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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제 2 부

 

기발을 올려라

 

5

 

청라산개를 에워싼 행차가 허덕이며 더위속을 헤치고있었다.

구려국 연노부대감인 도리의 행차다. 거가를 중심으로 앞에는 고수가 서고 그뒤로는 부월들고 말탄 갑사(甲士)들이 따랐다. 청라산개의 거가 뒤로는 역시 말을 탄 군사들과 보군이 간다.

고수이하 군사들의 얼굴에서 비오듯 땀이 흘렀다. 청라산개를 받고가는 도리는 물큰 풍기는 땀냄새에 코살을 찡그리였다. 그는 비단수건으로 몇번 부채질을 하고 얼굴에 돋은 땀을 닦았다. 얼굴을 문지르던 그는 수건을 내리며 전령을 불렀다.

《여봐라, 구마를 거가로 불러라!》

도리가 분부한지 얼마 안되여 턱이 뾰족한 사나이가 다가왔다. 구마였다. 그는 도리의 아우였다. 바삐 다가온탓인지 아니면 더위에 지쳐서인지 구마는 보습끌던 소처럼 헐떡거렸다.

《형님, 부르셨소이까?》

도리는 못마땅한 눈으로 구마를 흘겨보았다. 볼적마다 썩은 물가에서 날벌레를 노리는 개구리를 떠올리군 한다. 헐떡거리는 꼴도 그렇고 자기를 바라보는 멍청한 눈도 꼭 개구리와 흡사했다. 도리, 자기의 분부라면 소갈데 말갈데 가리지 않고 분주히 뛰여다니는 그 수고도 애처롭다거나 고맙다는 생각보다 미련해보였다. 아우라는 생각도 이때만은 역스러웠다. 어째서 모진 생각만 하게 되는가? 어째서? 구마가 도대체 뭘 잘못한단 말인가? 도리는 짜증이 났다. 그는 쓴입을 다셨다.

《음, 말갈읍락까지 아직 멀었느냐?》

도리로서는 부질없는 물음이다. 그는 구마 못지 않게 말갈읍락을 알고있었다.

《이젠 다 왔소이다.》

《말갈대인 구도에게 통고는 했겠지?》

《여부가 있소이까?》

《실수가 없도록 단속을 잘해라.》

《알겠소이다.》

도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흘전,

《급보요! 말갈인들이 연노부지경을 범하였소이다!》

허둥지둥하는 파발이 전한 소리에 아직도 취기몽롱한채 어전에 든 국왕인 연노부대가는 별안간 취기에서 깨여났다.

《어찌된 일이냐? 자상히 아뢰여라!》

말갈인들이 불의에 연노부지경을 넘어 한 고을을 들이치고는 사람들을 끌고가고 말, 소, 돼지 등 가축과 숱한 재물을 로략질하였다.

주독이 올라 코가 벌개진 연노부대가는 중풍으로 채머리를 흔들며 격노했다.

《고약한 놈들! 감히 내 지경을 범하고 로략질해?》

어전아래 시립하고있던 도리는 늘어뜨렸던 긴 목에 힘을 주며 왕의 옥안을 훔쳐보았다. 이때만은 연노부대가 같지 않다.

늘쌍 주색에 빠져 골골하던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 저렇듯 소리칠가.

《당장 군사를 보내 말갈놈들을 응징해라!》

도리는 목을 늘어뜨렸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옥체를 위해 노기를 푸시오이다.》

왕은 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요, 도리대감?》

《어명을 걷으시오이다. 말갈인들의 로략질은 한갖 장난으로 아뢰오.》

《장난질? 우리 백성들을 끌고가고 재물을 로략질하는데도?》

《하오나 모기떼를 보고 검을 빼들수는 없을줄 아뢰옵니다.》

도리의 또박또박한 아룀에 왕은 단박 풀이 죽었다.

《계책이 있으면 말해보라.》

《소신이 알아서 말갈인들을 처리하겠소이다. 미개한 종족들에게 어찌 수고로이 정병을 쓰겠소이까? 소신이 세치 혀로 말갈을 제압하겠소이다.》

연노부대가는 다시금 채머리를 저었다.

