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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 회)

 

제 2 부

 

기발을 올려라

 

17

 

씻은듯 맑은 달이 비치고있었다. 어느덧 선기가 돋는 초가을밤! 별들은 되알지게 여물어 방금 좌르륵 쏟아질듯 하다. 국화꽃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두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였다.

소서노와 주몽이였다.

소서노는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주몽의 눈을 홀린듯이 바라보고있었다.

아, 얼마나 훌륭한분인가!

저 부리부리한 눈, 먹을 찍어그은듯 한 눈섭, 큰 산을 떠메여 놓아도 꿈쩍 않을것 같은 어깨, 기둥같이 미츨하고 억센 몸매.

이런 사나이를 사랑하는 녀인들은 얼마나 행복할가.

저이의 뜻은 또 얼마나 웅심깊던가!

정력에 넘친 체력도 부러운것이지만 그 뜻은 더욱 높다. 사람에게 몸이 스무냥이면 뜻은 여든냥이라지 않아?!

하긴 나도 그 뜻에 반했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세상에 이런 사나이가 있었더람. 참말 단군겨레에게 복이 있으소서. 이런 억센 동량이 있는줄 내 미리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천리라도 만리라도 찾았을것을.

아, 그러나 인생은 얄궂은것, 내 미처 알기 전에 저이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해버렸었지…

나는 다만 저이의 뜻을 따르고있다. 하긴 그것만도 나에게는 행복한것, 저이의 뜻을 따르며 나는 지금 행복을 찾는거야. 내가 바라는것이란 저이가 그저 나를 멀리하지 않고 어딘가 내 가까이에서 저이를 바라볼수 있는것, 어떻게 하나 저이의 일을 이 한몸 바쳐 도와드리고싶은거야. 나는 거기서 나의 행복을 찾을거야. 소서노는 마주 쥔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호- 하고 내쉬였다.

《오늘 밤엔 달이 참 밝소이다!》

그리고는 제켠에서 오, 오 참 어리석다구야 하고 생각한다.

점도록 달을 바라보고있는 주몽이 소서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래! 차거와도 아름다운 달밤이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달밤의 경치여서 더욱 그런가보다.

벌써 몇몇해, 궂은비를 맞으며 진창길을 헤치였고 눈보라를 맞받아 혹한의 매운맛을 보아왔던가.

사나이 스무살에 세상의 절반고생은 겪었지.

노예와 같은 고역은 그래도 참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 형형색색의 시기와 질투, 음모와 모욕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을 눈앞에서 보아야 하는 뼈아픔은 또 얼마나 나를 괴롭히였던가.

그런 길을 나는 걸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것이다. 다만 걸어온것보다 더 험난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믿음이 생겼고 힘이 생겼다.

여러해동안의 고군분투, 사선을 넘는 과정을 거쳐 이 구려는 물론이요 주변소국들에 나와 나의 벗들의 힘이 뻗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이제는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였다.

그래, 공든 탑이 무너지게 해서는 안된다. 바야흐로 새 나라 세울 날은 다가오고있다.

뻐근해오는 가슴을 달래이며 큰숨을 들이긋던 주몽은 문득 소서노를 바라보았다. 그가 분명 무슨 말인가 한것 같았다.

《뭐라고 했소?》 하고 주몽은 물었다.

소서노는 미소를 지을뿐이였다. 달빛을 받아 소서노의 흰 이가 반짝이였다.

주몽은 멍하니 소서노를 바라보았다. 때때로 고적이 깃들적마다 어머니 류화와 례을나의 모습으로 변신하여보이는 소서노였다. 어둠속에서도 빛을 낸다는 그 무슨 야광주인양 자기의 걸음걸음을 감싸주는 소서노였다.

이것도 천명인가? 아, 아 하늘이여!

저 멀리 숲속 어디서인가 바람소리가 솨-아 지나갔건만 주위는 달빛에 젖어 교교하기만 하다.

주몽은 소서노에게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땅우에 비낀 주몽의 긴 그림자를 따라 소서노도 걸었다.

