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하 편
12. 거란의 2차침공을 물리치다
2
《술맛 쓰다.》
활 열어젖힌 군막안에서 별안간 튀여나오는 소리였다.
군막안에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텁석부리 무장 하나가 미끈하게 생긴 동년배나이의 다른 무장과 마주앉아서 술사발을 기울이고있었다.
텁석부리는 화주 방어랑중 류종이고 미끈한이는 상서 좌사랑중 하공진이였다.
이들은 년초에 임금으로부터 화주(함경북도 길주, 명천, 명간일대)계선에 나와 복닥소동을 일으키고있는 동녀진족속들을 진압하라는 령을 받고 이곳 동북변방에 나와있었다.
류종에게 준 방어랑중이란 직함은 실은 방어사요 군사가 3천정도이므로 격을 낮추어주었을뿐이였다. 여기에 하공진을 붙여준것은 그가 압록강 구당사로 있을 때 서녀진인들을 많이 다루어보아 그들의 속내를 잘알므로 류종을 잘 도울수 있으리라는 타산에서였다.
하지만 이들은 첫걸음부터 골탕만 먹고있었다.
류종은 일자진에서 팔자진으로, 입 구자진에서 날 일자진으로 기마전에 의한 맹공격과 포위전을 련속 들이대보았지만 도무지 소득이 없었다. 녀진인들은 별안간 솟구쳤다가는 모래속에 물 스며들듯 잦아들면서 토벌군을 한껏 조롱하며 정면을 때리고 측면을 치여 고려군을 절반으로 줄여놓았다.
고려군은 녀진인들의 장끼인 유인매복전에 완전히 손들고 나앉아버렸다.
녀진인들이 도망치는듯 하여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매복진을 치고 좌우 사방에서, 공중에서 화살을 퍼부어 쓸어눕히군 하였다.
이들의 나무타기는 날다람쥐 한가지였다. 뒤쫓아가다보면 어느틈에 나무우로 올라가 화살을 내리쏘군 하였다.
숲속에서는 당해내는 재간이 없었으므로 평지로 끌어내여 싸워야 했는데 일단 평지싸움을 벌려놓았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정한 대형을 짓고 마주 붙는것이 아니라 덮어놓고 뒤섞여돌아가며 적아를 혼탁시켜놓고 대검을 휘둘러대는 수를 당해내기 어려웠던것이다.
정해준 날자를 훨씬 넘기고서도 적들을 구축하기는 고사하고 되려 밀리는 판국이 되고있으니 부아가 날수밖에 없는것이였다.
생각던 끝에 일단 포위를 해놓고난 뒤에는 무작정 불을 놓아 화공을 들이대서야 놈들을 얼마간 몰아낼수 있었다.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음직해보여 놈들의 촌락들을 아예 불살라버리는 초토화전술로 나가서야 놈들의 기를 꺾어놓을수 있었다.
녀진인들은 자기들의 거처지가 재더미로 되는것을 보고서야 손을 든것이였다. 그보다는 숲에 불을 다는 공격에 무릎을 꿇은것이였다.
녀진인들은 숲을 생명의 요람으로 신성시하는 풍속이 있었다. 자기들에게 먹을것을 주는 숲과 물을 숭배하는 관념이였다. 숲을 목숨으로 여기는 이들이여서 정작 숲을 불태우기 시작하자 지레 겁을 먹고만것이였다.
녀진인들은 짐승가죽과 고기들을 바리에 싣고 조공을 해오며 항복을 표시했다.
하지만 성이 독같이 나있던 류종은 하공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항복해온 95명의 녀진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조정에 이러한 결말을 알리고 철
《금년 재수 옴 붙었어.》
류종은 볼이 잔뜩 부어가지고 화술만 들이키고있는것이였다.
《페하의 노여움을 샀으면 벌은 피할수 없는것이요.》 하공진은 이마살을 찌프리며 뇌까렸다. 《아무렴 목이야 베겠소? 어서 떠납시다.》
둘은 우거지상을 해가지고 터벌터벌 개경으로 돌아왔다.
대궐에 들어서는 길로 어사대에서 취조를 받고 외진 곳에 갇혀있다가 한잠 자고 깨여나보니 이들의 머리맡에는 귀양지로 가라는 파면장이 떨어져있었다. 하공진에게는 매소물(인천) 앞바다 무인도가 정해져있었고 류종에게는 곡산 두메벽촌이 정해져있었다.
이들의 죄목이 커진것은 거란에 트집거리를 잡히게 한것때문이였다.
녀진인들은 자기들이 잘못을 빌고 화의를 청하였음에도 고려가 몰인정하게 인명을 죽여버린것이 억울하다고 거란에 고소하였었다.
그때바름에 동서녀진인들은 고려가 저희들을 배척한다고 앙심을 먹고서 거란에 다가붙어 살 구멍수를 찾고있었다.
거란은 마침이다 하고 녀진인들을 끄당기면서 고려를 따돌리고 압박하는 기회로 써먹으려고 꾀하였다.
《고려는 우리 거란이 녀진을 돌보아주는것을 알고있을터인데 그토록 혹독하게 다루는것을 보면 우리 거란에 여전히 앙심을 품고있는것이 명백하다. 녀진을 친것은 우리 거란을 친것이나 같은것이므로 이제 거란은 이에 명백한 대답을 하게 될것이다.》
이런 통첩장이 날아온 뒤여서 임금의 비위는 한껏 상해있었던것이다.
하공진과 류종은 쓴입을 다시며 관모를 벗을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