《괘씸한 놈들… 하여튼 대감이 알아 조처하라!》

사흘전의 일을 생각하며 도리는 눈귀를 가늘게 떨었다.

왕이 쉽게 물러서는것이 다행이다. 하긴 그럴수밖에, 아무리 말갈인들에게 략탈당하고 절치부심하여도 당장 말갈인들과 대적할만 한 힘이 없는 연노부였다. 얼마 안되는 군사가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서는 중과부적이다. 연노부의 군력이 이 지경에 이른걸 도대체 대가가 알기나 하고 그러는건가. 허, 한번 발을 굴러보는것이겠지. 도리는 허거프게 웃었다. 하지만 도리의 마음도 별로 기쁠것은 없다. 평시에는 모르고있다가도 실지 란에 닥치면 연노부의 렬세한 군력에 희비의 묘한 맛을 느끼군 하는 도리였다.

주색에 탐닉하는 대가! 하루하루 기력이 쇠해가는게 알린다. 연노부의 대가가 주색에 빠져 기력을 잃어가는만큼 연노부자체의 군력도 쇠해갔다.

도리는 이 사태앞에 아연해지군 한다.

대가가 쇠퇴해가는것은 바랄지언정 연노부자체의 군력이 약해지는것을 바라는 도리가 아니다. 아들이 없고 늙어 여생이 내다보이는 연노부대가가 승하한다면 자기가 연노부를 다스릴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도리여서 이때껏 알게 모르게 대가의 주색을 부채질해왔다. 대가의 눈에 들어 이제는 연노부의 권한을 거의 틀어쥔 도리가 장차 연노부대가의 뒤를 잇게 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게다가 도리는 연노부대가의 생질이 아닌가?

연노부의 대가가 된다면 얼마든지 다시 예전 구려의 5부족을 통합하던 때의 연노부실력을 배양할수 있다고 믿지만 이렇게 란이 일어나고보면 어쩐지 아득해진다. 도리는 언제까지나 대가의 꼭지가 물러빠지길 기다릴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안으로 권력을 쥔만큼 이제는 착실히 실력도 키워야겠다. 연노부 하나에만 미련을 두고있다면 몰라도 구려를 다스릴 왕이 되자면 어차피 실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연노부의 무력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무력을 보며는 구려안에서 오히려 계루부가 제일 강하다.

렬세한 연노부무력과 강성한 계루부의 무력을 대비하며는 손맥이 풀리군 하는 도리였다.

도리는 한편으로 연노부의 세력을 키우면서 한편으로는 계루부의 세력을 약화시켜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계루부의 연타발은 아직 정정하고 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있으며 또 충직한 비추장군이 있어 함부로 동할수는 없다.

도리는 계루부를 놓고 오래동안 고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금 말갈읍락으로 가면서도 그 생각이다. 자기에게 개처럼 충실한 구마를 놓고 본의아니게 타박을 부리는것도 그때문일것이다.

도리는 찜찜한 속을 풀었다.

말갈에게 롱락당한 이 위기를 수습하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도리는 말갈을 리용하여 전화위복하리라 결심하고 이 길에 나선것이다.

그래서 이번 행차도 자못 요란하게 차리라고 분부를 내렸다. 요란하게 하면 할수록 도리의 위엄을 말갈족에게 한껏 떨칠수 있는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화려한 행차를 보여주면 단박에 무서리를 안길수 있다는것을 도리는 잘 알고있다. 흔히 무지한것들에게는 번쩍거리는것이 으뜸가는 몽둥이인것이다. 속이 없는자들일수록 겉에 번쩍거리는것에 곧잘 굽어드는 법이다. 이렇듯 안팎의 눈치를 적당히 헤아려 꾸민 행차이긴 하지만 도리는 천한 세평보다도 우선 요골요골한 단맛이 자꾸만 목젖을 간지럽히는것을 참을수 없다. 세상에 어찌 왕이 따로 있다더냐? 지금 내가 왕이노라! 태줄 달고 매-앵 하며 세상에 나왔다가 애수의 눈물 찔끔 내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한바탕의 인생그네길에 왕이 돼보지 못한다면 어찌 보람이 있으랴! 두고보아라! 이 천하가 도리의 손아귀에 들어올 날도 멀지 않으렸다. 그때는…

도리는 더운 김을 한껏 들이켰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세상이 즐거워진다. 이제 계루부는 다됐다. 연타발이 무너지면 계루부에 사람이 없다. 누가 감히 이 도리와 겨루자고 할것이냐?

