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하 편
11. 조정이 위기에 처하다
2
1009년 정월 어느날, 임금은 이해의 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숭교사에 갔다오다가 갑자기 불어치는 회오리바람에 일산대가 꺾어지는 변을 당하였다.
임금은 이것이 대단히 불길한 징조라며 문밖출입을 금하고 궁성안에만 박혀있다가 숭교사 주지가 찾아와 부추기는데 넘어가 상고전 후원에서 관등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때 상고전 뒤쪽 대부(왕가가 리용하는 창고)의 기름창고에 화재가 일어 천추전을 비롯한 주변건물들까지 타버리는 참변을 당하였다.
전해오는 말로는 천추태후와 치양의 꼴을 보다못해 격분한 궁성 노비들이 작당을 하고 불을 놓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화재로 하여 왕궁의 기본처소들이 재가 되고말았다.
임금은 하늘이 자기를 외면했다 한탄하던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말았다. 아예 초탈에 빠져 음식을 들지 않았으며 병문안 오는이들도 들여놓지 않고 정무일체를 조정에 떠맡긴채 두문불출하고 나앉은것이였다.
처음에는 임금이 하도 골이 아프니 머리쉼을 하는겸 안정하느라 그러겠지 하고있던 대신관료들이 점차 긴장해지기 시작했다. 임금이 식음을 전페하고있다는 그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던것이다.
참지정사며 중추원사며 중추원 부사 채충순이며 친종장군 유방이며 중랑장들인 탁사정, 하공진 등은 궁성의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임금의 호위에 들어갔다. 지금같은 시기에 임금을 개떡같이 알고있는 김치양이 무슨 도깨비짓을 해올는지 모르기때문이였다.
한편 김치양은 임금이 병석에 들어 반삭(보름)을 넘기고서도 일어나지 못하자 삵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쳤다.
《태후께서 다시 섭정을 하셔야겠소.》
치양은 두눈에 피발이 돋아서 태후를 부추기고 나섰다.
《지금은 이전과 다르오. 페하의 나이가 서른이요, 서른! 아이가 아니라는 말씀이라고요.》
천추태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룡상이 비여있으니 하는 소리가 아니요.》
《좀 더 지켜보는 수예요. 대신관료들이 또 욱 들고일어나면 어쩌겠소?》
《그건 내게 맡기오. 아예 두부모 베듯 해치우고말테니. 난 더 못참겠소.》
《해치우다니? 누구를 말이요?》
《누군 누구겠소. 날 쓴외 보듯 하는것들이지.》
《당신 지금 우리 페하를 노리는건 아니요?》
《그렇다면 어쩔셈인가?》
순간 태후의 가느다란 팔이 허공을 그었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치양은 볼을 싸쥐였다.
《어따대고 감히 손찌검이야!》
치양이 불그락푸르락하며 쏘아보자 태후는 한걸음 다가들었다.
《차라리 날 죽이고말지, 나를!》
태후는 활활 불이 이는 눈으로 치양을 쏘아보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서슬에 치양은 찔끔 목을 옴츠렸다가 다시금 뽑아들었다.
《강조가 쳐들어올수 있단 말이요. 그 털부숭이가 옥좌를 타고앉을수 있다는걸 몰라?》
《그 사람은 절대로 그런짓은 안해! 아니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져!》
가쁜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내젓던 태후는 갑자기 흠칠하며 치양을 뜯어보다가 급기야 마구다지로 달려들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셈이냐? 내 아들을 감히…》
천추태후는 치양의 턱수염을 잡고 늘어지며 요동을 쳤다.
《룡상이 탐나면 탐난다고 해! 나두… 내 아들두 다 죽이고 어서 그 더러운 욕심을 채워라! 이 짐승같은…》
《으악!…》
치양은 태후에게 볼따귀를 꼬집히고 눈알을 허비우자 기겁해서 뿌리치며 물러섰다.
《누가 아들을… 페하를 죽인다고 했어? 엥이…》
치양은 태후를 힝 하니 들어 침상에 메치고 씨근덕거리다가 휙 나가버렸다.
그 시각, 은천은 궁성 내성 안대문인 근전문을 두드리고있었다.
《누구든 들여놓지 말라는 친종장군나리의 분부시오!》
숙위군사는 막무가내로 막아나섰다.
