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 회)
하 편
15. 오, 조상의 땅이여!
2
《동생, 자네 이게 웬일인가?》
감찬은 병석에 누워있는 강쇠를 보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나으리, 이놈때문에 걸음을 하시다니요.》
《서경형편도 보는겸 왔네. 자네 이 지경이 되도록 왜 소식 한장 없었나?》
《바쁘신 나으리께 페를 끼칠가보아서요. 대신 이렇게 손자도련님들이 오시지 않았소이까.》
…
감찬은 그제야 강쇠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있는 세 젊은이를 알아보았다.
《할아버님! 그간 무고하셨소이까?》
일시에 절을 하는 세 젋은이는 바로 감찬의 손자들인 강농인, 강공인, 강상인이였다.
《너희들이 웬일이냐?》
《제가 걸음을 시켰소이다. 도련님들을 보고싶어서요.》
《그런가?!》 감찬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용쿠나! 그런데 너희들은 서경으로 오면서 개경에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이 할애비가 보고싶지 않더란 말이냐.》
감찬은 짐짓 손자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그것은 겉치레말일뿐이였다.
평소에 감찬은 집안의 그 누구도 개경 대궐은 물론 대궐밖의 초당에도 얼씬 못하게 하였었다. 나라의 벼슬을 하는 사람은 친인척일수록 멀리해야 부정과 비행을 범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있는 감찬이였다.
왕가계렬이 아닌 그 어느 신하도 조정안에 가계일족이 겹으로 있어서는 안된다는것이 감찬의 지론이였다. 혈족붙이들이 정사일을 보는 자리에 같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융화를 하고 싸고돌수 있으므로 공정하게 일처리를 할수 없다는것이였다.
감찬의 아들인 강행경만 놓고보아도 임금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들이 과거를 보도록 권고하였고 아니면 세습법에 따라 벼슬품계를 내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감찬은 이 일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 행경이 과거를 보았으면 하는것자체를 애초에 잘라버렸을뿐아니라 그 어떤 품계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너는 네가 나서자란 고향땅을 잘 다스려도 성공한 인생이다.
나라를 흥하게 하는 일은 꼭 벼슬자리에 올라야만 하는것이 아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것 이상 중요한 일이 없으니 너는 농사일과 장공일, 장사일이 잘 펴이게 하는 리치를 터득하고 그 일이 잘되도록 하는데 전심전력하거라.
이것이 감찬이 아들 행경에게 그어준 인생과제였다.
행경이란 이름자체가 갈 행자에 지날 경자라 말을 타고다니는 벼슬아치가 아니라 제 발로 걸어다니는 일군이라는 뜻이니 이는 곧 남이 만들어 받쳐주는것을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라 제 손발을 놀려 남을 먹여주는 사람이 되라는것이였다.
사내대장부로 났으니 무예는 익혀두되 란시에만 쓸것이고 그외에는 헛눈 팔지 말고 작게는 땅을 뚜지고 곡식을 가꾸어 낟알을 거두며 크게는 고향땅의 치산치수를 잘하여 나라의 본보기가 되게 하라 하였었다.
강감찬의 아들 강행경은 부친의 이러한 뜻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지켜왔다. 그는 세 아들에게도 아버지 강감찬의 이러한 뜻을 좇아 인생행로를 그어주었다. 맏이 강농인에게는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는 일을, 둘째 강공인에게는 쟁기를 벼리고 도기를 굽는 일을, 셋째 강상인에게는 장사일 즉 물물교역일을 터득하고 각기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감찬이 정해주고 행경이 지켜온 가문의 법도와 가풍은 조정안은 물론이고 궁성밖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흔치 않은 일이라 평판이 자자했다.
사람들은 전란이 끝난 뒤에 몇해째 풍년이 계속되여 백성들이 안착되고 나라가 평온한것이 강감찬의 공덕으로 이루어진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하지만 감찬은 자기
이런 감찬의 가문내속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강쇠는 감찬의 자식들에게 여간 왼심을 쓰지 않았다. 자식이 없는 강쇠는 감찬의 아들, 손자들을 자기 자식으로 여겼고 한뉘 정을 주어온 이들을 살아있을 때 한번 더 보고싶어 찾은것이였다.