비추? 그 흑돼지같은 놈은 연타발대가의 앞잡이노릇이나 하라면 곧잘 꿀꿀댈게다. 나에게는 안돼!

장차 이 구려는 도리의 땅이다. 지금 있는 수천의 노예와 땅도 성차지 않다. 어쨌든 이 지경의 주인이 되여야 한다. 이 도리의 발길이 닿고 눈길이 닿는 곳에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 할것없이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그 쾌감! 인생의 그네는 결국 그속에서 오락가락하는게 아니더냐?

오, 도리! 너야말로 하늘이 낸 이 땅의 주인이로다!

도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슬슬 저었다. 꾸민 행차가 이렇듯 마음을 들뜨게 할줄은 몰랐지? 하! 거참…

문득 도리는 눈을 번쩍 떴다. 쾌재를 부르기는 아직 이르다. 내가 무얼 놓친것은 없나? 만일 말갈족을 리용하려다가 그들에게 장계취계당한다면? 그럴수는 없다. 바로 그걸 경계했기에 이미 개마국의 부분노를 꼬이지 않았던가.

부분노! 과연 만나보니 용장이였다. 그를 추천한 구마가 고마왔다. 몇달전 도리는 구마가 싸움판에서 안면을 익혔다는 부분노를 만나려고 갔었다.

치세는 용인용병이라는 지론을 곧잘 외우는 도리는 장차 자기의 골육심복이 될 사람들을 만나는데 견마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부분노도 그 수고가 낳은 하나의 씨였다. 먼 개마국지경까지 가서 만나본 부분노는 도리의 마음에 들었다.

부분노는 구려에 이방인들이 몰려드는 경우에 협력을 바라는 도리의 청에 선뜻 응해나섰던것이다.

말갈족을 리용하여 구려를 쥐고, 부분노를 리용하여 말갈을 제압하면 과연 화려한 치세로 될것이다.

도리가 눈을 쪼프리며 입술을 오무리는데 거가가 멈추어섰다. 말갈족들의 지경에 닿은 모양이다. 도리가 고개를 쳐드니 키가 헐썩 크고 후리후리한 몸매를 가진 젊은이가 도리를 지켜보고있었다. 그리고 그 량옆에는 어슷비슷하게 생긴 두사람이 큰 활을 메고 붙어섰다. 도리는 바로 이들이 말갈족의 우두머리들인 구도, 일구, 분구라는것을 인차 알아보았다.

《안녕하시오, 도리!》 하고 가운데 선 젊은이가 마치 장터에서 흥정을 붙이려는듯 한 투로 물었다.

도리는 부지중 《음》 하는 군소리를 냈다. 선잠에서 깨여난 기분이다.

《안녕하오, 구도?》

구도는 벙긋 웃었다.

그를 바라보는 도리의 심중은 어수선하다. 이건 젊은 녀석이 괴력만 믿고 영 개버릇이다. 하긴 이 족속들에게 버릇타령이 가당치 않다. 다만 주인의 위엄을 세워주지 못하는 종놈들이 괘씸할뿐이다.

《어떻게 지내오, 구도?》

도리는 무표정한 낯색으로 물었다. 타인을 만날 때 도리는 흔히 이렇게 묻는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는듯이 그러나 할수없이 례절을 차린다는 뜻을 진하게 풍기면 어리석은 상대는 처음부터 기가 죽는다는걸 도리는 알고있었다.

하지만 도리의 그 잔꾀가 구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구도는 까닭없이 성난 아이를 보듯이 도리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더니 《도리, 어찌된 일이요? 왕의 행차만큼 요란법석인걸.》 하고 귀머거리흉내를 낸다. 도리의 인사말 같은것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수작이다.