《친종장군에게 내가 만나잔다고만 전하라. 밖에서 기다릴터이니.》
그 말에 군사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후에 유방이 반색을 하며 나왔다.
《페하께서 어떠하시오?》
은천의 물음에 유방은 금시 얼굴을 흐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병세가 돌아서긴 힘들것 같소.》
《그러하면…》
《다들 안절부절못하고들 있구려. 어쩌면 좋을지.》
《치양이쪽에선 무슨 기미가 안 보이오?》
《그자의 끄나불이 방금전에 대정문을 나가는걸 보았다는 보고가 있소.》
《대정문을 나갔다고? 그 작자가 궁성밖을 나갔으면… 궁성호위 외군을 찾아간게 아니요?》
《그렇게 생각되시오?》
《궁성밖을 둘러막고볼 심산일수 있지요.》
《치양의 군사가 우리 모르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요. 하공진의 한개 위가 있지 않소.》
《하공진의 부대가 치양의 군사를 견제할수 있다는거겠소?》
《그렇소. 나는 치양의 끄나불놈이 궁성 외군을 거쳐서 금교역(우봉고을)까지 나갈것 같아 그러오.》
《금교역이라면 …》
《우봉고을 두목이 치양의 일족이 아니요? 그 고을 향군(지방군)이 공개된 수보다 서너배는 더 많다고 들었소. 그우로 평주고을도 그 족속이 쥐고있으니 그곳 군사가 또 그만할거요.》
《그러니까 치양이 수하의 군사가 오륙천정도는 된다는 소린데…》
《그 력량으로 강조어른의 군사를 견제하려 하지 않을가 예상이 되여 그러오.》
《치양이네 작자들이 강조어른이 군사를 파할것을 예견해서 미리 막을 방책을 세울수 있다 생각되시오?》
《그렇소.》
《강조어른에겐 련락을 띄웠소?》
《곧 띄우려 하오. 페하께선 침상곁에 중추원사 최항과 중추부사 채충순이만 있게 하고 다른 대신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시오. 그래서 겨우 채충순에게 잠간 만나자고 전갈을 띄웠는데 아직 안 나오고있소. 페하의 지시가 있어야겠기에 지금 채충순에게 부탁하려고 기회를 보고있는중이요.》
《내 생각에는 일각이 새로우니 우선 사람을 띄우고 페하의 어명은 받는 차례로 뒤따라 보내는것이 좋겠소. 강조어른에게 빨리 개경을 지원하라 청해놓고 보는 수란 말이요.》
《그게 좋겠소.》
《강조어른에게 군사를 청하는 일은 내가 맡으리다.》
《그럼 믿겠소. 페하의 어지는 인츰 받아 보내리다.》
《그리고 어련하시겠소만 대량원군을 빨리 모셔와야 하리라 생각되오.》
《그것도 페하의 어명이 있어야 하는만큼 우리가 알아서 할것이요.》
유방은 머리를 끄덕였다.
《또 한가지》 은천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내전안에 치양의 끄나불이 또 있을것이니 그 선을 차단해야 할것이요.》
《그 일에 한해서도 최선을 다하고있소. 내 앞서 말한 그 치양이 끄나불도 즉시 잡아 묶으려다가 그자의 뒤를 밟아서 궁성밖 치양이 부대의 군사규모와 당면한 기도를 더 알아보려고 그냥 놔두었소. 미행을 조직해놓았으니 걱정마시오.》
《그럼 난 자리를 피하겠소.》
은천은 되돌아섰다.
자기 처소로 돌아오던 은천은 근전문밖 내성 서켠둔덕에 자리잡고있는 국사당쪽에 얼핏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 천추전이 불타버린 후 림시로 거처를 잡고있는 천추태후가 들어있기때문이였다.
지금 천추태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그가 치양과 무슨 작당을 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가 임금의 상태를 봐야겠다며 침전으로 들어가자 할수도 있지 않는가. 태후는 임금의 동향을 몹시 알고싶을것이였다.
은천은 천추태후가 치양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게 이제라도 눌러놓는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강쇠를 불러 강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주어 떠나보낸 뒤 은천은 천추태후를 찾아갔다.
