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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5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13

 

《무로대에 있던 적들이 기동한다는 급보요!》

전령의 다급한 보고에 양규는 벌떡 일어섰다.

《적들이 기동한다고?!》

무로대에 있는 적들이 기동한다는것은 정세가 급변하고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무로대는 흥화진에서 압록강을 따라 동쪽으로 오십여리정도 올라가서 있는 쇠부리터마을이였다.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산간벽촌마을이 거란군의 예비주력이 둔을 치고있는통에 양규의 지도에 굵다랗게 표기되게 되였다.

양규는 어제 밤에 구주 별장 김숙홍이 포위를 풀고 돌아서는 거란군을 통쾌하게 답새겼다는 쾌보를 전달받고 환성을 올리는 속에서도 불쑥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하였었다.

구주성을 포위하고있던 거란군이 왜서 갑자기 포위를 풀고 돌아선것일가?

이럴 때 김숙홍이 정황을 통보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소식이 없었다. 통주성에서도 아직 별다른 소식은 오지 않고있었다. 양규는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어 전령을 파했었다. 떠나간 전령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갑자르고있는 때인데 불쑥 웃쪽 무로대에서 먼저 소식이 날아든것이였다.

《몽땅 기동하는가? 아니면 일부분인가?》

《아직 다는 알수 없고 2만가량 되는 기마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는것을 포착하였다 하옵니다.》

2만이라면 무로대에 주둔한 적군의 삼할밖에 안되는 력량이였다. 그 력량이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그것은 구주 아니면 통주로 가는것일것이였다.

(적들이 다시한번 구주나 통주를 까보려는것일가?! 어쨌든 적의 기동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무로대의 적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고려군에 리날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양규는 이번 싸움에서 형세가 어떻게 변하든 서북방을 뜨지 말고 지키고있다가 적이 돌아설 때 치라는 령을 받고있었던것이다.

양규는 우선 적의 기동을 막고볼 심산으로 급히 출동하였다.

1011년 1월 18일(음력) 정오무렵, 흥화진의 고려군은 남하하는 거란군을 불의에 들이쳤다.

우수를 하루 앞둔 이날 잔뜩 찌프리고있던 하늘에서는 이해의 첫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차츰 녹기 시작한무렵이였는데 비까지 내려 땅은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급작스레 들이대는 측면타격에 거란군은 처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양규는 먼저 적행렬의 중허리를 잘라놓은 다음 토막난 적서렬의 앞부분을 포위해놓고 두들겨팼다. 뒤렬은 더 나오지 못하게 견제하고있다가 앞쪽을 먹어치운 뒤에 다시 밀고올라갔다.

거란군은 더 맞서보지 못하고 황급히 쫓겨들어가고말았다.

이날 고려군은 2천의 적을 쓸어눕혔다.

양규는 살아남은 적군졸 몇놈을 취조하는 과정에 거란왕이 개경에서 퇴각해올라오고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란왕이 퇴각하고있다는 사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는것을 말하고있었다. 고려임금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면 개경에 틀고앉아서 흥타령을 부르고있을것이지 서둘러 올라올리 만무했다. 그리고 무로대의 적이 내려갈 리유도 없을것이였다.

안전한 퇴로를 닦아놓기 위해 떨구어두었던 무로대의 병력이 이동해내려간다는것은 거란왕의 개경침공이 파탄된것은 물론이고 추격을 당하고있다는 증거로 된다.

거란군은 필경 자기 왕을 엄호하기 위해 무로대의 예비군을 호출하였을것이였다. 무로대의 적은 물론 이곳 청천강이북계선의 다른 성들을 포위하고있던 적들도 자기 왕의 퇴군을 엄호하기 위해 움직일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그렇겠지, 네까짓것들이 감히 우리 고려를 먹어?! 어림없다.

이놈들! 네놈들이 올 때도 그랬거니와 갈 때도 편안히는 못갈것이다.

한번 맛을 봐라!

양규는 또다시 출전령을 내렸다.

《리수로 가자!》

양규를 선두로 한 흥화진의 정예군사들은 리수(선천)로 말머리를 돌렸다.