도리에게는 이러한 구도가 밉살스러웠다. 움집에서 살아가면서 사냥과 로략질을 업으로 하는 말갈족들을 항상 경멸해오는 도리였다. 이 족속들은 체격이 거쿨지고 성격들이 결패스러운 반면에 아이와 같이 순진한데가 있어 길들이면 양떼와 같은 종족들이였다. 마음만 내키면 아무때든지 칼을 박아 피를 빨든 살점을 베먹든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구도란 녀석은 자기 종족들과 다르다. 차림새도 제법 때벗이를 하였고 또 배속에 계략도 적지 않다. 개천에서 룡이 난셈이다. 하긴 그런 녀석이기에 요즘에 와서는 종족들의 우두머리로 나서게 된것이겠지. 말꼬리를 잡아 말을 머리우로 휘둘러대는 이 녀석의 괴력 같은것은 도리에게 별로 놀랍지 않다. 뿔난 황소따위를 무서워할 도리가 아니였다. 하지만 도리의 속심을 곧잘 넘겨다짚군 하는건 질색이다. 바로 지금 이렇게 빈정거리는 태도가 도리의 속을 언짢게 한다. 나이 어린 놈이 도리를 보고 제또래취급을 하는 수작질이나 고양이 쥐놀리듯 하는짓은 그래도 너그럽게 봐줄수 있다. 미개한 종족들이란 별수 없는게니까. 그러나 도리가 은근히 꾸민 행차를 두고 이죽거리는 구도의 짓거리는 아무래도 괘씸하였다. 이건 도리의 속을 가물철 시내바닥 들여다보듯 하는것 같아 도무지 참을수 없다.

하지만 도리에게는 배심이 있다. 이런 종족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있다. 미련한 족속들은 맛나는 미끼를 덥석덥석 잘 무는 법이다.

도리는 거가에서 내려 허리를 쭉 폈다. 그는 될수록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천천히 구도의 뒤를 따랐다. 울긋불긋한 기발을 꽂고 비단천으로 휘장을 두른 거처로 들어가앉은 구도는 도리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왔소?》

그 물음에 도리는 구도의 본새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인차 정색하며 위엄을 뺐다.

《나는 구려의 사신으로서 말갈족들에게 통고할것이 있어 왔소.》

구도가 눈을 내리깔았다.

《통고? 무어요?》 하며 구도는 자기의 좌우에 앉은 일구와 분구를 둘러보았다.

《구도대인, 아닌보살 부리지 마오. 어째서 당신네 말갈족이 갈개는거요?》

《뭐 갈갠다구? 거 무슨 소리요?》

《꼬집어야 알겠소?》

《그래주시구려. 마침 가렵던 참인데…》

《여보 구도! 어째서 가만있지 못하고 도적질을 한다, 위세를 뽐낸다 야단이요? 요전번만 해도…》

《하, 하. 여보, 도리! 부끄럽지도 않소? 다 늙은 주제에 무슨 강짜요, 강짜가…》

《강짜? 허, 이건 도적이 매를 드는 격이구만, 제법!》

《어처구니없는 소릴 그만두오! 당신네 구려는 지금 헐떡병에 걸린 늙다리요, 우리 말갈은 한창 새파란 젊은이란 말이요! 젊은이들이 혈기에 못이겨 장난질 좀 치기로서니 그게 어쨌단 말이요?》

《그렇기로서니 구려에 복속되여 살아가던 옛날을 잊어서야 쓰나?》

그 소리에 구도의 낯빛이 얼음장이 되였다.

