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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부

 

탈 출

 

5

 

례나루가 손녀 을나를 부른지 얼마 안되여 구름을 빠져나온 달같은 처녀가 례나루앞에 뛰여들었다. 얼굴이 젖빛으로 뽀얗고 앵두같은 입술이 반짝거리는 처녀였다.

《부르셨나이까? 할아버님!》 하고 처녀는 풋보리밭우에서 우짖는 청아한 노고지리소리로 물었다.

례나루는 고개를 들었다. 늙은이의 주름잡힌 얼굴이 금시 환하게 퍼졌다. 늙은이에게는 이 손녀가 장중보옥과 같다. 단지 두벌자식이라서만이 아니다. 손녀 을나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숨은 매력이 있다. 그만큼 고이 기르게 되고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옥에 티라고 할지 을나에게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제또래 처녀애들과는 달리 어딘가 사내번지개같은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서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 벌찬 성격마저도 례을나에게는 오히려 그의 아름다움을 보태줄뿐이였다. 지금도 얌전을 빼려는 티는 꼬물만치도 없고 오히려 야광주같이 반짝이는 고운 눈으로 할아버지를 마주보며 분부를 기다리고있었다.

《원, 계집애도…》

례을나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시나이까?》

《응? 아… 아니다.》

《어디가 편치 않나이까?》

《아니…》

《할아버지는 요즈음 참 별스럽나이다!》

《내가?》

《그렇사옵니다.》

《원, 계집애도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니오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이까? 저를 부르시고는 또…》

《아, 그렇구나. 내가 불렀지, 음 그래…》 손녀의 반응석어린 말에 례나루는 책상우에 놓인 책 한권을 집어들며 물었다.

《네가 내 심부름을 해주겠느냐?》

《무슨 심부름이나이까?》

을나는 례나루가 넘겨주는 책을 받아들었다. 그것을 훑어보던 을나의 눈에는 놀라운 빛이 반짝이였다.

《이것은 단군선인께서 훈시하신 <삼일신고>가 아니오이까?》

《허, 네가 알아보았느냐?》

《제가 어찌 이 <삼일신고>를 모르겠나이까? 할아버님께서 어린 저에게 배워주시지 않으셨나이까? 그리고 또 할아버님께서는 얼마나 이 책을 귀중히 여기셨나이까?》

《음, 례나루의 손녀답다. 그래 너는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알고있느냐?》

《알고있나이다. <천훈>, <신훈>, <천궁훈>, <세계훈>, <진리훈> 이렇게 되여있지 않나이까?》

《옳다. 진리를 통달하고 공을 닦으면 죽어 하늘앞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수 있다는게 단군선인의 훈시였지…》

《그런데 이 책을 누구에게 전해야 하오이까?》 하고 례을나가 다시 물었다.

《주몽에게 전해다오.》

《주몽말이나이까?》

《그래. 실은 내가 가져다주려고 했었는데 오늘은 짬을 낼수가 없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시킬수도 없고…》

《제가 가져다주겠나이다.》

손녀가 너무도 흔쾌히 받는 바람에 례나루는 잠시 손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을나야,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몽말이나이까?》

《그래.》

《저… 저는 모르나이다.》

을나는 물기를 머금은 앵두입술을 잘근히 깨물며 얼버무렸다.

례나루의 눈길이 꼿꼿해지며 손녀의 붉어지는 얼굴을 더듬었다. 전에 없던 일이다. 도대체 저 을나가 수집음을 타는것부터가 수상쩍다. 평시에 좀해서는 볼수 없는 일이였다. 저 애가 혹시 주몽을 련모하고있는게 아닐가?

《너는 모르쇠 하지만 네 얼굴은 다 말하고있느니라. 이 할애비를 속일 생각일랑 말아라.》

《저…》 하며 례을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례나루는 속으로 피는 웃음을 감추고 짐짓 놀라운듯 물었다.

