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손전화홈페지열람기
날자별열람

 

(제 27 회)

 

제 2 부

 

기발을 올려라

 

13

 

도리는 말탄채로 소란스러운 장마당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이따금 멈추어서서 싸구려를 웨치는 장사군들이며 명도전을 쩔렁거리는 흥정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구마가 따라섰다. 구마는 소금, 어물, 가죽 등을 파는 장사군들앞에서 물건을 살듯이 값도 물어보고 만져보기도 하지만 그저 지나치군 하였다. 도리는 구마의 모습을 힐끔 살피고는 그대로 지나갔다. 도리가 장마당에 나선것은 복잡한 머리를 쉬기 위해서였다. 도리는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장마당을 거닐면서 풀리지 않는 일들을 곧잘 다듬군 하였다. 지금도 도리는 장마당을 내려다보며 딴전을 펴고있었다.

사람의 일생이라는게 참 예측하기 어렵다. 도리가 지금처럼 구차하게 더부살이처럼 될줄 어찌 알았으랴. 억이 막혔다. 구려라는 나라를 손아귀에 걷어쥐자던 꿈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판국에 깨지다니? 상놈들 말마따나 한여름의 개꿈처럼… 세상일이라는게 알다가도 모를것이다. 제딴에는 있을수 있는 사변들을 그렇게도 면밀히 따져보았건만 어떻게 되여 거품이 돼버리고말았는가?

주몽!

그 불청객이 나타날줄 어찌 알았으랴.

아,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사람이 일은 꾸미되 성사여부는 하늘이 한다던가? 젠장! 도리는 마치 입에 물었던 떡을 떼운 심정이였다. 아무리 대감의 체면을 살려 흔연한체 해보이려고 하여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것을 어쩔수 없다. 구마에게는 장차 어부지리를 얻는다고, 지금은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쓴다고 하였지만 도리자신의 마음은 그것을 믿지도 않았다. 당장 끓는 불가마를 어떻게 식힌단 말인가? 너 죽고 나 죽자고 칼물고 뜀뛰기라도 하고싶지만 간신히 참는다. 체면도 체면이지만 지금에 와서 주몽에게 정면으로 맞선다는건 자는 범의 코등을 다쳐놓는것으로 될것 같았다. 이런 때일수록 자기의 속심을 깊숙이 감추는것이 상책이다. 줄행랑도 병법의 하나가 아닌가! 불측지변(不測之變)을 당했으니 나도 불측지변을 쓸테다. 어디 주몽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누구에게나 그늘은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도리는 이미 구마를 부여에 몰래 보냈었다. 다행히 구마는 부여국 대소왕자의 제일 심복으로 있는 해리와 어떻게 끈을 댈수 있었다. 이런걸 가리켜 다리부러진 노루 한곬으로 모인다고 했던가? 구마의 출현은 대소왕자들을 깜짝 놀래웠다. 그들은 구마를 자기들의 궁안에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도리가 계략을 꾸미는데 따라 언제든지 도와준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하지만 도리의 마음은 즐겁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부여의 끄나불이 되는것이 싫었다. 부여쪽에서는 대소태자가 장차 왕권을 쥔 다음 이번 일을 빌미로 자기에게 굴레를 씌울수 있는것이다. 도리는 그것을 내다보았다. 요령부득하여 할수없이 하는 일이라는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래일은 또 다른 바람이 불겠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도리는 후- 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구마, 그…》

뒤따르던 구마가 없었다. 도리는 장마당을 둘러보았다. 구마는 저쯤 차일친 웬 가게앞에서 어슬렁거리고있었다.

도리는 그의 이상한 거동을 뿌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그쪽으로 말을 돌렸다.

《여기서 뭘하는거냐?》

구마는 도리를 힐끔 보고 다시 황새목을 빼들고 장마당을 살폈다. 구마의 시선이 사람들틈에 끼여 저쪽으로 걸어가는 한 소년의 뒤모습을 쫓고있었다. 그 소년은 방금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구마는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것 참, 신통하군…》

《뭘 말이냐?》 하고 도리가 물었다.

구마는 뒤더수기를 썩썩 긁었다.