《복속되여 살았다고? 흥! 너희네 무리들이 항상 우리 종족을 깔보고 업신여겨온건 생각 안해?》

《그건 무슨 소리요? 당신네 말갈족이 이때껏 우리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받았소? 그 활만 보아도…》

《황당한 소리를 걷어치워. 어느 망할 소릴 하는거야? 우리가 누구 젖꼭지를 물고 자랐는지 어떻게 아오? 참 별일 다 있지. 여보, 도리! 죽어가는 늙다리들이나 나이대접 받겠다고 하는거야. 세상이란 힘이 없으면 먹히우게마련이야. 그렇지 않아, 도리?》

구도는 벌떡 일어나 입귀로 게밥을 끓이며 소리쳤다. 구도를 까집은 눈으로 올려다보던 도리는 코웃음쳤다. 불에 덴 소새끼를 보는감이다. 도리가 입을 다물자 구도는 다시 자리에 앉아 무슨 잔나비를 보듯이 도리를 건너보았다. 구도의 입귀에 웃음이 배여나왔다. 이어 큼직한 구도의 손이 도리의 무릎을 쳤다.

《자, 도리! 눈감고 아웅하는짓은 그만두고 어서 배꼽이나 보여주지 그래.》

도리는 흠칫 놀랐다. 떡두꺼비같은 구도의 손이 뼈만 남은 자기의 무릎을 부서지게 치는것도 그렇지만 그 소리가 더욱 놀랍다. 도리는 이때껏 지켜오던 위엄을 잃어버리고말았다.

속으로 쌍욕이 콩튀듯 튀여나왔다.

이 녀석을 그저… 어른에게 이게 무슨 흉칙한짓이람. 참 별꼴 다 본다. 이놈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종자람? 생긴것은 계집같이 해사한데 괴력이 있겠다, 남의 속을 빤히 알겠다, 거참, 어느 암캐귀신의 솔숲샘골에서 이따위가 빠져나왔담. 쌍, 망할것!

속은 그래도 로련한 도리는 쇠투구를 더욱 푹- 내려쓴다. 이런 일에 구렝이로 자라 잔뼈굵은 도리였다.

《흠! 구도, 자네야말로 당대의 영웅이야!》 하고 도리는 짐짓 딴전을 폈다.

구도는 그러는 도리를 솔개눈으로 보며 코웃음쳤다. 그는 도리의 얼굴에 눈길을 박은채 시중들던 무리들과 좌우의 일구, 분구를 물러가게 손짓했다.

거처가 조용해지자 도리는 구도에게 다가갔다.

《대인, 실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 왔소.》

《뭐요? 어서 자루목을 풀어.》

《대인의 말갈족들이 용감하고 곧은배기들이라는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있소.》

《그래서?》

구도는 시큰둥해있다. 도리는 다시금 주위를 살핀다.

《구려는 지금 앓고있소. 이런 때 대인이 큰 마음을 먹는다면 내가 대인의 손벽을 마주쳐줄수 있소.》

《허, 도리! 곁불에 밤알 굴 생각 말어!》

《그야 어련하겠소. 장담하오.》

《그래 뭘 어쩌자는거요?》

도리는 잠시 검은 돈피가죽으로 만든 갖신코등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릇 천하를 쥐자면 문무를 겸비해야 하오. 우문좌무 (右文左武)란 말이요. 지금 대인은 무를 얻었고 나는 문을 지니고있소. 나와 대인이 합치면 천하는 곧 우리의것이 될거요. 대인이 말갈사람들을 휘몰아치면 형세는 달라질거요.》

《무슨 소리인지 까밝히오.》

《소소한 로략질을 그만두고 한번 크게 덮쳐보라 이 말이요!》

《당신네 구려를?》

《그렇소. 지금 연노부대가는 앓고있소. 이때를 타서 구려를 들이치면…》

구도는 도리의 얼굴을 놀랍게 바라보고있었다.

《당신, 참 무서운 사람이군. 나와 당신 둘중에서 누가 구려사람이고 누가 말갈사람인지 모르겠는걸?》

《바로 그것이 나와 당신이 다른 점이요.》

도리의 말에 구도는 랭소를 지었다.