《아니, 한갖 규방처녀가 어찌 목동을 련모할수 있느냐? 허, 변괴로군… 그래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느냐?》

《저, 그건…》

을나는 도톰한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주몽이 나에게서 3년동안 무예와 학문을 착실히 닦는다고 했더니 딴전을 부렸구나. 무예와 학문을 하면서 처녀를 넘겨다봐?》

을나의 얼굴이 익은 꽈리로 변해갔다. 어찌나 붉어지는지 금시 빨간 물이 튀여나올듯 싶었다.

《아니, 그이는 모르오이다. 저 혼자…》

을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례나루는 더이상 손녀를 다긋는게 맹랑하다고 생각하였다. 분명 손녀의 가슴속에는 누구도 모르게 주몽에 대한 련모의 싹이 자라고있는게다. 주책없는 꼬챙이질로 손녀의 부푸는 가슴에 자리잡은 봄망울을 파헤치고싶지 않았다. 무릇 사나이의 가슴에는 천하가 깃들고 처녀의 가슴에는 그 사내가 깃드는 법이다. 사나이의 가슴에 깃든 웅지는 당당히 헤쳐 영웅의 값을 사겠지만 처녀의 가슴에 깃든 정은 그 무엇으로 살수도, 꺾을수도 없는것이다. 아무리 무엄한 할애비앞이란들 어찌 그것을 스스럼없이 펴낼수 있으랴.

《참 인연이란 묘하군…》

례나루는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을나야, 이 <삼일신고>를 주몽에게 전해주지? 그에게 내가 이미 <단군교8리>는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을나의 굳어지던 낯이 비로소 풀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실>, <신의>, <사랑>, <구제>, <복락>, <불행>, <보은>, <응답>의 8리말이나이까?》

《허허, 녀석… 그래 그래…》

《알겠나이다. 할아버님의 분부를 기꺼이 받겠나이다.》

《오냐.》

례나루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례을나는 풋망아지마냥 방을 뛰쳐나갔다.

《주몽은 소부리언덕 근처에 있을게다.》 하는 례나루의 목소리는 어느새 자기의 방안문을 열고 들어가는 을나의 등에서 울렸다. 자기의 방에 들어간 례을나는 덤벼치며 면의를 입고 청동거울을 집어 자기의 모습을 슬쩍 비쳐보고는 뜨락으로 나왔다. 마구간에서 과하마를 끌어내여 타고 말구종도 없이 집을 나섰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간밤에 온 비로 미역을 감은 산천은 한결 싱싱하였다. 례을나는 머리우로 쪼롱쪼롱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새떼를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처녀의 가슴은 햇구름마냥 뭉게뭉게 부풀어올랐다.

키는 작아도 날래고 힘센 과하마는 오늘따라 들떠있는 을나가 놀랍다는듯 큰 눈을 디룩거리며 귀바퀴를 쫑긋거렸다.

을나는 과하마의 갈기털을 쓸어주며 친우에게나 하듯이 중얼거렸다.

《하마트면 할아버지앞에서 터놓을번 하였지 뭐 큰일날번 했지, 응? 정말이야! 호-》

코살을 찡그려보이는 을나의 눈앞에는 주몽을 련모하느냐 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 혼날번 했어…》

주몽은 을나 혼자만이 간직하고있는거다. 그 누구도 알아차려서는 안돼! 거칠것없이 보이던 을나에게 생겨난 이 야릇한 거리낌은 봄날의 대지에 피여오르는 아지랑이였다. 이게 뭘가? 누구에게나 숨기고싶고 그래서 오직 저 혼자만 두고두고 누리고싶은 이 마음, 그려보고싶고 만나보고싶은 마음이 쏜살이 되여 날아가는, 이게 무엇인지. 례을나는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가지는 세개요

      잎은 다섯인데

      해빛이 가리운

      음달에서 산다오

      나를 찾으려거든

      단나무밑을 살펴보시라

 

언제인가 할아버지가 배워준 노래였다. 저 남쪽의 구려사람들이 부른다는 인삼노래가 어째서 을나의 입에서 떠날줄 모를가?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그 많은 노래중에서 그 인삼노래가 샘물처럼 퐁퐁 솟구치니 이상하지? 을나는 눈감고 아웅하는거다. 인삼노래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주몽이 아닌가?