리수진은 선주(선천)고을에서 산 하나를 넘어가서 있는 산성이였다. 거란군은 선주고을보다 지세가 높은 리수진성을 차지하고 주변의 주민들을 랍치하여 성을 개축하는 공사를 벌려놓으면서 저희들 전방군의 퇴로를 지키고있었다.

양규는 김숙홍이 구주쪽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편 이상 그 서남쪽을 차단하여 적의 퇴로를 보다 넓은 면적으로 막아나설것을 결심한것이다.

리수진탈환전투는 낮에 이어 밤이 깊어서야 결속되였다.

이곳을 차지하고있던 적은 보군이 기본이였다. 유리한 지형지물에 의지해서 악을 쓰며 방어하는통에 조금 지체되였다.

적들은 림시로 쌓아놓은 돌성에 의지해서 집요하게 버티기를 하였으나 양규의 흥화진 군사들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고려군은 조상인 고구려때부터 공성전에 능하였다. 양규의 군사들은 가파로운 산세를 리용하여 쌓아놓은 성벽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리붙은 다음 성안의 적을 내리공격하여 멸살시켰다.

살아남은 적들은 석령(천마군)으로 달아났다.

양규는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하여 석령에 틀고있는 거란군 병참부대를 잇달아 답새겼다. 적의 보급물자가 저축되여있는 후방기지와 맞다들린통에 고려군은 수많은 식량과 군마를 로획하였고 인부로 끌려왔던 1천여명의 주민들까지 탈환해내였다.

고려군은 리수와 석령에서 적군 2천 5백의 목을 베여버렸다.

3일후인 1월 22일 양규는 여리참(대관부근)에서 기동하는 거란군을 세차례나 공격하였다. 첫번째는 구주성쪽에서 쫓겨올라오는 적을 맞받아치는 싸움이였고 두번째와 세번째는 무로대쪽에서 내려오는 적기마군에 대한 공격이였다.

차지한 계선에서 앞뒤로 기동하면서 벌린 이날 싸움에서 1천의 적을 죽이고 사로잡혔던 주민 1천을 또 탈환해내였다.

양규는 구주(구성)계선이 적의 기본퇴각로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판단해내였다. 그는 즉시 전령을 띄워 흥화진의 군사를 더 내려오게 하였다.

4일간 력량을 보강하고 준비를 끝낸 양규는 김숙홍의 부대와 합류한 뒤 이 계선에서 적의 마지막숨통을 끊어놓을 작전을 짰다.

《이 구주계선이 거란군의 기본퇴로인것이 분명해진 이상 우리는 이곳을 적의 마지막함정으로 되게 해야 할것이네.》

《옳소이다. 이곳에서 적을 최종적으로 소멸해야 할것이오이다.》

김숙홍은 양규의 결심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이곳 지세는 별장 자네가 더 밝을테니 작전안을 짜보게.》

《전 순검사나으리의 분부를 따를뿐이오이다.》

《그러지 말고 어서 생각한게 있으면 가르쳐주오.》

양규가 권하자 김숙홍은 지도를 짚어나갔다.

《지금 구주성 앞쪽 애전에 평양성에서 살아남은 적들이 밀려와있소이다. 이놈들이 주력인데 정면으로 돌파해올것으로 짐작되오이다.

같은 시각에 우리의 등뒤로 무로대의 적들이 쳐내려와 앞뒤협공을 꾀할수 있소이다. 순검사나리께서 이놈들을 여러차례 때려 많이 솎아내였지만 워낙 머리수가 많은지라 무시할수 없는 존재로소이다.

제 생각에는 먼저 구주 앞쪽 애전에 있는 적부터 쳐야 하리라 생각하오이다.

무로대에서 내려오는 적은 그다음에 쳐야 할것이고요.》

《적의 앞뒤공격을 면하기 힘들것 같소.》

《그래서 애전에 있는 적을 먼저 쳐야 한다는것이오이다. 최대한 시간을 당겨야 하옵니다.》

《그런데 거란왕은 어디쯤에 위치하고있는것이요?》

《그걸 알수 없소이다. 내빼는 놈이라 지휘기도 들지 않고 다니니 도무지 …》

《그러하면 거란왕은 기본주력속에 없을수 있소.》

《내 생각도 그러하외다. 통주성을 포위하고있던 적들이 철수하였다는 소식은 방금 들어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모르고있는 형편이오이다. 혹시 그 무리에 묻혀 빠져나가고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 생각에는 거란왕이 여기 구주성앞에 있지 않으면 이미 통과해 지나갔을수도 있다는거요. 개경에서 철수한게 이달 초열흘날이라는데 오늘이 스무닷새날이니 보름동안에 줄행랑을 놓았으면 이미 압록강을 건너갔을수도 있단 말이요.》

양규의 이 말에 김숙홍은 머리를 기웃했다.

