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음날 아침이였다.

막동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로 나갔다.

한가위를 당장 앞에 둔 때라 내가에는 서늘한 기운이 완연하였고 앞산에는 약삭바른 단풍들이 이제야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가 왔다는듯이 앞을 다투어 빨갛게 단장을 하고있었다.

낫가락을 넣은 망태기를 한옆에 내려놓은 막동은 웃동을 벗어 그우에 얹혀놓고 와락와락 세수를 하였다.

그리고는 망태기안에서 낫가락들을 꺼내놓고 숫돌처럼 세워놓은 바위우에 대고 썩썩 문댔다.

일년 명절중에 제일 큰 명절인 한가위날에 쓸 햇곡식을 거두어들이려고 동생들의 집기둥에 박혀있는 낫가락들을 뽑아왔던것이다.

그는 동생들이 깨여나기 전에 그들의 낫까지 다 갈아놓을 심산으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마지막낫을 거의다 갈았을무렵이였다.

그의 등뒤로 자그마한 손이 다가와 가까스로 목을 그러안았다.

그제서야 막동은 하던 일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세살잡이인 무남이가 아버지의 잔등에 매여달려 해죽해죽 웃고있었다.

막동은 무남이를 냉큼 품에 안고 물었다.

《무남이로구나, 그래 너 혼자 왔니?》

이제 겨우 말을 떼기 시작한 무남이는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뒤에 서있는 할머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할마. 할마-》

《오, 할머니하구 함께 왔단 말이지, 그런데 할마가 아니라 할머니야, 할머니.》

《할마니.》

《할마니가 아니라 할머니!》

《할머니.》 하고 무남이가 따라불렀다.

막동은 무남이를 덥석 안아 추어올렸다.

《옳다, 할머니란다.》

막동의 손에 떠받들린 무남이는 캐득캐득 웃어댔다.

막동은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빙그레 웃다가 무남이를 품에 안고 아이의 얼굴에 제볼을 비벼댔다.

《아파, 아파.》

무남이는 낯을 찡그렸다.

아마 덥수룩한 아버지의 수염이 제 얼굴을 찌르는것이 싫은 모양이였다.

뒤에 서있던 한씨가 얼굴에 웃음을 담뿍 담고 무남에게 말했다.

《무남아, 얼른 아버지에게 아침밥을 잡수시러 가자고 해라.》

땅에 내려선 무남이는 막동의 손을 잡고 《아부지, 밥.》 하고 떠듬거리면서 잡아끌었다.

막동은 껄껄 웃으면서 무남이의 작은 손에 이끌리여 갔다.

한씨가 서있는쪽에 거의다 가게 되자 무남이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할머니한테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할마, 저기 아부지.》

《오냐, 우리 무남이가 똑똑하구나.》

이윽고 무남이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각기 하나씩 잡고 팔그네를 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문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봉옥의 얼굴에서도 행복의 웃음이 활짝 피여났다.

부엌문에 서있는 어머니를 본 무남이는 《엄마!》 하고 소리치면서 아장아장 달려가 두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엄마품에 안기였다.

그 모양을 바라보며 막동이도 한씨도 즐겁게 웃었다.

막동이가 아침밥을 다 먹고 봉옥이 떠다주는 숭늉까지 마시고나서 상을 물리고 나앉았을 때였다.

무남이를 품에 안고 앉아있던 한씨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무남 애비, 금년 한가위절엔 어떻게 할셈인가?》

《예, 어쩔게 있어요? 작년처럼 햇곡식을 찧어서 즐기면 되지 않겠어요.》

《글쎄, 그렇긴 하다만…》

막동은 의아한 눈길로 한씨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혹시 무슨 생각이 있어요?》

한씨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난 어쩐지 윤산이네랑 그리구 저 무남이 에미랑 마음에 걸리누나.》

《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일이야 무슨, 엊저녁에 수안이가 얻어온 자라피를 이순이한테 먹였는데…》

막동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데요?》

《글쎄, 그 눈치가 말짱한게 모를게 뭐니? 자기때문에 수안동생이 고생했다고 눈물을 똘랑똘랑 떨구더구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꾸만 이러면 자긴 송구스러워 여기서 못살겠다는거야.》

《…》

《저 이순일 한동안 언진산절간에 보내면 어떨가?》

《절간에요? 그건 왜요?》

《그 절간의 부처에게 아이를 낳게 해달라구 빌러 보내잔 말이네.》

《그렇다구 될가요?》

《내가 그전에 언진산 불각사 부처가 신통해서 애를 낳게 해주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어. 그런데 이번에 수안이도 신계에 나갔다가 제누이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다누만. 그 마을에두 언진산부처에게 치성을 드리구 애를 낳은 집이 있대.》

