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11
은천은 패장의 모습으로 허겁지겁 돌아온 지채문을 지체없이 임금이 머무르고있는 양주(개경남쪽 1백리근방 고을)로 떠나보내였다.
지채문
임금이 개경을 떠나간지도 열흘이 넘은 때였다.
그 기간에 은천은 자칭 개경방어사가 되여 동분서주했다. 거란군의 최종목표가 개경인것이 명백해진 시점에서 은천이 취한 대책은 개경을 거란군의 퇴각의 기점으로, 고려군의 반격의 출발선으로 만들려는것이였다.
은천은 적들을 개경을 통과시켜 림진강대안까지 끌어들일 잡도리였다.
거란군주력을 례성강과 림진강사이에 끌어들인 다음 서쪽으로 슬금슬금 조여서 서해로 내몰아 몰살시키려는것이였다.
바다란 밑도 끝도 모르는 이 오랑캐족속들을 서해의 소금물에 절구어 수장해버리리라. 이 계획을 성사시키려면 적을 개경까지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했다.
은천은 평주(평산) 이남에서부터 개경으로 통하는 주요로상의 고을들과 촌락들에 긴급피난령을 내리였다.
식량을 비롯해서 적들이 리용할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것을 매몰하거나 불사르게 하였다. 가축들도 도살하거나 몰고가게 하고 우물마저 메꾸어버리도록 하였다.
지적된 고을과 촌락들에서는 집집마다 보름정도 먹을 식량만을 둘러멘채 멀찌감치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고구려시기 을지문덕장수가 적용했던 청야전술을 쓰려는것이였다.
은천은 자기가 개경계선에서 거란군을 막지 못하는 경우 그 후과가 얼마나 엄중해지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고려군의 대부분 력량은 서경과 그 이북 청천강계선과 압록강대안사이에 집중되여있었다.
개경이남에는 정예군이 단 한명도 없었다. 고을마다 자체방위력량으로 가지고있는 향군이 얼마간 있었으나 그것은 제각기 고을을 단위로 분산되여있어 거란군이 침공해오는 경우 조직적인 항전을 할수 없었다. 상비군이 아닌탓에 정규훈련도 전혀 받지 못하였고 대부분 보군이여서 거란군의 기마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은천은 임금을 떠나보내기 직전에 어전회의에서 투항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신랄히 타매하던 그때 정경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개경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항전을 포기할수 없다니 이 무슨 해괴한 궤변인가. 도읍을 함락당하면 그것으로 끝장인것을 그대가 모른단 말인가?》
《함락당하는게 아니라 일부러 내여주는것이다. 고려땅 전체를 지키기 위해 도읍일망정 잠시 내여주는것이다. 큰 고기를 낚자면 그럴사한 미끼가 있어야 하는 리치이다. 함정을 파야 짐승을 잡을것 아닌가.》
《불충무도하게 페하를 도성밖으로 내치면서까지 함정을 파야 하는가? 그건 하책에도 들지 못할 무지책이다.》
《하오면 투항을 해서 속국이 되는것이 상책이란 말인가? 우리 고려가 태조이래 누려오던 황제국의 지위를 포기해야 하는게 상책인가? 페하를 페하라 부를수 없게 되는데도 상책인가 말이다.》
《겉으론 속국이라 해두고 나라안에서는 황제국의 체모를 지키면 그만 아닌가?》
《야, 이놈아! 나라의 체모라는게 안팎으로 한결같아야지 안에서는 황제국이고 밖에 나가서는 속국이라?! 되지 않게 페하의 존안앞에서 감히 오랑캐의 속국이 되자 해? 조상들이 욕한다, 이 쓸개빠진 놈들아!》
은천은 더 참지 못하고 놈자를 붙여가며 된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 대에 속국이 되면 다음대엔 거란의 한개 주나 현이 되고말것인즉 죽은 뒤에 후대들에게 욕을 먹느니 지금 살아있을 때 죽기로 바로 잡자 함인데 밸빠지게 무슨 놈의 투항소리가 그리도 랑자하냐, 이 돼먹지 않은것들아!》
은천의 노성에 대신관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굳어졌다.
저 사람이 고작해서 정4품으로 대신반렬에 꼽히지도 못하는 주제를 해가지고 정2품 재상들을 자식 꾸짖듯 해?! 세상에 이런 변을 보았나?
대신들의 얼굴엔 이런 표정이 씌여있었으나 언제 언행따위나 론할 한가한 상황이 아닌지라 꿀먹은 벙어리모양 입술만 오물거리며 뽑은 목을 거둘념도 못하고 갑자르기만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은천의 말마디들에 그르다 흠잡아낼 구석이란 단 한대목도 없었기때문이였다.
