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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회)

 

하 편

 

13. 거란의 3차침입에 대비하다

 

1

 

새해 1012년에 들어와 두어달 흘러서 거란왕의 초청장이라는것이 한장 불쑥 날아들었다.

때는 4월 중순무렵이였다.

전해 섣달에 하공진을 죽이는것으로 고려에 대한 적대적감정을 표한 뒤 봄내 코빼기 한번 내여밀지 않고있던 거란측에서 새빠지게 저희네 태자의 생일이라며 고려임금을 초청한다는것이였다.

감찬은 이에 대해 함구무언으로 대답할것을 제의했다. 묵살하자는것이였다. 말로는 태자의 생일이요 뭐요 하지만 실은 고려임금의 나이가 적은것을 빗대고 한번 쑤셔보려는것이였기때문이였다. 고려임금의 나이가 당년 스물이라 거란의 태자와 같은 모양이였다. 고려임금이 내 아들벌이 되는터이니 아버지벌 되는 나의 말을 잘 들을것이며 공경해마지않아야 하리로다 하는 거란왕의 속대사가 짙게 깔려있었다.

임금도 어이가 없는지 웃어넘기고말았다.

《거란왕의 미침증이 또 도졌는가보오.》

《다시한번 시작을 떼보자는 속심 같소이다.》

《아직 어혈이 풀리지 않았겠는데… 그렇게 빨리 몸을 추세웠단 말이요?》

《요즈음 그네들 심기가 몹시 뒤틀려있을것이로소이다. 녀진이 우리 고려쪽으로 완전히 기울다싶이하였으니 말이오이다.》

《딴은 그렇군, 그럴만도 하오.》

임금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해 2월 초닷새날에 녀진의 추장 마시저가 자기 휘하의 30개 부락 씨족장들을 거느리고와서 토종말을 바치며 우의를 다짐했다.

30개 부락의 각 씨족들의 성씨를 렬거해보면 아간돈, 니홀, 니방고, 문질로, 불차리, 거질아, 점한일, 니질아, 야라다, 요게라, 요열일 , 울언, 오림대 , 몽골예, 훈저헌 , 도태 , 야올일, 나을신, 나을안 , 동골일, 지도일, 어슬은, 마을일, 도몰니, 운돌리, 압한이, 노일이, 배문이, 불서일, 만윤이 등이였다. (《고려사》)

이들의 조공행차는 고려의 위용을 돋구어주는 반면에 거란의 체면을 납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제딴에 저희들보다 어방없이 큰 송나라를 눌러놓았다 쾌재를 부르면서 고려를 조공국으로 만들어 힘을 더 키운 뒤에 다시금 송의 등허리를 꺾으리라 작정하고나선 걸음이 졸지에 수포로 돌아가서 아닌 말로 송이 저희들을 비웃으리라는 생각에 심기가 뒤틀릴대로 뒤틀려있는 판인데 분명히 저희들쪽으로 돌아선줄 알았던 녀진족들이 보란듯이 고려에 조공이라니 이런 분통이 터질 일이 또 있을가.

생각같아선 녀진족들을 냅다 쳐갈기고싶으나 그것은 마음뿐이지 쉽사리 될 일이 아니였다.

녀진인들은 오밀조밀 부락별로 널려져있는것이 척 보기에는 냠냠해보이나 한번 손을 대볼라치면 새떼마냥 사방으로 흩어져 숲속으로 종적을 감추고마는통에 천하없는 대군으로도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잡기 힘들다.

아무리 기를 쓰고 쫓아간다 하여도 몇걸음안팎에 무인지경의 원시림속에 빠져들어 각개격파당하는 꼴이요, 그게 아니더라도 곰이나 승냥이떼에 먹히우기 십상이라 살아돌아올 생각을 말아야 되는 판이였다.

고려도 그래서 이들을 얼리여서 길들이는 모양인데 고려가 하는것을 저희들은 흉내도 내지 못하니 속이 여간 뒤틀렸을소냐.

그렇다 해도 제 흉을 알았으면 제 처신을 바로할 생각을 해야지 고려에 대고 또 무슨 생트집을 잡지 못해 모양을 떤단 말이냐.

임금은 이 일이 있은지 두달이 될 동안 잠자코 있다가 거란이 여름철 인사차로 사신을 교환하자 하는 기회를 타서 은근슬쩍 고려임금이 몸이 편치 않아 초청에 응하지 못한것을 통고한다 껴묻어 전하게 하였다.

이에 거란왕이 발끈한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고려임금은 여전히 버릇이 없다. 례의를 가르칠셈으로 흥화(의주), 통주(선천), 룡주(룡천), 철주(철산), 곽주(곽산), 구주(구성) 6개 성을 탈취하련다.》

거란왕이 이런 통고를 해왔으나 고려는 꿈쩍도 안했다.

어디 올테면 와봐라, 아직 맛을 채 못본 모양인데 버릇이란것이 어떤것인지 진짜로 가르쳐줄터이니, 이런 생각으로 고려는 배심좋게 웃어버리고말았다.

거란왕은 말은 그렇게 뱉아놓았지만 감히 출동령은 내리지 못하고 제풀에 씩씩거리다가 말았다.

이런 거란을 비웃는듯 고려로 찾아드는 이웃나라들의 행렬은 끊기지 않고 계속되였다.

이해 8월 3일에 왜나라에서 35명이 살 곳을 조처해달라며 고려로 찾아들더니 그로부터 3일후에는 탐라국(제주도)사람들이 큰 배 두척을 타고와서 동족사이의 련계를 깊이하자 청하였다.