《언제쯤 될듯 하오이까?》

하고 침묵을 깨치며 소서노가 물었다.

《뭐가 말이요?》

《새 나라 잔치말이오다!》

주몽은 눈을 내리깔며 빙긋 웃었다.

《글쎄…》

주몽은 짐짓 딴전을 폈다.

소서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백옥같은 그 빛이 이상하게 주몽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언제나 멀리에만 있다고 생각하던 숯불이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세찬 열을 내뿜고있었다.

《그대는…》 하고 주몽은 저도 모르게 소서노에게 한발자국 다가갔다.

《소서노!》

주몽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털쓰개를 걸친 소서노의 동그란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렸다.

《알고있소이다!》 하고 소서노는 입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는 마치도 아득히 먼곳에서 울려나오는 남의 소리 같았다.

 

마침내 10월, 가을이 왔다.

주몽은 오녀산성에서 드디여 새 나라 잔치를 베풀었다.

풍요하고 아름다운 계절이였다.

이해따라 풍작을 거둔 사람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른새벽부터 오녀산성으로 밀려들어 사람산, 사람바다를 이루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 서로 부르는 소리, 떠들썩한 인사와 이야기로 하여 온통 북적북적하였다.

해가 머리우에 한발만큼 올랐을 때이다.

대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하였다. 행사가 시작된 모양이다. 떠들썩하던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이 북소리가 울리는 오늘의 제단쪽으로 쏠리였다.

제단은 박달나무로 높이 세단 쌓았는데 매 단의 네귀마다 붉고 검고 희고 푸른 기발들이 나붓기고있었다.

북소리가 잦은가락으로 울리자 번쩍거리는 붉은 비단옷을 걸치고 두손에 야단스러운 소리를 내는 방울묶음과 손북을 든 사람이 마치 춤추는 봉황새련듯 너풀너풀 제단주위를 돌았다.

그는 북과 방울을 흔들어대며 춤추다가 문득 멈추어서더니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오호라!

해와 달의 아들이며 하백님의 외손이신 우리의 신성한 주몽어르신이시여라!

단군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오늘에 나셨으니 삼신께서 기뻐하고 뭇신이 춤추도다!

하늘, 땅이 엇바뀌고 산천이 취할래니 구려의 억만생령 이 아니 복락인고!

아쉬라! 아쉬라! 아, 아쉬라!》

다시 방울소리 요란하고 잇달아 북소리는 둥-둥- 울린다.

제사장이 사라지니 제단쪽으로 마치 말렸던 주단이 펴나가듯 호위군사들이 두줄로 뻗어나간다. 그러자 번쩍거리는 찰갑옷을 입은 오이와 부분노가 앞장에 서고 그뒤로 네사람이 멘 커다란 징을 울리는 대가 따르고 그뒤로 재사, 마리, 협부, 묵거, 무골이 따르고, 이어 백마를 탄 주몽이 나타났다.

머리에는 금왕관을 쓰고 온몸에 금빛나는 찰갑옷을 입었다.

금관의 이마에는 닭알만 한 푸른 보석이 박히고 사슴의 뿔같은 세가지 가닥이 우로 솟았는데 거기에는 심장모양의 조그마한 황금보요들이 무수히 매달려 찬란한 빛을 뿌리고있었다. 이런 호화로운 왕관과 주몽의 홍안이 어찌나 잘 어울렸는지 마치 왕관은 주몽을 위하여 생긴듯 하였다.

사람들의 얼빠진 눈길이 모두 주몽에게 쏠려있었다.

주몽의 뒤로 소서노와 구려대가들의 모습이 보이였다.

마침내 행차가 제단앞에 닿았다. 주몽은 말에서 내려 제단으로 올랐다. 주몽의 얼굴은 사뭇 흥분되여있었다.

맨끝 제단까지 오른 주몽이 하늘을 우러르며 례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목소리가 숨을 죽인 사람들의 머리우로 울려갔다.

《거룩하신 하늘아버지와 하늘과 단군님검께 주몽이 삼가 새 나라의 창업을 아뢰나니 보살펴주옵소서!

