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하 편

 

11. 조정이 위기에 처하다

 

3

 

일행은 어슬녘에 은밀히 개경도성을 빠져나왔다. 대량원군을 데려오러 가는 호위대행렬이였다.

선두에 복면을 쓴 길잡이군사 두명이 하나는 도끼창을, 다른 하나는 삼지창을 들고 나가고 그뒤로 황보유의와 랑장 문연이 따르고 그뒤로 별장 리성언과 고적 등 무예와 기합술을 겸비한 무사들이 예도나 협도, 쌍검도, 언월도, 장창, 철퇴 등속을 들고서 뒤를 이었다. 황보유의와 문연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은 모두 군교이상급들로서 한명이 열, 스물을 당해내는 갑사출신들이였다.

일행은 해시 초엽에 림진강을 건느고 밤새 내달려 날이 밝을무렵에는 삼각산자락에 도달했으며 가파로운 산길을 질러올라가 정오무렵에 드디여 신혈사입구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절뜨락에는 코빼기도 들여밀어보지 못하고 느닷없이 내리굴리는 돌탕세례에 밀려 절밑 골짜기로 쫓기워내려가고말았다.

절간의 중들은 창과 칼, 화살로 완전무장하고있었는데 이들은 아무리 임금의 령을 받고 온 군사들이라고 고함을 쳐도 들은척도 않고 화살만 어지럽게 쏘아댔다.

절간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돌계단길을 내놓고 나머지 구간은 깎아지른듯싶은 절벽으로 둘러막혀있어 발디딜만 한 틈사리 하나 없는 천험의 요새였다.

한동안 역사질을 한 끝에 정체를 알리는 글을 적은 천쪼박을 화살에 달아 연거퍼 날린 뒤에야 이들은 겨우 절뜨락에 들어설수 있었다.

신혈사 주지는 일행이 무기를 절밖에 내던지게 하고 맨몸으로 뜨락에 들어서라 이른 뒤 한명한명 관상보기와 용모파기를 하고서야 정식 상대를 하자 하였다. 리유인즉은 대량원군을 모셔가련다며 벌써 두차례나 군사들이 왔다 갔다는것이였다. 그것은 물론 치양의 패당들이였다.

대량원군은 임금의 편지를 두세번 뜯어보고서야 편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그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임금의 진짜편지임을 확인한것이였다.

그러나 일행은 즉시 개경으로 돌아설수 없었다.

다시금 밀려온 치양일당에 의해 절이 포위되였던것이다.

놈들은 절에서 내려오는 외통길을 막아놓고 대량원군을 내놓으라 협박을 거듭했다. 온밤 집요한 기습으로 잠을 설치게 만들었고 다음날 해가 뜨자부터 또다시 달려들었다.

황보유의는 문연과 상론하고 개경에로의 출발을 일단 보류했다.

지금 할수 있는 일은 신혈사에서 치양의 군사들을 견제하면서 우선 대량원군을 빼앗기지 말고 지켜내야 했던것이다.

그 시각 강조는 선발대를 이끌고 정방산성을 지나 봉산고을지경에 들어서고있었다.

그무렵에 고을성곽의 북쪽대문이 찌꿍 열리며 마주 달려나오던 한무리의 군사행렬이 강조의 군사들과 부딪치자 기발을 흔들어 임금의 어지가 있음을 알려왔다.

《하공진, 네가 왔구나!》

강조는 마주 달려오는 하공진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강조어른, 임금의 어지가 내렸소이다.》

강조는 하공진이 받쳐올리는 종이말이를 나꿔채여 펼쳐들었다.

《…김치양이 궁성을 둘러막고 조정을 타고앉으려 하니 그대는 속히 개경으로 와서 치양일당을 진압하고 조정의 안전을 기할것이다. 군사에 관하여 전권을 행사하라!》

편지를 읽고난 강조는 턱을 부르르 떨었다.

《치양이 네놈이 끝내…》

강조는 목에 피대줄을 뻗치며 고함쳤다.

《지체말고 말을 달려라!》

강조가 이끄는 1천여명의 선발부대는 다시금 말발굽을 울리며 개경으로 내달았다.