10월에는 송나라의 속국인 남초의 사람들이 토산말을 바치며 고려에 의지하련다 했고 동녀진의 모일라, 조을두 등 추장들이 30개 부락의 씨족장들을 인솔하고 동계의 화주(화성)에 와서 고려와의 동맹을 요청하였다.

고려가 이런 사실을 거란에 통고해주니 거란은 할수없이 사신을 보내여 답례하고말았다.

아마도 거란은 당장에는 어쩌는 수가 없는지라 례의를 차리고 대하자고 작정한것 같았다.

하지만 거란은 고려에 뒤지는 형세가 계속되는데 대해 참지 못하였다.

이듬해(1013년) 5월 거란은 그사이에 얼마간의 녀진족무리들을 회유하여 준비를 한 뒤에 이들을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전해에 선포했던 압록강이남 여섯개 성을 탈환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거란의 이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군의 반격으로 헛된 죽음만 냈을뿐이였다.

거란은 저희들도 녀진인들을 다룬다는것을 시위하려 한 모양이나 압록강을 채 건너와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는 꼬락서니만 보이고말았다.

그러나 거란은 7월에 관료 야률행평을 보내여 압록강이남의 여섯개 성을 저희들에게 달라고 또다시 요구하였다.

《저런 개비위를 보았나. 학사승지, 저것들이 그냥 떼를 쓰니 어쩌면 좋겠소? 아예 사신의 목을 쳐서 두번다시 발길질을 못하게 하는것 아니요?》

임금은 성가신듯 감찬에게 물었다.

《거란왕의 요구는 무엄하기 짝이 없는것이나 거란사신의 언행에는 미안스런 표정도 없지 않으니 그를 돌려보내되 저희 왕을 잘 설복하도록 짐을 지워 보내는게 좋을듯 하오이다. 지금당장에 그의 목을 벤다 하면 자칫 언질을 잡혀 란을 몰아오기 십상이니 이는 거란왕이 바라는 바요, 그의 미침증에 말려드는 꼴이 될뿐이오이다. 거란왕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기회를 더 주는셈치고 그를 돌려보냅시다.》

감찬이 자기 생각을 아뢰자 임금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소. 우리가 자제하고 한번 더 아량을 보입시다.》

고려는 거란사절 야률행평을 잘 설복하여 돌려보내였다.

떠나가는 야률행평을 바래주는 감찬의 생각은 깊어졌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거란의 작태가 많은것을 시사해주고있기때문이였다.

거란은 앞서 있은 고려에 대한 전면침공전야에도 청천강이북의 여섯개 성을 달라는 강도적요구로 싸움을 걸어왔었다.

거란은 지금 고려에 대한 재침공의 전주곡을 울리고있는것이였다.

고려가 거란과의 또 한차례 전면전에 말려들 위기가 서서히 깃들고있었다.

이런 때에 나라방비에 조그마한 빈구석이라도 있어서는 안되였다.

감찬은 임금에게 서북방 방어계선에서 오래동안 병역을 치르고있는 나이많은 병졸들을 위무하도록 간언하였다. 그런 병졸들의 가족들에게는 조세도 면제하고 고을관아에서 량식도 보태주도록 하게 하였다. 변방에 나가 적과 대치하고있는 군사들이 집근심을 안하게 하는것이 중요하였던것이다. 개개의 군사들은 크게는 나라를 지키고 작게는 자기 부모처자들을 지키는것이기때문이였다.

감찬은 앞서 거란과의 싸움에서 경험이 있는 장수들을 적극 내세워 그들이 군사일에 더욱 열성을 내도록 고무하는 일도 놓치지 않고 따라세웠다.

감찬은 조정의 관료임면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인재의 선발과 배치가 얼마나 중요한것인가를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

부지중 내사령 최지몽이 생각키웠다. 그가 인재육성과 선발등용배치에 왼심을 쓴터에 서희와 같은 인물이 발탁되여 거란과의 첫 싸움을 무난히 치르었던것이 아니던가.

감찬자신도 례외가 아니였다.

최승로와 같은 인재도 태조께서 특별히 어린 나이때부터 조정에서 배우게 하여 태조의 훈요10조 다음으로 고려조정의 정무책이 되는 방략을 내놓을수 있은것 아닌가.

감찬은 최승로나 서희에 비하면 자기는 그들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존재라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임금의 머리가 되고 손발이 되는 자리에 앉아있지만 어느 한순간도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을 모르는 감찬이였다.

감찬은 자기도 선배들처럼 당장의 정무뿐아니라 후일을 예견하여 인재를 키워야 하리라는 생각에 미쳤다. 우선 자기 후임자부터 확정해놓아야 했다.

감찬은 자기 후임으로 최충을 점찍었다.

1005년 4월에 장원으로 급제한 최충은 학식에 있어서나 인품과 도량에 있어서 로장들을 찜쪄먹는 수준에 있었다. 21살에 조정에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한림원의 의관을 거쳐 지금은 학사(정4품)로 있는 그는 일처리가 여간 민활하고 깨끗하지 않았다. 사색형이고 집행력도 남달랐다.

감찬은 그에게 남보다 많은 일거리를 주고 즐겨 론쟁하였다. 임금에게 그를 특별히 살펴보라 이미전에 간하였고 임금의 지방순시길에 늘 따라서게 하였다.

썩 이후에 최충은 인재육성의 대가로 고려조정일반이 인정하고 떠받드는 존재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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