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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회)

 

제 2 부

 

기발을 올려라

 

2

 

강 저쪽 대안에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기슭까지 무성한 잡관목을 헤치고 나온 그는 길을 잃고 헤매이던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저쪽 대안에 나타날리가 없다. 기슭에 선 그는 기운이 빠졌는지 아니면 길을 찾는지 멍하니 이쪽 대안을 바라보다가 다시 강 아래우쪽을 오래도록 훑어보는것이였다. 그러더니 옷을 활활 벗기 시작하였다. 더워서 한바탕 목욕이라도 하려는가, 그런것 같지 않다. 한동안 꾸물거리던 그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강에 들어선다. 아무래도 강을 건너야겠던 모양이다. 사타구니에 매달린 고드름까지 말짱하니 내놓고 강에 들어선 그는 비칠거리며 하얀 물방울들을 튕기였다. 어정어정 물을 차며 몇발자욱 옮기는것 같더니 벌써 배꼽까지 잠겼다. 강바닥이 고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물살이 세차서인지 자주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린다. 그때마다 머리우에 이였던 보따리가 가슴팍으로 내려오는가 하면 허공에서 흔들렸다. 어느덧 강물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옷보따리를 다시 머리우로 올려놓던 그는 고개를 돌려 떠난 기슭을 보는것이였다. 망설이는 모양이였다. 한손으로 정수리에 인 옷보따리를 쥐고 되돌아서려던 그는 아차 하는 순간에 물속에 잠겼다. 강바닥의 미끄러운 돌을 밟은 모양이다. 옷보따리가 둥-둥 떠내려갔다. 어푸하며 물속에서 솟아오른 젖은 머리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떠내려가는 보따리를 발견한 그는 허우적거리며 두서너번 팔을 놀려 마침내 옷보따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헤염을 치며 강을 건느기 시작하였다. 겨우 강 대안에 다가가 몸을 세우는가싶더니 다시 쑥- 들어간다. 생각밖에 그쪽 기슭이 깊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헤염을 쳐 기슭까지 대였다.

기슭으로 걸어나온 그는 애되여보이는 되박이마였다. 되박이마때문인지 아니면 꼭 다문 입술때문인지 록록치 않아보인다. 그가 안고나온 옷보따리에서 물이 좔좔 흘러내렸다. 되박이마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삐죽이 솟은 돌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보따리를 끌러 젖은 옷가지들을 꺼내 둥글둥글한 돌우에 널기 시작하였다. 옷을 다 널고난 그는 나중에 주먹밥을 꺼내여 입으로 가져갔다. 소금을 섞은 강보리밥이 물에 젖어 풀어진것을 손가락으로 움켜 입에 넣고는 질금질금 씹으며, 인적없는 길을 바라보던 그는 마지막 밥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고 되박이마는 다리를 폈다.

되박이마가 물에 발을 담근채 졸며 말며 하는데 강 웃쪽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눈을 뜬 그는 서둘러 옷을 주어입었다. 아직 물기는 있으나 그런대로 입을만 하다. 옷을 다 입고 바라보니 대여섯명의 말탄 사람이 건들건들 오고있다. 모두 창이며 칼을 든 군사들이였다. 그들 뒤로는 수레가 두채 따르고 그뒤로는 또 사람들이 걸어왔다. 수레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등에 짐을 지고있는데 몰골들이 말이 아니다. 대개 머리가 풀어지고 웃통은 벗었다. 그래도 아래도리는 헝겁인지 속곳인지로 대충 가리웠다. 그들은 어깨에 부담들을 지고있었다. 그 부담군들은 둘씩, 셋씩 줄지어 늘어서서 힘겹게 오고있었다. 부담군들 사이사이에 역시 말을 탄 군사가 섞여오며 채찍을 휘두르군 한다. 되박이마가 한동안 지켜보는 사이에 부담군들의 행렬이 끝나고 그뒤로 또 말탄 군사들이 나타났다. 그 군사들은 모두 끈을 맨 개들을 앞세우고있었다. 개들이 길길이 뛰며 부담군들을 재촉하고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부담군들의 걸음은 여드레 팔십리걸음으로 느릿느릿하다. 부담군들이 되박이마가 서있는 기슭의 길을 거쳐 지나갔다. 그러자 비린내가 풍기고 파리떼들이 윙-윙 거린다. 아마도 물건들이 소금이나 물고기, 미역 같은 어물인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이 부담군들은 저 멀리 바다가에서 내륙으로 해산물을 날라가는 노예들이 분명하였다. 되박이마는 자기를 의심스럽게 힐끔거리는 군사들은 아랑곳않고 노예들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들의 질그릇같은 잔등이며, 얼굴에서 팥죽땀이 뚝뚝 흐르고있었다.

