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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7

 

《로전, 이 금수만도 못한 노옴! 네놈이 오랑캐의 삽살개가 돼서 내앞에 나타나? 이 더러운 놈아, 퉤!》

거란왕이 보낸 투항지시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로전에게 침을 뱉는 사람은 고려군 중랑장 최질이였다.

최질의 좌우에는 같은 중랑장인 홍숙과 통주성 방어사 리원구, 방어부사 최탁, 대장수 채은겸이 늘어서서 편지를 가지고 온 거란조정의 합문사 마수와 변절자 로전을 쏘아보고있었다.

행영도통판관이던 로전은 강조와 함께 포로된 즉시 전향하여 거란왕의 끄나불노릇을 하고있는것이였다.

《내 말을 들어보구서 욕을 해도 하시오. 내가 이 노릇을 하고싶어하는줄 아시오? 행영도통사 강조나리를 살리려거든 통주성을 투항하게 하라 강박하니 어쩔수 없어 이러하는거란 말이요.》

로전은 제사 억울하다는듯 억지울음을 삼키며 주억거렸다.

《도통사나리 선성을 함부로 팔지 말라. 그분은 죽으면 죽었지 투항하라 할분이 아니다. 제 목숨을 살리겠다고 투항을 지시할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방어사 리원구가 걸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수인지 하는 저 작자는 억류해두고 인질로 써먹을것이고 변절자 로전은 공개처형해서 성안의 군심을 바로잡도록 하는게 좋겠소.》

대장수 채은겸이 한마디 이르고 쓰거운듯 돌아섰다.

통주성 방어사 리원구는 즉시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모아놓고 로전의 목을 벤 다음 성루에 걸어놓았다.

《사나이로 세상에 나서 한번 죽는것은 당연지사로되 오랑캐의 앞잡이가 돼서 죽는 이따위 개죽음은 절대로 따를바가 아닌가 하노라.

우리모두 내 나라 고려를 지켜 온전한 남아장부 기개를 떨치고 죽어도 죽자!》

리원구의 호소에 군민은 다같이 호응하였다.

수장 강조의 포로소식으로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던 성안의 민심, 군심이 비로소 안정되였다.

소배압은 5만의 군사로 통주성을 사흘동안 공격했으나 완강히 저항하는 통주성 군민을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서고말았다.

소배압은 방향을 돌려 남쪽방향으로 80리 내려와 곽주성을 들이쳤다.

곽주성 군사들은 거란군과 맞서 치렬한 격전을 벌렸으나 이틀만에 함락되고말았다. 이 싸움에서 장수 신녕한과 대장수 대회덕(발해유민후손이다.), 공부랑중 리용기, 례부랑중 간영언 등 지휘장수모두가 전사하였다. 신녕한은 앞서 있은 완항령싸움에서 거란군을 물리친 뒤 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곽주성으로 들어와있다가 싸움을 지휘하였었다.

곽주성을 방어하던 군민 5천여명이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성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

며칠후 곽주성이 함락되였다는 비보를 접한 양규는 참지 못하고 뛰쳐일어났다. 그는 700명의 기마군을 인솔하고 은밀히 흥화진을 빠져나와 통주성에 도달한 다음 군사 1천을 넘겨받아 력량을 보강하고 새벽에 곽주성을 불의에 공격하여 소배압이 떨구어놓았던 거란군 6천여명을 모조리 소멸해버리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주변의 민가들을 략탈하고 강제로 끌어들였던 주민 7천여명을 통주성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한편 통주성은 깨지 못했지만 곽주성을 까고서 체면은 세웠다 위안하며 돌아섰던 소배압은 자기 임금으로부터 곽주성이 다시 고려군의 수중에 들어간것도 모르고서 무슨 승전타령이냐고 된욕을 먹고나서 그 분풀이를 포로된 강조에게 들이대였다.

《거란군사를 5만이나 죽인 고려군 수장을 아직도 살려두고있어?

당장 그놈을 끌어내고 불을 지피라! 내 그놈의 살고기를 베먹어야겠다.》

수고했다, 술 한잔 마셔라 할줄 알았는데 되지 않게 웬 욕지거리냐?