《그래요? 그게 정말일가요?》

《글쎄, 무남 애비나 내나 비구가 아니니 부처를 믿지 않아 잘 모르긴 하다만 불 안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겠나. 무슨 조간이 있긴 있으니 그런 소문이 나겠지.》

《어머니, 그렇다면 이순이를 보내자요. 까짓거 부처에게 치성드릴 준비를 해서 보내면 될게 아니예요.》

《나두 그게 좋을것 같구나. 우리에게 먹을것이 없으면 몰라두 햇곡식을 찧어서 한 네댓말 지어보내자꾸나.》

《알겠어요. 내 동생들 하구 의논을 하겠어요. 그런데 어머니, 봉옥이 일이란건 도대체 무엇이예요?》

한씨는 한동안 문밖을 내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가위날이 다가오니 글쎄 말은 안한다만 무남 에미가 왜 고향에 묻고 온 부모생각이 나질 않겠니. 집떠나 3년이 되도록 부모에게 성묘 한번 제대루 못했으니 가슴이 오죽 아프겠냐?》

한씨의 말을 들은 막동의 눈앞에는 3년전에 쇠부리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봉옥이의 아버지가 운명하던 일이며 자기들의 잔치를 차려주던 마을사람들과 황급히 떠나는 자기네를 손저어 바래주던 외삼촌내외의 모습도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한씨는 생각에 잠겨있는 막동을 이윽히 바라보며 자기 말을 계속했다.

《그래 내 생각엔 이번 한가위날에 무남 에미 고향에 한번 다녀오는게 좋을것 같구나. 네 내막이 알려질가봐 두려워 그런것 같은데 몰래 다녀오면 될게 아니냐.》

《알겠어요, 어머니.》

《길차비는 내가 다 해놓았으니 걱정말아.》

막동은 한씨의 손을 잡고 목메여 말했다.

《어머니, 고마와요.》

《원, 자식두, 어머니보구 고맙다는건 또 뭐냐. 그리구 매골에 있는 네 아버지묘에 찾아갈 생각은 아예 말아. 네가 살아있다는것이 소문 나면 큰일난다. 내가 여기서 간단히 제상을 차려놓겠다.》

《허지만 그렇게야…》

《아니다. 일이란 다 경우가 있는 법이다. 어서 나가 윤산이랑 모두 의논들을 해보아라.》

막동은 주섬주섬 저고리를 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동이 조밭에 이르니 윤산을 비롯한 동생들이 밭머리에 앉아 가을걷이할 차비를 하고있었다.

《일찍들 나왔구만.》

막동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막동을 맞이했다.

《형님, 이거 너무하우다.》 하고 봉산이는 볼부은 소리를 했다.

《봉산인 어제밤에 갑녀한테 지청구를 들은 모양이지. 아침부터 두덜거리는걸 보니.》

《어제저녁이 아니라 오늘아침에 들었지요. 글쎄 형님은 새벽에 일어나서 우리가 쓸 낫까지 다 갈아놓았는데 늦잠만 자구있다구 말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나?》

《하, 이젠 아이아버지가 되였는데 좀 부지런해야지 그렇게 느렁뱅이가 되여서는 주인구실을 못한다구 지청구를 늘어놓는데 뭐라구 말할수 있어야지요.》

《저런, 우리 셋째제수가 보통이 아닌데 하…》

《그러게 우리가 색시들한테 욕을 먹지 않게 형님이 좀 조절하시라요. 자꾸만 우리가 할일까지 도맡아하지 말구 오히려 우리한테 시키란 말이요. 이건 동생들이라는게 형노릇을 하니 온통 꺼꾸루란 말이요.》

봉산이의 지청구에 막동은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봉산은 더욱 승이 나서 막동에게 달라붙었다.

《그저 머리만 끄덕이지 말구 그렇게 하겠다구 대답을 하시우, 어서요.》

《오냐, 그렇게 하마.》

막동은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봉산이는 또다시 오금을 박았다.

《만약 이제 다시 형님때문에 우리가 색시들한테 구박당할 땐 형님 볼기를 치겠어요.》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예-에? 그건…》

막동의 역습에 말문이 막힌 봉산은 말을 갑자르면서 곁에 선 수안이와 윤산을 쳐다보았다.

《형님말이 옳수다. 우린 색시들한테 칭찬만 받는데 이 봉산이만 구박당하구 괜히 우리까지 껴들어넣지요.》

윤산의 그 말에 봉산은 약이 올랐다.

《아니 윤산형님, 그 말이 진짜요? 방금전까지도 자기도 아침에 말을 들었다구 하구선 정말 이러기요?》

봉산은 윤산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만에야 윤산이도 웃음을 터뜨렸다.

《얘, 간지럽구나. 하…》

둘이 붙어안고 밭머리에서 딩굴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면서 막동과 수안은 한바탕 웃어댔다.