《그건 아닌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무로대쪽에서 적이 내려올리 있겠소이까?》

《내려올수 있지요. 거란왕은 정작 빈손으로 돌아가자니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남은 군사로 압록강 남쪽대안만이라도 차지해보려고 마지막반격을 가해나올수 있단 말이요.》

《거란왕이 개경에서부터 쫓겨올라왔으면 지칠대로 지쳤겠는데 어지간히 혼쭐이 난 놈이 아직도 기가 살아 돌아간단 말이오이까?》

《워낙 질기기가 락타발뒤꿈치같은 족속들이 아니요? 좌우간 올라오는 놈, 내려오는 놈 가리지 말고 맞다들리는 족족 족쳐버리고봅시다. 그러느라면 거란왕의 위치도 자연히 알게 될테니까.》

《하오면 계획한대로 애전에 집결하고있는 적부터 칩시다.》

《그럽시다.》

김숙홍은 머리를 끄덕였다.

1월 27일 저녁 술시무렵에 양규와 김숙홍은 구주성앞 애전벌에서 거란군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단행했다.

적들은 구주성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다가 되려 역습을 받고 처음엔 갈팡질팡하였으나 오리가량 퇴각하고나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맞서나오기 시작했다. 양규와 김숙홍의 부대는 앞서 싸움에서 지쳐있었으나 적은 사나흘 넘게 공격을 준비하면서 늘어지게 휴식을 한터여서 기력이 여간 우세하지 않았다. 밤이 새도록 밀고당기기를 하는 과정에 적은 1천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더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싸움이 길어지고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적을 눌러놓지 못하게 되자 양규는 초조해졌다. 무로대에서 내려오는 적들이 뒤에서 달려들 시간이 되였기때문이였다.

아닐세라 무로대의 적은 날이 밝자마자 등뒤로 고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양규와 김숙홍은 애전벌의 적을 설때려놓은 상태에서 뒤로 돌아서서 무로대에서 내려온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들이 이끄는 고려군은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창과 칼로 백병전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날은 1월 28일이였다.

양규도 김숙홍도 모르고있은것은 거란왕이 이미 구주계선을 통과해 올라간 사실이였다. 양규의 반짐작이 들어맞은것이였다. 하지만 김숙홍은 거란왕이 실지 통과해올라간 정보는 입수하지 못하였으므로 양규도 김숙홍도 거란왕이 남은 군사를 그러모아가지고 마지막발악을 해나올줄은 예견 못하였었다. 쫓기기만 하는 적으로 알고있은것이 실책이였다.

허둥지둥 압록강가에 도달하여 닷새가량 로독을 뽑고난 거란왕은 몸살이 채 풀리지 않은 속에서도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긴 숨을 한번 쉬고나서 제법 체면건사를 하리라 작정하고 나섰던것이다.

거란왕은 우선 무로대에 있던 나머지 군사들을 모조리 구주계선으로 내리몰고나서 통주성을 견제하고있던 또 다른 예비대를 직접 끌고 구주성으로 달려들었다.

통주성의 고려군이 거란군의 기동을 포착하지 못한것은 거란군이 통주성을 직접 포위하지 않고있었기때문이였다. 통주성에서 이십여리 떨어진 산속에 둔치고 죽은듯이 배겨있었는데 오밤중에 은밀히 기동하여 구주계선의 고려군을 서쪽 옆구리로부터 들이쳤던것이다.