하지만 모두 짐에 눌리여 씻을념도 못하고 헉헉거리며 가고있었다. 노예들은 각양각색이다. 고토리를 내놓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수염이 무릎에 닿는 늙은이도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고있는 되박이마의 얼굴에서도 땀이 줄줄이 흘렀다. 되박이마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길가에 올라섰다. 그가 올라선 길섶에는 아름드리 참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던지고있었다. 되박이마는 그밑으로 들어서서 여전히 노예들쪽을 살피며 손바닥부채질을 하였다. 한동안 손부채질 하던 그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노예들쪽에서 무슨 일이 났는지 갑자기 그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와 함께 욕지거리소리가 들려왔다. 노예들의 행렬이 멈추어섰다. 그러더니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이 길가에서 뛰여내려 물가로 달려갔다. 그뒤로 풀어논 개들이 미친듯이 따랐다. 어찌자는것인가? 저 사람이 도주하려는건가? 설마… 물가에 닿은 사람은 개들이 따르건말건 그 자리에 엎드려 물을 마시였다. 그것도 성차지 않은지 아예 머리를 물속에 잠그었다 꺼냈다. 꽤나 목말랐던 모양이다. 뒤따르던 개들이 물가에 엎드린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물을 마시던 사람은 악- 소리를 지르며 개들을 쫓았다. 하지만 개들은 쫓으면 쫓을수록 더욱 영악스럽게 달려들었다. 이리차고 저리차며 개들을 쫓는 사람의 온몸에서 벌건 피가 흘렀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노예들중에서 한사람이 아우성치며 달려가는것을 군사들이 빙 둘러막으며 채찍질로 쓰러뜨렸다. 개들과 싸우던 사람은 마침내 늘어졌다. 개들이 으르릉거리며 넘어진 사람을 물고 뒤걸음치였다. 쓰러진 사람의 몸에서 피가 흘러 강물을 물들이였다.

기슭에서 구경하던 군사들이 뭐라고 소리치자 노예 몇이 내려와 개에게 물려 만신창이 된 사람을 맞들었다. 늘어진 사람은 앞쪽 수레에 처실리고 그우에 거적이 덮이였다.

노예의 행렬은 다시 움직이였다.

개와 노예의 혈투를 바라보던 되박이마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노예들의 행렬이 움직이자 저도 따라갔다.

뒤에 섰던 군사가 되박이마를 보고 우뚝 멈추어서더니 뭐라고 고함쳤다.

되박이마는 주춤거렸다. 군사는 한동안 이쪽을 지켜보다가 다시 행렬을 따라갔다. 되박이마도 멀찍이 바라보며 노예들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갔다.

강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던 행렬은 산굽이를 돌아서자 등성이쪽으로 붙었다. 아마 길이 그쪽으로 트인 모양이였다.

행렬의 끄트머리가 나지막한 등성이를 넘어서는것을 본 되박이마는 부지런히 그뒤를 따라갔다. 등성이를 올라서니 거기서부터 다시 길은 산굽이를 에돌며 나있었다. 길은 무성한 숲에 묻혔다가 나타나군 하였다. 저쯤 가는 노예행렬의 꼬리가 보였다.