《좋소!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구려를 덮치면 계루부나 다른 부들이 가만있겠나? 당신네 연노부는 문제될게 없지만 계루부는 달라, 알고있을텐데…》

《알고있지. 하지만 란이 일어나면 각 부의 군사들을 내가 통솔하게 될거니까. 내가 내응외합하는데야… 그래서 크게…》

도리는 눈을 깜박이며 구도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보매 이 녀석에게도 흥미가 있는 모양이다. 아무렴 이 도리의 세치 혀에 녹아나지 않을 놈이 있나? 구렝이가 발이 있어 담을 넘는다더냐. 갈데 없지. 잘만 하면 아예 코를 꿰여 부려먹을수 있다. 헌데 이 녀석이 도대체 뭘 그리 골똘하는거야? 이리새끼가 웃는지 우는지 낯짝보고 알수 있나, 제길.

마침내 구도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겐 무엇이 차례지나?》

《뭣이 차례지다니? 대인의 숙망이 뭐요? 구려를 호령해보고싶은게 아니요?》

《그렇긴 하지만 생각대로 될가? 당신 같은걸 믿구?》

《대인, 지금 보니 겁쟁이로구만. 가시돋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서야 알밤을 얻겠소. 대인이 한번 크게 결심하면 일은 제대로 되는거요.》

《흥! 그게 밤알인지 도토리인지 어떻게 알아?》

《대인답지 않는 소리요.》

도리는 속이 졸아 소리쳤다. 그 모양을 보며 구도가 소리내여 웃었다.

《네가 구려국을 타고앉자는거지?》

구도가 손가락으로 도리의 이마를 찌르며 별안간 소리쳤다.

도리는 엉겁결에 고개를 젖히며 입을 벙하니 벌렸다. 이 흉칙한 놈이 어느새 눈치챘을가? 하여튼 숙볼 놈이 아니야.

도리는 옷깃을 바로잡았다.

《구도, 내 말을 믿소. 그대들 말갈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수 없지 않소? 우리 구려와 하나로 어울리면 좀 좋은가? 대인과 내가 손만 잡으면 우린 허리굽히지 않고 떡을 먹게 될거요. 멋하면 내가 대인의 밑에 설수도 있소.》

《도리, 난 네가 우쭐거리며 행차흉내를 내는걸 보고 속통을 들여다보았어.》

《구도, 밤이 길면 꿈자리는 사나와. 흥정도 제때에 매듭을 지어야 하는거요.》

《난 본래 꿈자리같은건 무서워하지 않소! 흥정할줄도 모르고…》

《그래, 파장하는거요?》

《흥!》

도리는 구도를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닭 쫓던 개 울담 보기다. 빌어먹을!

구도는 도리가 생각한것처럼 그렇게 물불가리지 못하고 날뛰는 녀석이 아니였다.

도리는 아래도리가 떨렸다. 할수없이 돌아서는수밖에 없다.

구도도 더이상 옴니암니 할 생각이 아닌듯 하였다.

두사람은 소 닭보듯 헤여졌다.

도리를 태운 청라산개 거가는 다시금 더위속을 헤쳤다. 하지만 파죽이 된 행색이였다.

이 일을 어쩐다? 도리는 오는 도중에 생각을 모질게 굴리였다. 도리는 구도의 측면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아우인 구마를 일구에게 보냈다. 일구는 분구와 함께 구도의 한팔이였다. 그런 일구이지만 구도의 총애를 받는데서 분구와 은근한 암투가 있다는것을 도리는 알고있었다. 그런 암투를 리용하여 적당한 《미끼》를 쓰면 일은 뜻대로 되는것이다.

 

일행은 계루부를 뒤에 두고 자꾸자꾸 멀어져갔다.

재사는 잔등이 척척해지는것을 느끼고서야 말고삐를 당겼다.

이윽고 무골과 묵거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기다리던 재사는

《자! 이제는 거칠것없는 들판에 나왔네. 그러니 우리사이에 지금부터 주종관계란 없네.》

《그럼 어떤 관계오이까?》 묵거가 짐짓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떤 관계냐구?》 하고 재사는 두 친구를 둘러보다가 자기와 그들의 차림새를 여겨보고는 웃었다. 자기도 묵거와 무골처럼 노예들의 차림새였다.

재사는 집떠날 때 우정 그런 옷을 입었던것이였다. 재사는 흔연하게 말했다.

