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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제 2 부

 

기발을 올려라

 

4

 

미닫이문을 열고 재사가 나왔다. 그는 마루에 놓인 갖신을 발에 꿰고나서 토방을 내려섰다. 그리고는 페부속에 부풀었던 바람을 내뿜었다. 몇번 입풀무질하며 뜨락을 거닐던 재사가 멈추어섰다. 그의 눈길은 후원을 지나 앞에 우람하게 솟은 본채의 지붕우로 쏠렸다. 2층으로 되여있는 본채는 골기와를 입혔는데 지금 참새들이 치미주위를 맴돌며 저희들끼리 수다를 떨며 깝치고있었다.

이 본채는 재사의 아버지인 연타발이 사는 집이다.

재사의 아버지인 연타발은 구려 5부중에서 황부인 연노부 다음가는 계부루의 대가이다.

원래 구려국의 지경에는 5개의 부족들이 있었는데 연노부의 세력이 강해져 나머지부족들을 통합하고 구려를 세웠다. 그때 여러 부족을 통합하리만큼 연노부의 세력이 강했지만 계루부의 대가 연타발만은 꺾지 못하였다. 연타발이 기어코 연노부와 맞섰더라면 구려의 왕이 연노부의 대가가 아니라 연타발이 되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용력과 아량을 겸비한 연타발은 연노부와 엇서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왕이 되는가를 놓고 다툼질할 때가 아니다. 여러 부족들이 하나로 합쳐져 강해진다면 나는 국왕이 아니라도 좋다고 했다는 연타발이였다. 연노부대가도 자기가 구려를 다스리게 된것이 연타발의 양보가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잘 안다. 그래서인지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귀족평의회 의견을 중시하고 특히 연타발의 의견을 심중히 들었다. 연노부대가가 언제든지 계루부대가인 연타발에게 정권을 넘겨줄수 있다고 하던 말을 재사도 두어번 들었다. 말은 그렇지만 왕위는 연노부에 의하여 세습되게 되였다. 바로 이것에 대해서 연타발의 비장인 비추는 몹시 못마땅해하고있었다. 아버지인 연타발이 늙었으나 비장인 비추장군은 한창 왕성한 중년나이이다. 그는 상전인 연타발에게 맹목적이니만치 충실한 사람이였다.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연타발에 의하여 발탁되여 마침내는 계루부대가의 비장이 된 비추장군은 연타발대가를 생명의 은인으로 받들고있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비추장군은 연타발의 일에 대해서는 자기의 일보다 더 극성이다. 비추장군은 연타발대가가 아량있는분이라는것을 리용해서 구려국왕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있는 연노부와 연노부의 대가를 증오하고있었다. 비추장군은 그런 속생각을 여러번 연타발대가에게 비쳤으나 연타발은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추는 은밀히 계루부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왼심을 썼다. 그의 노력으로 계루부의 실력이 지금에 와서는 연노부를 누를만큼 강성해졌다. 비추장군은 때를 기다렸다. 그의 목적은 어떻게 하든지 연노부를 누르고 계루부대가인 연타발을 구려의 왕으로 받들자는것이였다.

재사는 비추장군이 여러번 자기의 속심을 터놓군 하여 그에 대해서는 잘 안다.

재사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버지의 심복하인이 다가왔다.

《저, 도련님, 대가어른께서 부르시오이다.》

《나를?》

좀해서는 아들을 부르지 않는 연타발대가이다. 그런데 연노부에 다녀오자마자 비추장군을 부르더니 또 재사까지 부른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후- 하고 숨을 내쉬고난 재사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알겠다.》

재사가 아버지의 방에 들어서자 연타발은 아들을 치여보고 《오, 재사냐?》 하며 반가운 기색을 지었다.

《거기 앉아라. 이제는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 세상일에 참여할 때가 됐다. 그런것만큼 나라와 우리 계루부일에 대해서 알아야겠기에 널 불렀다.》

재사는 아버지가 앉은 평상의 한쪽을 바라보며 잠자코 있었다.