어디선가 까욱이소리가 청승맞게 들려오는가 하면 메비둘기의 구구구- 하는 소리도 들렸다. 되박이마가 숨을 내쉬고 발을 옮기려는데 별안간 덤불속에서 여러 사람이 우르르 쓸어나와 앞을 막아섰다.

그는 흠칫 멈추어섰다.

《꼼짝말아!》 하며 길을 막던 사람들중에서 유독 칼을 쥔 사람이 소리쳤다.

《왜 이러우?》

되박이마는 한쪽 눈을 깜박이며 막아선 사람을 쳐다보았다.

칼끝이 되박이마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떤 놈이냐?》

《길손이요.》

《길손?》

칼을 쥔 사람이 우아래를 훑어보고나서 다시 물었다.

《너, 저 노예들을 몰고가는 군사들패가 아니야?》

목소리가 처음보다 짐짓 누그러들었다.

《아니요.》

《그럼 냉큼 물러가.》

《아니, 물러가라니 웬말이요? 왜 남 가는 길 막고 야단이요? 난 가던 길 가야겠소. 비켜서우.》

《허, 이놈 보게, 젊은 놈이 죽지 못해 몸살났다, 찍소리 못하게 죽여버리려다가 행색보아 살려주었더니 제법 코대 높이네. 아, 이놈! 네놈과 시비질할 사이 없다. 죽지 않겠으면 썩 물러가!》

되박이마를 겨누었던 칼이 내렸다.

《망할 자식!》 하고 중얼거린 칼잡이는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얘들아! 어서 길가에 마름쇠들을 깔아라.》

그러자 손에 활을 들고있던 사람들이 덤불속에서 마름쇠들을 꺼내다가 길가에 뿌려놓았다.

어찌자는걸가? 마름쇠들을 왜 길가에 뿌려놓는담. 무슨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가? 무얼 노리는걸가? 혹시 앞서간 그 노예행렬을 덮치자는걸가? 길손들을 터는 도적떼들?

되박이마가 눈을 깜박이고있는데 칼잡이가 다시 소리질렀다.

《모두 차비를 해! 그 새끼들이 밀려오면 활촉에 매누깔을 달아서 쏴야 하네.》

활잡이들이 명령을 듣고는 각기 길섶이며 덤불속에 자리를 잡고 노예들이 지나간쪽을 살피였다. 부하들을 지켜보던 칼잡이가 다시 되박이마에게 돌아섰다.

《야 이놈아, 너 정 죽고싶으면 어디 잠간 기다려봐라.

꼼짝말고 앉아있어. 그렇지 않다가는 이 칼날이 네 녀석의 피맛을 먼저 본다.》

되박이마는 눈을 깜박이며 싱긋 웃었다.

《원, 로형두! 혀바닥이 주인 만난 개 꼬리 같소.》

칼잡이는 되박이마를 힐끔 보더니 한쪽볼을 찡그리며 괴상하게 웃었다.

이때였다.

노예들이 간 쪽에서 개들이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꽹과리소리, 함성소리, 말의 울부짖음소리가 따랐다.

《시작됐어.》 하고 칼잡이가 침을 퉤 뱉으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요?》 되박이마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꿈쩍말아, 이제 알게 돼.》

함성소리가 차츰 높아가고 간간이 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윽하여 앞쪽에서 노예들을 따르던 군사들이 말을 짓조기며 달려오는것이 보였다. 범 본 개들 같았다.

《온다!》 하고 칼잡이가 허리를 낮추며 소리쳤다. 말탄 군사들이 죽어라고 달려온다. 이제는 코앞까지 닿았다.

그러자 칼잡이가 소리쳤다.

《쏴라!》

화살이 피융- 피융 날아갔다.