《소인이 부여에 갔을 때 벙어리소년을 하나 보았소이다. 저 부여태자의 측근으로 있는 해리의 아우였는데…》

《해리?》

《예, 해리에게 추연이라는 녀동생과 고도라는 사내 아우가 있다 하오이다. 그런데 그 고도라는 애녀석이 벙어리라고 하지 않소이까? 풍문에 듣자니 그 벙어리가 추연이라는 제 누이를 몹시 따른다는데 자기 형인 해리와는 영 남남처럼 지낸다고 하오이다!》

《해괴한 일이군. 제 형이 아니라 제 누이를 따르다니? 하긴 그럴수도 있지…》

《소인도 얼핏 추연이라는 처녀를 보았사온데 그 정말… 흐, 흐.

그런데 그 계집이 바로 오이라는 사내에게 반했다는게 아니오이까?》

《오이?》

《그렇소이다. 거, 왜 생각나지 않소이까? 저 주몽의 휘하에 무서운 도끼부대 장수말이오이다. 바로 그 사내오이다.》

도리의 미간이 단박 찌프러졌다. 그의 머리속으로 해리, 추연, 벙어리, 주몽, 오이… 이런 모습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구려 황부의 대감인 도리가 부여의 모사 해리와 내통하게 될줄 어이 알았으며 또 그의 아우인 벙어리가 제 누이를 통해서 오이, 주몽과 이어져있을줄 어이 알았으랴.

그건 그렇다치고 까닭 모르게 슴배여드는 불안의 그림자는 어찌된걸가?

갑자기 주몽에 대한 말을 들었기때문인가? 도리는 잠시 생각해보고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오이?

그것도 아니다.

그럼 저 벙어리?

도리는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엇인지 알수 없는것이 손닿지 않는 곳에서 안타깝게 파고드는듯 한감을 느끼며 몸을 으쓱하였다.

아서라, 도리. 자넨 너무 날을 세우는군.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병신이 뭐길래 속을 썩이나?

도리는 쓰겁게 웃었다.

《구마, 그 뭐라고 했던가? 이름도 참, 해리의 아우라는 그 애말이야? 그 애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을가? 자네가 잘못 본게 아닌가?》

《글쎄오이다. 저도 설마하고…》

《하여튼 알아보게. 해리의 아우라니 의리로 봐도 그렇고, 또 알겠나? 혹시 뜻밖에 떡짝이 잡히겠는지… 그건 그렇고, 구마! 재사가 어쨌다구?》

《재사… 말이오이까?》

구마가 얼떠름해서 되묻는다.

《음, 재사말이야. 그가 연타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게 사실이야?》

《네… 에, 사실인줄 아오이다.》

《그래? 음, 그건 정말 큰떡인걸. 그리고 요새 말갈놈들의 동태는 어떻든가?》

《말씀드리지 않았소이까? 그놈들이 그 무슨 <검은 칼잡이>라는 무리들을 끌어들이고있는가 보오이다.》

도리는 턱방아를 연방 찧었다.

《그럼 자네는 벙어리소년인지 뭔지 알아보게. 난 상감마마를 뵈와야겠네.》 하고 도리는 구마와 헤여졌다.

도리는 말우에서 소부왕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상감에 대해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주몽이란 어떤자인가. 계루부의 장군이 아닌가? 그리고 부여에서 쫓겨온 마상객! 그런데 상감은 어떻게 되여 주몽이라는 사람에게 빠져버렸는가? 그가 아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무리 아들이 없는 상감이라도 그렇지. 정 아들이 없다면 생질이 되는 이 도리에게라도 왕권을 넘길수 있지 않는가? 도리, 자신이 이 구려국을 위해 바친 그 모든 낮과 밤은 그렇다치고라도 상감자신의 일생이 바쳐진 나라가 아닌가? 망녕이 드셨는가? 망녕이… 젠장.

도리는 허탈감에 빠져 말가는대로 몸을 맡기고있었다.

바깥은 지글지글 물쿠는 무더위가 한철 맹위를 떨치고있었다. 무더위는 저녁무렵이 가까와도 수그러들줄 몰랐다. 농부들은 열매를 익히는 더위라고 했다.

어슬녘에 구마는 도리앞에 다시 나타났다.

낮에 왕을 만나고 온 다음부터 줄곧 상감과 주몽, 연노부와 계루부, 구려와 말갈사이에 대해서 생각하며 산가지를 놓고있던 도리는 구마가 나타나자 저도 모르게 낯빛이 굳어졌다.