강쇠는 감찬의 손을 잡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죽화를 먼저 보낸것이 아쉽소이다. 생각나시오이까? 이전에 병법을 줄줄 외우던 그 처녀애를…》
《생각나고말고. 동생이 딸삼아 손녀삼아 데리고있던 그 애 말이지?! 그 애가 기미년(1019년) 거란군과 싸울때 전사하였다고 했지.》
《그 애의 묘소가 구주성 봉화터아래에 있소이다. 제 아비의 묘와 나란히 있소이다. 오늘따라 그 애 얼굴이 자꾸 떠오르오이다, 나리!》
《내 이번 걸음에 꼭 찾아가보겠네.》
《고맙소이다. 나리도 이젠 힘이 드실터인데…》
《이보게 동생, 자꾸 나리라고 부르지 말게. 나를 형이라고 부르라지 않나. 자, 한번 불러보게, 어서!》
감찬은 강쇠가 마지막림종의 시각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렸다.
《마음속으론 가끔 불러보았소이다. 내 이 무슨 망녕된짓이냐 하면서도요. 세상에 나서 내가 제일 존경해온분이신걸요. 스승이옵지요. 하지만 나도 형이 있었으면 했소이다. 나리는 나의 스승이옵고… 형님이옵니다, 형님!》
《동생!》
《형님…》
강쇠의 두눈에 눈물이 고이였다.
하지만 여한이 없는 미소가 비꼈던 그의 두눈은 인차 스르르 감겨버렸다.
《동생, 강쇠동생!… 동생아!…》
감찬은 강쇠의 두볼을 싸쥐고 목메여 부르짖었다.
…
강감찬은 지금 구주성 봉화터에 올라있었다.
죽화의 시신이 안장되여있는 봉분우엔 초록빛잔디가 유난히 반짝이고있었다.
젊은 봉화지기가 부어주는 술잔을 들어 상돌우에 올려놓은 감찬은 무릎을 꿇고 정히 머리를 숙이였다.
(강쇠동생, 내 자네 대신 죽화를 찾아왔네. 자네의 마음까지 합쳐서 술을 붓고 절을 하였네. 이 나라를 지켜 애젊은 청춘을 바친 렬사앞에 백발의 이 로구인들 어찌 머리를 숙이지 않을손가!)
감찬은 봉화지기젊은이가 말해주는 죽화의 위훈담을 들으며 격해지는 감동을 금할수가 없었다.
죽화는 강쇠에게 떼를 써서 끝내 군복을 입었었다. 강쇠의 호위군졸로 있는다는 전제로 군영에 들어간 후에 얼마 안 있어 구주성 수비군사로 자원해갔다. 강쇠에게 편지 한장 남겨두고 오밤중에 떠나가버리였다.
강쇠는 그만 두손 들고 나앉고말았다. 죽화가 남복을 하고 녀자애인것을 숨기고있는것을 아는 강쇠로서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가 걱정이 되였지만 그를 찾으러 구주성까지 갈수도 없었다. 강쇠는 평양성 군사였기때문이였다.
그가 분명 자기 아버지가 싸운 곳인 구주성으로 갔을것이지만 그곳에 알려서 돌아오게 할수도 없었다. 처녀애인것이 탄로나서 아예 입대한것이 수포로 돌아갈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죽화가 구주성에 들어간지 두달만에 거란군의 세번째 침입이 개시되였다. 죽화는 거란군이 구주성을 50여리 에돌아 남으로 내려가고있는것을 알고는 구주성에서 또다시 탈출하여 적을 찾아 떠나갔다.
지금 여기 구주성 봉화지기로 있는 젊은 총각이 함께 따라갔다. 총각도 거란군의 2차 침입때 죽화처럼 아버지를 잃은 처지였다. 그는 죽화와 가까이 어울리다나니 그가 처녀인것을 남먼저 알아차리고 죽화의 보호자가 된것이다.
이들은 소배압이 개경으로 진공해가는 부대의 후군서렬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적과 맞다들리였다.
고개마루에서 내려다보니 고려군은 거란군의 앞서렬을 치는 구간에 집중되여있었다. 이들가까이에 매복진을 치고있는 고려군은 적군보다 수적으로 적었다. 싸움이 붙은지 얼마 안되는 모양이나 형세는 고려군에 불리하게 기울어져있었다.
거란군이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강웃쪽의 물동을 차지하고 저들의 서렬을 강우로 그냥 통과시키고있었다. 고려군사 몇이 물동을 터뜨리려고 대담하게 돌진해갔으나 물동에 가기 전에 중도에서 쓰러지고말았다.
강대안에 매복진을 치고있는 고려군은 거란군에게 눌리워 자칫 퇴각할수도 있는 처지에 빠져들고있었다.
