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 회)
하 편
13. 거란의 3차침입에 대비하다
3
《상서나리!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장연우는 울상이 되여 감찬을 바라보았다.
《얼마 되지도 않은 땅을 가지고 무얼 그러오.》
《많지 않다니, 12결이 어디오이까.》
《내 마음이 내켜서 그러한것이니 모르는척 해두시구려. 나는 하루세끼 끼니나 건느지 않으면 되는 사람이요. 군사들을 돕는데 보탬이 되면 그만이지.》
감찬은 대수롭지 않은듯 손을 내저었다.
일인즉은 감찬이 자기 소유지인 12결의 땅을 군사들의 집들에 나누어주게 한때문이였다.
류배지에서 돌아온 장연우는 호부상서로 등용되여 나라의 재정을 주관하고있었다. 말썽을 일으켰던 군사들의 토지를 다시 회수하여 정리하고있었는데 문득 강감찬이 나라에서 받은 자기 땅의 일부를 내놓은것이였다.
감찬은 궁성밖 개녕현(개풍)의 좋은 논을 군사들의 집들에 나누어주게 했다. 군사들중에 식구들이 많거나 부모를 공양하는 집들이 조금 섭섭해하는것을 알고 자기 땅을 나누어주게 한것이였다.
누구나 쉽게 할수 없는 일을 한것이다.
대신관료라면 누구나 자기 땅을 한뙈기라도 늘구려고 하지 솎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먹고살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손대대로 넘겨주는 세습재산이기때문이다.
태조이래 100결이상의 수조지를 받은 대신들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것은 꿈에조차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나라로부터 얼마만한 땅을 받았는가 하는것은 당자의 지체뿐아니라 가문의 위세를 시위하는 표적으로도 되기때문이였다. 임금으로부터 얼마만큼 신임을 받고있는가가 땅의 소유량에 따라서도 알수 있게 하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감찬은 금천(시흥)에 있는 조상때부터 물려오는 땅만으로 만족하고있었다. 고향 금천에 살고있는 문중일족이 배나 곯지 않을만큼 소출이 나는 얼마간의 경작지와 그에 잇달린 선대의 묘가 있는 선산 한자락이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장연우는 감찬이 내놓은 땅을 군사들에게 나누어준 뒤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리였다. 그리고 이후에 더 좋은 땅을 하사받게 하리라 작정을 하고있었으나 그 일을 매듭짓지 못하고 이해 11월에 죽고말았다. 나라재정을 맞추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여서 밤낮이 따로없이 동분서주하다가 로상에서 순직한것이였다.
감찬은 임금을 사심없이 받들던 또 한명의 충신이 쓰러진데 대해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였다.
감찬은 다시금 도래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애써 일하다가 순직한 충신들을 응당히 평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연우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리도록 주선했다. 그와 아울러 많은 장수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제의했다.
이해에 적지 않은 장수들을 잃었다.
흥화진 대장군 정신용을 위시한 여렷의 장수들이 또다시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하는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것이다.
9월에 거란장수 리송무가 찾아와서 청천강이북 여섯개 성을 또다시 달라고 생떼를 쓰다가 거절당하자 돌아가는척 하다가 불의에 통주성을 공격하였다.
정신용은 흥화진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을 지원하여 적군 700여명의 목을 베였으나 그
거의 같은 시각에 또 한무리의 거란군 기병부대가 녕주성(안주)까지 기습해내려온것을 대장군 고적여와 장수 고연적이가 격퇴하고 추격하다가 또 희생되였다.
감찬은 이해에 리부상서로 전임되여 조정의 관료임면을 주관하고있었다. 감찬은 희생된 장수들과 관료들을 공로에 따라 평가해주고 가족들을 대우해주는 사업을 직접 나서서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감찬의 일처리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분발시키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온 나라가 미구에 닥쳐올 국난에 대처하여 하나같이 일떠섰다.
거란은 고려군민의 위세에 눌리워 1016년부터 두해어간에 잠시 움츠러들어 더는 침공해오지 못하였다.
하지만 거란은 고려침공야욕을 버린것이 아니였다. 국부전으로 몇차례 고려의 맥을 짚어본바로는 웬만큼 품을 들이지 않고서는 전면전을 들이댈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금 그 준비에 들어갔을뿐이였다.
그런데 이 두해어간에 예상외로 많은 거란인들이 고려로 탈출하여왔다.
그들이 고려로 탈출해오는 리유는 거란조정의 박해와 엄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거란인들은 과중한 조세와 군역부담에 허덕이고있었다. 사내꼬투리라고 생긴것은 병신이나 천치라도 리유불문하고 창을 들려 징발되여갔고 군포를 지적된 기한에 내지 못하면 그 즉석에서 목을 잘리웠다.
탈출해온 거란인들로부터 이러한 형편을 료해한 고려는 싸움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고려군은 중앙군을 더욱 정예화하는 한편 지방 향군을 현역화하고 특히 서북방 방어군사들을 중앙군과 꼭같이 대우하는 제도를 세웠다.
임금은 조정안의 모든 관료대신들이 병법을 연구하게 하고 일일이 만나 시험을 쳐 등수를 매겼으며 고려 중앙군 6위에 대한 사열식까지 거행하였다.
임금은 수라상의 반찬수를 줄이게 하고 검박한 생활로 재정을 절약하여 군비에 보태게 하는데 솔선 수범을 보이였다.
이러한 임금을 본받는데서 조정관료들가운데서 감찬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1018년 5월, 임금은 감찬을 서경류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임금의 자필로 된 임명장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경술년(1010년)중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 나라 한강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은 때에 만약 강공의 전략을 리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한날한시에 오랑캐옷을 입는 비극이 도래할번 하였다.
그때와 같은 시기가 도래하였으므로 강공을 선두에 내세워 국난을 막고 나라의 안전을 기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