《알아보았소이다.》 하고 구마가 도리에게 다가와 나직이 아뢰였다.

잠박이수염을 뜯던 도리는 구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얼… 말인가?》

《그 벙어리말이오이다. 틀림없소이다.》

구마는 의기양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도리는 까닭없이 불안스러웠다.

《그래?!》

도리는 시답지 않게 대답했다.

구마는 도리의 불편한 속을 미처 느끼지 못한채 돌아서서는 문을 열고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웬 소년이 들어왔다.

도리는 들어서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애가?…》

《그렇소이다. 그 벙어리오이다.》

도리는 벙어리소년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어쩐지 눈빛이 마음에 없는걸? 그런데 어떻게 이애가 여기에 나타났을가?》

《오이를 찾아왔다고 하오이다.》

《오이? 그걸 어떻게 알았나?》

《벙어리라고 하지만 글을 알고있소이다.》

《모를 소리군. 배안의 병신이 아니던가?》

《글쎄오이다. 전후 사연은 모르오나… 사실이오이다.》

두사람이 수군거리듯 주고받는 사이에 벙어리소년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들의 입을 주시하고있었다.

도리는 소년을 얼핏 띠여보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저 병신이 오이를 찾아왔다면 결국 주몽과 한패란 말인가? 어떻게 해리에게 이런 아우가 생긴걸가?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도리를 말없이 지켜보던 구마가 물었다.

《이애를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어떻게 하다니?》

《오이한테 보내겠소이까? 아니면 해리한테 도로…》

《글쎄, 두고보자구. 당장은 그게 급한게 아니니까? 자네가 데리고있으라구. 잘 구슬려가지고…》

《그러다가 눈치를 채면?》

《걱정도, 저런 병신이 뭘, …게다가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애숭이가 아닌가? 설사 눈치를 차렸단들 뭐라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수염쓸면 그만이야.》

랭소를 흘리며 돌아서던 도리는 피뜩 벙어리소년의 눈길과 마주쳤다.

순간 도리는 저도 모르게 묘한 전률을 느꼈다. 오한같은감이 등줄기를 따라 짜르르 흘러 지났다.

도리는 다시금 소년을 쳐다보았다. 한참 소년과 눈싸움을 벌리던 도리가 비죽이 웃었다.

그 웃음을 띠여본 구마는 흠칫 놀라며 한걸음 물러섰다.

도리의 웃음은 풀숲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뱀의 눈빛, 그것이였다. 구마는 얼른 도리를 외면하고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맑은 눈동자가 고요히 도리를 주시하고있을뿐이였다.

《제길!》 하고 구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구마도 무언가 좋지 못한감을 느꼈다. 구마는 벙어리소년이 비록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속을 낱낱이 꿰뚫어본다는것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그런데 도리는 이것을 모르는가? 아마 그런것 같다. 이 일을 어쩐다? 구마는 어정쩡해졌다.

도리는 구마더러 벙어리를 적당히 처리하라고 이르고는 돌아섰다. 구마는 한동안 도리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머밋거리며 물러갔다. 다시 홀로 남게 된 도리는 뒤짐을 진채 눈을 꾹 감고있었다.

그따위 병신같은 애녀석에게 머리쓸 경황이 없다.

도리의 눈앞에는 오늘 상견한 상감의 근엄한 얼굴이 떠올랐다.

《도리대감, 듣자니 그대가 일처리를 썩 잘하는것 같지 않소.》

처음부터 불만이였다.

도리는 감히 고개를 들고 상감을 대하였다.

《전하, 어인 말씀이시오이까?》

《그대는 어째서 오녀산성 쌓는 일을 방심하오? 연노부가 부담하기로 된 인마와 축성에 필요한것들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다면서? 성이 연노부지경에 쌓아지고있는데 연노부는 강건너 불보듯 하고 반대로 계루부에서 주관하게끔 되였다 하니 이게 어디 체면이 됐소?》

《전하, 우리 연노부는 말갈의 침입으로 극히 쇠퇴해졌소이다. 연노부성책을 다시 복구하는 일만도 아름찬 일이오이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제가평의회에서 이미 각 부에 분담이 된것조차 마련해주지 않는다니 제가들이 좋아하겠소? 그렇지 않아도 오녀산성 쌓는 일은 순수 주몽이 발기하고 주몽의 유세에 따라 각 부가 인입된 일이 아니요? 대감이 일을 잘못하고있는것 같소.》

도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입이 열둘이라도 할말이 없다. 이피탈 저피탈 한것도 사실이다. 애당초 오녀산성을 쌓는 일은 외손자 봐주는 격이라고 치부하고있는 도리였다. 그도 물론 말갈을 제압하고 구려, 특히는 연노부를 살리자고 해도 오녀산성을 쌓아야 한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뿐 도리의 마음이 동하지 않는거야 어찌겠는가?