그곳에 치양이 함께 있다면?… 그러면 뭐 대순가. 지금은 이것저것 재고있을 때가 아니렷다.
은천은 주저없이 국사당의 서승당 퇴지문을 두드렸다.
《어슬녘에 외간남자가 녀승방문을 두드렸으니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는 불측무토한짓이 되오나 사정이 막급하와 무례함을 무릅쓰고 소신 알현하였음을 아뢰나이다.》
《그대는 누군가?》
방안에서 들려나오는 태후의 목소리는 몹시 놀라운듯 떨고있었다.
《례부시랑 강은천이라 하옵니다.》
《음, 내가 좀 아는이군그래. 하지만 나와 근사한 연고는 없는이인데 무슨 일로 이렇게 경우에 닿지 않는 걸음을 하였나?》
《이왕에 대응을 해주시는바 하고는 존안을 직접 상대하고 은밀히 말씀올리게 하여주사이다.》
은천이 내친김에 들이대자 태후는 《거 참,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 하면서 문을 열었다.
《별일 없을테니 들어오게.》
은천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용기를 내여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엔 태후 혼자였다. 은천은 너푼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마마! 이후에 어떤 벌도 달게 받을것이오이다.》
《그만하고 본론을 말하게. 나를 믿고 왔을터인데… 설마 나를 해치러 온 자객은 아닐테지?》
《제딴엔 태후마마를 돕자고 온것이오나… 괜한 잡사설일것 같아 주저되오이다.》
《어서 말하게. 무슨 일인가?》
《페하께서 병중에 계시오니 국운이 기울고 나라는 슬픔에 잠겼소이다. 이런 때에 역모를 꾸미는자들이 있음은 고금에 례사인지라 태후께서 이 점을 알아서 옥체보존에 각별히 관심하시라 일러올리려 왔소이다.》
《착하기도 하시네. 그런것쯤이야 내 알아하지 않으리. 구태여 옥체보존하고싶은 생각은 없지만…》
태후는 한숨을 포옥 내쉬였다.
《의례히 그러하실테지요. 페하의 안위는 념려마시고 가까이 걸음을 하시지 않으심이 좋을듯 하나이다. 그리고 이 시각을 기하여 판삼사사 대감과 거리를 두시옵고 당분간 궁성밖 외진 곳에 거처를 옮기시여 자취를 감추심이 좋을가 하나이다.》
《어느쪽 칼날이든 피하라 그 말이군. 하나 보태면 정사에 참견말고 함구무언해야 할것이고.》
《소신을 앞지르시여 더 할말이 없소이다.》
《고맙네. 나를 찾아주는이도 많지 않거니와 그런 말을 해주는이는 더우기 많지 않네. 오직 하나야, 자네 하나라고.》
태후는 지극히 감동이 된다는 표정이였다.
《내 걱정은 말게. 람루한 이 몸을 감추고말고 할것도 없고 나머지는 익히 알아서 할터이니까. 하늘이 내리는 벌이야 피하는 수가 있겠나? 좌우간에 고맙네, 정말 고마워… 흐흑…》
천추태후는 금시 눈물을 쏟아내며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보라고.》
《그럼 전…》
은천은 깊이 머리숙여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죄는 지었을망정 자책의 눈물을 흘리는데는 은연중에 동정심까지 솟구쳤다.
(그래, 죄는 지은대로 가는 법이거늘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설사 치양이 솟구쳐서 판이 그대로 버티여진다 할지라도 백성들의 지탄을 면할수는 없으렷다. 아, 아, 불쌍코나!…)
은천은 입이 쓰거워나 얼굴을 찡그렸다.
한편 임금의 침전에서는 은천이 바라는대로 일이 벌어지고있었다.
임금은 산삼차가 든 종지발을 자기 입에 대여주는 채충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더듬어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간에 그대들이 하는 소리를 은근히 들어보니 나를 위하는 마음들이 지극히 갸륵하오만…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있다함이 사실인듯 하온데 어떤 방어책을 세우고있는가.》
채충순은 바라던 기회라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가 페하의 충신들을 하나, 둘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기를 조석이 멀다하게 다그어채고있기에 우리는 서로가 변심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페하를 향해 맹세하고있사오며 그를 견제하러 군사를 발동케 해주십사 페하께 간하려 하고있사옵니다.》
《이 봉서를 읽어보라.》
임금은 베개밑에 끼워두었던 봉서 두개를 내주었다.