《벗들의 관계지, 이를테면 노예들의 벗, 하하.》

무골과 묵거도 빙그레 웃었다.

들판을 지나고 작은 개울을 건너섰을 때 재사가 묵거에게 돌아섰다.

《자, 이젠 말해보게. 묵거.》

묵거는 이마에 내밴 땀을 소매로 훔쳤다. 그러고나서 느리게 이야기했다.

《처음 난 소서노누이가 말했다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소. 그 녀자종이 사라졌다는쪽으로 말이요. 도중 여러 마을에 들려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지. 나는 다시 길을 떠나 마침 강을 끼고있는 어떤 마을에 들렸소. 거기서 마을좌상격인 한 늙은이를 만났네. 그 늙은이에게 한 이십여년전에 어떤 녀자노예가 아기를 안고 온 일에 대해 물었더니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더군.

하두 오랜 일이니 그럴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좀 여유를 두고 따져보기로 했네. 어느날 그 늙은이와 함께 강기슭 높은 벼랑을 지나가게 되였는데 문득 그 늙은이가 소리를 질렀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거야.

늙은이는 벼랑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더군. 거적에 만 아이를 안은 그 녀자노예는…》

 

그 녀인은 울고있다.

《울긴 왜 우는거야? 빌어먹을!》

사나이가 소리친다. 말라버린 진흙덩어리같은 상통에 어쩐지 우악스러운감을 주는 사나이다.

《어서 던져! 어서!》 하고 사내는 독촉한다.

녀인은 다시 포대기에 얼굴을 묻으면서 중얼거린다.

《아무리 내 자식이 아니기로서니, 설사 병신이라 해도 살아있는걸 어떻게 벼랑으로 던지라고 하시오?》

그러나 사내는 차디차게 내뱉는다.

《노예인 주제에 사람같은 소리 하는거야? 네년놈들을 죽여버리지 않으면 내가 죽든지, 노예가 된단 말야!》

《정 그러면 이 죄많은 계집만 죽여버리시오. 애당초 남편과 생리별하고 노예가 된 이 몸은 천번만번 죽어도 한이 없으니… 제발…》

《무슨 군소리가 그리 많아! 공연히 사람가슴이 싱숭생숭하게…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아? 그래 내가 자비를 베푸는거야. 그리 알고 죽어도 나를 원망 말아!》

사나이가 몽둥이를 휘둘러 포대기를 안은 녀인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녀인이 맥없이 꺼꾸러지며 벼랑밑으로 떨어진다. 첨벙- 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내가 벼랑밑을 내려다보고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사람이 몽둥이를 휘둘러 벼랑끝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사내를 요정낸다. 획 눈을 까집고 뒤를 돌아보던 우악스런 사내는 비칠거리다가 역시 벼랑으로 첨벙 떨어진다.

농부차림의 새로 나타난 사람은 자기도 역시 벼랑밑을 굽어보더니 여차 하는 순간에 몸을 날려 물에 뛰여든다.

농부가 구원해낸 녀인과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흠뻑 젖어든 머리카락이 말라갈무렵 정신을 차린 녀인은 놀란 눈길로 농부와 옆에 누워있는 아기, 그것도 살아있는 아이를 알아보고는 순간적으로는 생의 희열이 비쳤으나 이내 눈귀로 비가 흐른다. 그러더니 벌컥 몸을 일으켜 바위에 머리를 짓쪼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농부가 녀인을 뜯어말린다.

녀인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다. 농부에게서 제지를 당한 녀인은 그만 정신을 잃는다.

농부는 불쌍한 생각보다도 생명에 대한 그 어떤 의무감으로 하여 가련한 모자를 살려내기에 온갖 힘을 다 짜낸다.

그러나 농부는 오히려 살려준 녀인에게서 원망을 듣는다. 농부는 허거프긴 하지만 그런대로 리해한다. 녀인의 아이를 보니 그럴만도 하다. 갓난아이는 본래 날 때부터 병신인 모양이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에 복숭아만 한 혹이 있는데다가 코구멍과 입이 관통되여 젖을 빨지 못할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살았는지 참으로 생명이란 모진것이다.