부아통이 터져와 참을수가 없구나. 제길할! 뭐든 피를 좀 봐야지 이거야 견딜수가 있나.

소배압은 자기 임금이 들으라는듯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감히 뉘 살고기를 먹겠다는거냐. 이제 곧 내 신하가 될 사람보고…》

거란왕은 소배압의 약을 더 바싹 올려주려는듯 입을 삐쭉했다.

《신하가 되다니? 그럼 저자가 그사이에 속을 굽혔다는것이오이까?》

소배압은 두눈을 흡떴다.

《이제 곧 그렇게 될게다. 네가 통주성에 갔다오는 사이에 난 저놈의 부장인 행영도통부사란 놈을 휘여잡았다. 이제 그놈을 내세워서 저 강조란 놈을 굽혀놓고야말겠다. 너는 이제 곧 강조에게 통주성을 함락시키고 왔다고 말하라. 그다음에 행영도통부사인지 하는 놈을 저놈앞에 내세우잔 말이다.》

《그런다고 굽혀들 놈이 아니오이다. 시간 끌지 말고 숨을 끊어놓읍시다.》

《왜 그리 보채느냐. 어렵게 잡은 놈인데 써먹고서 죽여도 죽여야지. 저놈을 잡기만 하면 고려군이 기가 죽을줄 알았는데 아직 딩딩하단 말이야. 하지만 저놈을 돌려세워만 보지? 고려군은 진짜로 기가 꺾일것이다. 그다음에 땅짚고 헤염치기로 일을 끝내는거다. 자, 시작해보자.》

거란왕은 소배압을 부추겼다.

잠시후 거란왕과 소배압은 두손 걷고 나앉아서 강조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방금 그대 수하이던 통주성과 곽주성을 함락시키고 왔다. 이제 그 여세로 우로는 흥화진을, 아래로는 안북부(안주), 순주(순천), 봉학(평성)성을 차례차례 점령하면서 서경으로, 개경으로 진격해나갈것이다.

현명한 장수는 제때에 패배를 인정하고 손을 드는 법이거늘 내가 아량을 베풀적에 응해나옴이 어떠한가?》

거란왕은 거드름 절반, 야유 절반으로 강조를 회유해나섰다.

《그따위 꾸민 소리에 넘어갈줄 아느냐? 설사 통주성이 무너졌다해도 난 달리 마음먹을 생각 없으니 괜한 수고 말라.》

강조는 두눈을 질끈 감은채 귀찮은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 함께 통주성으로 가보자는가? 투항한 그대 군사들앞에 그대의 꼴불견을 보여주어도 일없겠는가?》

소배압이 비꼬자 강조는 머리를 끄덕였다.

《보여주라! 내 몰골을! 하지만 우리 군사들은 내 꼴을 보고 교훈을 찾을것이다. 백배천배로 힘을 내서 복수전을 해나올것이다.》

《보소이다, 저놈은 이가 먹어들 놈이 아니오이다. 씨원히…》

소배압은 칼을 쭈욱 뽑아들며 벌떡 일어섰다.

《아서라.》

거란왕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대에게 보여줄 사람이 있다.》

거란왕이 손벽을 두번 치자 군막안에서 행영도통부사 리현운이 어정어정 나왔다.

그를 얼핏 띄여본 강조의 눈길이 대번에 시퍼래졌다.

함께 포로될 때 피칠갑을 하였던 얼굴이 희멀쑥해진것을 보고 모든것을 알아차린것이였다.

(저것도 변절했구나!)

강조는 쓴입을 다시였다. 판관 로전과 감찰어사 로의가 포로된 즉시 변절한것은 알고있었지만 부사인 리현운은 버티는줄 알았는데 그도 결국은 무릎을 꿇은것이였다.

《도통사나으리! 생사를 함께 하여온 이 사람의 말을 긴히 들어주사이다. 사람이 한번 나서…》

《닥치지 못할가! 난 자기 집 개짖는 소리는 가려들어도 거란의 개가 짖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하니라. 내앞에서 썩 사라지라!》

강조는 가련한 변절자의 넉두리를 단박에 밀막아버렸다.

