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5

 

첫 싸움은 흥화진(의주부근)에서 벌어졌다.

거란왕 성종은 제가 직접 서렬을 짜고 군사 5만으로 흥화진을 둘러싸게 한 다음 일거에 성을 점령해보려고 파도식공격을 들이대였다.

거란왕은 다른 성들에서 흥화진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머지 군사들을 여러갈래로 나누어서 흥화진과 린접해있는 이웃 성들도 동시에 포위하게 하는 한편 고려군 수장이 거처하고있는 통주성(동림)방향으로 10여만을 들이밀었다.

그러면서도 처음 맞다들린 흥화진성을 먼저 깨서 고려군의 사기를 저락시킬 심산으로 흥화진 공성전에 직접 몸을 담근것이였다.

하지만 흥화진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흥화진은 압록강대안에 위치한 성으로서 력대적으로 침입하는 적과 퇴각하는 적의 발목을 붙잡고 언제한번 쉽게 놓아준적이 없는 전적이 있는 성이였다. 993년에 거란군은 1차로 침입해올 때에도 이 흥화진에 발목이 잡히는것이 두려워 멀리 에돌아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흥화진뒤로는 걸음마다 조밀하게 방어성들이 쌓여있어 한두개쯤이면 몰라라 많은 성들을 다 에돌아가다가 뒤로부터의 역공격을 면할수 없기때문이였다.

따라서 이왕에 성들을 함락하면서 공격해나갈바에는 첫번째에 위치한 흥화진부터 까야만 했던것이다.

흥화진은 통주성 이북계선의 성들가운데서는 어미성이였던 까닭에 이 성을 까면 주변의 대여섯개 되는 새끼성들은 자연히 무너지게 되여있었다.

이런것으로 해서 흥화진에는 도순검사인 양규가 직접 틀고앉아 지휘하고있었다.

양규는 강조와 의사소통이 잘되는 편이였다. 강조처럼 급한 성격은 아니였지만 침착하면서도 일단 달아오르면 끝을 보고야마는 끈질긴 기질이여서 그를 당해내기가 수월치 않았다.

강조는 이러한 양규를 보는 첫순간에 호감이 가서 끌어당겼고 전 임금에게 청을 올려 형부랑중이던 그를 도순검사로 발탁시켜 청천강이북일대를 통제하게 했던것이다.

고구려때 압록강너머에 있던 안시성을 지켜 이름을 날린 장수 양만춘의 후손이라 일러오는 양규 이 사람은 나라를 지키려는 보국열의가 남달리 높았다.

그의 지휘밑에 흥화진 군사들은 거란군의 공격을 끄떡없이 막아내고있었다.

《너는 공성전의 능수라 들었는데 조그마한 성 하나도 깨지 못한단 말이냐?》

거란왕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애꿎은 수하장수에게 화를 냈다. 제가 나서서 일을 칠것처럼 하다가 안되니까 부하에게 책임을 묻는 꼴이였다.

공성전의 능수니 어쩌니 하고 욕을 먹고있는 거란장수는 소배압이였다.

거란왕 성종의 사위이기도 한 소배압은 먼저번 1차고려침공때 거란군 우두머리였던 소손녕의 형이였다. 소손녕이 고려침공에서 실패하고 돌아와서 공신칭호까지 박탈당하고 공주와 다투다가(소손녕도 이전 거란왕의 사위였다. ) 화병으로 죽어버린 그해 996년에 동경류수직을 넘겨받은 소배압은 그 이전(986년)에 송나라군대를 여러번 쳐서 이긴 공로로 부마도위로 발탁되였던 인물인데 그가 송나라군대를 칠 때 공성전을 잘해서 이름을 드날린것을 지금 임금이 거들면서 욕을 하고있는것이였다.

송나라의 성에 비하면 규모가 절반도 안되는 고려성을 거차, 충차, 교차를 섞어가며 공격하고서도 깨지 못하는것이 무슨 장수이냐고 내놓고 꼬집어 힐난하고있었다.