채충순이 읽어보니 하나는 좌사랑중 류승정이 치양의 꼬드김을 폭로한것이고 다음 하나는 대량원군 왕순이 자기를 죽이려 독을 넣은 음식을 보내온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한 밀서였다.
채충순은 저으기 놀라며 단호히 주청했다.
《사세가 급박하니 빨리 손을 써야겠소이다. 강조어른에게 군사를 보내오라 어명을 내리시고 대량원군을 빨리 모셔와 페하곁에 있게 해야 할줄 아뢰오.》
《나의 병이 이미 기운것 같고 언제 땅속에 들어갈지 모를 일이니 급히 손을 써야겠다.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뿐이니 그대는 최항과 짜고서 그를 속히 데려오도록 하라. 사직이 타성에게 속하지 않도록 충과 의를 다하리라 믿는다.》
《알아들었소이다.》
채충순은 급히 침전을 나와 최항과 상의하고 그의 의견을 좇아 감찰어사 고영기를 더 인입하여 세명이 론의한 끝에 황보유의가 책임지고 가서 대량원군을 호위해오도록 하고 이에 대해 임금에게 다시 상주하였다.
임금은 《내가 친히 왕위를 선위하고싶으니 빨리 가서 데려오라. 내가 자식이 없고 계승자가 미정이여서 뭇사람들이 동요하니 이는 나의 허물이노라. 국가대계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는 채충순에게 대량원군이 받아볼 편지초안을 잡으라 일렀다.
《옛날부터 국가대사는 미리 결정하면 민심이 안정되는 법이다. 내가 병석에 드니 간신들이 기회를 엿보고있고 명분을 정하지 않고있기에 더욱 엿보는것이다. 그대는 태조의 적손이니 빨리 떠나오라. 내가 죽기 전에 면대하고 종묘사직을 그대에게 맡기면 죽어도 한이 없겠고 만약 내가 더 살게 되면 그대는 동궁에 거처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면 될것이노라.》
채충순이 이러한 글을 받아써올리니 임금은 《길이 험하여 악당들이 잠복하였다가 불의의 변을 일으킬수 있으니 경계하고 조심하여 오라.》고 더 쓰게 한 뒤 서둘러 떠나보내였다.
이들이 떠나간 뒤 임금은 계속해서 채충순에게 강조에게 보내는 밀서를 쓰게 하여 하공진이 가지고 가서 전하고 함께 군사를 끌고올것을 지시했다.
하공진은 서경으로 출발하는 길에 은천을 만나 내전에서 취한 조치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유방에게 일러두었으니 이후엔 그와 련계를 가지시오. 그럼 난 가겠소.》
하공진은 떠나갔다.
강은천은 살륙이 예견되는 내전의 소용돌이가 이미 시작되였음을 직감했다.
이런 때에 내전밖에 내쳐져있는
참지정사 류진과 중추원사 최항, 급사중 채충순, 좌사랑중 류충정은 조정의 머리역할을 할수 있는 사람들이고 유방과 중랑장들인 탁사정, 류종, 형부상서 진적, 호부시랑 최사위들은 조정을 지키는 팔다리역할을 능히 할수 있는 사람들이였다.
형부랑중 양규가 있었더라면 그도 한몫 끼였을것이지만 그는 서북면 도순검사로 나가있었다. 임금이 지난해에 강조가 돌아오라는 뜻에서 그에게 내렸던 서북면 도순검사직을 양규에게 내렸던것이다.
강은천은 이런 급한 때에 거란이 쳐내려올수도 있는지라 양규가 변방에 나가 나라지경을 지키고있는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강조는 양규를 자기 수하에 걷어쥔것이였다.
강은천은 강조가 한시바삐 개경에 돌아와 임금을 지키고앉아있는것이 위기타개의 기본고리임을 재삼 절감했다.
방금 떠난 하공진이 언제 가서 강조를 데려올것인가, 강쇠가 제대로 갔으면 지금쯤 강조를 만나고 돌아섰을터인데…
빨리 오라, 강조야.
강은천은 가슴을 조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