풀어오르는 속마음을 참을길 없는듯 막동은 옷자락을 와락 풀어헤쳤다.

무엇이라고 하늘에 대고 막 소리라도 치고싶은 심정이였다.

《무남이 아버지, 매골에 있는 외삼촌부터 모셔오세요.》

《매골외삼촌?》

《예.》

《그럼 매골외삼촌두 쇠부리마을사람들두, 아니 세상사람들을 다 모셔오자구. 그래서 량반부자가 없는 무원골에 지상천국을 꾸려놓잔 말이야.》

막동은 어린애마냥 기쁨에 들떠서 엉치를 들썩거렸다.

《못할것두 없지. 우린 벌써 그런 세상에서 살고있지 않아.》

(하긴 무남이 아버지의 말이 옳다. 우린 벌써 3년째나 량반부자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있지 않는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데려다가 우리 무원골에 모여살면 얼마나 좋을가. )

봉옥의 눈앞에는 지난 3년간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뭘 그렇게 생각해?》 하는 막동의 목소리에 봉옥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무남이 아버지 말이 옳아요. 앞으로 우리 무원골을 꼭 그렇게 꾸리자요. 어서 가시자요. 쩌-》

봉옥은 타고가는 청가라의 배허벅을 찼다.

그뒤를 따라 막동이 탄 청부루가 숲속으로 내달렸다.

끝없는 기쁨과 앞날에 대한 행복을 싣고 내달리는 그들의 앞길을 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는듯 하였다.

허나 그들은 누가 자기들의 뒤를 필사적으로 따르고있는지, 그 독사같은 놈이 그들의 앞날을 어떤 올가미로 칭칭 감아놓겠는지 하는것은 전혀 몰랐다.

리악은 막동이네가 알아채지 못하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말을 타고 검질기게 뒤따랐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따라온 길을 잊지 않으려고 곳곳에 나무아지를 꺾어놓아 표적을 남겨놓았다.

막동이네가 병풍골에 들어서자 얼마간 뒤따르던 리악은 그자리에 흠칫 멈춰섰다.

골안의 막바지에서 막동이네가 귀신처럼 없어졌던것이다.

말에서 내려 온통 절벽으로 뒤덮인 막바지의 이곳저곳 허우적거리면서 돌아치던 리악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여 바위턱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바위아래로 한참 굴러내린 리악은 이마가 선뜩한 감이 들어 손을 대여보니 선지피가 묻어나왔다.

리악은 입을 사려물고 울부짖었다.

《이 쌍것들, 어디 두고보자.》

옷자락을 찢어 이마를 처맨 리악은 당장 눈앞에 막동이네가 서있기나 한것처럼 칼을 빼들고 윽윽거렸다.

거적눈을 부릅뜨고 앞을 막아선 절벽을 쏘아보던 리악의 눈길이 한곳에 멈춰섰다.

금방 싸놓은것 같은 말똥덩어리가 있었던것이다.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간 리악은 김이 몰몰 나는 말똥덩어리를 손에 집어들고 보았다.

바위옆에 틈이 있는것을 본 리악은 손을 뻗쳐 돌을 밀었다.

그러자 바위돌이 움씰거렸다.

리악은 호기심이 동하여 바위돌에 등을 대고 낑 하고 힘을 주어 밀었다.

바위돌은 움씰하더니 툴렁 떨어졌다.

그러자 사람과 말이 들어갈만 한 구멍이 나졌다.

그 구멍으로는 굴속의 바람이 쏴 하고 뿜어나왔다.

순간 리악의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섰다.

금시라도 그안에 숨었던 막동이가 칼을 빼들고 달려나오는듯싶어서였다.

리악은 한동안 굴속을 지켜보았다.

굴속에서는 쏴쏴 흐르는 도랑물소리뿐 다른 기척이 없었다.

굴속으로 한걸음 발을 들이밀던 리악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자기 혼자 들어가서는 막동이의 감때사나운 돌벼락에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리악은 다시 나와 바위돌을 끌어다가 굴어구를 막아놓고 그밑에 나무꼬챙이를 끼워놓았다.

(이놈들, 이제야 독안에 든 쥐 한가지다. 내 네년놈들을 모조리 요정내고야말테다. )

이를 악문 리악은 허겁지겁 되돌아섰다.

해는 어느덧 서산에 기울어지고있었다.

리악은 어서빨리 관가에 알릴 생각으로 말을 타고 내달렸다.

지금쯤 털보의 련락을 받은 고을군사들이 방아역이나 역참마을에 와서 자기를 기다릴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무원골의 위험은 서산에 지는 해를 따라 기여드는 땅거미마냥 다가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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