《어서 말해. 비추장군, 그래서 어떻게 됐다구?》

《방금 말갈족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소이다.》

《그래, 요즈음 말갈족들이 승세하고있다는데 어찌된 일인가?》

《제가 알건대 말갈족의 대인으로 구도라는 사람이 된 다음부터 그 주위에 일구, 분구라는 읍락 대인들이 뭉쳐지면서 점차 강성하고있소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말갈이 흥하는것은 좋지만 주제넘게 구려를 넘보는것은 방심할수 없네. 그래서 연노부대가이시며 구려의 왕이신 그분께서도 심려하시는거야, 알겠나?》

비추장군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두툼하고 자지빛이 도는 입술이 힘주어 모아지더니 약간 꿈틀하였다. 재사는 그런 비추장군의 태도가 언짢은 일이 있을 때 지어진다는것을 잘 안다. 그러니 지금 비추장군은 연타발대가의 말을 좋지 않게 듣고있다는것이다.

연타발대가도 그걸 눈치챘다.

《딴 생각 있나?》

《있소이다.》

《뭔데?》

《대가어른, 말갈이 커지든 말든 우리 계루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이다.》

《무슨 소린가?》

《말갈이 승세해서 구려를 넘겨본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노부일이오이다.》

《어째?》

《우에서 아래로 흐르고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미는것은 흔히 보는 세상리치오이다. 지금 말갈이 승세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넘겨보는것은 연노부이지 구려는 아니오이다. 더구나 우리 계루부에 대해서는 엄두를 못낼것이오이다.》

《결국 비추장군은 말갈이 구려를 노리는것이 연노부의 잘못이라 그거지?》

《그렇소이다. 강자가 약자를 노리는것은 잘못이 없소이다. 잘못은 강자가 되지 못하는 약자에게 있소이다.》

《공평치 못해.》

《대가어른, 공평하오이다.》

《고집부리나?》

《아니오이다. 원래 연노부는 대가어른께 이미 왕위를 넘겨야 했소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가어른의 아량과 대범성을 악용하고있소이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명목으로 왕위를 세습할수 있소이까?》

《비추장군, 난 그대가 우리 계루부의 실력을 양성하느라고 고생하는걸 모르지 않네.》

《대가어른, 알아달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오이다.》

《물론 그대는 나를 위해서, 우리 계루부를 위해서 그러지. 하지만 굼벵이도 지붕우에서 떨어질 때는 제 생각이 있다질 않나? 각자는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이 있는 법이야. 그걸 탓할수는 없네. 연노부가 황부로서 근래에 와서 세력이 약해진것만은 사실이야. 연노부대가도 늙었으니까! 하지만 한때는 단군선인의 옛땅을 수복하자고 웅지도 품었던분일세. 그래서 나도 동지가 된거고… 늙었다고 숙보는건 좋은 행실이 못돼.》

《대가어른, 어찌 늙었다고 숙보겠소이까? 실로 그렇다면 그거야 망종일뿐. 하지만 통촉하시오이다. 대가어른께서도 늙으셨지만 이 비추장군은 대가어른을…》

《비추장군, 그걸 몰라서가 아니야. 하지만 지나친 결백은 때때로 편견에 빠지게 한다는걸 명심하게.》

《명심하겠소이다. 그러나 이 비추는 결백해서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딴전을 펼수 없소이다.》

《허, 고집두…》

연타발은 웃고말았다.

《하여튼 비추장군, 말갈에 대해서 방관해서는 안돼. 계루부도 구려의 한쪽이라는걸 명심하게. 연노부대가를 만나서 자네의 불만도 여쭈어보겠네. 그래서 수습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연타발이 재사를 보며

《참, 재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엇 말씀이시오이까?》

《구려 북쪽의 말갈이 심상치 않아. 거기에 대해서 준비가 있어야겠는데… 재사가 좋은 생각 있으면 말해보라.》

《저… 저는…》

연타발은 숨을 크게 들이키며 재사에게 주었던 눈길을 천정에 보냈다. 아버지의 태도에는 재사에 대해서 섭섭해하는 심중이 짙게 내비쳤다. 재사는 지금껏 다른 생각에 골몰해있던 자기가 민망스러웠다.

