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 회)
하 편
15. 오, 조상의 땅이여!
6
새 임금 왕흠은 감찬이 은퇴를 요청해오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개부의동삼사, 주충협모안국봉상공신칭호와 특진검교태사, 시중벼슬을 내리고 천수군, 개국후의 작위와 식읍 1천호를 주었다.
당시로서는 이만한 벼슬관직과 작위, 식읍을 한꺼번에 받은 례가 드물었다.
임금은 16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조금도 어린 티를 내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조정을 장악해나갔다.
자랄 때부터 그는 나이에 비해 숙성하였는데 성격이 강의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문무에 밝아 대신들의 평이 좋았다. 장대한 체구에 무예도 남달랐는데 공중걸이로 날아서 궁성담장우에 올라서면 대번에 기와장이 깨여져나가고 길이가 아홉자 반이고 무게가 열여덟근 나가는 무거운 삼지창을 한손으로 꼬나들어 올리는 완력을 지니였었다.
정사에 한해서도 그는 전 임금이였던 아버지(현종)가 규정해놓은 기률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지켰으며 원로들인 서눌(서희의 아들이다.), 최충 등을 신임하여 내세우고 아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근검과 절약을 장려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서로 기만하고 시기하는 일이 없었다.
백성들은 평온한 생활을 누렸으며 변방수비를 나간 군사들은 기한을 연기하면서 나라방비에 헌신하는 의로운 상무기풍이 서있었다.
그가 원인 모를 불치의 병에 걸려(암으로 판단된다.) 삼년밖에 룡상을 지키지 못하였지만 그의 임기기간에 북방은 안정되고 거란은 말할것도 없고 녀진, 철리국에서는 예전처럼 임금의 생일을 비롯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공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나라의 위풍이 당당하였다.
덕종(왕흠)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덕종의 동생 정종(고려 제10대임금 왕형)도 나라의 부흥과 안녕을 도모하는데 미흡한 점이 별로 없었다.
최충은 덕종때에는 중추원사로, 정종때에는 참지정사, 내사시랑 평장사, 문하시랑 평장사로 있었으며 문종이 즉위한 후에는 문하시중이 되여 나라정사를 주관하였고 말년에는 중서령이 되여 임금을 보필하다가 1068년에 눈을 감았다.
그가 4대왕조를 받들어 나라정사에 재능을 발휘할수 있은것은 감찬의 숨은 노력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감찬은 이전에 김부와 최지몽이 최승로와 서희 등을 특별히 발탁시켜 국가의 기틀을 떠받치게 한것처럼, 서희가 감찬
자고로 현명한 임금밑에는 현명한 신하들이 있는 법이다. 인재를 잘쓰면 나라는 흥하고 인재를 바로 찾아쓰지 못하면 기필코 망하는 법이다.
강감찬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최충을 불렀다.
《내가 살아온 한생의 경험과 교훈을 추려서 후대들에게 참고가 될가 하여 책을 쓴것이니 받아두게.》
감찬은 부피두터운 책꾸러미 두개를 내놓았다.
하나는 《락도교거집》 , 다른 하나는 《구선집》이였다.
《락도교거집》은 제목그대로 즐거운 인생길이 되게 하는 지침서란 뜻이고 《구선집》은 착한 소행을 모아 전하니 이를 본받아야 하리라는 뜻이다.
최충은 감찬이 넘겨주는 저서를 정히 받아안았다.
그의 한생이 비껴있는 책이였다. 선대 조상들이 동방일각에 솟구어 올린 통일국가의 위용을 유감없이 지키고 그 부흥번영을 위해 로심초사 헌신해온 파란만장한 강감찬의 한생이 고려국의 력사와 더불어 자자구구 새겨져있는 책이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들은 후세에 그 원문이 전하여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제목만 보아도 짐작할수 있는바대로 이 책들에 겨레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선대들의 무훈과 위훈이 담겨져있고 후대들이 본보기로 삼고 따라야 할 인생의 진리, 애국의 진리가 담겨있을것이였다.
나라의 부흥번영은 부국강병에 의해 담보된다는것을, 부국강병이야말로 겨레가 살고 나라가 지켜지는 근본의 국사라는것을.
자기의 한생을 즐겁게, 긍지롭게 추억할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한생을 즐겁게, 긍지롭게 추억할수 있는 사람은 생을 떳떳하게 산 사람이기때문이다.
강감찬은 세상에 나서 나라를 위하고 겨레를 위하는 애국의 큰걸음을 걸은 사람이다. 조정의 웃렬에서 여러 임금의 대를 거쳐가며 거란오랑캐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상이 물려준 이 땅을 지켜내고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고려황제국의 지위를 지켜냈다.
감찬은 신분의 귀천과 빈부의 차이를 초월하여 한덩어리로 뭉쳐 나라를 지켜낸 고려군민의 애국항전의 선두에서, 지휘탑에서 자기의 온넋을 깡그리 바친 장한 애국남아이고 군사전략가, 정치가였다.
강감찬은 남에게 무릎굽힘하고 비굴하게 연명하는 그런 나라를 추호도 용납하지 않은 사람이였다. 당당하게 머리를 비껴들고 배심있게 살아가는 그러한 나라를 바랐고 그렇게 되게 하였다.
감찬이 자기의 한생을 통하여 후대들에게 물려준것은 단순한 조상의 땅이 아니라 겨레의 존엄이 지심깊이 뿌리내리고 창공높이 서리발을 치는 그러한 정신이였다.
강감찬은 한점 부끄러움없이 긍지로움으로 충만된 생을 자부하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날은 1031년 그가 84살이 되는 해 8월 을미일(17일)이였다.
감찬이 그토록 사랑하고 그토록 정열을 다해 지켜낸 어머니대지는 장한 자기의 아들을 포근히 품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