기마행렬의 꼬리뒤로 눈가루가 뽀얗게 말려오르며 구름처럼 날려갔다.

같은 시각에 치양은 절령계선에서 강조의 군사를 막기 위한 작당을 꾸미고있었다.

지금 치양의 속은 탈대로 타서 재가 될 지경이 되였다.

궁성을 포위해놓으면 손들고 나올줄 알았던 임금이 아주 태연히 버티고 앉아있었다. 간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임금은 신혈사에 있는 대량원군을 데려오라 이른 뒤 강조를 기다리면서 치양이 자기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지탄했다 한다.

그래, 역적이다. 그럼 어쩔셈이냐, 이제 궁성을 타고앉아 칼을 목에 갖다대여도 역적이란 말을 다시 하나 두고보자. 이렇게 이를 갈며 한쪽으론 신혈사에 군사를 파해서 대량원군의 목을 따치우라 하고 다른쪽으론 우봉, 평주고을의 끄나불들을 다그어서 절령계선에서 강조의 군사를 막게 하는 한편 임금(목종)을 아예 포로할 목적으로 오늘 아침 궁성내전으로 돌입할 예정이였는데 하루밤새 2천의 군사가 궁성내성밖을 둘러막으며 내전의 숙위군을 증원하는통에 더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서버린것이다.

2천의 군사란 바로 치양이 자기가 장악하고있다고 생각했던 궁성밖 경계부대의 일부였다.

이 부대는 중랑장 하공진에게 지휘권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형식에 불과한것이라고 생각했던 치양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에 중앙군은 각 위별로 수장들이 다 있고 평시에는 병부에서 관리하다가 유사시에 일단 발령이 난 뒤에 조정의 대신들속에서 상군사, 중군사, 하군사가 임명되여 내려오면 해당 싸움시기만 복종하도록 되여있기때문이였다.

나라가 외적의 침공을 받는 때도 아니고 궁성안의 다툼질이니 칼자루를 직접 쥔 수장들만 제 심복으로 꾸려놓으면 되려니 했던 치양은 궁성의 다른쪽도 아니고 서북방향을 담당한 이 부대가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나올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것이다.

하공진이 유사시에 자기가 지휘할 부대라고 미리부터 지휘관들을 특별히 장악하고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1년도 못되는 사이에 그렇게 손쉽게 움직일수 있을 정도로 장악하고있었다면 하공진이 난인물은 난인물이라 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궁성 네귀때기중 세곳은 치양이 자기의 족속들이 둘러막고있으니 그닥 락심할 일은 아니라 하겠지만 우봉과 평주의 향군발동이 잘되지 않는것이 더 급한 구석이 아닐수 없었다.

치양은 자기의 끄나불이 하공진의 군사에 의해 뒤를 밟히웠고 결과 우봉, 평주쪽의 반란군규합이 말짱 드러난 상태라 제대로 성사될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이틀을 기다렸으나 준비가 완료되였다는 소식은 오지 않고있었다.

자기의 끄나불이 돌아오는 길에 유방이 친 그물에 걸려 궁성밖에서 잡힌것을 알리없는 치양은 속이 타는중에 더럭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몸서리를 쳤다.

강조가 천리밖에 있는것도 아니요 겨우 600리밖에 있으면서 여기 개경의 일을 관심 안할수 없는 일이고 자기의 기도를 알아차리고 필요한 대책을 취하고있으리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치양은 목이 터져라 고함쳤다.

《이제 당장 절령으로 출동하여 강조를 막을것이다!》

치양은 궁성을 둘러막고있던 군사를 약간만 남겨놓고 전부 내몰았다.

보름전에 개경 남쪽에 집결시켜놓고있던 자기의 기본부대(경주지방에서 그러모아 끌어온 지방군) 5천명도 절령방어에로 투입시켰다.

하여 1만 5천에 가까운 치양의 주력군이 하루밤사이에 우봉을 지나 평주계선에 진을 치고 강조를 기다렸다.

그것도 모르고 우봉너머 개경만 바라보면서 네굽을 안고 달려내려오던 강조는 동주(서흥) 룡천역말에서 동주고을 관리들이 막아서자 칼부터 뽑아들었다.