《거 욕이 너무 과하군.》

거란왕은 강조의 불호령에 덴겁하여 목을 움츠리는 리현운의 당황해하는 꼴을 보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리현운! 저 강조나으리는 네가 거란의 개가 되였다 하시는데 개가 아니라 거란의 신하가 되였음을 알려드려라. 엊그제 내앞에서 읊은 시가 있지 않느냐.》

거란왕이 이렇게 부추기자 리현운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벌거우리해진 상통을 들어올려 떠듬떠듬 주둥이를 놀렸다.

《구름은 바람을 따르옵거늘… 새 임금을 뵈옵는데 어찌 옛 임금을 생각하리오.》

《자, 들었소? 자기를 거란 신하라 자칭하는 저 소리를!…》

느물느물 웃는 상통을 해가지고 이죽거리던 거란왕은 별안간 소배압이 쥐고있는 칼을 나꿔채서 휘익 뿌려던졌다. 뒤이어 피잉!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칼이 리현운의 목을 뎅강 베여버렸다.

헉! 소리와 함께 변절자 현운놈은 단박에 목없는 귀신이 되여버렸다.

《난 저런 얄팍한 심지를 가진 놈은 탐나지 않소. 저런자는 열백이라도 싫단 말이요. 하지만 도통사 당신만은 정말이지 욕심이 나오. 부디 마음을 돌려먹으시오. 그대와 함께 손잡고 천하를 평정하고싶단 말이요.》

거란왕은 정색해서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강조는 가볍게 머리만 가로 저었다.

이 시각 침통한 얼굴을 하고있는 강조의 머리속에서는 수치와 모멸감만이 세차게 고패치고있었다.

(내 어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였단 말이냐. 내가 사람으로 치지도 않는 이 오랑캐족속의 맘에 들다니. 이따위 야만의 무리와 함께 있자는 애원을 듣다니, 세상에 이런 까무러칠 일이 또 어디 있담!…

강조야! 너 이런 치욕을 당하자고 세상에 났단 말이냐?!…)

강조는 욕지기가 올라와 마른침을 꿀꺽 삼키였다.

목없는 귀신이 되여버린 변절자 리현운의 몸뚱이에 시선이 닿자 강조는 또 한번 몸서리를 쳤다.

치양일당을 숙청해버리고 궁성을 장악한 바로 그날 저녁에 저 현운이란자가 뭐라고 하였던가. 병이 든 전 임금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열여덟 코흘리개인 대량원군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수 있겠는가, 고려가 사는 길은 바로 강조 당신이 룡상을 차지하는 길이다, 기회란 두번다시 있는것이 아니니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렇게 줴쳐대지 않았던가.

너 이 강조를 뭘로 보는거냐, 김치양이 고려왕조에 타성갈이를 하려드는것을 막자고 나선 이 강조에게 되려 치양의 본을 따라고 부추겨?! 리현운, 이놈! 똑바로 새겨들으라, 이 강조는 고려를 떠받드는 기둥이 되자 함이지 룡상을 탐할 역적이 되자는게 아니란 말이다. 우리 고려는 태조이래 왕씨만이 임금이 돼야 한다. 이건 하늘의 뜻이거늘 감히 날보고 하늘의 뜻을 거역하라 해?!

강조는 단칼에 현운의 목을 베려다가 그가 눈물을 쥐여짜며 실언을 용서해달라 비는통에 칼을 거두었었다.

현운이 네 말이 본심이 아니고 실언이라니 이 일은 없었던것으로 치겠다만 다시는 그따위 역적소리를 하지 말라! 이 강조는 어제나 오늘이나 래일에나 죽으나사나 오직 고려의 신하일뿐이다!

그날 강조는 이렇게 부르짖었었다.

그때 저 현운이놈의 목을 베여버렸더라면 지금같은 꼴은 보지 않았을것을! 임금을 아무렇게나 갈아댈수 있다고 생각한 저런 놈을 살려주었다가 오랑캐임금을 섬기며 목숨을 부지하려드는 개보다 못한 역신이 나게 하였구나!