해빛이 가리운 음달에서 살아도 귀하디 귀한 인삼! 바로 그게 주몽이 아니던가? 새빠진 소리, 아니 그런게 아니다.

주몽은 목동이다. 그런 총각을 사랑한다고 하면 세상은 얼마나 놀랄가? 삶과 죽음의 나락만큼이나 넘기 힘든 그 지경! 하지만 례을나는 그 지경을 비웃으며 선뜻 저쪽 나락으로 발을 딛고 팔을 벌린것이다. 아무리 뭇사람들이 비웃고 아우성쳐도 례을나에게는 그 지경이 아름다운것을 어찌하랴. 봄날의 대지처럼 부푸는 처녀의 가슴은 사랑하지 않으면 못 견딘다. 바로 그 사랑은 주몽이였다. 하늘을 우러러 우뚝 선 주몽의 모습은 을나에게 비쳐진 어쩔수 없는 해님이였다. 그에게만 갈수 있다면 권세와 부귀를 다 버린대도 행복한것이다. 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쳐도 을나는 마다하지 않을것이다.

자기가 철없는 계집애여서 그런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떤 반발심이 일어나 례을나의 가슴을 뛰놀게 하였다.

인삼노래는 그 반발을 부추기며 어두워지려는 마음을 몰아내는 향기였다.

 

       …

      해빛이 가리운

      음달에서 산다오

      나를 찾으려거든

      단나무밑을 살펴보시라

 

주몽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것은 바로 례을나자기만이 알고있다. 넓으나넓은 세상이 한갖 목동으로 알고있는 그를 례을나 자기는 다르게 안다. 자기만이 알고있다고 믿고있는 주몽의 그 참됨과 억세인 기상을 례을나는 버릴수 없다! 버릴수 없는 그 매혹은 언제부터 시작되였던가? 례을나는 가벼운 숨을 내쉬며 그때를 더듬었다. 그것은 삼년전 《영고》때였다.

쿠- 쿵, 쿵…

천둥같은 북소리가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우로 퍼져갔다. 형형색색의 인파가 아글바글거리여 귀가 멍멍하고 눈앞이 핑- 핑 돌았다. 을나는 자기가 어떻게 이 《영고》구경을 나왔는지 알수 없었다. 어리벙벙해서 내키는대로 흐르던 을나의 눈길이 문득 저쯤 앞에 있는 한 아이에게 멈추어섰다. 열두살 났을가? 어느 촌에서 굴러온것이 분명한데 녀석은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풍맞은 놈처럼 우뚝우뚝 놀란다. 그 모양이 어쩐지 웃음을 자아냈다. 재미있는 아이였다. 곰팽이가 푸르스름하게 낀데다가 우글쭈글해지고 털이 빠진 마고자를 입고 머리가 수팜송이처럼 푸수수한 꼬락서니가 볼만 하였다. 녀석은 북소리 울릴 때마다 내우하는 계집이 젖가슴 가리듯 옷섶을 끄당겨놓군 하였다. 그러나 인차 헤자자 벌려지는 그사이로 팥알같은 젖꼭지와 때가 재들재들한 배꼽이 거리낌없이 내다본다.

례을나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간것은 물론 녀석의 차림새나 행동이 우스워서만이 아니다. 그 애의 곁에 얼굴이 해빛에 타 검실검실한 총각이 의젓하게 서있는데 시선이 쏠린것이다. 생김새나 차림새로 보아서는 형제 같지 않은데 어떻게 털부엉이와 따오기가 어울리듯이 나란히 서있는걸가? 《영고》는 참 재미있는 두레마당이다. 저런 기묘한 어울림을 다 보게 되니 말이다. 을나는 구경거리가 생긴것이 은근히 기뻤다. 그는 눈가에 새물새물 꽃을 피우며 그쪽을 지켜보았다.