《재사, 내가 보건대 너는 요즘 딴 생각을 하는것 같아…》

《아버님, 그런게 아니오라…》

《네 나이때 흔히 춘정에 빠질수도 있다. 난 그런것때문이라면 말 안해. 대장부라면 칼, 술, 계집쯤 즐길수 있으니까. 하지만 쓸데없는 싱아대생각일랑은 버려. 알겠나?》

《알겠소이다.》

《그럼 가봐.》

재사는 머리를 푹 숙이고 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자기의 거처로 돌아오는 재사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아버지 연타발의 눈은 항상 정확하다. 재사는 아버지가 자기의 속심을 빤히 들여다보고있다는 생각에 괴로왔다. 실상 재사의 생각은 아버지가 말씀한 그것 칼이니, 술이니, 계집이니 하는 따위에 있는게 아니다. 그런것에만 집착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때는 무술도 익혔고 학문도 깨쳤다. 그것이 자기가 이루어야 할 전부라면 너무나 싱거웁다 할만치 재사는 그런것에 쉽게 능통하였다.

세상의 세도재상집 자제들이 출세의 수단으로 가지고싶어하는 그런 따위나 체득하기에는 재사의 성정이 너무 오활(汚闊)하다. 그것도 아마 하늘의 탓이겠지. 계루부니, 구려니, 말갈이니, 왕위니 하는것에 호기심을 내던 때는 이미 멀리 흘러갔다.

재사는 다시금 긴 숨을 토해냈다.

재사는 지금껏 호강하게 자라왔다. 작지 않은 구려라는 나라의 중추가 되는 계루부대가의 아들로 그것도 내리내리 세 딸을 두다가 말년에 본 아들인 재사였다. 재사에 대한 연타발내외의 사랑은 끔찍하였다. 누이들도 손아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더없이 귀여워하였다. 그러나 세상살이란 참 묘한것이다. 남들이 볼 때는 부러울것이 하등 없을 재사였지만 재사는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군 하였다.

재사가 《슬픔》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재사자신도 잘 모른다. 재사의 슬픔이란 마치 잔등에 난 기미와 같은것이였다. 사람은 태여날 때부터 가지고난 기미를 크면서도 전혀 감촉 못한다. 보지 못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기미가 없어지는것은 아니다. 그 기미처럼 재사에게는 《슬픔》이 항상 붙어다녔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떤것인지 그는 딱히 몰랐다. 어느날 웬 사람이 재사의 얼굴을 보고 《어쩌면 그리도 우울할가?》 하며 혀를 차던 그때부터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우연히 그렇다고 여겼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자기에게 《슬픔》이라는것이 실지로 존재한다는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지금껏 모르던 흠집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거기에 마음이 쏠리듯이 재사도 자기의 《슬픔》에 대하여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되였다. 그것을 비로소 확신하게 된것은 누이 소서노에게서 오직 누이만이 알고있다는 《비밀》을 들은 때부터였다.

소서노가 뜻밖에 과부가 되여 집으로 돌아온 저녁이였다.

재사는 어쩐지 쓸쓸해지는 마음을 달래려고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창백한 달이 고즈넉이 구름사이로 헤염치고있는 밤이였다. 재사는 방안쪽을 힐끔 바라보다가 마루 한끝에 초연히 서있는 소서노누이를 발견하였다. 누이는 수심에 싸여 무슨 생각에 골똘한듯 하였다. 달빛이 더욱 그렇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재사는 조심히 소서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소서노가 재사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재사냐?》

《그래요, 누이.》

《이리 오렴.》

재사는 누이곁에 앉았다.

《누이, 너무 슬퍼말아요.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니 어찌겠소이까?》

소서노는 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달빛어린 눈에는 물기가 맺혔다.

《하늘의 운명? 호- 그럴지도 모르지…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으니까…》

《난 누이를 동정하오이다. 사람이…》

《동정?》

소서노는 고개를 저었다.