《일각이 천추인데 왜 길을 막는거냐?》

《자비령계선에 치양의 군대가 진을 치고있소이다. 그놈들이 절령고개길을 봉쇄하고서 강조나리가 자비령을 통과한 다음 절령계선에 들어오면 포위해서 사로잡으려 꾀함을 알리는바오이다.》

《뭐, 나를 사로잡아?! 흥!》

강조는 불그락푸르락하며 그냥 나가려고 하였다.

《가만! 임금께선 이미 치양의 칼에 잘못되시옵고 치양은 조정을 틀고앉아 새 각료직을 짜고있다는 소리도 있소이다. 상황을 좀 더 살피시고 가시는게 좋을가 하오이다.》

《페하께선 나를 빨리 오라 하시였다. 치양을 진압하라 하시였단 말이다.》

《페하께서 이미 잘못되시였다 하지 않소이까. 강조나리를 개경으로 오라 한것도 치양이 꾸민 수작일수 있사옵니다. 페하께서 오라고 하면 틀림없이 올것으로 알고 오는 즉시 죽이려고 하는것이 아닐가요?》

그만에 강조는 주춤했다. 그게 사실일가?

아니다. 그럴수 없다. 궁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맥없이 페하를 잃을수 없다.

유방이, 네가 정녕 페하를 지켜내지 못하였다면 넌 사람이 아니다.

나의 믿음을 그렇게 값없이 저버릴수 있는거냐?

씨근거리던 강조는 일단 숨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개경정세를 더 료해하고 가도 가야 할것이였다.

어쨌든 치양이 네가 옥좌에 올랐든 안 올랐든 너를 죽이고야말것이니 너 조금만 기다려라 강조는 씨근거리며 돌아섰다.

《하공진, 이게 사실일가?》

《그 말을 믿을수 없소이다. 유방과 탁사정, 류종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니오이다.》

《내 만약 이 모든게 사실이라면 먼저 그들부터 목을 베고 그다음에 치양이를 죽일것이다.》

《저… 이 점을 생각해보소서.》 서북면 관리 한명이 쭈빗거리며 한마디 끼여들었다. 《치양이 룡상을 차지하였다 하오면 어찌됐든 그는 임금이 되신것인데… 어른께서는 임금의 목을 치겠다 함이니 자칫 반역의 감투를 쓸가보아 걱정이로소이다.》

《나도 그걸 생각 안해본것 아니요. 내가 죽으면 반역이 되는것이요. 하지만 내가 살아서 치양을 죽이는 한 나는 반역의 감투를 쓰지 않는것이요.

치양이, 그놈을 죽여야 내가 사오. 자, 나를 따를 사람은 나서시오. 싫은 사람은 물러서도 되오.》

강조는 짐짓 목소리를 누그려뜨렸다.

《당치 않은 소리! 치양이 옥좌를 차지하였다 해서 임금이 된다구? 태조이래 우리 고려가 오늘에 와서 사직을 타성에게 넘긴단 말이요? 치양이 올라앉으면 그게 어디 고려요? 거란이지. 치양이 그놈이 거란왕과 내통하고 이짓을 하고있는지 누가 알겠소?》

하공진은 압록강나루 구당사로 있을 때 거란사절단이 들여오는 물품중에 많은 몫이 천추태후와 치양이것이던것을 이 순간에 불쑥 상기했다.

《뭐, 어찌됐든 치양이 룡상을 차지했으면 그가 임금이 된것이라구? 에이, 이 혼빠진 놈!》

하공진이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칼을 뽑아 휘익!- 허공을 가르자 뒤이어 털써덕! 하고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공진은 피 한방울 묻지 않은 칼날을 휘익 불고는 칼집에 꽂아넣으며 조용히 뇌까렸다.

《치양이 임금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죽어야 한다.》

강조는 자기의 발밑에 나딩구는 방금 치양이 옥좌에 올랐으면 임금이니 뭐니 하던 서북면관리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두눈을 끔뻑거렸다.