을나가 바라보고있는걸 모르는 수팜송이녀석은 힐끔힐끔 주위를 살피더니 껍질벗긴 밤알을 냉큼 입에 넣고 오드득 깨물었다. 녀석의 입귀로 젖물이 흘러나왔다. 허지만 녀석은 그걸 씻을념도 않고 헤- 하니 북치는 구경만 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새들켰는지 으윽- 쿡 하며 씹던것을 푸- 하니 내뿜었다. 아뿔사! 녀석이 토해낸 찌꺼기가 희반죽 뿌린듯이 앞사람의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앞사람이 획- 돌아섰다. 요란한 털보다.

《이 쌍놈의 새끼!》 하고 털보는 소리쳤다.

그걸 바라보던 을나는 저도 모르게 탁 웃음이 터졌다. 더욱 우스운것은 아이놈이였다. 털보가 우락부락 끓는 물에 덴 두꺼비처럼 날뛰건만 아이는 이게 왜 이러노 하는듯 한 낯으로 한쪽눈귀를 찌끗거렸다.

《왜 그래. 나도 <영고>구경 왔다구…》

아이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닦았다. 방귀뀐 놈이 제법 큰소리다. 털보와 아이가 티각태각하니 총각이 빙긋이 웃었다. 털보는 총각을 힐끔 보고 다시 수팜송이에게 향했다.

《이새끼. 영고가 너의 에미 젖꼭지야?》

《영고 안다구요. 우리 동네에서두 새벽에 구경왔다니까.》

《알긴 쥐좆을 알아? 에, 영고는 우리 부여국에서 해마다 한번씩 하는 큰 제사란 말이야. 그렇지 않우, 총각? 이 녀석하고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하고 털보가 묻자 총각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히, 쎈데.》

아이는 총각이 머리를 끄덕이는것을 보고나서 털보를 보며 비시시 웃었다. 털보도 제가 한 말이 장해보였던지 새바람들린 황소처럼 웃었다.

이때 북소리가 잦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구작작 모여선 사람들을 헤치며 이마와 가슴에 둥그런 청동거울을 붙인 사람이 한길넘는 박달나무지팽이를 짚고 흰수염을 날리며 나타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쫙 쏠렸다.

《저… 저건 뭐야?》

아이가 눈이 휘둥그래서 쑹얼거렸다.

《쉬-이, 이놈. 어따대고… 제사맡아보는 신선이시다. 말말어.》 하고 털보가 나직이 말했다.

《으응, 그래? 나두 알아…》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의 뒤를 따라 머리에 번쩍거리는 황금쓰개를 얹고 눈부신 비단옷을 걸친 임금과 우가, 마가, 구가, 제가 이렇게 네사람의 대가와 사자, 대사자, 대사 등 벼슬하는 사람들이 따라섰다.

어느덧 북소리가 멎었다. 제관이 제단우에 올라선것이다. 그는 두 팔소매를 떨치며 하늘을 우러러 사방에 절하고나서 뭐라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제관의 웅글은 목소리가 사람들의 머리우로 울렸다. 비귀신-우사, 바람귀신-풍백, 구름귀신-운사, 세 신에게 풍년을 가져다주옵소서 하는 뜻이였다.

그의 주문이 끝나자 다시 북소리가 쿵- 쿵- 울리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웅성웅성했다.

제관이 나오던 길로 머리에 검은 수건을 질끈 동인 장정이 황소를 끌고나왔다. 울긋불긋하게 잔뜩 치장된 나릅짜리 황소가 어찌나 살찌고 잘 생겼던지 누군가의 입에서는 혀차는 소리까지 나왔다. 제단앞까지 끌려나온 황소는 퉁방울눈을 뒤룩거리며 꼬리를 휘- 휘- 저었다. 무척 한가롭고 태평스러웠다.