맨앞에서 달려오던 군사가 이마에 화살을 받고 말우에서 떨어졌다. 이어 뒤따르던 말이 벌떡 재주넘기를 하고 또 다른 군사가 악- 소리치며 뒤번져졌다. 달려오던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화살은 련이어 날아갔다. 길가에 시체들이 깔리고 말울음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문득 머뭇거리던 저쪽에서 말 한필이 튀여나와 내닫는다. 이쪽에서 더 세차게 화살이 날았다. 하지만 용케도 꺼꾸러지지 않고 점점 이쪽으로 접근해왔다. 군사가 휘두르는 칼이 눈앞에서 번뜩거렸다. 활잡이들속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칼잡이가 벌떡 일어섰다. 이때 달려오던 말이 싱아대 꺾이듯이 무너져버린다. 마름쇠에 걸린것이다. 칼을 휘두르던 군사가 얼결에 칼을 놓치고 곤두벌레처럼 굴렀다. 칼잡이가 표범처럼 휙- 날아 군사의 등에 칼을 박았다. 피가 내뿜고 군사가 네 활개를 폈다. 그것이 마지막이였다.

삽시에 길가는 조용해졌다. 주인잃은 말들이 서성거리고있을뿐이였다.

《하하, 새끼들, 꼴 좋다!》 전장을 훑어보던 칼잡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피방울이 묻어있어 금방 먹이를 덮친 맹수 같았다.

칼잡이가 한번 손짓하자 활군들이 죽어넘어진 군사들쪽으로 다가가 창이며 칼들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살맞은 군사들중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음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그중 어깨에 화살을 맞은 군사는 발길이 닿자 벌떡 일어나며 《살려주.》 하고 빌었다. 활잡이는 놀란듯 한걸음 물러서며 칼잡이를 불렀다.

《이걸 어쩔가?》

칼잡이도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군사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는데 군사들이 쫓겨온쪽에서 왁작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도 모두 손에 활과 창을 들고있었다. 선두에 선 사람은 밤색말을 타고있었다. 그는 턱수염이 검은 중년나이였다.

《어떻게 됐어?》 하고 그가 소리쳤다.

《말끔히 해치웠소. 그런데 명이 질긴 놈이 여럿이 있구려.》

이쪽 칼잡이가 대답하였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살아있는자들이 있단 말이요.》

《그게 어쨌다는거야?》

《살려달라고 애걸하누만.》

《아따,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참, 자네 인정도 많아 두부자루일세.》 하고 시까스르며 말탄 턱수염쟁이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자넨 우리의 법도를 잊었나?》

턱수염쟁이가 따졌다.

《그런건 아니지만…》

《닥치라구, 저 군사놈들이 어떻게 노예들을 죽였는지 자네는 못 보았나? 저 앞의 수레에 가보라구. 갈증에 타죽고 배고파 죽고 개에게 물려죽은 노예들의 시체가 구데기 쓴채 그대로 실려있어.

이 군사놈들은 사람의 종자들이 아니야, 개새끼들이야! 노예주놈들의 껍데기에선 이새끼밖에 생길게 없어! 모조리 목을 치라구, 죽은 놈, 산 놈 가릴것 없이…》

《알겠네.》 하고 칼잡이는 얼굴에 묻은 피를 팔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요놈은 뭔가?》

칼잡이를 바라보던 턱수염이 되박이마를 가려보며 물었다.

《우리 패가 아닌것 같은데…》

칼잡이가 돌아서 되박이마를 보며 《군사놈들의 뒤를 따르던 놈일세.》 하고 말했다.

《그놈도 죽여치워!》

《하지만 대장, 이 젊은이는 군사들 패가 아니야. 행색을 보아 우리들이나 별반 다름없는 놈일세.》

《알게 뭔가? 상통을 보니 노예 같지는 않구만… 뭘하러 노예들의 뒤를 따라다녀, 송장 파먹는 새새끼야?》

턱수염쟁이대장은 되박이마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고 되박이마의 턱에 칼끝을 댔다.

《너 이름이 뭐냐?》

《묵거요.》

《성은?》

《없소. 묵거요.》

《묵거? 노예주들 껍데기가 아냐?》

《그렇다면 어쩔테요?》

《요녀석이?》

대장의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묵거라는 젊은이는 턱에 닿은 칼끝을 치우며 말하였다.