조정에 머리를 들이민이래 처음 보는 은천의 과격한 언행이였지만 나라와 임금의 존위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정당한 론거앞에 더 다른 할 말이 없는것이였다. 되여먹지 못한 놈에 쓸개빠진 놈에따위 된욕을 뻐꾹소리 한마디 대꾸를 못한채 곱게 먹고섰을뿐이였다.
《되였소. 강시랑이 방금 한 말은 짐이 할 말이였노라. 이 시각부터 궁성안의 일체 정무는 강시랑이 주관하라!》
어전회의는 이렇게 결말이 났었다.
은천은 임금이 부여한 전권을 행사하여 지금 결전의 새 고비를 헤쳐가고있었다.
이런 은천을 적극 도와나선 사람은 유방이였다.
유방은 품계가 은천이보다 한급 높은 정3품이였지만 그런데는 개의치 않고 모든 일처리를 은천의 지시대로 따랐다.
선비는 말로 하고 무사는 행동으로 한다, 이것이 유방의 지론이였다. 그는 개경방어군의 전방지휘를 책임지고 은천의 결심대로 청야전술이 빛을 보게 하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하공진이 거란왕을 만난 뒤 억류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소.》
지도를 펴놓고 적의 침공경로를 기입해넣고있던 유방은 은천이 군막에 들어서자 새로 입수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억류되다니? 정확한 정보요?》
은천의 눈길이 날카로와졌다.
《지금 거란왕을 따라 여기로 오고있다오. 발목에 쇠사슬이 걸린채 수레에 앉아있더라오.》
《?!…》
은천은 하공진의 신변이 위험에 빠졌음을 대번에 직감했다.
일전에 보낸 고려임금의 정화요청을 거란왕이 묵살하였다는것을 말안해도 알수 있었다. 부득부득 개경으로 공격해오고있는것자체가 정화요청을 거절한다는 표시이기때문이였다.
거부의 표시로 하공진을 죽여버릴수도 있는것이였다. 발목을 묶어가지고 끌고오는것이 바로 그런 예감을 더해주고있었다.
《그 사람을 잃으면 안될터인데…》
은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란것들이 하공진을 인질로 쓰려는게 아니요?》
유방의 이 말에 은천은 머리를 끄덕이다가 이내 가로 저었다.
《그럴수도 있소만… 저희들 사람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있을수도 있소.》
《저희 사람으로 말이요?》
《하공진은 인품이 준수한데다 언변술이 좋아 놈들의 환심을 살수가 있소. 그가 거란풍물을 잘 알고 거란인들과 쉬이 어울리는 장끼가 있기에 하는 말이요. 거란은 우리 고려를 놀래우느라 그를 죽여버릴수도 있었지만 억류하고 끌고다니고있소. 이것은 그를 돌려세워보려고 하는것이요. 》
《그 사람이 견디여내야 할터인데…》
유방은 괴로운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하공진은 쉽게 변할 사람이 아니요. 견디여낼거요. 자, 우리 거란왕을 맞을 준비나 잘해봅시다.》
은천은 유방이 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적이 오늘 아침에 평주고을을 출발했다오.》
유방은 침착하게 적정을 설명했다.
《그럼 지금쯤 우봉 금교역에 거의 들어섰겠소.》
《조금 있으면 싸움이 붙을것이요.》
《그곳 오조천(례성강지류) 계곡에서 한 1만은 솎아내야 할터인데…》
은천의 이 말에 유방은
《
금교역말에서 동서방향으로 20리가량 펼쳐진 이 계곡은 오조천을 가운데 두고 량옆으로 깎아지른듯싶은 낭떠러지나 울퉁불퉁한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있어 벼랑우에서나 산릉선에서 화살질 또는 돌덫사태로 손쉽게 적을 조겨댈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또 삼십여리 들어와서 이 탑고개 계곡에서 그만한 수를 또 줄여낼수 있겠구만.》
은천은 손가락으로 한뽐정도 밑으로 재여내려가서 또 한곳을 짚었다.
《거기서는 조금 못 미칠수 있소. 워낙 폭이 좁아놔서… 좀 아쉬운 곳이요.》
유방이 대꾸하자 은천은 손을 내저었다.
《아쉬울것까진 없소. 오는 도중에 너무 많이 줄여놓으면 놈들이 놀라서 아예 멎어버릴수 있으니까. 그러면 우리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고마오.》
《딴은 그렇구려.》
유방은 알만 하다는듯 웃으며 거란군이 완전히 갇히게 될 개경도성 남쪽 드넓은 개활지대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려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