다시 상감의 불만에 찬 어성이 울렸다.

《지금부터라도 축성에 물자와 인마를 대도록 하오. 설사 연노부 일이 바쁘더라도 오녀산성 쌓는 일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되겠소.》

《알겠소이다.》

《그리고 대감은 아직도 연노부군사들을 지내외병마사에게 복속시키지 않고있다는데 어인 일이요?》

《전하, 그것은…》

《혹시 대감은 계루부주장에게 병마사를 시킨것이 못마땅해서 그런건 아니요?》

《아니오이다. 저… 연노부군사라면 워낙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또 직분이 있느니만치 그 군사들은 상감을 모셔야 할 궁중시위군사들이라 감히 내줄수 없었소이다. 통촉해주시오이다.》

《그거야 안팎이 다르지 않소? 병마사에게 병권을 준 이상 마땅히 그가 총독할 일이 아니요? 어째서 대감이 곁가지를 만들어놓고있소? 아무리 궁중시위라도 그렇지… 말들이 많소, 말들이…》

도리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땀이 바질바질 내뱄다.

《전하, 황송하오나 신이 병마사를 만나 시비곡절을 가리겠나이다.》

소부왕은 못마땅한 눈길로 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숨을 들이긋고나서 천천히 책망하였다.

《그대는 병마사 주몽이 그대를 모함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게 아니요.》

《그러하오면?…》

《허, 허… 대감, 어째 그리 옹졸해지였소? 이전 같지 않구려. 실은 저 연타발의 재사가 보다못해 과인에게 상주한것이요!》

이보다 더 큰 모욕은 없다. 도리는 상감의 말씀 한마디한마디가 마치 찌르는듯이 들렸다.

상감을 상견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렸다. 지금껏 은밀하게 뒤를 주도해오던 상감에게서 이런 불쾌한 핀잔을 듣다니… 누구때문인가, 무엇때문에?

도리는 커다란 자기 몸에 한마리의 등에가 날아와 그 칼날같은 주둥이를 쿡- 박고있는감이 들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사!

으흠!

그놈, 아무래도 안되겠구나.

도리는 어금이를 악물었다.

 

소서노는 쓸쓸한 기색으로 백호를 그린 화판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사나운 맹수의 특징을 대담하게 돋구고 동물의 미끄럽고 윤기있는 특유한 피부색의 질감까지 나타내여 마치 안개속을 뚫고 네발걸음으로 막 달려나올것 같은 백호그림은 요즘 들어와 소서노가 유일하게 소일하는것이였다. 부릅뜬 눈, 휘여든 잔등, 억센 발과 같은데는 굵고 진한 선으로 단벌치기 하였고 날개, 수염, 뿔과 같은 부분은 가늘고 연한 선으로 세고 약하게, 밝고 어둡게 변화를 주어 백호의 성격을 잘 표현한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일가.

소서노는 붓을 놓고 화판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슬픈 기색이 어려있었다.

소서노는 시집가서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시집을 가면서 굉장한 재물을 가지고갔던 소서노는 남편이라는 사람이 초동때부터 골골하던 병으로 죽은 다음 그의 재산까지 덤으로 합쳐가지고 돌아왔다. 마치도 산정에서 굴러내린 눈덩이가 산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커지듯이 소서노는 세월이 갈수록 재산만 불어났다. 재산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야 그게 락인지는 몰라도 소서노는 그렇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풍족하면 귀한줄 모른다고 소서노가 하도 재산이 많으니 그런다고 하지만 소서노자신은 워낙 재산따위에 흥미가 없었다. 그는 젊은 녀인이였다. 과부라고 하지만 아직 순정마저 바쳐보지 못한 녀인이였고 또한 세상을 보자고 하는 나름대로의 여유를 가진 녀인이였다. 그러고보면 사람의 일생일대란 참 묘한것이다. 어째서 세상은 사람이 바라는것과 정 다른것을 지꿎게 선사하는걸가. 소서노는 언제 한번 재산이 쌓이기를 빌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재산이 이래저래 불어갔다. 한편 그가 갈구하는 열렬한 사랑과 의로움 같은것은 점점 희박해져가는듯 하였다. 오녀산성에서 주몽을 기다리다못해 무슨 생각에서인지 홀연 떠나온 뒤 소서노의 마음은 후회로 그늘졌다. 참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녀자의 마음이라는게 이렇듯 외곬인가? 어째서 그때 주몽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을가? 그런 메토끼같은 염통을 가지고 어떻게 백호를 바라볼수 있겠는가. 주몽이 성으로 돌아와 내가 떠났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가? 경박하다고 보겠지? 그럴거야!