《재사야, 난 내 신세를 슬퍼하는게 아니야. 세상을 슬퍼해.》

《세상을?》

《그래.》

《무슨 세상?》

《너도 포함한 세상을…》

《나도? 누이는 참 이상한 말씀 하시오이다.》

《이상할것도 없지. 난 다 알거든…》

《뭘?》

《남들이 모르는 비밀.》

《그게 뭔데?》

《너하고도 관계돼.》

《나하고? 그럼 더 속탄다. 그 비밀이라는게 뭐요 응?》

《말해줄가?》

《그래.》

소서노는 잠시 재사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듯 침묵에 잠겼던 소서노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 차라리 모르는게 나아.》

《누이, 비싸게는 노네. 그렇게 약 올리긴가? 내 성미를 알지, 누이도…》

소서노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끝내 소서노는 꼭지 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재사가 졸라도 절벽이였다.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 지나 뜻밖에도 재사의 어머니가 급사하였다. 림종에 이르러 어머니는 재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안타깝게 입술을 놀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 한마디도 알수 없었다. 어머니의 주름잡힌 눈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끝내 갔다.

고인의 장례를 치른 뒤 집안은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실색한 재사는 우두커니 망연자실해질 때가 많았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최후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씀을 그리도 애타게 하려고 하셨을가? 분명 거기에는 사연이 있는듯 하였다. 집념이 강한 재사는 그 일로 하여 점점 여위여갔다.

재사의 태도를 두고 제일 놀라고 근심하는 사람은 소서노였다.

《재사야, 너무 속쓰지 마.》 소서노는 재사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재사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내 말 듣니 응? 그러다가 두벌 상가나겠다. 얘, 재사야!》

재사는 흐린 눈길을 들어 소서노를 바라보았다.

《누이, 어머니가 림종에 무슨 말씀하려고 했을가? 분명…》

이번에는 소서노가 궁색해졌다. 그의 고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누이는 아마 알고있겠지 응?》

재사의 간절한 물음에 소서노는 가볍게 숨을 내쉬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말해줘, 누이 대체 무슨 일이야?》

소서노는 재사를 바라보았다.

미구하여 소서노는 입을 열었다.

《좋아, 어차피 너도 알게 될테니까. 그런데 약속해, 내가 말한걸 너만이 알고있어야 하는거야. 약속할수 있어? 사내대장부로서 약속해.》

《그래, 약속해.》

재사는 굳게 다짐을 두었으나 소서노는 그래도 미심쩍은지 심중하게 재차 어우른다.

《만약 이 비밀이 알려지면 너와 나는 결단이 난다. 아마 그 비밀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으니까… 알겠어? 더우기 너는 나보다 더할거야. 웃긴, 바보처럼… 그러니 절대로 내색을 해서는 안돼.》

《무슨 비밀이 그렇게도 요란한가, 누이답지 않게…》

재사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소서노의 이야기를 듣고난 재사는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늘과 해, 별, 달 그리고 땅과 바다의 온갖 신령에게 치성을 드리고 이번까지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다면 살아 숨쉴 면목이 없노라고 두고두고 되뇌인 산모의 정상을 가엾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반드시 아들을 낳으며 그것도 대길할 신동을 낳으리라고 솟대를 세운 덕에 분에 넘치게 많은 재물을 받은 산파의 예언이 적중해서인지 연타발대가의 집에는 마침내 아들이 태여났다. 어른들 몰래 산실을 엿보던 어린 소서노는 영문도 모르고 좋아했다.

그러나 인차 산파가 불안해하고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혼절하는것을 보아 갓난애가 죽었던 모양이였다. 기쁜 분위기도 잠간이였다. 소서노는 홀딱홀딱 뛰는 동가슴을 누르고 일이 어찌되나 하고 주시하였다. 잠시 산실은 어둠이 깃들었다. 귀신이 들렸는지 칙칙하고 무직한 그런 어둠이였다.

잠시후 산실을 나온 산파는 불안스러운 얼굴로 누군가를 불렀다. 우악스럽게 생긴 사내가 불리워왔다. 산파는 그 사내에게 뭐라고 귀속말로 수군거렸다. 말을 다 듣고난 사내는 《그래서 일없을가유?》 하고 겁에 질려 물었다.