생각이 이에 이르자 강조는 도리질을 멈추었다.

《그래, 이젠 마음을 돌리였소?!》

거란왕은 강조의 기색을 뜯어보며 목을 빼들었다.

강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람따라 돛을 다는자 역적임을 알고서야 어찌 그 본을 따 인생을 망칠소냐!》

《그렇다?!…》

여전히 한모양새인 강조를 노려보는 거란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였다. 허나 검질긴 거란왕의 입에서는 다시금 회유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대는 패한 장수다. 돌아가도 죽음을 면치 못할줄 잘 알터인데… 그대의 기개가 지극히 장해보여서 내 함께 손잡자 함인데 나의 진심을 그렇게도 몰라준단 말이뇨!》

《그만하라, 장부로 세상에 나서 어찌 두 맘을 먹을소냐. 그만큼 나를 상대해보고서도 미련을 가지다니… 참말로 가소롭구나!》

《그런가?!… 좋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건 없느뇨? 그대 임금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으면 하라. 내 인츰 고려왕을 꿇어앉힐터인즉 그대의 마지막말은 전해주겠노라.》

《그렇게는 안될터이나 정 내 부탁을 들어줄셈이면 마지막으로 시원히 칼춤이나 추어보게 해달라.》

《칼춤을 추어보겠다고?!…》

《춤상대로는 저 소배압이 맞춤한줄 아노라.》

《뭣이?!…》

소배압은 공중 뛰며 이발을 사려물었다.

《뭘 그렇게까지 성낼거야 있느냐! 발목은 묶인채로 놓아두고 두손만 풀어달라. 아무래도 내 죽는 꼴을 보아야 할터인데. 속시원히 직접 손대봄이 좋지 않느냐!》

강조는 태연하게 청을 했다.

《네놈이 우리 페하를 노리고 흉측한짓을 하려 하는줄 모를줄 아는가. 이 엉큼한 놈!》

소배압은 길길이 뛰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 사람이 아무리 궁한 목에 들었다한들 경우야 바르게 처신해야 할것 아니냐? 내가 고려임금이라면 거란왕과 겨루어보자 하겠으나 나는 수장이라 거란수장과 겨뤄보자 함이다. 싫으면 싫다 하라. 비웃지는 않을터이니.》

《좋다, 정 소원이라면 …》

소배압은 주먹을 부르쥐며 튀여나왔다.

《야, 저놈의 상체를 풀어주라!》

소배압은 기가 올라 저희 왕이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칼싸움에 응해나왔다.

결박이 풀리자 강조는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두다리는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있는채로였다.

강조의 량쪽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있었고 족쇄에 련결된 쇠사슬은 또 짐을 잔뜩 실은 수레채에 비끄러매져있었다. 아무때건 량쪽수레에 말을 메우고 몰아채면 사지가 찢기워 죽게 되여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두팔만 써서 상대를 어느 정도나 막아낼는지…

하지만 강조는 태연자약해서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해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칼을 달라는 뜻이였다.

《방패는 필요없느뇨?》

거란왕이 칼을 던져주며 묻자 강조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어디 재주를 부려보라!》

거란왕은 직접 시작을 떼주었다. 그는 강조가 거란군사들에게 포박당하는 자리에서 무려 열여덟의 목을 베여눕힌것을 알고있었다. 나이가 예순에 이른 늙은 몸을 가지고 그만큼 힘을 쓴다는것은 웬간해선 생각도 못할 일이였다.

거란왕은 소배압이 강조보다 다섯살 아래인것을 알고있었다. 게다가 강조는 두발목이 묶이여있는 상태였다.

소배압이 거란땅에서는 두번째 간다 하면 싫어할 칼부림쟁이인것을 아는지라 념려될것은 없었으나 그래도 속으론 은근히 걱정이 되였다.

하지만 강조의 부탁을 거절하고싶지는 않았다.