《대장! 난 당신네 두령을 만나야겠소!》

《뭐, 우리 두령?》

《그렇소.》

《네가 우리 두령을 아느냐?》

《알고있소. 혹부리언청이!》

대장이 흠칫 놀란다. 그리고는 말투가 달라졌다.

《그쪽은 우리 두령의 아우요, 아니면 형이요?》

《아무것도 아니요.》

《그럼?》

《글쎄 꼭 만나야겠소.》

대장은 묵거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참 훑어보았다. 잠시후 《자객은 아닐테지?》 하고 물었다.

묵거는 피식 웃었다.

《겁쟁이구려.》

묵거의 말에 대장도 빙그레 웃었다.

《좋아. 보아하니 쥐새끼 같지는 않군. 두령을 만나게 해주지. 하지만 알아둬. 딴 마음을 먹었다가는 네 녀석의 생간을 씹어먹을테다.》

《알겠소.》

대장은 칼집에 칼을 꽂으며 일렀다.

《여보게, 건건이, 자네가 맡게.》

처음 되박이마를 상대하던 칼잡이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건건이는 묵거의 등을 툭 쳐 앞에 세웠다. 그리고는 넘어진 군사들에게 다가가 발길로 차서 군사의 몸뚱이를 굴리고 칼을 내리쳐 목을 잘랐다. 살려달라고 비는 군사의 등뒤에서 대장이 칼을 내리쳐 그마저 요정을 냈다. 일을 끝낸 대장은 무리를 거느리고 앞으로 갔다. 산굽이를 돌아서니 땅에 웅크리고 앉은 노예들이 보였다. 짐짝들은 모두 어디다 팽개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중에서 어떤 사람은 땅에 머리를 박고 뭐라고 중얼거리고있었다.

노예들을 훑어보던 대장이 소리쳤다.

《당신들은 살아났소!》

그러자 노예들이 놀란 새무리처럼 머리를 들었다.

대장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형제들이요!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노예들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요. 우리도 노예였소. 그러나 우린 노예주놈들에게 반항하는 노예들이요. 알겠소? 자, 이제는 당신들 갈데로 가오.》

대장은 앉아있는 노예들의 곁으로 지나갔다.

노예들중에서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섰다.

《대장, 우리는 갈데가 없소.》

대장이 멈추어서서 그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수염으로 덮인 얼굴에 장난기어린 웃음이 피여났다.

《갈데는 많소.》

《노예주들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게요.》

《그럼 어찌겠소? 양새끼처럼 날 죽여주소 하고 대가리를 들여밀구려. 그것도 어쨌든 갈데가 아니겠소, 하하.》

《그렇게 죽기는 싫소. 이젠 신물이 나오. 우린 대장을 따라가겠소.》

《좋도록 하라구. 우릴 따라갈 사람들은 따라오고 싫은 사람은 산속에 들어가든지 맘대로 하오.》

대장은 부하들에게 일러 따라올 사람들과 다른데로 갈 사람들을 갈라놓게 한 다음 따라올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물이며 식량을 내주게 하였다.

허약자들과 늙은이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대장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한켠에 비켜서서 물건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대장에게 따라가길 청했던 노예청년이 말하였다.

《우린 한 백명 넘었댔소. 그런데 어물을 지고 오는 사이에 절반남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소. 파리새끼처럼… 내 형도 저 강가에서…》 청년의 눈에서 피빛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서쪽하늘에 노을이 비끼기 시작하였다.

《노예의 운명이란 피차 매일반이야.》 하며 대장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남은 사람들과 헤여진 무리들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으로 까마귀떼가 몰려들었다.

일행은 길을 벗어나 산골짜기를 따라 줄곧 걸었다.

이제는 뒤에서 들리던 강물소리도 사라졌다.

묵거는 건건이와 함께 걸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건건이가 묵거에게 말을 붙였다.