《내가 맡는다질 않수? 이판사판이야, 알겠수? 마님이 깨여나고 대가어른이 진상을 알게 되면 땅땅 장담한 나나 또 그 돈 먹고 고분고분 내 심부름 해준 그 댁은 무사할가?》

《그래두…》

《일없어유, 찌르는 놈보다 긁어주는 놈이 더 고운 법이요.》

우악스럽게 생긴 사내는 산파가 주는 거적에 싼것을 들고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쥐도 새도 모른다.

날이 밝자 연타발의 집안은 아들을 낳은 경사로 떠들썩했다.

주인내외를 더욱 기쁘게 한것은 한다하는 친지들과 관상본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였는데 갓난애가 갓난애답지 않게 크고 잘났으니 틀림없이 장차 대인이 될것이라는 칭사였다. 실지 갓난애는 실했다.

소서노에게는 어리둥절한 일이였다.

그러나 총명한 소서노는 며칠후에 스스로 진상을 알게 되였다.

꽃꿀을 따느라고 붕붕거리는 꿀벌을 따라 깨꾸막질하던 소서노는 갑자기 포대기를 안은 녀인과 부딪쳤다. 소녀는 그가 며칠전에 새로 온 노비라는것을 대뜸 알았다. 그 노비가 끌려올 때 포대기에 싼 아이를 안았기에 《갓난애야? 우리도 애기가 생겨!》 하고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녀인은 지금 울고있었다. 여느때라면 어린 상전앞에서도 무릎을 꿇어야 하건만 넋을 잃은 사람처럼 울고만 있었다.

《왜 그래? 아이가 죽었어?》

소녀는 울먹해서 물었다.

노비는 더욱 섧게 울었다. 그러나 며칠후에 그 노비도 우악스럽게 생긴 사내도 종적을 감추었다. 후에야 소서노는 그 까닭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였다. 이것이 소서노만이 아는 재사의 비밀이였다. …

누이의 말이 끝나자 두사람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재사에게는 누이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 아, 운명의 장난.

그러면 자기는 연타발의 친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혹시 이 모든것이 한바탕 꿈이 아닐가? 오뉴월 개꿈? 아니면 소서노누이가 꾸며대는 소리가 아닐가?

아니, 아니

모르겠다.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또 보지도 못했다.

재사가 답답한 속을 후- 내뿜는데 시중군이 기다린듯이 머리를 숙이고 다가왔다.

《저, 손님들이 오셨소이다.》

《없다고 해.》

《저, 사실은 묵거와 무골이오이다.》

재사는 언제 그랬냐싶게 반색을 지었다.

《뭐? 그래 어디 있느냐?》

《정원에 들게 하였소이다.》

《잘했다, 어서 가서 뭘 좀 차려내오지.》

재사는 시중군을 보내고나서 심장이 쿵쿵거리고 눈앞이 아찔해와서 잠시 눈을 감고 서있었다.

《묵거가 왔다?!》 하고 재사는 혼자소리로 되뇌여본다.

묵거는 소서노누이에게서 자기의 비밀을 들은 이후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떠나보냈던 재사의 몸종이였다. 여태껏 소식없이 날을 보내더니 비로소 나타난것이다. 재사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여났다. 그는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뜨락정원으로 달려갔다. 정자나무아래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묵거와 무골이 보였다.

재사는 숨이 가빠지는것을 느끼며 소리질렀다.

《누가 왔다구? 어디?》

묵거와 무골이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꺾으며 《그간 편안하셨소이까?》 하고 인사했다.

《묵거! 이게 얼마만인가? 응?》

재사는 달려가 묵거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재사가 흔들어대는대로 몸을 맡기고있던 묵거가 눈물이 핑- 돈 눈길로 재사를 정겹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사이 별고없으시였소이까?》

《나야 무슨! 자네가 고생했지. 그래 갔던 일은 어찌됐나?》

《동남, 동북 천리를 돌아보고 오는 길이오이다.》

《그래?! 정말 수고가 많았네. 앉게, 앉아서 회포나 나누자구. 무골 자네도 어서 앉으라구.》

재사는 묵거의 어깨를 눌러앉히며 무골에게도 손짓했다.

