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하 편
14. 거란군을 최후격멸하다
2
소배압은 행군서렬의 전방경계로부터 고려군의 아무러한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이틀째 계속 들어오자 희색이 만면하여 속도를 높이라고 다그쳐댔다.
(지금쯤 고려군은 통주성부근 여섯개 성을 지키는데 정신을 쏟고있을테지!)
경술년(1010년) 고려침공때 쓴맛을 톡톡히 보고 쫓겨돌아간이래 어느 하루도 고려를 잊은적 없는 소배압이였다.
자기네 왕 성종에게 간청하기를 그 몇번, 다음번 고려침공에서 무조건 결말을 볼것이니 믿어달라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또 빌어 군사를 일으켜 드디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사이 흥화진서쪽아래 통주성방향으로 군사를 계속 들이밀어 고려의 이목을 집중시켜놓았다. 공식적인 사절을 파하여 청천강이북 서켠의 여섯개 성을 달라고 고려에 들이대기는 또 몇번이던가. 아마도 열번은 된듯 하다.
그만큼 끈질기게 다불러댔으니 고려가 이번에도 그쪽방향일것으로 믿고있을것은 뻔하였다.
이번에도 선발부대는 그곳 여섯개 성쪽으로 내몰았다. 고려군이 성방어에 급급한다는 보고를 받고 쾌재를 올리며 두번째 부대를 이끌고 동켠으로 공격해내려가고있는 소배압이였던것이다. 목표는 개경, 임무는 고려임금을 사로잡는것이였다.
단시일안에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하였다.
일이 될라니 고려군은 정말로 구주동쪽방향은 무방비상태에 두고있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고려군이 미처 알아차릴 사이없이 번개불에 양 굽듯이 해치워야 한다, 이렇게 작정하고 밤승냥이처럼 소리없이 내려가고있는것이였다.
하지만 뛰는 놈 우에 나는 놈 있는줄 소배압은 아직 모르고있었다.
고려군은 소리없이 진을 치고 거란군을 기다리고있었다.
곳곳에 물동을 막아놓고 산허리마다에 매복진을 펴고 1만 2천의 군사가 거란오랑캐들이 매복진안에 들어서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었다.
소배압은 자기 휘하의 중군서렬이 뱀허리처럼 구불구불 렬을 지어서 골짜기아래로 끝없이 행렬을 지어가는 광경을 흐뭇해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령마루 왼켠에 치솟은 산봉우리에서 다섯줄기의 흰 연기가 타래쳐오르는것을 보고 와뜰 놀랐다.
(저게 뭣이냐? 봉화가 아닌가?!)
소배압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앞쪽 산봉우리에서도 또 다른 다섯줄기의 흰 연기가 솟구쳐오르고있었다.
《뒤쪽에도 연기가 오르오이다.》
호위군사가 가리키는 뒤쪽을 보니 방금 지나온 령너머 산봉우리에서도 같은 모양의 흰 연기가 뭉게뭉게 솟구치고있었다.
아뿔싸!
소배압이 미처 신음소리를 내기도 전에 둥- 두둥둥! 북소리가 사방에서 울려나왔다.
(걸렸구나, 매복이다!)
소배압은 사태를 알아차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소로길 량쪽산허리에서 매복했던 고려군이 화살을 날리며 쓸어내려오기 시작했다.
《멈춰서지 말고 앞으로 나가라!》
소배압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어방잡아 이십리는 실히 되는 구간이라 고려군이 아무리 밀집대형으로 매복을 쳤다 해도 빈 공간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친것이다.
얼핏 뒤쪽을 보니 령마루에서는 고려군과 거란군이 벌써 한데 뒤엉켜 돌아가고있었다. 거란군행군서렬의 중허리를 자르려는것이 첫눈에 알리였다.
《나를 따르라!》
소배압은 무작정 앞으로 내달았다.
잘리운 허리는 인차 메꾸어질것이였다. 소배압은 령너머에 잇달려오는 자기 군사의 후위가 3만은 된다는것을 생각하고있었다. 그만한 수의 력량으로 능히 고려군을 막을수 있다고 본것이다. 보다는 앞쪽에 늘어서있는 3만을 가지고도 목적을 이를수 있다고 타산한것이였다.
거란기마군은 무서운 속력으로 내달았다.
고려군은 화살전으로는 거란군을 막을수 없다는것을 알아차리자 백병전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고려군은 거란군을 막지 못하였다. 보군으로는 기마군을 제압하기 힘들었다.
창황중에도 소배압은 자기 군사들이 무난히 통과해나가는데 안도의 숨이 나갔다. 그는 말고삐를 련속 채며 앞으로! 구령을 련발했다.