아, 나는 왜 기다리는 진미를 모를가? 그러고보면 그것도 역시 남다른 사람들의 천성인가보지? 기다리는것, 그리고 기다릴줄 아는것, 세상살이가 어쩌면 그런것이 아닐가? 기다릴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사랑인들 할수 있으며 어찌 의로운 큰일을 해낼수 있느냐? 그런데 나에게는 그게 없어.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일호반점(一毫半點)이야. 가는 바람에도 바르르 곧잘 떠는 연약한 풀잎사귀야! 그러면서도…

가엾어라!

소서노는 백호그림에서 시선을 거두고 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는 문득 손목에서 금팔찌를 뽑았다. 소서노는 금팔찌를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팔찌가 굴러 왼쪽으로 굽으면 주몽이 나를 찾아올것이요, 오른쪽으로 굽으면 찾아오지 않을거야.

소서노는 부디 왼쪽으로 굽어들기를 바라면서 팔찌를 탁자우에 조심히 굴렸다. 팔찌는 비틀비틀 굴러가다가 오른쪽으로 굽어졌다.

순간 숨이 쿡 막히는듯 하였다.

아니 세번 해봐야 돼! 해속에 있는 까마귀발가락도 세개가 아닌가? 세번 해서 두번 왼쪽으로 넘어지면 나를 찾아올거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모든것이 끝장이야.

팔찌는 왼쪽으로 굽어졌다. 이제 한번만 더. 소서노는 긴장해졌다.

비틀비틀 금팔찌가 굴렀다. 왼쪽? 오른쪽? 숨이 막혀 죽겠네. 아, 아.

팔찌는 오른쪽으로 넘어졌다.

소서노는 눈을 꼭 감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침상우에 그대로 쓰러졌다.

소서노는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나는것도 듣지 못했다. 시비가 들어와 조심히 소서노를 불렀다.

《아씨, 재사도련님이 돌아오셨나이다.》

소서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뭐라구? 그게 정말이냐?》

《그렇나이다.》

소서노는 잠시 어쩔줄 몰랐다.

이때 재사가 들어왔다.

《누이!》

소서노는 와뜰 놀라며 재사를 돌아보았다.

《재사, 네가?》

《그래요. 그사이 별고없으셨소이까?》

《아니, 그런데 어떻게? 혼자 왔니?》

《주몽형과 함께 왔소이다. 이번에 말갈사람들과 전쟁을 앞두고 아버님과 의논할것이 있어 왔소이다.》

《아, 그래?》

소서노는 엉겁결에 틀어올린 머리에 꽂은 황금비녀를 매만져보고 자지힐문금으로 지은 비단옷을 더듬어보았다. 자지빛바탕에 붉은 물결이 세로 지나고 흰색으로 여러가지 무늬를 새긴 비단옷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살피던 소서노는 탁자우에 그대로 놓인 금팔찌를 발견하였다. 소서노는 못볼것을 본듯이 고개를 틀며 그 팔찌를 쥐였다.