세사람이 자리에 앉는데 마침 시중군이 과실을 담은 그릇을 가져다 탁상에 놓았다.

재사는 시중군이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무골에게 눈길을 주며 핀잔했다.

《왔으면 인차 알릴것이지. 자네도 참…》

무골은 조용히 웃었다.

《그건 그렇고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묵거! 어서 이야기하게, 어서! 그래 알아보았나?》

묵거는 잠시 재사를 바라보다가 그저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재사가 또 물었다.

《있었소이다.》

《뭐라구? 그럼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재사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맙시사, 운명의 희롱이여!

정녕, 너는 피할수 없단 말이냐? 사실로 믿기에는 너무 야속하다. 그래서 애써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것이 낫지 않았을가? 내가 왜 하필 묵거에게 그 일을 부탁했던가. 그것도 운명의 장난인가. 그저 그렇게 알고 지나쳐버릴걸. 이제는 어떻게 한다?

없었던 일로 하자.

그래 없었던 일로… 아무 일도 없었던것으로, 더 물어보지도 말자!

하지만 재사의 입에서는 전혀 반대의 말이 느리게 풀려나왔다.

《자세히 이야기하게 묵거. 난 모든걸… 다 알아야겠네.》

거짓말! 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시중군이 나타나 재사에게 비추장군이 찾는다고 전하였다.

《없다고 하게!》 하고 재사는 어깨너머로 손짓하였다.

《그러면 장군께서 몹시…》

《글쎄 없다고 하라니까!》

재사가 화를 내자 시중군은 쭈빗쭈빗하며 물러갔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묵거가 일어났다.

《재사, 여기는 몹시 소란스럽소이다. 우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겠소이까?》

재사는 찌프린 자기의 량미간을 쓸어만지며 대답하였다.

《나도 언제부터 그 생각을 하고있었네. 하지만 자네도 없지, 또 요즈음은 무골도 자주 안 오고 해서 안절부절 못하고있었네. 며칠 여길 뜰가부야. 마침 자네도 왔으니 소일이나 하세. 그런데 어디로 갈가?》

《그건 내가 정해논 곳이 있소이다. 이야기는 거기 가서 하는것이 좋을듯 하오이다. 여기는 자리가 좋지 않소이다.》

묵거가 기다린듯이 말했다.

《무골, 자네는?》

《연타발대가의 허락을 얻기가 힘드오이다.》

《그건 념려말게. 내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겠네…》 하고 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거와 무골과 헤여진 뒤에 재사는 누이를 만나러 들어갔다.

소서노는 마침 젊은 녀인과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재사는 상글상글 웃으며 말하는 젊은 녀인을 건너다보았다. 이 녀인은 두달전에 재사의 집에 나타났다. 부여에서 살다가 더는 살수 없어 찾아왔다는 녀인은 재사의 아버지 연타발의 먼 친척벌이 된다는 부분노의 안해였다. 처음 시어머니를 모시고 나타난 녀인의 모색은 말할수없이 가긍했다. 머리는 풀어지고 옷은 갈기갈기 찢겨 때국이 흘렀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누가 보아도 소서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저 녀인이 두달전의 그 녀인이라고 생각도 못할것이다.

이제는 갈데없는 부자집녀인의 티가 났다. 사람이란 저렇게도 겉모습에 따라 달라지는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재사가 들어오는것을 본 소서노는 말을 끊고 그를 바라보았다.

재사는 잠시 망설이였다.

《왜 그러고 서있느냐?》 하고 소서노가 물었다.

《누이, 》 하며 재사는 누이앞으로 다가갔다.

부분노의 안해는 두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나갔다.

그 녀자가 나가는것을 바라보던 소서노가 다시 물었다.

《오늘따라 왜 바재이느냐? 무슨 일이 있었냐?》

《누이, 난 며칠간 소일 나가려고 하오.》

《그건 왜?》 하고 소서노는 놀라 재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시끄러워서 그러는게 아니냐?》 누이의 물음에 재사는 머리를 저었다.