아닌 말로 고려의 일등맹장이라는 이 강조의 무술솜씨를 그가 살아있는 지금 이때에 보지 않고 언제 보랴. 이런 기회는 하늘도 쉽게 주지 않는 기회다.

거란왕은 호기심이 잔뜩 동해서 미구에 펼쳐질 두 장수의 춤가락을 주시했다.

소배압은 정작 응해나오긴 하였으나 발목이 묶여있는 상대와 겨룬다는것이 게면쩍었던지 목을 한번 비틀고는 왼손을 허리뒤로 가져다붙이고 칼을 든 오른손만 휘저으며 들어갔다.

휙, 휘익!

핑, 피잉!

두 거구가 펼치는 날렵한 무용속에 휘젓고 부딪치는 칼소리가 허공을 날아옜다.

빙 둘러 어깨성을 쌓고 선 거란군사들은 입을 헤 벌리고서서 넋을 잃고 구경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강조는 마치 한마리의 늙은 범을 련상케 했다.

그는 여적 눈을 뜨지 않고 지르감은채로였다. 마치도 소경이 막대기 재주를 부리는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소배압은 두눈을 올롱하니 뜬채로 먹이를 찾는 독수리눈을 해가지고 강조의 주위를 너풀너풀 날아예며 칼을 휘둘렀다.

대체로 찌르고 베는건 소배압이였고 강조는 그저 건성으로 대수대수 막아내고 내치는 모습이였다.

열합이 넘고 스무합이 넘어가자 소배압의 목줄기로는 땀줄기가 번들거리며 흘러내렸다.

하지만 강조는 이마에 땀 한방울 내돋지 않고있었다.

칼질을 서른합쯤 하고나자 소배압은 저도 모르는 사이 등뒤에 붙이고있던 왼손을 풀어내려 몸의 중심을 유지하는데 써먹다가 그만에 마흔합에 이르러서부터는 두손으로 칼을 모두어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것으로 보아 힘이 어지간히 빠진 꼴이였다.

하지만 놀라웁게도 강조는 아직까지 눈도 뜨지 않고있었다.

입도 시작할 때 꾹 다문 그대로였다. 아직까지 강조는 코로만 숨을 쉬고있었다.

강조의 이런 모양앞에서 소배압은 기가 질려 쩔쩔매고있었다.

저런 시라소니라구야. …

거란왕은 그만 두눈을 감아버렸다.

역시 거인이로구나! 정말이지 죽이기는 아까운 존재로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거란왕은 손을 획 내저었다.

옆에 있던 호위군졸이 뎅겅 징을 울려 칼싸움을 멈추게 했다.

징이 울리는 소리에 피끗 뒤로 눈을 주었던 소배압은 싸움을 멈추라는 자기 왕의 손시늉을 보자 그만 악에 받쳐 마지막힘을 모아 강조에게 덤벼들었다. 허나 소배압은 강조가 맞받아치는 칼날에 자기 칼을 그만 떨구어버렸다.

그 틈에 강조는 자기 칼날 옆등으로 소배압의 두팔을 련속해서 내리쳤다.

소배압은 떨어뜨린 칼을 집을념도 못한채 두팔을 감싸쥐며 아픔을 참느라 겅둥겅둥 뛰였다. 그러다가 강조가 칼을 겨누어 던질가보아 겁이 나서 두어걸음 껑충 뛰여 뒤걸음쳤다.

강조는 그제야 두눈을 뜨고 씨익 웃으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죽이지는 않을터이니 걱정말라는 뜻이였다.

강조의 비웃는 양을 띄여본 소배압은 그만 악이 치받쳐올라 저도모르게 고함쳤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죽여라!》

그러자 둘러섰던 거란군사들이 왁 쓸어들어 강조를 덮쳤다.

하지만 강조의 칼질에 덤벼들던 거란군사들은 목을 잘리우며 너부러졌다.

《충차로 깔아버리라!》

소배압이 다시 소리치자 거란군사들은 충차를 들이몰아 강조를 덮쳐버렸다.