이렇게 한바탕 즐거운 《싸움》을 한 그들은 조가을을 하기 시작하였다.

실하게 익은 조이삭들이 볼을 스칠 때마다 싱그러운 낟알냄새가 풍겨왔다.

흥이 난 그들은 부지런히 낫질을 해댔는데 어찌도 걸싸게 하였는지 해가 소꼬리만큼 솟아올랐을무렵에는 벌써 한가위명절에 쓰고도 남을 곡식을 다 베였다.

한바탕 가을을 하고 밭머리에 나앉은 그들은 이마에 흐르는 땀들을 씻으면서 입이 벙글써해서 조단들을 바라보았다.

막동은 실하게 여문 조이삭을 빼들었다.

《금년에도 조이삭이 잘 여물었구나.》

윤산은 싱글벙글 웃었다.

《난 지금껏 이렇게 실한 조이삭은 처음 봐요.》

수안이도 흥에 겨워 말했다.

《정말 그래요. 박순누이네도 조가 잘됐다고 하면서 나더러 자랑하길래 보니 이 조이삭절반도 안되요.》

봉산은 조이삭을 거머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농사도 풍년이겠다. 이번 한가위날에 조찰떡을 한가득 쳐놓구 잔치를 차리자요.》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한마디씩 하였다.

먹을것이 많으니 절로 마음도 젊어지고 흥그러워지는 법이다.

막동은 그들을 둘러보면서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이번 한가위절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다른게 있어요? 작년처럼 잔치를 차리구 즐겨보는것이지요.》

윤산의 대답이였다.

웅심깊은 수안은 막동에게 말을 건넸다.

《형님에게 혹시 무슨 생각이 없으시우?》

막동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내 생각엔 이 좁쌀을 한 네댓말 찧어서 윤산이네를 언진산 불각사 구경가게 하자는거다.》

뜻밖의 말에 윤산은 눈이 커졌다.

《예-에? 거긴 왜요?》

《듣자니 언진산 불각사 부처가 그렇게두 령험해서 아이까지 점지해준다고 하더라. 그러니 이순이와 함께 가서 치성을 드리고 오라구.》

《그게 좋겠어요.》

《둘째형님, 어서 그러시우.》

봉산과 수안이도 맞장구를 쳤다.

《여러 동생들도 좋다니 그렇게 하자. 그러니 윤산동생은 떠날 준비를 하라구.》

《형님, 그건 좀…》

《여러말 할게 없다. 그렇게 하자.》

막동은 윤산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윤산은 제고집을 부렸다.

《형님, 난 안가겠어요.》

《그건 왜?》

《그까짓 돌부처가 무슨 일을 치겠다구. 난 일없어요. 꼭 아이가 있어야만 하는것두 아닌데…》

윤산의 그 말에 막동은 울컥했다.

《윤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글쎄 넌 그렇다치구 이순이 마음을 왜 몰라줘. 모두들 애들을 놓구 좋다구 할 때 고적하게 지내는 이순이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하구 그래? 난 이 무원골사람들모두가 사람이 누릴수 있는 모든 복을 다 누리게 하자는거다. 한뉘 억눌려 살아야 한다는게 우리의 인생이 아니란 말이다.》

막동의 절절한 이 말에 윤산은 아무말도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막동은 또다시 윤산에게 오금을 박았다.

《그래, 아직두 안가겠다구 고집이냐?》

윤산은 한숨을 푹 내쉬였다.

《형님말대루 하겠수다.》

그러자 막동은 빙그레 웃었다.

《진작 그럴것이지, 아무렴 내나 이 동생들이 너를 궁지에 몰아넣을려구 그러겠니? 한번 가보라구.》

윤산은 한손을 획 내저으며 말했다.

《글쎄 난 가겠소. 그런데 형님한테 여쭐 말이 있소.》

《뭔데? 어서 말하라구.》

《형님두 이번 한가위날엔 꼭 형수님고향에 다녀와야 하우다.》

《엉?》

《아까 무남이 할머니가 형님한테 하는 얘길 문밖에서 다 들었수다. 까짓거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소?》

《글쎄, 그건 좀 생각해보자.》

윤산은 또 고집을 부렸다.

《형님이 안가면 나두 그만두겠수다.》

《…》

곁에 섰던 수안은 막동에게 권고했다.

《형님, 여기 걱정은 말구 다녀오세요.》

봉산이도 수안의 말에 동참했다.

《형님, 이 동생들이 못 미더워 그래요? 형수님을 봐서라두 갔다오시라요.》

막동은 정겨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믿음이 가는 그들이였다.

이런 동생들과 함께라면 물과 불속에 뛰여들어도 그 어떤 사지판에 빠진다 해도 두려울것이 없을것 같았다.

그럴수록 막동의 마음은 이 동생들을 위해 자기 한몸도 서슴없이 바쳐갈 굳은 맹세로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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