화가 치민 소배압은 《군주께서는 예서 잠시 쉬시옵고 그사이에 내가 통주성으로 내려가서 적장 강조의 목을 베여오는것이 어떠하오니까.》 하고 슬쩍 몸을 뺄 궁냥을 해내였다.

《여기에 한발을 묶이운 꼴을 해가지고 그쪽에 가서 다른 발을 또 묶이우자고 그러는가?》

거란왕은 다시한번 욕을 하고나서 《그러지 말고 수를 써서 어떻게든 흥화진을 깨야 한다. 내 한가지 수를 생각해냈는데 들어보라.》 하고는 소배압에게 제가 궁냥한것을 설명했다.

거란왕이 궁냥해냈다는 수인즉은 흥화진성벽에 나무낟가리를 흙과 함께 다져쌓아서 둔덕을 만들어놓고 그우로 공격해들어간다는것이였다.

그것이 그럴듯해보여 소배압은 10여만의 군사를 집중시켜 어떤 놈은 나무단을, 어떤 놈은 통나무를, 어떤 놈은 흙가마니를 닥치는대로 걸머메고, 지고 돌격해나가게 하였다.

성 량쪽에서 동시에 나무낟가리를 펴고 흙산을 쌓는 역사질을 벌려놓았는데 그 광경은 실로 가관이였다.

나무단이든 통나무든 흙가마니든 혀를 가로 물고 간신히 지고와서 성벽밑에 쌓아놓는 놈들중에 다시 되돌아서는 놈은 별반 없고 곱다시 흙과 함께 파묻혀버리였다. 고려군이 성벽우에서 돌을 내리떨구어 즉사시켜버리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일이 안될라니 고려군이 내리떨구는 돌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거란군의 흙낟가리쌓기를 도와주는 결과를 빚어내고있었다. 나무단과 흙이 쌓아지는 우에 돌이 떨어지면서 흙산을 더 다져주는 역할을 해주고있은때문이였다.

고려군은 돌떨구기를 포기하고 대신 끓는물을 부어댔다. 그런데 그것도 흙을 더 다져주는 꼴이여서 거란군을 좋게 해주었다.

고려군은 생각을 고쳐서 이번엔 기름을 쏟아붓고 불뭉치를 내리던졌다. 순간 화광이 충천하면서 거란군은 불세례를 받고 아우성쳤다.

결국은 화공전이 은을 내였다.

나무단들에 불이 달리자 삽시에 성벽주위에는 화염이 뒤덮이고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갈팡질팡하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란군은 수적우세를 믿고 계속 새로운 력량을 투입하여 공격을 들이대였다.

흙과 타다남은 나무가지, 통나무우에 거란군의 시체가 덧쌓여지고 한치두치 서서히 키돋움을 해 올라오며 흙산의 형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숱한 주검을 내면서도 검질기게 시체를 밟고 올라서기를 거듭해대자 어느덧 흙산이 성벽과 비슷한 높이로 솟아올랐다.

고려군은 할수없이 성벽을 타고넘어내려 거란군서렬로 육박해 내려갔다.

그러자 기진맥진한 적들은 몇합 못해보고 둔덕아래로 퇴각해버렸다. 하지만 더이상 물러서지 않고 화살전으로 고려군을 막아나섰다.

날이 어두워지자 거란군은 일단 공격을 멈추었다.

《군사들! 지금 적이나 아군이나 피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을 지켜내려면 이밤으로 적의 진영을 들이쳐서 적들이 더는 다가들 엄두를 못내게 해야 한다. 야간습격조에 나갈 군사들은 자진하여 나서라!》

양규가 소리치자 고려수비군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습격조에 응해나섰다.

추운 겨울이라 군데군데 불무지를 피워놓고 몸을 녹이며 한숨 돌리고있던 거란군은 별안간 들이닥치는 고려군의 습격에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륙계를 놓아버렸다.

거란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였다. 2만의 군사가 시체로 되여버렸던것이다. 거란군은 아직 군사가 적지 않았지만 공격을 일단 멈추고 멀찌감치 물러나 방어서렬을 전개했다.

