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12

 

거란군은 강은천이 예견한 이틀이 아니라 나흘만에야 개경의 도성어구에 들어섰다.

금교역말계선과 탑고개계선에서 유방이 보낸 고려군에게 곤죽이 되게 얻어맞고 주눅이 들대로 들어가지고 도성어구에 도달한 거란군은 성이 빈줄도 모르고 겁기가 가득해서 성을 둘러싸고도 진종일 어물거리다가 닷새째되는 날에야 성을 공격하였다.

이날은 새해 1011년 정월 초하루였다.

불에 대충 그슬린 양고기쪼박 한개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나서 비칠거리며 돌격해나가는 거란군사들의 몰골은 해괴망측하기 그지없었다.

짬만 있으면 추위를 견디느라 불에 매달린탓에 타다 남은 넝마를 간신히 걸친 옷주제는 차마 눈뜨고 보아줄수 없는 지경이였다.

평주이남에 들어서서부터는 낟알 한톨 구경도 못해본 놈들이여서 뼈다귀와 가죽이 서로 맞붙은듯싶은 그 몰골을 보아서는 창질을 한합도 할것 같지 못해보였다.

찌그럭거리는 충차를 몰고 김빠진 구령소리에 맞춰가며 겨우겨우 성문을 까고 들어가본즉은 성이 텅텅 비여있다. 눈이 뒤집혀진 적병들은 행여나 먹을것이 없나해서 집집의 울담을 넘어들어가 구들장을 들추고 뒤간까지 쑤셔보았으나 낟알은커녕 뜨물 한방울 찾아내지 못하였다.

기진맥진한 거란군사들은 토방마루건 길옆 도랑창이건 가리지 않고 찔 뻗어버린채 가쁜숨만 톺아내였다. 조금 지나 태반의 군사들이 스르르 눈이 감겨들며 잠에 빠져버렸다.

졸지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앞에서 거란왕은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평주땅을 지나면서부터 된코에 걸려든다는 기미를 느끼기 시작하였으나 그렇다고 되돌아설수도 없는것이여서 추근추근 매집좋게 얻어맞기를 거듭하면서 행여나 끝이 나겠지 하고 악을 쓰며 참고 와본즉은 함정, 곧 패배의 종착점이였다.

화가 치민 거란왕은 단말마적인 비명을 질러대였다.

《불을 지르라! 불을… 모조리 타서 재가 되게… 불을 지르라!…》

도성의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맥이 빠진 적병들은 불질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다.

한낮이 지나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란왕은 도성에서 벗어나야 목숨을 건질수 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지금에 와서 고려임금을 사로잡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속히 철수하라! 서둘러라! 여기는 함정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성밖 북쪽 산자락에서부터 화광이 충천하더니 뒤이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불길이 덮쳐들기 시작하였다.

성안에 들어갔던 적병들이 밖으로 쓸어나와보니 성밖에 있던 적들은 벌써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고있었다.

불길은 때마침 불어오는 서북풍을 타고 번져지고있었다.

거란군은 동남방향으로 무리지어 내뛰기 시작했다.

거란왕은 그 복새통에서도 동남쪽으로 뛰는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저들의 무리를 서쪽으로 돌려세우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북쪽에서는 불길이 밀려오므로 당장은 서쪽으로 내빼려는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고려군이 바라는것이였다.

은천이 유방과 함께 이미전에 작정해놓은 두번째 함정이였다.

개경도성에서 시오리정도 빠져나왔다 생각될즈음에 거란왕은 피뜩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이대로 계속 나가다가는 륙지가 끝나고 바다에 닿으리라는것을 생각해낸것이였다.

바다라니?!…

거란인들은 바다 그자체를 모르는 족속들이였다.

게다가 바다엔 고려수군이 있을것이였다.

그곳은 올데갈데 없는 진짜 함정이였다.

서쪽으로 가면 안된다!

차라리 타죽는 한이 있어도 불길을 맞받아 북으로 뛰여야 한다.

거란왕은 비장한 각오를 안고 불길이 치솟는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화염을 들쓰며 겨우 길을 만들고 무리를 뽑기 시작했다.

밭뙈기들이 널려있는 구간을 찾아내여 그리로 말을 몰아 구멍을 낸것이였다. 밭은 잡관목이 아니라 새초만 한벌 깔려있은탓에 불길이 높지 않았고 인차 빈땅이 드러난것이였다.