죽은자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나와 순식간에 굳어져버렸다. 베여진 머리는 저만치 굴러내려 길옆 도랑에 구겨박혔다.

《하공진, 그대 말이 옳소. 우린 설사 치양이 옥좌에 올랐다 해도 옥좌를 더럽힌 죄를 물어 그자의 목을 따치우고 대량원군을 모셔다 앉혀야 하오.》

《강조어른, 치양이 날뛰는 꼴을 보아 대량원군을 모셔오는 일이 어려움을 겪고있을수 있사옵니다. 그놈이 대량원군을 가만히 놔두자 할리 있겠소이까?》

《십분 그럴수 있소, 그 일도 우리가 지원을 합시다.》

《제가 그 일을 돕겠소이다.》

군사 하나가 나섰다.

《거긴 누군가?》

《방금 목이 잘린 사람의 동생이 되옵니다. 서경 분사 김응인이라 하옵니다. 형의 실언을 용서받아 가문의 허물을 씻을가 하나이다. 승낙해주옵소서!》

《저도 같이 가겠소이다.》

강쇠가 이때다 하고 한발 나섰다.

《강군교는 빨리 가서 강은천시랑을 모셔야 하지 않는가?》

강조는 반대했다.

《강시랑어른은 내가 신혈사에 갔다 하면 칭찬하실줄 아옵니다. 지금 그 일보다 더 중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나이다.》

《그럼 그리하라. 김응인이 수장이고 강쇠군교는 부장이다. 기마군사 100을 줄터이니 그대들은 빨리 신혈사에 가서 대량원군을 모셔오라. 그때쯤이면 우리도 개경에 들어갈것이다.》

강조는 자기의 지휘기를 띄울것을 명령했다.

《하공진, 그대는 뒤에 오는 주력을 이끌고 시급히 따라오라. 난 먼저 나갈터이다.》

《알아들었소이다.》

《자, 앞으로!》

강조는 수염발을 드날리며 앞장에서 말을 달려나갔다.

선발부대는 다시금 말발굽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비령계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하루를 넘기지 않고 끝나버렸다.

강조는 1천여명의 선발부대만 가지고 치양의 군사를 가볍게 눌러버렸다. 먼저 량익측으로 공격을 시작하고 뒤미처 정면돌입하여 절령고개를 타고앉자 치양의 군사들은 3천정도의 주검을 남긴채 황황히 도망쳐버렸다. 강조의 선발부대는 운제차(사다리를 리용한 성벽돌파용수레)로 절령고개 차단물을 타고넘은것이였다.

강조의 군사들은 성난 맹호마냥 돌진해들어가며 치양의 군사들을 삼대베듯 쓸어눕혔다.

군사의 사기는 정당한 명분을 가졌을 때 오르는 법이다. 치양의 군사들은 자기들이 싸우는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있었다. 아니 떳떳치 못한 싸움을 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니 사기가 날수 없는것이였다.

강조의 선발대는 금교역말(지금의 금천)에서 또 한번 치양의 수비군사 3천을 격파하고 삼십리를 내처달려 날이 어둡기 전에 탑고개를 타고앉았다. 여기서 뒤따라온 5천의 주력이 교대로 공격을 가하여 치양의 나머지 군사들을 소멸진압하면서 밤중으로 송악산을 돌파하고 날이 밝아올무렵에는 궁성을 완전히 포위해놓았다.

강조는 개경 남쪽계선에서 역공격해오는 치양의 예비대를 크게 품들이지 않고 격퇴해버리고 계속 남으로 추격하게 하는 한편 궁성 내전에 돌입하여 숙위군과 합세하고 궁성을 완전장악하였다.

근전문옆 숙위군 지휘처에 림시로 쳐놓은 군막안에는 강조이하 무장들이 비좁게 둘러앉아서 차후 처리안을 토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종장군, 치양을 잡아오는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가?》

강조가 유방을 다그어대자 유방은 여유있게 대답했다.