《여보게, 힘들지 않아?》

《아니요.》

《그럼 좋고… 아무말이나 하지, 길 걸으면서는 서로 이야기를 해야 힘든줄 모르는 법이야.》

《나야 할말이 있어야지, 그쪽에서나 말씀하시오이다. 형은 어떻게 여기에 들게 되였소이까?》

건건이는 내짚던 걸음을 세웠다. 그바람에 묵거는 나무가지를 잡은채 멈추어선 건건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건건이의 눈에는 정이 어려있었다.

《자넨 나를 형이라 부르는구만.》

《나보다 나이가 우이니 형이라 하지 않소이까.》

《그래, 하여튼 고마워. 나도 자네가 처음부터 남 같지 않더군. 첫날에 정들어 백년지기하는게 어쩌면 인생일지 모르지…》

건건이는 다시 말없이 걷다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건건이는 낳아서부터 노예였다. 그는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라나 철들어서부터는 여기저기로 팔려다녔다.

어느덧 스무살쯤 되였을 때 그는 다시금 팔려가게 되였다. 손목을 바줄로 묶이운채 건건이가 끌려간 곳은 장마당이였다. 옆에는 소, 말, 양과 같은 가축을 파는 말뚝들이 있었다. 건건이를 끌고나간 노예주는 겸포(실로 꼬아서 짠 비단) 마흔필을 받고 건건이를 팔았다. 건건이가 팔려간 곳에는 다른 노예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건건이는 겸포 스무필에 팔려온 처녀를 보게 되였다. 그 처녀를 눈여겨보게 된것은 처녀가 슬프게 울고있기때문이였다. 이때껏 가축처럼 팔려다니며 그런가보다 하고 체념해오던 건건이였건만 처녀의 눈물에서 난생처음으로 자기나 처녀도 사람이며 사람이기때문에 소나 말처럼 팔려다니는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는걸 깨달았다. 건건이의 가슴속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소경이 눈 뜨는듯이 번쩍 타올랐다. 처녀가 아름답다고 느낀것도 거의 동시였다.

처녀는 늙은 노예주의 몸종이 되고, 건건이는 솔거노비가 되였다. 건건이는 하루의 고역에 지쳤어도 밤이면 처녀가 있는 집의 울담을 넘군 하였다. 그때마다 건건이의 손에는 나무하면서 따모은 먹음직한 산열매가 들려있었다. 노비처녀도 총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처녀의 주인이 죽었다.

그 노예주의 죽음은 젊은이들에게도 검은 나락을 들씌웠다.

주인이 죽었으니 몸종이였던 처녀도 건건이도 산채로 주인과 함께 땅에 묻혀야 하였다. 이것은 전례의 법에 따른것이라 어길리 없다.

처녀는 담을 넘어온 총각의 품에 안겨 섧게 울었다. 달빛아래 눈물을 흘리던 건건이는 처녀를 업고 담을 넘었다.

그러나 오래갈수 없었다. 한해도 못 채우고 건건이는 노예주들에게 다시 잡혀 달군 쇠붙이에 지지우고 처녀와는 생리별하였다.

그후 건건이는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탈출하여 마침내 지금에 이르렀던것이였다. 자기 래력을 이야기하고난 건건이는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심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노예! 소나 말처럼 팔려다니고 혹사당하는 말하는 짐승!

나는 그렇게 더는 못살겠더군.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그래.

우리는 소박한 꿈을 안고있어. 부자들처럼 땅껍데기같은 욕심이 차서 살아가자는것도 아니야.

그저 제 땅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누라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제 뼈와 땀을 바쳐 농사를 짓고 하늘이 주는 낟알로 굶지 않고 살아가고싶은게 소원이지… 그런데 세상에는 제 땀 한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남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가. 알겠나?》

이야기를 마친 건건이는 묵거에게 물었다.

