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8

 

격전의 소용돌이속에 한해가 저물고있었다.

이해 1010년의 마지막 섣달무렵에 들어서면서 고려군민은 더욱 기세차게 항전을 벌려나갔다.

속전속결로 고려의 땅을 큼직이 떼여내고 항복을 받아내려던 거란은 싸움이 길어지자 갈팡질팡 허둥대였다.

청천강이북계선에서 온전히 까고 차지한 성이 단 한개도 없다는 사실이 적들을 당황케 한것이였다.

맵짠 동삼의 추위가 거란군을 더욱 수세에 몰아넣고있었다.

이런 때 고려군이 반격을 해나오면 형세는 거란군에 완전히 불리하게 번져질판이였다.

그러나 고려군은 아직 반격을 가해올 처지는 못되는것 같아보였다. 력량상차이로 해서 수적으로 적은 고려군은 아직은 반격이 아니라 방어에 급급하는 모습이였다.

거란왕은 생각끝에 두번째 방안으로 넘어갔다.

모험이기는 하지만 고려임금에게 직접적인 예봉을 돌려 그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자는것이였다.

항복만 받아내면 돌아가는 길은 무사할수 있다고 타산한것이다.

거란왕은 흥화진과 통주성을 비롯한 청천강이북계선의 고려군들을 견제하는데 거란군의 절반을 떨구어놓고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개경으로 돌입하기로 작정했다. 서경을 한번 다쳐보고 타고앉으면 더 좋고 타고앉지 못하는 경우 포위만 해놓고 개경으로 곧추 공격해들어가자는 심산이였다.

거란군이 서경을 포위하는 한편 개경을 목표로 정하고 공격해내려온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조정은 설레설레 끓고있었다.

일부 관료들은 투항을 해야 산다는데로 의견을 모아가고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투항이란 거란왕의 요구대로 강조를 잡아바치고 청천강이북땅을 내여주며 고려가 거란의 속국이 되였다는것을 약조하는것을 말하는것이였다.

성종임금때에 결사항전으로 물리쳐버린 그 횡포무도한 거란의 요구를 지금 와서 받아들이자는 쓸개빠진 넉두리였다. 치욕을 들쓰고서라도 목숨을 살려보자는 구차한 궁여지책이였다.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얼빠진 넉두리를 꺼리낌없이 늘어놓고있는 대신들을 바라보던 은천은 더는 참아내지 못하였다.

《서북방 군민이 결사항전으로 적을 막고있는 때에 싸움의 끝도 보지 않고서 투항이라니 이 무슨 괴이한 궤변들이시오?》

《시랑은 사태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고서 그런 소릴 하오? 서경이 포위에 들었단 말이요, 서경이. 그 다음차례가 어디일것 같소. 바로 이 개경이란 말이요. 개경이 함락되면 끝인줄 그대가 그래 모른단 말이요?》

감찰어사 리인택이 목에 피대를 세우며 은천을 공박했다.

《개경이 함락되면 끝이라구? 그대는 개경이 왜서 꼭 함락된다고 생각하는지 그게 우선 리해가 되지 않소. 그리고 설사 개경이 함락된다 한들 페하께서 계시고 우리 고려군민이 있는 한 다시 찾으면 되는것인데 싸워보지도 않고 무슨 끝타령이요?》

은천의 말에 리인택은 발끈해서 대들었다.

《답답하군, 서경이 포위되였다는 말을 뭘로 듣소.》

《서경이 포위되였다고 개경도 포위된다는 법있소? 그리고 포위되였다 해서 끝이라는 소린 대체 무슨 뜻이요? 싸움이란게 먼저 성을 포위해놓고 공격하는것인데 공성전으로 성을 깨지 못하면 공격했던 적이 오히려 지는것으로 되는걸 모르신단 말이요? 포위되였으면 끝나는줄 아니 세상에 그런 무지가 어디 있소!》

은천은 겁부터 먹고 헤덤비는 인택의 꼬락서니를 매섭게 타매했다.

《서경의 대도수는 그렇게 맥없이 손들고 나앉을 졸장부가 아니라는걸 난 장담하오. 그리고 페하께서 이미 동계(지금의 함경남북도와 강원도북부)를 지키고있던 지채문을 서경으로 지원가게 하였은즉 이제 그들이 거란군을 역포위하고 안팎으로 조겨대면 능히 서경포위를 풀수도 있는거요. 싸워보지도 않고 그따위 투항같은 소린 하지도 마시오.》

은천은 인택이보다 지체높은 대신들을 겨누고서 그들이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이고있는것이였다.