소를 끌고온 사나이가 코뚜레를 잡고 이마때기를 두서너번 툭- 툭- 치는것 같더니 갑자기 황소가 쿵- 하니 앞발을 꺾으며 넘어졌다. 황소의 앞발이 올가미에 조여진것을 다른 장정이 힘껏 잡아당기자 또 다른 장정이 황소의 뒤다리도 잽싸게 묶었다. 그러자 장정 열대여섯명이 묶이운 황소다리사이에 굵은 통나무를 꿰여 어엿차 하고 메였다. 제관이 뭐라고 소리치니 황소밑에 장작들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장작더미에 제관이 불뭉치를 가져다댔다. 기름을 쳤는지 불이 퍽 일어났다.

을나는 불길이 일어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아-앗 소리쳤다. 찡그린 시선들이 을나쪽으로 쏠렸다. 손등으로 입을 막고 황소쪽을 보던 을나는 저도 모르게 총각에게 눈이 갔다.

총각의 얼굴에서 번쩍하는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눈빛인가 했지만 그런것이 아니다. 입을 꾹 다물고있는 총각의 눈아래로 물기가 보였다. 잘못 보았나? 총각이 울고있지 않아? 울고있다고? 왜? 을나는 눈이 올롱해져서 놀랍게 총각을 바라보았다. 을나의 비명소리를 듣고 이쪽을 바라보던 아이가 《쳇, 그까짓거… 우리 동네에선 소 싸울 때마다 불뭉치를 가져다대는데 뭘…》 하고 으쓱거렸다. 그러던 아이는 총각에게 턱을 돌리다가 머쓱해진다. 녀석도 아마 총각의 눈물을 보았던 모양이였다.

을나는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얗게 잊고 총각만 보고있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건강하고 씩씩해보이는 총각의 마음이 그렇게도 여릴가. 황소가 세괃게 몸부림치며 질러대는 영각소리도, 털타는 노린냄새도, 우들우들 떠는 사람들도 을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총각의 눈물을 보니 저도 모르게 자신도 마음이 이상해지는듯 싶었다.

우지직- 탁

장작타는 소리가 황소의 비명에 삼켜버렸다.

깎은듯이 굳어져 총각의 옆모습만 훔쳐보던 을나는 문득 이상한 비명소리에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총각의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본것도 그때였다. 한동안 을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 아- 큰일났구나. 장정들에게 거꾸로 매달려 불에 타던 황소가 어찌됐는지 길길이 날뛰고있었다. 둘러섰던 사람들이 비단깁을 찢는듯 한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내달리고… 황소는 미쳐버렸는지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뭉개버린다. 을나는 자기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미친 황소를 보고 그만 얼어붙었다. 창졸간에 벌어진 위험앞에 그만 얼이 나간듯 했다. 을나의 옆으로 황소에 받기운 웬 사람이 휙 날아났다.

《비켜라!》

벼락치는듯 한 소리가 울렸다.

을나는 창황중에도 촌녀석의 옆에 서있던 총각이 호랑이처럼 몸을 날리는것을 보았다. 그 순간 총각은 을나의 앞을 막아섰다.

을나는 흰 베옷을 입고 허리띠를 맨 총각의 몸이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흔들리는것을 지켜보며 점점 정신이 혼미해갔다.

잠시후 쿵- 하는 소리와 우-윙 하는 황소의 쇠된 소리사이로 털보가 다가오며 《에, 총각이 아니라면 이 처녀가 래년 이맘때 첫 제사날이 될번 했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우- 하니 몰켜들었다.

다시 황소가 꽁꽁 묶이우고 장정들이 거꾸로 메고 불에 태울 때에야 을나는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것 같았다. 어느새 총각은 사라졌었다. 을나는 부지런히 총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찾을수 없었다. 털보와 그 촌녀석은 그대로 저쯤 앞에 서있는데 총각은 없었다. 을나에게는 꿈을 꾸고난것 같았다.