《지금쯤 끌어오고있을것이오이다.》

《그놈이 귀법사로 도망친것이 적실한가?》

《합문사 유행간이 도망치는것을 숙위군사가 은밀히 따라가서 귀법사에서 치양의 행처를 찾아낸게 어제 밤 술시중엽이였으니까 지금쯤은 돌아섰을것이오이다. 중랑장 탁사정이 직접 숙위군을 데리고갔소이다.》

《천추태후가 귀법사에 간것은 어떻게 알아내였소?》

《태후는 강시랑의 궁성밖으로 피하라는 조언을 듣고 거기로 간것이오이다.》

《강시랑은 무슨 심보로 태후를 빼돌리였소?》

강조는 오랜만에 만나는 은천을 퉁명스레 흡떠보며 묻는다.

《태후를 치양이와 떼놓으려고 그랬소이다. 복새통에 눈먼 칼에 잘못될수도 있고…》

《흥, 다심도 하시지.》

《그보다는 치양이 태후를 내세워 저들이 목적한대로 페하를 강박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 그랬소이다.》

《글쎄, 그렇다면 몰라라… 그래 페하의 병세는 어떠시오?》

강조는 은천에게 조금 풀린 눈길로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셨소이다. 중추원사께서 오시면 직방 알리라고 하셨소이다.》

《그런데 대량원군은 왜 아직 도착하지 않고있소?》

《치양이가 그쪽에도 군사를 증파해서 충돌이 일어 지체하고있었소이다. 그쪽도 완화되였으니 조만간 도착할것이오이다.》

유방이 정황을 설명했다.

《저… 중추사어른, 내전봉쇄를 풀지 않겠소이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고생이 적지 않았소이다.》

은천은 강조가 궁성에 들어오자바람으로 임금이하 문신관료들을 억류하라 한것이 사리에 어긋나는것 같아 속이 편치 않았다.

《강시랑은 그들이 치양과 한짝이 아니라는걸 담보할수 있소?》

강조는 은천의 제의가 리해되지 않는다는듯 흘깃 치떠보며 묻는다.

《그들은 페하를 지켜낸 사람들이오이다. 치양이 페하를 해칠가보아 지금까지 단 한발자국도 내전을 뜨지 않았지요.》

유방이 강조를 일깨우고나섰다.

《응당 그랬어야지. 페하의 총애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하는거요. 이렇게 합시다. 치양을 잡아오는 즉시 페하앞에서 목을 치고 그다음에 페하를 귀법사로 옮겨모십시다. 그다음에 대량원군이 오면 식을 갖추어 정식으로 모십시다. 유방장군은 이제 가서 최항과 채충순에게 새 임금을 모시는 례식을 준비하라 이르도록 하오. 우리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간단히 요기나 하고봅시다.》

강조는 기본고비는 넘겼다는듯 갑옷을 벗어던졌다.

바로 이때 《치양을 잡아들였소이다.》 하는 전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을 끌어왔어?!》

강조는 걸상에 비스듬히 누운채로 끌려들어오는 치양을 쏘아보았다.

한참을 쏘아보고있던 강조의 입에서 된욕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주제를 해가지고도 마지막까지 치마폭만 찾아다녀? 예끼, 이더러운 놈! 아, 저것이 겁기라군 모기좆만큼도 없는 놈이군 그래. 원, 저런… 저따위놈이 우리 사내망신은 도맡아 해가지고있지 않는가, 저게 말이야. 야, 이놈아, 네놈것은 개를 줘도 안 먹을게다, 퉤! 이 더러운… 이놈아, 사람은 분수가 있고 경우가 있어야 한다, 이 개돼지만도 못한 놈아! 네까짓것이 감히 우리 고려왕조에 타성갈이를 하려들어? 이 천하에 덜된 놈!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강조는 숨도 안 쉬고 된욕을 련발하고는 술사발을 기울여 목을 추기고나서 명령했다.

《페하를 오시게 하라!》

임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비척비척 군막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치양의 자개물린 피투성이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페하를 바로 모셔라!》

강조가 다시 이르자 채충순이 허겁지겁 들고온 보료를 접어 걸상우에 걸쳐놓고 임금을 바로 앉히고 부축했다.