사태를 판단한 죽화와 총각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말을 몰아나갔다.
물동을 지키고있던 거란군사들은 느닷없이 익측으로 들이닥치는 이들의 급습에 처음에는 좌왕우왕하다가 인츰 정신을 차리고 대항해나섰다.
앞장에서 적병들의 목을 베며 내닫던 총각은 적의 화살에 말이 곤두박질하며 굴러넘어지는 바람에 강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할수없이 총각은 뒤에서 적병들을 막아서면서 죽화의 돌진을 엄호했다.
죽화는 비오듯 날아오는 적의 화살을 뚫고 동뚝우에 올라서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바줄을 동인 곳을 찾지 못해 안타까이 오갔다.
화살을 날리는 적병들을 향해 맞받아나가던 총각은 이번엔 죽화를 도우러 뒤돌아 내닫다가 몇걸음 못 가서 다시 쓰러졌다. 적의 화살이 총각의 등허리와 허벅다리에 박힌것이였다.
그 순간에 죽화도 말과 함께 쓰러졌다. 적의 화살에 맞은것이였다.
총각은 몸에 박힌 화살을 뽑을 사이도 없이 젖먹은 힘까지 다 내여 죽화가 쓰러져있는 동뚝으로 기여갔다. 가면서 보니 죽화는 다시 일어나서 물동뚝가운데로 한치한치 기여가고있었다.
그렇게 열보가량 기여간 죽화는 드디여 온몸을 솟구며 일어섰다.
마침내 바줄을 동인 곳을 찾은것이였다.
죽화는 총각쪽으로 피끗 얼굴을 돌리며 생끗 웃어보이고는 두손에 모두어잡은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방 칼을 내리쳤다.
쏴아!-
드디여 물동은 터져나갔다.
사품을 일구며 물사태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강얼음우로 말을 몰아가던 거란군사들이 아우성치며 쓰러지고 뒹굴었다.
와!-
강기슭에서 매복진을 치고 방어에 급급하던 고려군은 함성을 올리며 거란군을 맞받아 쳐나갔다.
거란군은 기세를 올리며 덮쳐드는 고려군의 창날을 피하는 재간이 없었다.
적군은 강반우에 무수한 죽음을 널어놓은채 뿔뿔이 도망쳐버렸다.
고려군은 퇴각하는 적군을 십여리까지 추격하여 쫓아버림으로써 앞쪽의 적군과 합쳐지지 못하게 하여 개경쪽으로 내려가는 적의 력량을 보강하지 못하게 하였다.
적의 기도를 파탄시킨 기쁨을 안고 함성을 올리며 고려군사들은 물동을 터뜨린 용사들을 찾아 달려왔다.
하지만 죽화는 승리의 함성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온몸이 화살투성이가 된채 쓰러져있는 죽화의 얼굴엔 평소의 당돌한 그 웃음이 그대로 비껴있었다. 금방 잠에 든듯 고운 눈을 살포시 감고서…
군사들은 봉긋한 그의 가슴노리에 꿰인 화살을 뽑으면서야 불굴의 이 용사가 놀라웁게도 처녀인것을 알아보았다.
흰눈이 깔린 동뚝우에 뉘여진 처녀의 얼굴은 눈속에 금방 피여난 한떨기 꽃송이같았다고 군사들은 말하였다고 한다.
그래, 꽃이고말고.
태여난 이 땅을 그리도 사랑하였기에 죽어서도 그 땅에 정을 바치고싶어, 가꾸고싶어 피여난 꽃이고말고.
네 이름 후세에 길이 전해가려니 너의 거룩한 그 이름에 성이 없다니 될 말이냐, 눈 설자를 성씨로 주자꾸나.
설죽화!
내 나라 고려국의 장한 딸아!
감찬은 죽화의 묘비에 설죽화라 이름을 다시 새기게 하였다.
설죽화의 무훈은 정사에는 기록된것이 없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쳐 구전설화로 전해올뿐이다.
하지만 정사에 기록된 장수들의 이름은 다 몰라도 설죽화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상층관료출신이 아니여서 죽백에 이름이 새겨지지는 못하였어도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엔 그의 이름이 소중하게 간직되여 후세에 자자손손 전해지고있다.
어찌 설죽화뿐이랴.
조상이 물려준 이 땅을 지켜 얼마나 많은 이 나라의 아들딸들이 자기의 진한 피를,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것인가.
나라는 백성이 지킨다.
력사는, 이 땅을 지켜낸 애국렬사들은 종이장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속에 새겨지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