거란왕의 속심은 어떻게든 흥화진과 구주성일대의 고려군을 제압하고 퇴각해올라오는 저희네 군사를 다문 얼마만이라도 구출해가지고 돌아가자는것이였다. 그것이 도를 넘어 흥화진을 위시한 압록강대안의 고려땅을 아예 차지하려는데로 가닥을 치고있었다. 청천강 이남에 있는 고려군이 별로 굼뜨게 그리고 죽기로 쫓아올라오지 않고있는것이 거란왕으로 하여금 이렇듯 어벌뚝지 큰 작정을 하고 나서게 한것이였다. 개경도성어구에서 이제는 다 죽었구나 가슴을 쥐여뜯던 때가 언제던가싶게 제법 기세를 올리고있는것이였다.

양규는 김숙홍에게 구주계선을 맡기고 자기는 한발 물러서서 흥화진계선에서부터 그 이남계선을 장악하였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는 거란왕이 그렇게 빨리 도망쳐 올라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한탓에 적군을 한놈이라도 더 죽이려는 생각에만 치우치면서 거란왕을 사로잡는 일을 급하게 생각하지 못하였다. 거란왕의 움직임을 장악하기 위한 촉수를 뻗쳐놓지 않은탓에 적의 괴수가 무사히 빠져나가 지휘를 계속하는것을 막지 못하였다.

적의 력량은 양규와 김숙홍의 부대보다 무려 다섯배나 되였다. 근 5만의 적이 양규와 김숙홍의 부대를 에워싸고 조여들었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홍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구주성과 잇달아 뻗어올라간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지휘처를 정하고 군사를 다섯겹으로 둘러치고 태연자약히 싸움을 지휘하였다.

《별장! 그대는 인심도 참 박하오. 그만큼 이곳에 틀고앉아있었으면 이 순검사에게 그 유명하다는 구주성 돌배주 한대접이야 내놓았어야 하지 않소?》

양규는 김숙홍에게 배포유하게 롱을 걸었다.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라 건사해둔것이 없소그려. 술먹고 싸우는 사람을 난 제일 싫어하오.》

《고약하군. 인정머리라군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야.》

《걱정마소이다. 이 싸움을 치르고나서 한동이 구해올릴테니.》

《약속했소.》

《약속했소이다.》

바로 이때 《돌배주가 여기 있소이다.》 하며 군사 하나가 오지단지를 들고 다가왔다. 이곳 봉수대를 책임진 군교였다.

《나는 여기 봉수대 군교이오이다. 명성높으신 두 장수분을 위해 한턱 내는것이니 드시옵소서.》

《그대가 그래도 주인노릇을 하는군. 어서 붓소.》

양규는 군교가 부어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별장도 어서 드시오. 봉화지기, 그대도 어서…》

양규가 지꿎게 권하자 김숙홍은 얼굴을 찡그리며 술보시기를 들어 조금 마시였다.

《어, 이게 꿀맛이다.》

김숙홍은 머리를 한번 기웃하더니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술을 안한다더니 잘만 드시는군.》

양규가 퉁을 주자 김숙홍은 껄껄거리며 대꾸했다.

《술이 이렇게 단것인줄 오늘에야 알았소이다. 봉화지기, 이게 술이 맞긴 맞소? 식혜가 아니요?》

《술이기도 하고 식혜이기도 하오이다.》

《허, 이런게 술이라면 난 매일이라도 마시겠소. 그대는 싸움이 끝난 뒤에 이 술담그는 비방울 꼭 알으켜줘야 하오.》

《그리하겠소이다. 아, 그럴것없이 금년 가을에 여기 봉수대골안에 디디고쌓인 돌배를 가지고 별장나리와 함께 돌배술을 담그옵시다.》

《좋소, 약속했소.》

김숙홍은 곱배기를 청하며 기분이 좋아서 말을 이었다.

《오늘이 정월 스무아흐레날이 되는군. 순검사나으리! 보아하니 고려땅에 들어왔던 거란군은 다 여기로 모여온듯 하오이다. 오늘싸움이 볼만 하겠소이다.》

《우리가 오늘싸움으로 아예 끝을 맺읍시다.》

《그럽시다.》

양규와 김숙홍 그리고 봉화지기는 권커니작커니 하며 잠간사이에 술 한단지를 다 비웠다.

인츰 날이 밝았다.

거란군은 마지막총공격을 가해왔다.