주몽이 새 나라 세워 우로는 하늘과 해와 별, 단군님검의 뜻을 받자옵고 아래로는 백성의 얼을 모아 단군님검의 성지를 되찾고 우리 겨레 하나되여 화목하게 복락을 누리게 하려 하오니 천지신명은 사랑하여주옵소서…》

주몽이 하늘을 우러러 세번 절하고 사방에 각각 한번씩 절하고 다시 가운데 이르러 합장하고 절하였다.

그리고는 우뚝 서서 웨치기를

《5부 대가들과 백성들은 듣거라! 바야흐로 새 나라의 창업을 만방에 알리노니 이제 임금은 머리가 되고 신하는 팔다리가 되고 백성은 몸뚱이가 되여 단군님검의 옛땅을 일떠세우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할지어니 구려를 높이 세워 그 이름 고구려라 하노라!》고 하였다.

북소리가 세번 울리자 제가와 백성들이 《고구려 만세!》를 목청껏 웨쳐댔다.

북소리가 울리고 이번에는 주몽이 고구려 5부의 위계를 알린다.

《중부 일명 황부 즉 계루부!》

사람들이 《고구려의 계루부 만세!》 하고 웨친다.

《북부 일명 후부 즉 절노부!》

또다시 《고구려의 절노부 만세!》 소리.

《동부 일명 좌부 즉 순노부!

남부 일명 전부 즉 관노부!

서부 일명 우부 즉 연노부!》 하니 매 부의 위계를 정할 때마다 부의 이름으로 만세를 부른다.

위계를 정한 주몽이 손을 높이 들어 《고구려기발을 올려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누런 비단바탕에 고구려라고 쓴 기발이 올랐다.

기발은 청명한 가을하늘에서 한없이 펄럭이였다.

《잔치를 시작해라!》 하고 주몽이 선언했다.

사람들의 만세소리가 떠나갈듯 하였다.

주몽이 례식을 끝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서니 악공들과 춤군들이 제단을 에워싸고 춤판을 벌리였다.

악공들은 자색비단모자에 새깃으로 장식하고 누런색의 큰소매 달린 웃옷에 자색비단띠를 띠였고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물을 들인 줄로 장식하였다. 춤군들은 네사람인데 메같은 상투를 뒤로 짜고 이마에 붉은색을 바르고 금구슬로 장식하였으며 두사람은 누런 치마저고리에 붉은 바지를, 두사람은 붉고 누런 치마저고리에 바지를 입었으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고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그들은 둘씩둘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공들은 오현금, 쟁, 피리, 가로 부는 저대, 퉁소, 북, 등속으로 곡조를 조화시켜 춤군들을 돕는다.

이사람저사람 할것없이 모두가 춤군들을 가운데 놓고 들썩들썩 춤판을 벌린다.

주몽은 한동안 춤판을 구경하다가 부하들과 제가들을 거느리고 오녀산성 점장대에 올랐다. 여기에서는 성안은 물론 그 주위의 산줄기와 골짜기들, 길과 강줄기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오녀산 점장대에서 색다르게 볼수 있는것은 높은 산과 함께 사시장철 마르지 않는 《천지》라는 못이였다.

《천지》의 파란 물우를 바라보는 주몽에게는 지나간 나날이 사무치게 떠올랐다.

자기의 희생으로 주몽의 앞길을 축복한 례나루스승이며 다심하고 강직한 어머니와 을나 그리고 많고많은 이름모를 사람들!

그들이 바라던것은 무엇이였던가?

공명이였던가. 부귀였던가?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한 백성들이였던가. 그들은 모두가 근면하게 일하며 하나의 겨레로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하고있다.

토막토막 갈라져 떨어져나간 수십이나 되는 치욕당하는 단군님검의 옛성지 부활을 갈망하고있다. 겨레의 념원을 헤아려보는 주몽은 큰숨을 들이쉬였다.

주몽은 산성우에 나붓기는 고구려기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주몽의 나이 22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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