《그만하라!》

거란왕이 소리쳐서야 충차는 다시 뒤로 물러서고 깔리웠던 강조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강조는 손에 들고있던 칼을 들어 다른 손으로 칼날부위를 쥐고 지그시 칼을 휘다가 뚝- 꺾어버리고는 부러진 칼날과 자루를 소배압의 발치에 내던지며 말했다.

《내가 칼을 스스로 꺾어버리는것은 아직 대항할 힘이 남아있다는것을 알라는것이노라. 이 강조는 죽어도 고려는 싸울 힘이 넘쳐있다 그 뜻이노라. 알겠는가, 하하하. …》

강조는 통쾌하게 웃어제꼈다.

(아직 싸울 힘이 있다는것을 알라구?!…)

거란왕은 그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려두어선 아니된다. 그는 강조를 다시한번 회유해보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그리고 다급히 소리쳤다.

《소배압! 너 저자의 살고기를 먹겠다 하지 않았느냐!》

그 말에 소배압은 살기를 머금고 달려들어 어느결에 강조의 팔뚝살을 썩둑 베여내여 입에 쓸어넣고 미친듯이 씹어댔다. 그러다가 왝 토해버리고 피묻은 턱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렇게 먹고싶던 내 살인데…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넘길줄 알았더냐? 어림없다, 어림없어!》

강조는 다시금 소리내여 웃어제꼈다.

네놈들이 우리 고려를 먹어?! 어림도 없는 소리!

강조의 웃음은 이런 뜻을 담고있었다.

《야-앗!》

소배압은 미친듯이 강조에게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놈은 강조의 손아귀에 목줄을 졸리워가지고 두눈을 부릅뜬채 혀까지 찔끔 내뽑은채 꼿꼿이 굳어져버렸다.

소배압의 숨이 금시 넘어가는찰나 여러놈의 거란군졸들이 달려들어 강조의 뒤등에 칼을 박았다.

강조의 입에서 뜨거운 선혈이 뿜어져나왔다.

강조는 드디여 마지막순간이 온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알았느냐? 이 오랑캐놈들아! 이 강조는 고려의 역적으로 죽을지언정 거란의 신하로는 되지 않는다!》

강조는 마지막힘을 모아 이 말을 하고는 쓰러지고말았다.

강조는 산같은 한을 품은채 눈을 감았다.

순간의 해이로 해서 나라를 지키는 그토록 중대한 싸움의 중도에서 자기 몫을 마무리하지 못한채 그는 세상을 하직하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고려군의 사기를 떨구는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적을 과대평가해도 안되지만 과소평가해도 안된다는 교훈을 그리고 군사의 실수는 그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장수의 실수는 나라의 전반운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피의 교훈을 남기여 후세에 두고두고 이를 경계하게 해주었다.

당대의 사가들은 그의 이름을 역적의 반렬에 기록했다. 그가 자기 임금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해서였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그는 페위된 임금을 죽이였다. 개인적 명분으로는 새 임금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꼭 전 임금을 죽여서만 새 임금의 안전을 위하는것이 아님에도 그는 부디 죽이는 길을 택하였다.

그것이 강조의 만회할수 없는 죄였다. 당대의 무지한 권력세태의 반영이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역적의 락인은 지우지 못한다 하여도, 그가 전장에서 범한 과오 역시 용서할수 없는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 순간까지 적앞에서 굴복을 아니하고 고려의 신하임을 소리높이 웨친 그 하나만으로도 후세에 그의 이름은 장한 모습으로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강조가 조국을 배반하지는 않았기때문이다.

나라에 큰 죄를 짓고 포로된 그는 거란왕의 애원을 받아들이면 살수도 있었다. 그것도 거란의 큰 벼슬을 하면서…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고려신하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죄를 지을수도 있다. 그러나 벌이 두려워 나라를 배반하는 길을 택하면 그 죄악은 돌이킬수 없다.

사람은 나라와 겨레앞에 결백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배반하는 더러운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진가는 관을 덮고나서 알게 된다.

비록 나라앞에 죽을 죄를 지었을망정 조국을 배반하지 않은 강조는 역신이 아니라 충신이고 애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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