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회)
하 편
15. 오, 조상의 땅이여!
1
온 고려땅이 전승의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덩지큰 오랑캐 료국의 코대를 보기 좋게 꺾어버리고 고려황제국의 지위를 고수한것이였다.
2월 12일 임자일에 임금은 명복전에서 연회를 차리고 장수들을 축하하였으며 대승을 거둔 고려군의 무훈을 위무격려하였다.
그리고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운 군사들을 일일이 등급을 매기여 상을 내리였다. 장렬하게 순직한 1백 73명의 장수들에게 벼슬을 추중하고 유가족들에게 쌀과 보리를 주게 하는 등 나라에서 돌봐주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강민첨은 상장군으로, 류참은 례빈경으로, 김종현은 례부 원외랑으로 임명되였다.
류참을 례빈경으로 임명한것은 그가 인물이 미끈한데다 언변이 류창하고 림기응변에 능하므로 이후에 거란사절들을 고자세로 다불릴수 있는 적임자로 보았기때문이고 김종현을 례부 원외랑으로 임명한것은 그에게 병법교육과 조련을 주관하고 과거시험때 무과를 담당케 하려는데서였다.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임시키던 제도는 페지되였지만 이들만은 특별히 겸직을 주어서 조정의 골간으로 키우려는 감찬의 의도를 임금이 받아들인것이였다.
나라지경밖에서도 고려의 승리를 축하하여 왔다.
철리국(위글족) 왕 라사는 자기 나라 특산종토산말을 바치면서 거란을 때려눕힌 고려군의 무훈을 찬양하는 글을 보내왔다. 저들의 뒤꼭지를 누르고 종처럼 부려먹고있던 거란의 코가 납작해진것이 여간 깨고소하지 않았던것이다.
철리국왕은 거란이 보란듯이 고려국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저희가 고려국을 조공한다는것을 내놓고 시위하였다.
석달후 겨우 정신을 차린 거란왕은 그래도 체면은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동경(료양)의 부류수격인 문적원 소감벼슬을 가진 오장공이란자를 고려에 보내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왕은 반주검이 되여 돌아온 소배압에게 약속대로 얼굴가죽을 내놓으라 고함을 지르다가 그를 파직시켜 귀양을 보내버렸었다. 이후에 소배압은 화병으로 절명하고말았다.
침략의 괴수에게 차례진 응당한 심판을 받은것이였다.
송나라에서는 천주사람 진문궤가 1백여명의 사절을 이끌고 그만한 수의 토산말을 몰고와서 고려의 전승을 축하하였고 송나라 복주사람 우선 역시 1백여명의 축하사절을 인솔하고와서 고려임금에게 보내는 송나라임금의 선물이라며 특이한 향료와 약재를 바쳤다.
송은 고려가 거란을 보기 좋게 타승하였을뿐아니라 거란의 군력을 밑뿌리채 허물어놓아 당장은 저들의 국경이 위태롭지 않게 된것이 여간 고마운것이 아니였다.
고려가 힘겨운 싸움을 벌리고있을 때 원병을 보내지 못한것이 미안쩍기 그지없는 송나라였다. 고려가 거란을 꺾어놓은것은 송나라의 안전을 기하는데 여간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였다.
마침내 고려가 저들 혼자의 힘으로 덩지 큰 거란을 굴복시켜버린 지금에 와서 송이 고려를 고맙게 생각하는것은 너무나도 응당한것이였다.
앞으로 퍽 오래동안 거란은 고려는 물론 송나라에도 범접을 할수 없게 되였기때문이였다.
고려에 조공하는데서 녀진이 눈에 띄우게 활기를 띠고있었다.
7월에는 서녀진 추장 아라불이, 8월에는 동녀진의 모일라가 각기 부하들을 데리고 말과 기타 토산물을 바리에 가득 싣고 찾아왔다.
지경밖의 주변정세가 고려에 유리하게 전변되고 나라안의 정사 역시 안정과 생계진흥에로 활기있게 펴나가는 속에 임금은
문하시랑 평장사는 시중 다음가는 정2품벼슬로서 임금의 정사를 돕는 조정의 맨 웃자리관직이다. 내사문하 평장사 역시 같은 품계의 벼슬로서 임금의 어명을 만들고 신하들의 청을 최종심의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자리이다.
감찬이 정2품 위계의 두개 관직을 겹쳐서 가지도록 함으로써 그는 고려조정의 백관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임금은 고려조정의 문무백관의 맨 웃서렬 시중 다음자리에 감찬을 올려앉힘으로써 사실상 감찬을 고려국의 실권자로 내세운것이였다.
강감찬은 새 직무에 올라 첫 사업으로 개경이남 고을들에서 젊은 장정들을 골라 가족들을 데리고 개경이북의 상산(곡산), 이천, 수안, 신은(신계), 협계(신계), 우봉(금천) 등지에 이주하게 하여 이 일대를 개경방어의 외성으로 더 실속있게 다져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함께 싸운 강민첨을 우산기상시로 임명케 하여 중서령(중앙 행정집행기관)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한것이다.
왕순이 등극한 때로부터 두차례의 국난과정에 임금의 곁에서 신변을 보호하는데 모든것을 다 바친 최사위, 유방, 채충순을 청하현(경상북도 례천), 천승현, 제양현의 개국남으로 임명하게 하여 그들이 고려국의 안정과 부흥에 이바지한 공로를 높이 평가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일종의 소국왕의 지위를 주게 함으로써 고려가 황제국이라는것을 내외에 더욱 뚜렷이 하도록 하였다.
고려가 거란의 끈질긴 압력과 침공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버티여낸것이 조상의 땅을 빼앗기지 않자함과 동시에 태조이래 동방일각에 찬연히 기치를 든 황제국의 지위를 고수하자는데 있었기때문이였다.
고려조정에서는 그동안 억류하고있던 거란사신 야률행평을 되돌려보내는 인편에 상기관료들의 관직임명에 관한 통고문을 돌려보내였다.
이에 대해 거란왕은 가타부타 참네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통고문을 받아보았다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사실상 고려의 지위를 인정하는 립장을 표명할수밖에 없었다.
거란은 완전히 기가 죽어있었다.
전란의 흔적은 가뭇없이 가셔지고 온 고려땅에 태평성대가 도래하였다.
고려는 조정을 다지고 백성들이 생계유지에 전념하도록 정사를 지향시켜 나갔다.
이 나날 강감찬은 전장에서 드날리던 백발의 그 모양새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맡은바 중임을 다하는데 전심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