《총각은 뭣때문에 우리 두령을 만나자는거야?》

청하지도 않은 남의 래력을 듣고난 묵거는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그 래력을 파보는중이지요.》

《래력?》

건건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노예주들이 그렇게 하라던가?》

《아니요. 세상에는 별일 다 있지 않소, 그저 쓸데가 있어서 그러는거요.》

《아무튼 우리 두령을 모해하려는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요, 세상에 할짓이 없어서 그따위짓을 하겠소?》

《그렇다면야, 하긴 어쩐지 난 자네를 믿게 되누만…》

건건이는 히죽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르며 묵거가 입을 열었다.

《그쪽에선 두령에 대해서 꽤나 극진하구려.》

《흠, 그럴만 하네.》

《혹시 피줄이 아니요?》

《그런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 두령이 나이는 젊고 비록 허물이 있어두 의협심이 있고 산을 들만 한 힘을 가진 장사요.》

《그런건 나도 아우.》

《그래?》

어둠이 산속에 깃들었다.

일행은 산등성이를 타기 시작하였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를 피하며 힘겹게 등성이에 오르니 골짜기아래로 불빛이 보였다.

《아직 멀었소?》 하며 묵거가 지친 소리로 물었다.

《다 왔소. 저기 불빛이 보이지, 거기까지 가면 돼.》

건건이가 흰 이를 내보이며 말하였다.

산등성이를 내려 그 집에 닿자 대장은 묵거와 건건이를 떨구고 저희들은 어디론가 다시 떠났다.

건건이는 바로 이 집이 자기들의 영채로 들어가는 길목의 객주집이라는것과 두령을 만나려면 여기서 묵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묵거가 그 집에서 사흘을 기다렸으나 두령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하두 묵거가 보채니 건건이는 알아보겠노라고 떠나갔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건건이는 저녁이 다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게 틀림없었다. 애당초 선뜻 두령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할 때부터 묵거는 일이 숭한데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래일까지 기다려보고 소식이 없으면 떠나버리고 말리라. 그 턱수염쟁이가 어떤 오그랑수를 쓰는지 어찌 알겠나? 바보처럼 떡주겠다는 소릴 믿고 멍청하니 앉아있다가 벼락맞을수 있다.

묵거는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뒤치락거리며 밤을 새우고있었다. 계절로 봐서는 그럴수 없는데 어쩐지 선기가 나는것 같았다. 집주인 로파는 묵거를 이상한 눈길로 보며 산골이 돼서 그렇다고 안심시켰으나 묵거는 믿을수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졸듯말듯 하던 묵거는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풀벌레소리와 밤새소리도 이미 그쳤는데 조심스럽게 자기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하고 묵거는 조용히 물었다.

《나야, 건건이.》

《건건이?》

묵거는 걸쇠를 벗기였다.

건건이가 소리없이 들어왔다.

《아니, 살인이라도 했소? 왜 사람들의 눈길을 기이면서 그러우?》

《쉿! 아래방에서 듣겠네.》

방에 들어선 건건이는 묵거의 입에 손을 가져다대고 잠시 아래방의 동정을 살폈다. 잠자는 소리가 고르롭다.

《웬일이요, 갑자기?》 하고 묵거가 물었다.

건건이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묵거를 바라보았다.

《두령은 있소, 없소?》

《두령은 지금 없네.》

《없다니, 있다고 할 때는 언제고?》

《글쎄 알아보니 이틀전엔가 어디로 떠났다더군. 말갈사람들한테서 사람이 왔댔는데 아마 그들과 함께 간 모양이야.》

《말갈사람?》

《그래, 자네 혹시 말갈사람들을 아나?》

《내가 어떻게 말갈사람들을 아우?》

《그래?》

건건이는 고개를 기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건 왜 묻소?》 하고 묵거가 물었다.

건건이는 다시 눈을 쳐들었다.