거란군이 공격을 멈춘것은 그들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성벽과 거의 근사하게 흙산을 쌓아놓고서도 성안으로 공격해들어가지 못하는것은 희생을 줄여야 하는 사정때문이였다. 흙산이라고는 하지만 한개의 둔덕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들이밀어야 한줄기 말오줌발같이 외줄로밖에 들어갈수 없는데 그것은 성안의 고려군이 량옆으로 나란히 서서 오이 쏠듯 저며내여 소멸하면 그만이였다. 그와 동시에 성둘레에서 협공할수도 있지만 그것은 처음과 같은 방식이라 크게 달라질것이 없는것이였다. 결국 력량만 소비될뿐인데 그러면 앞으로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것이 문제였던것이다.

아직 첫 싸움을 뗀데 불과한 이때 한곳에서 이제 또 2만을 죽일지 3만을 죽일지 알수 없는 싸움을 계속할수 없었던것이다.

아직 점령하여야 할 성들이 부지기수인데 첫탕에 다 죽이고나면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인가.

지금처럼 사상자를 내다가는 개경은 고사하고 서경까지도 나아가볼지 말지 했다. 서경은커녕 청천강가에 닿기도 전에 병력을 다 잃어버리고 빈손털고 나앉을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압록강을 다시 넘어갈수 조차 없게 되는것이였다.

거란왕은 회유책을 쓰는데로 방향을 돌려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대들의 먼저 임금 왕송(목종)이 우리 거란을 섬기려 하므로 화친으로 나오던중 역신 강조가 별안간에 왕송을 죽이고 어린아이를 대신 앉혔으므로 화친페기의 책임을 물어 강조를 벌하러 왔으니 강조만 붙잡아 보내면 즉시로 퇴군할것이나 만약에 말을 듣지 않으면 개경으로 쳐내려가 너희네 처자들을 몰살할터이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는데 잇달아 천쪼박을 매단 화살 몇대가 날아와 꽂히는지라 그것을 뽑아 천을 펼쳐 이어보니 거기에 씌여있기를 《흥화진 성주와 군사, 백성들에게 포고하는바 고려의 먼저 임금 왕송이 우리 거란의 번신이 되기를 약조하고 그 대가로 자기 국토를 보존하여왔는데 뜻밖에 간흉 강조의 손에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죄인을 벌하러 왔으니 항복하면 용서할것이다. 후회가 없도록 조처하라.》는 내용이였다.

편지를 받아들고 한동안 쓴웃음을 짓고있던 양규는 수하모사를 시켜 《하늘아래서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를 해치는자를 징벌할 권리가 있는 법이거늘 부모를 모시고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절개를 굽히지 않는 법이노라. 거란왕은 명철한 지혜로써 이 점을 판단하고 고을의 포위를 푸는것이 좋을듯 하노라.》라는 답서를 보내게 하였다.

거란왕이 다시 글을 보내왔는데 《강조가 이전 임금을 죽이고 어린 임금을 끼고서 호강하는것을 벌하여야 하겠기에 내가 왔는데 그대는 공경하는 모양은 있으나 귀순하려는 의향은 보이지 않으니 사리분별이 없는것을 용서할수 없다.》는 으름장이였다.

양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채 마지막 회답서신을 보내게 하였다.

《눈서리와 찬바람을 견디여낼것이고 백성들과 더불어 고려의 천년위업을 길이 받들 결심이니 알아서 하라.》

양규의 회답장을 받아본 거란왕은 그만에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말씨름으로 될 일이 아님을 안것이다.

머리칼을 움켜쥐여뜯던 거란왕은 할수없이 군사 절반으로 흥화진 동쪽에서부터 남서방향으로 반달모양의 엉성한 포위진을 쳐놓고 나머지 20만을 끌고 통주성으로 내려갔다. 흥화진과 그 주변성들에서 고려군이 쓸어나와 저들의 뒤통수를 치지 못하게 견제하면서 강조와 직접 붙어보려고 결심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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