소서노가 재사의 뒤를 따라 아버지의 방으로 갔을 때 문에 가린 휘장으로 주몽과 아버지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가께서 진력해주신 덕분에 현재 오녀산성 축성은 마감에 이르렀소이다.》

《큰일을 했네. 그런데 연노부 도리가 반복무상(反覆無常)한다는데…》

《보아하니 그 사람이 눈은 높으나 재주가 부족하여 감히 외친내소(外親內疎)하는듯 하오이다.》

《그래, 화근을 길러 근심을 사지 않도록 하는게 좋겠네. 지내보면 승패는 안속을 어떻게 다지는가에 있어.》

《알겠소이다.》

《말갈의 형편은 어떤가? 비추장군에게 듣자니 일구의 군사들도 대인 구도의 읍락으로 모인다던데…》

《탐마에 의하면 불원간 란이 일어날것 같소이다. 실은 대가께서도 미리 대비하고있어야겠기에 의논차 왔소이다.》

《일구의 군사들이 구도에게 집결되였다면 이쪽은 빈 공간인데 걱정할게 없겠지.》

《하지만 구도는 지략과 용맹을 겸한 장수인것만큼 소홀히 할수 없소이다. 소서노랍치사건도 그렇고 구려군의 주력이 계루부로 이루어진것도 구도가 모를리 없겠는데 그가 동섬서홀(東閃西붰)하면 계루부가 위태하오이다.》

《걱정말게, 말갈군의 병력은 얼만가?》

《5만에 이르고있소이다.》

《우리보다 2만이 더 많은셈이구만.》

《하지만 그 2만은 치중병까지 모두 합친 오합지졸이오이다.》

《중과부적이 아닐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축성 인마들도 준비하였소이다. 림전하게 되면 그들만으로써도 성을 지킬수 있소이다. 그리고 이미전부터 묵거를 <검은 칼잡이>부대에 들여보냈는데 그쪽에서 온 소식을 보면 그들도 구려군에 인입할수 있을것 같소이다. 그들의 무력이 작지 않소이다.》

《<검은 칼잡이>들이라면 그 유명한 산적들 말이요? 풍문에 듣기는 하였소만 그들이 귀신같이 싸움을 한다면서? 다만 산적떼라는게 꺼림직한데…》

《그들의 무력이 적지 않소이다. 말갈과 구려가 결전할 때 그들을 누가 끌어당기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갈라질수 있소이다.》

《병마사의 주장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난 아무래도 미타하오. 워낙 도적떼들이란 본성이…》

《근심을 마시오이다. 말갈과의 싸움은 어느 부나 일부 특정한 귀족들을 위한것 아니라 겨레를 위한 성전이오이다. 구려군이 아무리 각 부의 정예군들로 무어지고 적들보다 뛰여난 쇠무기들로 무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겨레의 단합이라는 대의명분을 무시한다면 동패서상(東敗西喪)을 면할수 없소이다.》

주몽의 당당한 어조에 이어 아버지의 숨소리가 새여나왔다.

《어련하겠소? 하지만 군황이 그렇다면 계루부의 정예군도 인입시켜야 하지 않겠소?》

《때를 보아 기각지세(琦角之勢)를 써서 말갈을 협공하려고 하오이다.》

《그게 좋겠소. 기각지세라, 비추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소장은 병마사의 발령을 기다리고있겠소이다.》

다시 웃음소리가 울렸다.

《구려의 운명이 말갈과의 싸움에 달려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요. 그런것만큼 비추장군도 지내외병마사를 잘 돕도록 하오. 구려의 대가들이 모두 주몽을 바라보고있소. 그러니 비추장군은 말갈이 일단 싸움을 일으키면 지체없이 응병을 파해야겠소.》

소서노는 방안에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어 그만 돌아서려고 하였다. 몇발자욱 옮기던 소서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가슴이 갑자기 후드득 뛰였다. 소서노는 그자리에 굳어져 방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자기의 이름이 화제에 오르고있었다.

《하, 하, 그렇다고 일생을 그렇게 보낼수야 없지 않겠소? 뭇새도 짝이 있으려니 어찌 그대같은 영웅호걸에게 짝이 없겠소?》

아버지 연타발의 목소리였다.

소서노는 온몸이 사정없이 떨리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버지의 말소리가 다시 울렸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또… 이런 말이 괴로운것만은 사실이지만 어찌겠소? 대장부들끼리 툭 터놓겠소. 나는 소서노가 그대의 배필이 될수 있다고 보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소서노는 눈앞이 핑 도는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말짱한 정신을 방안에 쏟았다.

《소서노가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영웅호걸의 짝이 될만 하다고 보기에 하는 말이요. 어떻소, 주몽?》

《고맙소이다.》

《그러니 내 사위가 돼주겠다는 말이요?》

그리고는 사나이들의 웃음소리.

소서노는 잡고있던 문설주를 놓고 허둥지둥 돌아섰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