《그만큼 싸워봤으면 다 안것 아니요? 도통사가 적군에게 포로되는 지경인걸 말이요.》

인택은 은천이 동계의 군사를 서경으로 증원시킨걸 상기시키는통에 한풀 기가 죽어가지고 그래도 제사 옳다고 우기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강조가 포로되였다고 만사가 끝난게 아니란 말이요. 보다싶이 그가 없이도 싸움은 계속되고있지 않소.》

은천은 쓰겁게 인택을 흘겨보고는 말없이 내전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밤에 임금이 거란왕에게 말씨름을 붙여보아야겠다고 한 분부의 진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따져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과인의 뜻인즉은 거란에 투항하자 함이 아니고 외교적경로를 타고 사리를 따져보는것도 필요한것이라 생각되여 그러는것이요.》

임금은 충혈진 눈으로 은천을 바라보며 자기의 의도를 설명했다.

《그러하실줄 알았소이다, 페하! 소신은 페하께서 혹여 저 투항파들의 어불성설에 기울어지시는가 하여 온밤 걱정하였소이다. 용서해주시오이다.》

《나라의 사직을 떠맡고있는 몸으로 어찌 그런 소리에 기울어지리오. 그들 말대로 하면 종당에는 사직을 포기해야 하는줄 과인이 모를 사람이요?

그래, 어떻소. 다소 늦춰주는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장난삼아 말씨름을 해보는 수가 아니요?》

《그른 일은 아닌듯 하옵니다만… 말씨름에 내보낼 적임자가 보이질 않아 그러하오이다. 하나같이 심지가 얄팍하니… 저, 소신 생각엔…》

《하공진을 점찍고있는게 아니요?》

《그러하오이다. 그를 소환하여 보내는 수옵니다.》

《그 사람이 거란문물에 밝고 접촉도 많이 해보아 안면도 넓겠다, 게다가 그는 배심도 있는 편이지. 그럼 빨리 조처해야겠소.》

《알겠소이다. 서신은 인츰 초잡아 올리겠소이다.》

《성종때에는 문무겸전한 서희가 있어 국난을 무난히 처리할수가 있었다보오만 내 대에는 그런 인물복이 태우지 않소그려. 강조 그 어른을 크게 믿고있었는데… 그렇게 맥없이 잡히고말았으니…》

임금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너무 상심마소이다, 페하! 장수들이 적지 아니 죽었다 하나 군사들은 여전히 살아있지 않소이까. 압록강이남의 우리 성들이 하나같이 버티고있는건 엄연한 현실이오이다.

서희대감께서 선견지명으로 성쌓기를 다그쳐서 조밀한 방어진을 형성해놓은것이 지금 큰 도움이 되고있소이다. 적이 서경까지 왔다 해도 그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닌줄 아옵니다. 우리가 결사로 막아 적의 맥을 뽑아놓으면 기필코 돌아서지 않을수 없사온데 그때가 바로 적을 치는 적기가 될것이온즉 종당에는 우리가 이길것임을 신은 믿어의심치 않소이다 》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반드시 이긴다 하였던가? 싸움에선 이긴다는 신심이 중요한가보오.》

《지당한 말씀이시오이다.》

은천은 임금이 맥을 놓지 않고있는것이 마음놓이였다.

《페하! 제 생각에는 만약의 경우를 예견해서 페하께서 잠시잠간 개경을 뜨실 준비도 해두는것이 좋으리라 생각하옵니다.》

《그런 생각도 안해본건 아니오만… 성종임금처럼 전장으로 나간다면 몰라라 뒤걸음친다는것이 어쩐지 거북해서 그러질 않소.》

《그때하고 사정이 다른 점을 생각해야 하옵니다. 그때는 거란이 우리로 하여금 압록강 이북땅을 포기하게 하는게 기본목적이였고 그 다음목적이 저들의 속국이 되게 하려는것이였는데 지금은 청천강 이북땅을 내놓기를 바라는것이옵니다.