락타무리를 앞세우고 고려군이 차지한 진지를 톺아올라온 적들은 급기야 창을 휘둘러대며 미친듯이 덤벼들었다.

화살이 이미 떨어진 고려군은 적을 바투 끌어붙인 다음 백병전으로 소멸하는 전술로 맞섰다.

적들은 제놈들의 시체를 타고넘으며 물밀듯이 공격해올라왔다. 앞에 선 적병들은 고려군의 창에 찔리고 칼에 베여지면서도 뒤로 돌아설념을 못하였다. 뒤로 돌아설 틈사리가 없었기때문이였다.

한겹, 두겹 고려군의 방어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수적우세를 믿고 적군은 시체를 쌓아가면서도 앞으로만 밀려들었다.

고려군의 마지막방어진이 무너졌다. 남은 고려군사들은 양규와 김숙홍을 에워싼채 최후격전에 나섰다.

거란군은 한덩어리로 굳어진 고려군에게 더는 다가붙지 못하고 궁수들로 화살전을 들이댔다.

비발치듯 날아드는 적의 화살을 칼날로 쳐떨구며 고려군사들은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굴함없이 싸웠다.

양규와 김숙홍도 선혈을 쏟으며 쓰러졌다.

바로 그무렵에 적군의 등뒤에서 귀에 익은 고려군의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둥! 두둥! 둥둥둥둥!…

유방과 김훈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지원부대가 적의 뒤통수를 답새기며 구름처럼 공격해왔다. (유방은 거란왕을 놓친것이 분하다며 내처 평양성까지 올라와서 장수 김훈이 지휘하는 부대와 함께 퇴각하는 적을 추격소멸하는 싸움에 또다시 몸을 잠근것이였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은천이 이후에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의논이 되여있었다.)

거란군은 역포위에 들어 좌왕우왕하다가 드디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란왕은 고려군의 새로운 병력이 기치창검을 번뜩이며 진격해오자 케가 틀렸음을 알아차리고 황황히 꽁무니를 사려버렸다. 그는 졸개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채 압록강을 건너 쫓겨가고말았다.

고려군은 맹렬한 추격전으로 강을 건느는 거란군을 뒤쫓아가며 족쳐댔다.

구주계선에서 압록강까지 가는 길우에 죽은 거란군의 시체가 한벌 뒤덮였다.

양규는 이 한달어간에 적은 수의 군사를 가지고 일곱차례의 큰 전투를 벌려 3만여명의 적을 살상하고 그만한 수의 랍치되였던 인민들을 구원하였으며 수많은 말과 락타, 식량과 기재를 로획하였다.

적을 물리친 고려군은 승리의 환호를 올리였다.

하지만 쓰러진 양규와 김숙홍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채 봉수대지휘터에 선채로 굳어져있었다. 이들의 온몸에는 적의 화살이 빼곡이 박혀있는것이 흡사 고슴도치를 련상케 하였다.

《아버지! 눈을 뜨세요, 내가 왔어요, 아버지!…》

열두어살 나보이는 소녀애가 죽은 군사의 시체를 흔들며 애타게 울부짖고있었다. 그뒤에 수염이 허연 로인이 눈물짓고 서있었다.

로인과 소녀애가 붙안고 우는 그 시체는 봉화지기였다.

《래일이 네 생일인데… 이렇게 숨지고말았구나, 아들아!》

로인은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빈 오지단지는 바로 이날 새벽에 양규와 김숙홍과 봉화지기가 함께 마신 돌배주가 들어있던 그 낯익은 오지단지였다.

아마도 봉화지기는 이 오지단지를 집에서 떠나올 때 가지고왔던 모양이였다. 자기 아버지와 무엇인가 약속이 오갔던것 같았다. 이곳 구주성에 유명한 돌배주를 드리겠으니 한번 찾아오라고, 그래서 생일을 앞두고 찾아온것일수 있었다. 그동안 몰라보게 큰 딸도 보일겸 해서…

하지만 이들의 상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아, 얼마나 많은 이 나라의 장정들이 전장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것인가.

오랑캐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그 하나의 생각으로, 조상이 물려준 이 땅을 단 한치도 오랑캐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들은 싸웠다. 고려의 남녀로소 모두가 떨쳐나서 싸웠다. 싸워서 이긴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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