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 회)
하 편
15. 오, 조상의 땅이여!
5
또 한해가 지나갔다. 새해 1030년 정월초에 흥료국에서는 원외랑 고길덕을 또다시 고려에 들여보내여 원병을 요청하였다.
요청문에는 그동안 고려에서 지원해준 병쟁기와 화살들이 큰 도움이 되였다며 우선 감사를 표하고나서 보다 많은 지원을 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이 요구하는것은 고려군의 직접적인 출병이였다. 이미전에 들여보낸 고려군장수들과 군사들이 싸움을 잘하고있다면서 더 많은 인력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고있었다.
고려조정에서는 론의를 거듭한 끝에 서북방 수비군사들로 발해원정군을 조직하여 출병하도록 조처하였다. 정식 지원군의 명목으로가 아니라 변방군사들이 자의로 출전한것이라는 외피를 씌워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정작 출병을 허용하자 탄원자들이 예상외로 늘어났다. 발해유민후손들은 물론이고 고려 본토배기출신들속에서도 출병하는 군사들이 떼를 지어 압록강을 건너갔다. 이들은 간난신고끝에 동경까지 도달하여 흥료국의 동경성방어에 합류하였다. 흥료국군사들은 심주(심양)성함락작전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다시 남하하여 동경성을 차지하고 방어에 전념하고있었다.
하지만 고려군사들의 출병을 눈치챈 거란측에서는 황황히 항의사절을 보내여왔다.
거란은 고려군의 출병이 고려조정의 결정에 따른것이 아니고 변방군사들의 자발적인 지원이라는것을 통고받자 무슨 수를 써서도 막아줄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고려조정에서는 채충순을 서경 류수사로 임명하여 서북방방위군의 《무질서한 군기》를 바로잡도록 조처하였다.
한편 흥료국의 대연정은 비록 소극적이긴 하지만 고려군의 지원출병에 대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의를 표하여왔다. 동녀진의 모일라, 만투, 소물개 등 추장들을 내세워 례방하게 한것이였다.
이해 4월에 접어들어 들판에 풀이 돋기 시작하자 거란군은 군사들을 솎아 집으로 보내여 방목을 하게 하였다. 유목민들은 여름절기를 놓쳐서는 안되는 사정이 있었던것이다.
흥료국군사들은 이 기회를 리용하여 력량을 재정비하고 완강한 방어에 들어갔다. 어떻게 해서든 한번 일으켜세운 나라의 존재를 유지해보려는것이였다.
거란군은 일단 자제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8월에 들어서기 바쁘게 마지막총공세를 들이대였다.
흥료국군사들은 죽기로 싸웠으나 거란군의 끈질긴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마지막까지 발해유민편을 들어 항전에 참가하고있던 한족출신장수 양상세는 이길 전망이 보이지 않자 거란군과 내통하고 동경성 남쪽문을 열어주어 거란군이 성을 함락할수 있게 하는 배신행위를 저질렀다.
9월 중순무렵 흥료국은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근 1년간의 항전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고구려, 발해유민들의 불굴의 애국정신을 다시한번 시위하였다.
일단 싸움이 멎자 발해유민들이 물밀듯이 고려지경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록에는 이 시기에만도 삼사만의 발해군사들과 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해온것으로 기록되여있다.
임금과 마주앉은 감찬의 얼굴엔 형언할수 없는 비애가 비껴있었다.
《시중어른,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정말이지 괴롭기 그지없소그려.》
석달전에 임금은 감찬에게 문하시중벼슬을 더 내리였었다.
《너무 상심 마옵소서. 페하탓이 아니오이다.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페하의 심신이 대단히 약해지셨소이다.》
아닌게아니라 임금은 이해에 들어와서 자주 병석에 들군 하였다.
《상심을 안하게 되였소? 후대들이 우리를 보고 무어라 하겠소?》
《어찌겠소이까. 그네들이 당대사람들만큼 현실을 겪어보지 못한 이상 우리를 타매해도 할수 없는 일이오이다. 싸움이란것이 대체로는 력량상 대비에 많이 좌우되는것이온데 우리 고려보다 세네배는 큰 거란을 그것도 지경밖에 나가서 구축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잖소이까.》
《그걸 리해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아, 내 한점 부끄러운것이 있다면 동족의 국가가 일떠선것을 지탱케 하지 못한것이요.》
임금은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쏟았다.
《…》
감찬은 더 이상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였다. 실은 감찬의 가슴도 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적아의 력량대비가 너무도 엄청난 차이였던것이다. 그보다 흥료국이란 존재가 너무도 기초가 약했던때문이였다. 거사를 주도한 대연림자체가 한족들과 녀진족들을 자기 혈족들처럼 걷어쥘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데다 일으킨 나라를 유지할수 있는 충분한 지반을 닦아놓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일어난때문이였다.
아아, 조상을 볼 낯이 없구나!
감찬은 신음소리를 내였다.
다음해인 1031년 5월 임금은 끝내 쓰러졌다.
의술로는 고칠수 없는 병마가 아직 한창 나이인 그를 쓰러뜨린것이였다.
이달 신미일에 임금은 태자 왕흠을 불러 왕위를 넘겨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40세, 재위년수는 22년이였다.
태조 다음임금들중에서는 이때까지 제일 오랜 기간 룡상을 지켰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한번 보고들은것은 잊는 법이 없은 그였다.
너그러운 인품에 사고가 민활하였으며 진중하면서도 사려가 깊고 여유가 넘치였었다.
전대(목종)에 루적되여있던 사치와 랑비를 근절하고 솔선 근검절약하며 문란하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오만무례한 거란오랑캐의 코대를 꺾고 고려국의 위상을 내외에 당당히 떨친 임금이였다.
강감찬은 애석한 마음으로 현종의 령전에 허리굽혀 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