겨우 걸려있던 넝마옷마저 불에 타버려 맨살을 드러낸 거란군무리들이 꾸역꾸역 몰켜들어 불이 사그러진 구간으로 꽁무니를 사리기에 급급했다.

어둠이 이들의 목숨을 부지해주었다.

개경도성에서 사오십리정도 쫓겨와서 겨우 고려군을 떼버린 거란군은 다시금 찔 뻗어버렸다.

개경도성앞 싸움에서 무리의 사할가량을 잃어버린 거란왕은 까무라칠 지경이 되였다.

평양성에서 때아닌 불세례를 받고 홀딱 타버리고만 뒤에 겨우 모기다리기장만큼 자래웠던 턱수염이 개경도성에 와서 또 한번 들쓴 불세례에 다시금 깨끗이 타버렸다.

불에 익어 반들반들해진 송곳턱을 어루쓸던 거란왕은 찌르는듯싶은 아픔에 골살을 찌프리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이상하게도 이 고려땅은 꼭 도성에 접근하기만 하면 불벼락을 내려 턱수염을 태워버리는것이였다.

하기는 이상할것도 없었다. 함부로 남의 지경을 넘어오는 무뢰한에게 그쯤한 벌은 응당한것이였다.

거란군은 군마를 마구 잡아 주린 배를 달래며 사흘이 걸려서야 몸을 대수 추세울수 있었다.

그러나 거란군은 허리도 채 펴지 못한채 고려군의 포위에 들어 오도가도 못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고려군이 사흘이 지나서야 거란군을 포위한것은 그 사이에 도성의 불을 끄고 방어군을 재정리하는데 시간을 소비한때문이였다.

고려군도 숨을 돌려야 했던것이다. 적에 비해 어방없이 적은 수로 혼신의 힘을 다한탓에 맥이 진하기는 거란군과 별반 다를바 없었던것이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최후발악하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속에 사흘이 또 지나갔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포위를 뚫는 싸움에서 또 절반을 잃어버렸다.

나머지 삼할만이 겨우 잔명을 유지한채 더이상 움직일념도 못하고 또다시 쓰러져버렸다. 포위를 뚫렀다기보다는 고려군이 일단 공격을 멈춘 덕에 살아남은것이였다.

고려군도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사실상 고려군은 적에 비하면 대비도 안되는 력량이였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 기아에 허덕이면서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탓에 이길수가 있었다. 그보다는 침략자들을 더이상 들여놓을수 없다는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죽기로 맞서나왔기때문에 이긴것이였다.

거란군이 5만이 넘는 반면에 고려군은 1만을 조금 넘을뿐이였다. 이러한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고려군은 이긴것이였다. 4만의 거란군을 소멸해버리였던것이다. 고려군은 5천의 군사를 잃었다.

량측은 이 계선에서 다같이 맥이 진해버렸다.

거란군은 사흘을 더 주저앉아 쉬고서야 겨우 일어섰다.

개경도성에 들어섰던 날부터 꼭 열흘만에 거란군은 5분의 1만이 겨우 살아남아서 그것도 반주검이 된 몰골을 해가지고 급기야 총퇴각의 걸음을 떼였다.

은천은 개경에 들어왔던 적들을 마지막 한놈까지 깨끗이 소멸해버리지 못한것이 여간 한스럽지 않았다. 더우기 침략의 괴수 거란왕을 사로잡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내는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남은 고려군사 5천도 거의다 부상자였다. 단 한명도 온전한 군사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였다.

은천은 생각던 끝에 유방과 의논하고 전령을 파하였다. 탑고개와 금교역계선에서 적을 선제타격하였던 부대들에 련락해서 거란군 패잔무리들을 마저 소멸하라는 령을 내린것이였다.

그러나 은천의 이 명령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거란왕은 탑고개옆 도로주변에 불을 피워놓아 자기 군사들이 쉬는것처럼 해놓고는 고려군이 기습해오자 즉시 부대를 우회시켜 빠져나갔던것이다. 거란군은 같은 방법으로 금교역도 빠져나갔다.

거란군이 금교역계선을 뚫고 올라갔다는 소식을 받은 은천은 평양성안에 있는 고려군의 일부를 빼내여 퇴각하는 거란군을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기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평산고을어구에 이른 거란왕은 떨구어놓았던 하공진을 다시 끌고 올라가면서 은천에게 이런 통첩장을 보냈던것이다.

《거란군의 퇴군을 막으면 고려사신 하공진을 죽일것이다.》

은천은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아직 기회는 있었기때문이였다.

은천은 거란군의 퇴각소식을 서둘러 임금에게 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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