《그럼?》

《다른게 아니오라 묵거가 집 떠나있다가 오늘 돌아왔소이다. 그래서 바람이나 함께 쏘이려 하오이다.》

《묵거가?》

《그렇소이다.》

《묵거가 왔으면 나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돌아갔느냐? 참, 묵거를 만나본지도 오랬구나. 요즈음은 어쩐지 무골도 오지 않고… 혹시 너희들은 나한테 불만이 있는것 아니냐? 내가 너희들을 초청할수도 있을텐데…》

소서노의 얼굴에는 섭섭한 빛이 떠돌았다. 그것은 진정이였다.

소서노는 이들 세사람을 어릴적부터 알고있었다.

재사, 묵거, 무골은 능달에 산삼씨 모이듯이 어울러졌다.

소년시절에 섬섬약질이였던 재사는 그 체질때문이였는지 성격자체도 침울하였다.

그는 사람들앞에 나서서 활기있게 놀줄 몰랐다.

늘 봐야 뒤전에서 제또래들이 노는것을 재미있게 바라보는것으로 만족해하였다.

재사가 열두어살 나던 해에 그에게 달렸던 녀자몸종대신 재사보다 나이가 두어살 우인 한 소년이 몸종으로 들어왔다. 주인이 뭔지, 노예가 무언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두 소년은 서먹서먹하게 만났다.

재사는 어쩐지 자기를 증오스럽게 쳐다보는 몸종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내 몸종이냐?》

몸종은 자기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주인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왜 말이 없어, 응?》

이때였다.

몸종소년의 잔등에서 말채찍소리가 아츠럽게 울렸다.

소년을 끌고 온 관리인이 채찍을 휘둘렀다. 어린 노예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채찍은 연거퍼 떨어졌다.

《대답해라! 어서 주인나으리께 대답해. <나는 어린 주인님 노예이오이다!>라고 대답해!》 몸종소년의 대답보다 먼저 재사의 울음섞인 소리가 나왔다.

《이게 무슨짓이야? 왜 말새끼처럼 채찍으로 때리는거야?》

《어린 주인님, 이 자식은 어린 주인님의 노예오이다.》

《내 노예라구? 그럼 내거란 말이지?》

《그렇소이다.》

《그런데 왜 네가 때리는거야? 내 노예라니 이제부터 내 맘대로야. 너는 물러가!》

어린 몸종소년이 감싸쥔 두 손가락사이로 성이 나서 고함치는 어린 주인의 모양을 의아스럽게 쳐다보고있었다.

이때부터 두 소년은 마치 친한 동무처럼 지냈다.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만 아니라면 두 소년은 형제처럼 서로 장난질하며 딩굴었다.

재사는 그 과정에 묵거가 본시 노예는 아니라는것, 이름있는 학자의 집에서 태여난 묵거는 어릴 때부터 지리와 천문에 놀라울만치 정통해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군사들에 의해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많이 죽고 잡혀서 어디론가 끌려다니다가 마침내 여기로 오게 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두 소년은 서로 책을 좋아하였다. 재사의 방에는 책이 가득차있었다. 그후 두사람사이는 더욱 친밀하게 되였다.

학문에 대한 이야기가 두 소년을 친구이상으로 만들었다. 이 두사람을 뗄수없이 련결시킨것은 다만 학문에 대한 조예만이 아니였다.

오히려 제나름의 학문은 이 두 친구를 자주 다투게 하였다.

이 두사람을 묶은 매듭은 다름아닌 묵거의 친구였던 무골이였다. 무골은 묵거와 함께 끌려와 연타발의 시종이 된 소년이였다.

귀족들의 주문세공에 종사하는 집에서 태여난 무골은 눈치가 빠르고 싹싹하였으며 한번 본것을 그대로 만들줄 아는 뛰여난 재간도 가지고있었다.

재사와 묵거, 무골에 대해서 생각하던 소서노는 재사에게 물었다.

《그래, 언제 떠나려느냐?》

《당장!》

《그렇게 빨리?》

《사실 아버님에게 여쭈고 떠나야겠는데 달리 생각하실것 같아 누이에게 들렸소. 훌쩍 떠나기는 멋하고 해서…》

소서노는 가늘게 한숨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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