이상하게도 녀인은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사연이 있는지 끝내 말하지 않고 자기를 구원해준 은인에게 공손한 인사를 올리고는 떠나갔다. 농부차림의 사나이도 종적을 감추었다.

여기까지 들은 묵거는 다시 길을 걸어 그후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그후 몇달동안 헤매이던 그 녀인은 어떤 부자집의 종으로 다시 잡혀갔다.

거기서 오륙년이 흘러 어느덧 병신아이가 뛰여놀게끔 되였을 때 주인은 병든 말 한필과 그들 모자를 덤으로 장마당에서 팔았다. 그리하여 그들 모자는 다시 머나먼 곳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낯선 타고장에서 기구한 그 녀인은 병신아이가 커가는것을 의지해서 살았다. 그 녀인에게 힘이 된것은 비록 병신일망정 엄청난 괴력을 지닌 병신아이였다. 그 병신은 효도가 대단했다. 사람들은 병신모자를 《까마귀모자》라고 했다. 생기기는 추하여도 낳아키워준 어미를 극진히 돌보는 까마귀들과 같다고 붙인 별명이였다.

병신아이가 열서넛 나서 제법 꼴머슴이나마 시키게 되였을 때 불운의 액은 또다시 찾아왔다. 병신아이의 어머니가 물을 긷다가 그만 허리를 다치여 자리에 눕게 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자 집주인은 오래전부터 품어오던 계책을 실현하려 하였다. 주인은 병신아이를 힘꼴이나 쓴다고 비싼 값으로 팔아넘기고 허리를 다친 녀인은 쫓아낼 심산이였다. 마침내 병신아이가 끌려가게 된 날이 왔다. 영문을 알아차린 까마귀모자는 울며불며 엉켜붙었다. 평시에는 병신모자라고 은근히 피하기까지 하던 사람들도 너무나 애통하게 몸부림치는 그들을 보며 동정과 련민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끝내 허리를 못쓰는 어미는 주인의 발길에 멍석말리듯 굴러떨어지고 얼핏 알아듣지 못할 소 영각소리 같은것을 질러대던 병신도 사슬에 묶이여 끌려갔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밤중에 무서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까마귀모자를 팔아넘긴 주인은 란타를 당해 마치 탕친 고기뭉치처럼 되여버리고 집은 화염에 휩싸였다.

사람들속에서는 병신아이가 어떻게 끌려갔던 곳에서 도망쳐와서 저지른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실지로 그날 밤에 무서운 눈빛을 번뜩이며 허리 못쓰는 어미를 둘쳐업은 혹부리병신아이가 몇몇 솔거노비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는것을 본 사람도 있다는것이다.

그후 그들은 어떻게 되였을가?

도적무리가 되여 돌아친다는 소리도 있고 죽었다는 소리도 있다.

묵거는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 이상은 더 알수 없었소.》

묵거는 재사쪽을 바라보았다. 재사는 말이 흔드는대로 몸을 맡기고 먼 하늘에 눈길을 보내고있었다.

묵거는 재사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두줄기 눈물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한숨을 쉬였다.

흐린 낯빛으로 묵거의 이야기를 들은 무골이 중얼거렸다.

《노예란 사람같이 생긴 짐승의 다른 이름이지… 세상은 넓고 산천은 아름다와도 고통은 매일반이야…》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재사는 침묵만 지켰다.

땅을 밟는 말발굽소리만이 울렸다.

묵거는 재사를 위로하고싶었다. 그 까마귀모자, 아니 그 종녀인이 꼭 재사의 어머니라고 말할수는 없지 않는가.

소서노의 말만 가지고는 믿을수 없다. 그러니…

재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이란 흔히 행운이라면 그것이 설사 현실로 되지 않은것이라도 현실이라고 믿고싶고 불행이라면 그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애써 믿지 않으려고 하는것이 아닌가.

한동안 말없이 가던 재사는 눈물을 씻었다.

그는 무골과 묵거를 번갈아보고나서 부르짖었다.

《사람은 사람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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