다시 제사는 계속되였다.

사람들은 방금 있은 공포는 씻은듯 잊어버린듯 싶었다. 아니 서로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털빛이 보기 좋던 황소는 불에 끄슬려 거무스레하게 되여버렸다.

장작불길은 사그라져갔다.

불길이 타는 동안 내내 지켜보던 제관이 철철 흐르는 땀을 닦을념을 못하고 까맣게 탄 황소에게 다가갔다. 긴장해진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과녁에 화살 박히듯 모아졌다. 귀가 멍- 해질 정도로 사위가 조용해졌다.

《왜 그래? 응? 왜 그래?》

아이가 안달아서 털보에게 물었다.

털보는 아이의 귀를 잡아당겼다.

《녀석, 좀 조용해라. 이제 저 제사맡은 어른이 황소발굽을 보고나서 발굽이 붙었으면 길할 징조고 떼졌으면 너나 나나 다 나쁜거야. 알겠어? 이 바보야.》

제관이 황소의 발굽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앞발순서로 네굽을 하나하나 살피고난 그는 하늘로 두팔을 벌리며 발굽이 모두 합해져있노라고 웨치였다.

그러자 사람들의 터질듯 한 함성이 일어났다. 금와왕과 제가, 대신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숨이 새여나왔다.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것 같아 얼결에 고개를 돌리던 을나는 사람들이 모여선 저쯤 변두리에서 총각의 모습을 보았다. 을나가 다가가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례나루의 문하에서 배우는 협부가 다가왔다. 그뒤로는 오이와 마리가 서있었다.

《을나, 여기서 뭘 그리 보고있는거야?》

《참, 협부오빠가 때맞춰 왔네.》

《때맞춰 오다니?》

《협부오빠, 저기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나?》

협부는 례을나가 가리키는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말이야?》

《저기, 저 사람들이 몰켜선 그 변두리에 있는 사람.》

을나의 손길을 따라가던 협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주몽형이 아니야?》

《주몽형?》

《그래.》 하고 대답한 협부가 마리와 오이쪽으로 돌아섰다.

《여보게, 마리, 오이. 저기 주몽형이 있구만.》

《뭐? 주몽형이? 어디?》

마리와 오이도 협부가 가리키는쪽을 바라보았다.

《옳구만! 주몽형이야!》 하고 마리가 소리쳤다.

《주몽형이 옳지?》 하며 협부가 큰소리로 부르려는데 마리가 협부의 어깨를 쳤다.

《여보게, 협부, 그만하게. 사람들이 보네.》

협부는 마리의 얼굴을 쳐다보고나서 주위를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마리, 오이, 협부는 그때부터 잠자코 있었다. 그들은 지금 한창 죄수들을 내놓는 영고의 판결을 구경하는척 하였다.

을나는 그들 세사람의 태도가 의아했다. 어째서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걸가?

을나는 협부에게 다가갔다.

《협부오빠, 저 사람을 알아?》

《알지…》

《누구야? 주몽이란 어떤 사람이야?》

《응, 저… 주몽형은 금와임금님의 목동으로 있는데…》

《목동?》

《그래, 그쯤해둬…》

협부는 당황해하며 얼버무렸다.

《그런데 목동을 가리켜 어떻게 협부, 오이, 마리오빠들과 같은 명문자제들이 형이라고 부르나?》

《을나, 거 딱하게는 구네. 나이가 우이니깐, 그리고…》

마리와 오이는 협부와 을나의 이야기를 못들은척 하고있었다.

《영고》국중대회에서 죄수들까지 놓아주고나자 북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러자 제가끔 가져온 망태기며 자루에서 음식들을 꺼내먹으며 사람들이 떠들썩하였다. 오늘의 이채로운 화제는 다시 황소소동과 미친 황소를 단숨에 휘여잡은 총각인듯 했다.