《태조이래 간신들이 적지아니 있었으나 저놈처럼 지독하게 임금을 우롱하고 찬탈을 추구한 놈은 일찌기 없었노라. 하늘이 굽어보고 응당히 벌을 내리라 하였으되 이제 저놈의 숨통을 끊어 만사람의 한을 풀어줄것이노라. 야, 너!》

강조는 치양의 옆에 선채 우들우들 떨고있는 패당 한놈을 가리켰다.

《네가 망나니를 해라!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죄를 덜 생각 있으면…》

놈팽이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칼을 받아쥐고 한참 치양을 노려보다가 끙 힘을 쓰며 칼날을 휘둘렀다.

눈깜짝할 사이에 치양의 목이 쑥덕 베여졌다. 두눈을 흡뜬 놈의 대가리가 떼구루루 굴러떨어졌다.

강조는 계속해서 죄목을 따져가며 일곱놈의 목을 더 벤 다음 나머지 서른놈은 귀양지로 보내라 령을 내렸다.

임금은 눈앞에서 벌어진 피비린 광경에 넋을 잃고 굳어져있었다.

강조는 천천히 일어나 임금앞에 와서 털써덕 주저앉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 기유년(1009년) 봄 2월 무자일 묘시를 기점으로 페하의 정무가 끝났음을 알려드리나이다. 왕위는 페하의 어지대로 대량원군에게 양도하여 여한없이 이어가도록 최선을 다할것임을 삼가 맹약하는바오이다.

페하는 이제부터 양국공으로 상왕이 되시여 새 임금의 뒤를 살펴주시기 바라나이다. 거처를 귀법사로 옮기시고 태후마마와 함께 여유를 즐기시옵소서.》

왕송은 아무 말도 못한채 듣기만 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겨우 한마디 《왕위는 내가 직접 선위하려 하였는데…》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어지에 다 밝혀주셨으니 재삼 곱씹을 필요가 없는줄 아오이다. 나라사직이 실패없이 잇게 된것은 페하의 공이로되 후세에 이 점에 한해서는 길이 찬양받을것이로소이다. 안심하소서.》

강조는 눈짓으로 임금을 모셔내가라 이르고는 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왕송이 나간 뒤 이윽해서 강조가 대충 요기를 하고 입가심을 하고있는 때에 밖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군막을 들치며 황보유의와 문연, 강쇠와 김응인이 대량원군을 옹위하고 들어섰다.

강조는 황급히 옷매무시를 바로잡고나서 너푼 절을 하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새 임금을 모시게 되였소이다. 역적간신들은 깨끗이 제거되였으니 안심하시고 무지한 저희들을 새로이 이끌어주시옵소서. 그간에 노여운것이 있사오면 주저마시고 벌하여주소이다. 우리 몸은 페하의것이오니 처분대로 따를것이오이다.》

강조는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새 임금 왕순은 아무 말도 없었다. 눈마저 지그시 감고서 한손을 가볍게 들어 강조의 머리우에 멈춘채 굳어진듯 까딱도 하지 않았다.

강조는 슬며시 머리를 들어 새 임금을 쳐다보다가 자기 눈언저리에서 멎어서있는 그의 손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떠름해서 굳어겼다.

일어서라는 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앉아있으라는 소리는 더욱 아니고…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인가?

강조는 말할것도 없고 주위의 문무관료모두가 어리둥절한채 숨을 죽이고 새 임금을 주시했다.

《과인은 피로하여 잠시 쉴터이니 모든 대신관료들은 이미 하던 자기 일을 그대로 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슬며시 일어나 스적스적 걸어나갔다.

그 자리에 서있던 관료대신모두가 한동안 얼이 나간듯 까닥도 하지 않고 그냥 굳어져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새 임금의 첫 한마디, 자기가 이제부터 임금이라는것을 선포한 과인이라는 그 말만은 똑똑히 새겨들었다.

아직은 18살, 목종과 꼭같은 나이에 어린 몸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옹송그리는 모습을 볼수 없었다.

방금전까지 서슬푸른 기상을 하고 전 임금의 페위를 선언하며 천하제일의 위엄을 과시하던 강조마저도 자라목을 한채 눈만 껌뻑거리고있을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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