《이틀전인가 말갈사람이 여길 묵어갔지? 거 왜 두령을 만난다고 하면서 말이야. 우리보다 먼저 여기에 와있던 사람들 있지 않나.》

묵거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래서?》

《자네, 그들을 모르나?》

《모르오!》

《거참 이상하군… 내 오늘 영채에 들어가 알아보니 그 말갈사람들중에서 한사람이 자네를 안다고 하였다더구만! 자네가 저 구려국 계루부대가의 끄나불이라고 하였다던데?》

《뭐요?》

이건 분명 심상치 않다. 묵거는 말갈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말갈은 구려의 북쪽에 있는 종족들이다. 그들의 세력이 요즘에 와서 커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말갈사람들이 어째서 여기에 얼씬거리는걸가? 묵거는 말갈사람들에 대해 별로 아는것이 없었다. 그만큼 자기를 알아볼 말갈사람도 없을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갈사람은 자기를 정확하게 알아본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일가? 닭알에도 뼈가 있다더니, … 그래서 며칠이 지나도록 두령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구나.

묵거의 표정을 주시하던 건건이가 무릎을 세웠다.

《감쪽같이 빠져나가세, 자세한건 나가서 이야기하지…》

두사람은 밖으로 새여나왔다.

우중충한 산속의 밤이였다.

이미 초저녁의 밤벌레와 새소리도 뜸해졌다.

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빠져나와 어느 한 나무밑에 이르러 건건이는 멈춰섰다. 묵거도 걸음을 멈추었다.

《묵거! 자네가 어디서 무얼 하는 사람인지 난 알려고 하지 않네. 그저 자네가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것만 믿네. 그래서 자네에게 해줄 말이 있어. 사실 우리는 노예부대인데 <검은 칼잡이>부대라고도 하네. 우리 세력은 구려전체에 미치고있어. 우리 두령인 언청이는 구려 5부 귀족들의 솔거노비들과 관노비들을 비밀리에 끌어당기고있어. 장차 일이 날걸세. 이런 말을 왜 해주는지 자네 알겠나? 난 자네도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그 밑바닥을 알아야겠기에 해주는거야. 자넨 날 형이라고 불렀지?

세상에서 그렇게 부른건 자네가 처음이야. 그건 그렇고…

우리 <검은 칼잡이>가 커지는걸 말갈사람들이 알고있네. 그래서 말갈대인 구도라는 사람이 우리 두령에게 서로 통하자고 한거야. 구도대인이 볼줄 알거든. 하지만 그것도 다 정략이라는거야. 구도가 뭘 고와서 우리에게 손 내밀겠나. 구도는 흉칙한 생각을 가지고있는게 분명한데 그 일에 우리를 써먹으려는거지. 구려가 말갈을 앞잡이로 써먹군 하던 수법을 배웠는지. …

하지만 우리 두령도 그걸 모르고있지는 않아. 내가 보건대는 그래. 두령은 말갈과 협력해서 노예주들을 징벌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 우리 두령이 말갈사람들과 내통하지만 싫어하는것도 있네. 그게 뭔가 하니 말갈사람들과 구려의 어떤 귀족이 내통하고있기때문이야. 그가 구려 어느 부의 대감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해!》

묵거는 건건이의 말에서 구려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였다.

구려의 연노부, 계루부지경에서 《검은 칼잡이》들이 활약하며 은밀히 세력을 키우는것은 이미 알고있지만 그들이 말갈과 련결되고 또 말갈은 구려의 어떤 귀족과 련결된다는것은 처음 알았다. 무슨 놈의 갈래판인지 아리숭하다. 다만 일이 심상치 않은것만은 분명하다.

묵거가 생각에 잠겨있노라니까 건건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일세, 묵거, 이제 당장 소리없이 꺼져버리게.》

《뭐요?》

《글쎄, 그렇게 하라니까.》

《아니, 내가 죽을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왜 달아난단 말이요? 난 두령을 만나야겠소.》

《이렇게 답답하다구야. 자넨 잘 몰라서 그래. 여기 법도라는게 노예주건 노예주의 심부름군이건 할것없이 눈에 띄우기만 하면 죽여버리네. 래일 아침이면 자네 목을 따자고 할걸세. 내 귀로 들었네. 하지만 난 자네가 결코 노예주들의 끄나불이라고 생각지 않네. 그러니 이 밤도와 꺼져버리게. 알겠나?》

묵거는 잠자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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