대주연이 시작되였다.

북소리, 슬(악기)소리에 맞추어 춤과 노래가 펼쳐졌다. 춤군들은 두팔을 너펄거리고 발을 구르며 신나게 춤을 추었다. 이제부터 며칠동안 즐겁게 마시고 노래부르며 춤출 판이다. 인생은 이런 멋이다. 슬픔도 기쁨도 고생도 락도 있는게 아니냐? 어느덧 방금전의 소동도 다 잊은듯 했다.

영고는 영고다.

을나는 마리, 협부, 오이가 뭐라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온다간다없이 슬그머니 사라지는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춤추며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다가 을나는 아까 미친 황소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총각을 다시 찾아보았다. 떠들썩한 사람들틈에 끼우지 않고 점도록 우두커니 서있던 주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얼핏 을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로 깎은 소, 말, 돼지, 개 등 짐승들의 커다란 우상들을 떠메고 도성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을나는 주몽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켰다.

주몽! 목동이라고 했지? 천하를 호령할만 한 기상을 지닌 사나이가 어쩌면 영고제사때 희생되는 황소를 보고 눈물을 흘렸을가? 목동의 동정일가? 아니면 그 사나이는 정이 무른 사람이란 말인가? 눈물이란 녀자들의 정표라고만 생각해온 을나에게서 사나이의 눈물은 정녕 뜻밖이였다. 을나는 그후에도 미친 황소를 휘여잡던 주몽보다 눈물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기를 발견하군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사나이의 고요한 눈물이 한창 부푸는 처녀의 가슴에 파고들어 풋풋한 새싹을 움트게 하는 한방울의 비가 되는줄은 을나자신도 몰랐다. 그후 주몽은 할아버지의 문하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을나는 여러번 주몽을 만나 그를 눈여겨보며 가슴설레이군 하였다. 그러다가 오늘 또다시 할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그를 만나게 된것이였다. 을나의 봉긋하게 부푼 가슴은 퍼덕거리는 새새끼를 품고 어쩔줄 몰랐다.

을나가 생각에 파묻혀있는 사이에 과하마는 길을 벗어나고있었다. 산딸기가 무성하게 엉킨 덤불곁을 지나 찔레꽃이 피여난 어방에서 멈추어섰다. 찔레꽃나무밑으로 음달이 졌는데 이끼가 파랗게 덮인 돌들이 있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돌돌 흐르고있었다.

아마도 과하마가 그 물을 마시려고 여기까지 들어선 모양이다.

말이 물을 마시는 동안 잠자코 있던 을나는 인적에 놀라 머리를 들었다. 을나가 가려는 소부리쪽에서 두필의 말이 달려오고있었다. 처음에는 여느 길손이겠거니 하여 방심하려던 을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피끗 본 모습이 이상하였다. 말을 몰고 오는 두사람의 모습이 낯익었다. 앞장선 사람은 몸집이 작은 아이였고 그뒤에서 말을 몰고오는 사람은 먼발치에서 대뜸 알리는 털보였다. 저 사람들은 어디선가 보았는데… 어디서? 아, 그렇지! 영고때 본 그 수팜송이와 털보가 아니야?

을나의 얼굴에 미소가 피여났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그들이 어딘가 겁을 먹은듯 한 황급한 모습이다. 무엇에 쫓기듯 당황해하는걸 감촉한 을나는 별안간 긴장해졌다.

저들이 어떻게 소부리쪽에서 오며 또 왜 바빠하는걸가? 을나가 알건대 주몽이 방목하고있다는 소부리쪽에서 오는 저 사람들은 주몽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들이다. 혹시 다른 길에서 접어든것이 아닐가?

을나가 그들을 유심히 보고있는 사이에 어느덧 눈앞에까지 다가왔다.