앞에 펼쳐진 강줄기만 넘어서면 다시 산줄기에 들어설수 있었다. 거란군은 두텁게 얼어붙은 강우로 말을 몰아 들어섰다.
바로 그때, 강 웃쪽 물동우에서 쩡쩡 도끼질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뒤이어 솨- 하는 소리와 함께 물사태가 쏟아져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미끈거리는 강얼음판을 간신히 통과해가던 거란기마군은 쏟아져내려오는 물살에 떠밀리여 공중잡이로 꼬꾸라지기 시작했다.
넘어져뒹구는 말과 군사들로 강복판은 일대 수라장이 되였다.
기다렸다는듯이 다시한번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강 량쪽대안에 매복하고있던 고려군기마병들이 살같이 달려나오며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거란군사들은 변변히 창질 한번 못해보고 곱게 목을 베이고있었다.
소배압은 눈앞이 아찔했다. 고려군이 미리부터 품을 들여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있었던것이였다. 물동을 터뜨릴 계획까지 하고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소배압이 더욱 놀란것은 고려군기병들이 타고있는 말들의 발굽에 채워져있는 철편으로 만든 사갈이였다. 발통마다 네 귀에 각이 진 사갈을 차고있는터여서 맨 편자만 신긴 거란군말과는 달리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지도 않았다.
사전에 치밀하게 짜고서 들이대는 매복전이였다.
소배압은 2천가량되는 자기 기병들이 고스란히 죽어가는 모양을 눈 펀히 뜨고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소배압 자기는 어느결에 뒤걸음쳐 령마루에 되돌아올라와있었다. 예견했던대로 후미의 군사들이 올리밀어 령마루를 차단하려던 고려군은 일단 물러선 때였다.
앞뒤로 네다섯겹의 방어대형을 쳐놓은 뒤에 잠시 숨을 돌리느라니 뒤로부터 련속 패보가 날아들었다. 뒤따라오던 후군서렬들에서도 여러곳이 수공전에 걸려들어 된죽음이 났다는 보고였다.
기세가 등등했던 소배압의 기분은 졸지에 서리맞은 호박잎이 되여버렸다.
못해도 1만은 잃은것이였다.
이 모양을 해가지고 계속 남하할수 있을가?
이 생각, 저 생각 굴려보는 소배압의 눈앞에 왕 성종의 이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 고려침공이 성공하면 돌아오는 즉시 왕위를 넘겨줄것이고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얼굴가죽을 내놓으라고 했었다.
소배압은 몸서리를 쳤다. 얼굴가죽이 문제가 아니였다. 이번걸음에 성공하지 못하면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볼 기회가 없기때문이였다. 그동안 20년을 숨죽이고 웅크리고있던 송이 다시금 북방을 수복하러 인츰 올리밀련다는 정보를 받고 떠난 걸음이였다. 이번걸음에 고려를 항복시켜 속국으로 만들어놓아야 이후에 벌어질 송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할수 있었다.
송의 동맹국인 고려를 걷어쥐여야 송을 고립시키고 궁극에는 이길수가 있는것이였다.
세상에 나서 그래도 제 종족을 보란듯이 일으켜세우고 죽자는 장한 목표를 세우고 이날이때껏 동분서주해온 소배압이였다.
송을 먹자면 고려를 먼저 먹어야 한다. 고려정복의 성공여부에 송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짐이 판가름난다는것으로 해서 소배압은 이번걸음에 자기의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고있는것이였다.
이대로 물러설수 없다!
소배압은 칼을 쭈욱- 뽑아들었다.
《나와 생사를 같이할자들은 내뒤를 따르라!》
소배압이 비린청을 뽑으며 말을 몰아 내달리자 아직 덜 얼친 무리들이 줄레줄레 꼬리를 물었다.
거란군은 어둠이 깃드는 골짜기로 미친듯이 말을 몰아나갔다.
워낙 수적으로 우세한 거란군은 그 정도의 된매에는 끄떡도 안한다는듯 제법 기세를 올리며 내달았다.
웬일인지 고려군은 더는 걸치지 않고 꼬리를 사려버렸다.
하지만 고려군은 힘이 딸려 물러선것이 아니였다. 감찬의 지시로 추격을 멈추고 안북부(안주)성으로 들어가버린것이였다.
그 시각, 감찬은 민첨에게 다음행동에로 넘어갈것을 지시하고있었다.
《이제는 그대 차례요. 부
《알아들었소이다.》
민첨은 녕주(녕변)에 대기하고있는 5만의 고려기병군가운데서 젊고 건장한 군사를 골라 2만의 기동부대를 편성해가지고 소배압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