우리 고려의 국토를 줄여놓아서 약소국으로 만들어놓으면 속국으로 되라 안해도 자연 속국이 되리란걸 알고 하는짓이온데 문제는 적이 페하를 직접 상대하여 이 일을 매듭지으려 하는것이옵니다. 무엄하게도 페하를 포로하려는것입니다. 이런 때 자칫하면 적의 전술에 말려들수 있사오므로 페하의 종군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강조의 교훈이 말해주고있소이다.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는것은 아무때나 하는것이 아니오이다. 지금 우리 고려에 있어서 첫째로 나서는 중대사는 페하의 안전을 지키는것이옵니다. 이 일이 빈틈이 없어야 결사항전도 무난히 치르어질수 있고 종당에는 거란을 이기고 국토가 보존되는것이옵니다.》

《시랑이 그렇게 생각해주니 과인은 고맙기만 할뿐이요.

내 좀 생각해온바가 있는데… 강은천시랑은 성종임금때부터 목종대를 거쳐 지금까지 근 20년을 례부의 시랑으로만 종착하고있었소그려. 이는 대단히 잘못되였소. 늦게나마 이를 바로잡으려 함이니 어떤 자리가 합당할는지 본인의 의사를 들어봅시다.》

임금의 이 말에 은천은 난감을 표시했다.

《란시일수록 관리임명에 신중해야 할것이오이다. 지금같은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신은 지금 이 자리로도 만족하옵니다. 페하께서 저의 소견을 중히 여겨주시는 그것이면 전 더 바랄것이 없사옵니다.》

《과인이 새삼스레 생색을 내는것 같아 독촉은 않겠소만… 이후에 더는 사양말기를 바라오.》

말이 끝났음을 알리는 뜻으로 손을 들어올리던 임금은 다시금 은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만, 지금까지 과정을 놓고보매 과인의 일처리에 빈틈이나 허실이 많았을것인데 급히 바로잡으라 간할 사항은 없소?》

《큰 탈선이 없었사온데 무슨 간할 사항이 있겠소이까. 신이 진심으로 아뢰옵는데 페하께서 현명하시와 그간에 조정의 정책방향이 정확하여 국위선양에 흠이 없었을뿐더러 인재의 등용이 적재적소하니 만사가 페하의 뜻대로 원활하게 풀려왔고 페하의 검소함을 따르니 나라기강이 바로 서고 민심이 한곬으로 흐르고있소이다. 현실이 보여주는바로 40만의 적대군이 두달째나 압록수에서 청천수사이의 좁은 구간에서 맴돌이를 하고있는것은 우리 고려의 국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수 있게 하거니와 조정의 일처리가 원만하였음을 증명하는것이 아니겠소이까.》

《강시랑의 말은 들을수록 힘이 생겨 좋소이다. 참, 리인택 그 사람이 조금 지나쳐보이는감이 들지 않으시오?》

《그 사람도 페하께 충성함은 의심할바 없사오나 한사코 투항만을 주장하니 여간 눈에 거슬리지를 않소이다. 말이 난김에 한마디 보탠다 하면 그는 현지의 수장들을 존대하지 아니하고 깔보면서 분수에 넘는 훈계를 례사로 하여 종종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는줄 아뢰옵니다.》

《알고있소. 그를 아무때건 단단히 신칙해야 할가보오.

그럼 돌아가 눈을 좀 붙이시오. 서신초안은 천천히 해도 될것이니… 하공진이 돌아오는데 사나흘은 걸리겠지요?》

《데리러 가는 걸음까지 더하면 빨라서 엿새는 걸릴것이오이다.

페하께서도 옥체를 돌보시오이다. 페하가 무탈하셔야 만사가 무난할것이오이다.》

은천은 머리숙여 임금의 건강을 빌었다.

《나야 한창나이인데 걱정할게 있소? 강시랑이 그 년세에 탈이 날가 걱정이요.》

은천은 어느덧 예순두살에 이르고있었다. 그 나이에 마흔세살 아래인 스물전의 년소한 임금을 받들고있는것이였다.

하지만 은천은 걱정하지 않았다.

임금은 여간 총명하고 대가 바르지 않았다.

측근대신들이 주저없이 제 소견을 펴게 하면서도 자기 소견은 제 머리로 세울줄 아는것이였다. 우왕좌왕하는 모양을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투항을 운운하는 관료대신들을 구태여 나무람하지 않고 내버려둔채로 조용히 그리고 꼼꼼히 매사를 제 주견대로 처리해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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