말갈기털에서 수팜송이머리를 오르락내리락 자맥질하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건 나쁜짓이 아니야?》

그러자 털보가 말채찍을 쫙 갈긴다.

《이놈 주둥이를 조심해. 누가 들을라.》

《체, 나쁜짓이 아니야?》

《몇번이나 말해야겠어? 나쁜짓이 아니라고…》

그들은 을나가 지켜보고있는것도 모르고 어느덧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으로 지났다.

《야, 이 바보야. 너도 봤지. 그 목동초막에 누워있는 사람말이다.》

《그게 어쨌어?》

《바로 그게 내가 알고싶던거야? 그 사람은 정신을 잃고있지만 대소왕자가 찾고있는 사람이 분명해.》

《왕자?》

《응, 이 사실을 알려만 주면 왕자님이 한턱 낼거야.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찾으려고 눈을 밝히고있어. 우리가 찾아냈으니…》

《피, 바보…》

《누굴 보고 바보래? 바보가 누굴 보고?》

그들은 나타났던것처럼 을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목동의 초막에서 정신잃은 사람을 봤다고? 왕자가 찾는 사람? 알쏭달쏭한 그 소리를 되새겨보던 을나는 과하마를 쳐몰았다. 소부리언덕에 이른 을나는 서둘러 주몽을 찾아보았다. 을나는 언덕아래서 풀을 뜯고있는 말떼들사이에서 주몽을 발견하였다.

을나를 발견한 주몽이 반가운 낯색을 지었다.

《을나, 어떻게 여길…》

《할아버지가 책을 가져가라고 해서 왔소이다.》

《그래?》

《참, 오면서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듣자니까 목동의 초막에 낯선 사람이 정신잃고있다고 하오이다.》

책을 받고 벙글벙글 웃음이 피여오르던 주몽의 얼굴이 을나의 말을 듣고 놀란다.

《누가 그럽디까?》

《어느 <영고>때 수팜송이와 털보가 있지 않았나이까? 그들이 무슨 대소왕자가 찾는 사람 뭐라고 했소이다.》

주몽은 을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오추마를 몰아치며《을나, 나를 따라오우.》 하고 소리쳤다.

을나는 주몽을 따라 바삐 갔다.

초막에 이르러 주몽은 황급히 그안을 들여다보고나서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이까?》

《을나, 사실 어제 시위군사들에게 쫓기는 한사람을 내가 숨겼소.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지독하게 당했는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려.》

《그럼 그 털보가 말하던 사람이 초막에 있는…》

《그렇소. 이제 대소왕자가 알게 되면 당장 여기로 달려오겠는데… 가만, 을나. 그 털보를 어디쯤에서 만났소?》

《저기 샘터있는 곳에서…》

을나가 가리킨 곳을 살피던 주몽이 다시 오추마에 급히 올랐다.

《을나, 안됐지만 여기 좀 있소. 내가 그 털보를 만나보겠소.》

주몽이 떠나간 다음 을나는 초막앞에 서있었다.

간간히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을나는 조심스럽게 초막안으로 들어갔다. 파리가 윙윙 날아났다.

을나는 험상궂게 부어오르고 터갈라진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그만 손등으로 입을 가리웠다.

참, 끔찍도 하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상했을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을나는 더 참지 못하고 초막밖으로 나왔다. 물을 떠다 상한 사람의 얼굴이라도 닦아주고싶었다.

이때 말발굽소리가 울리더니 주몽이 나타났다.

《어떻게 됐나이까?》

《다행히 털보를 만나 설복은 시켰소. 우물쭈물하면서도 자기는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하더군. 왕자에게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을나,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하겠소.》

《어디로 옮기겠나이까?》

《적당한 곳이 한군데 있소.》

《저도 따라가겠나이다.》

《그러지 마오. 을나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오. 그리고 어련하겠지만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해서는 안되오.》

《알고있나이다.》

을나는 주몽이 낯선 사람을 말에 태우고 사라지는것을 바라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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