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하 편

 

10.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다

 

1

 

씨르륵- 씨르륵-

뜨락너머 울바자밑 풀덤불속에서 풀벌레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초당마루에 걸터앉아 풀벌레소리가 들려오는 덤불우로 이리저리 날아예는 반디벌레들을 바라보는 은천의 얼굴엔 수심이 짙게 어려있었다.

오늘 은천은 오랜만에 궁궐밖의 이 초당에 나와 머리쉼을 하고있었다.

날아예던 반디벌레 하나가 담장우로 뻗어올라간 호박넌출의 꽃송이 안으로 들어가 박혔다. 밤이슬을 막느라 꽃잎을 모두어들여 초롱모양으로 오무라든 호박꽃속으로 들어간 반디벌레는 다시 나오지 못하고 그안에서 몇번 맴돌이를 하다가 아예 하루밤 자려는 모양 꼼짝 안하고 박혀버렸다. 반디벌레가 내비치는 불빛으로 해서 오무라든 호박꽃은 마치 애기에게 만들어 들려주려고 만든 깜찍한 초롱불같았다.

반디불꽃초롱을 바라보던 은천은 불현듯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부인 송죽이 아직 처녀일 때 일이니 퍼그나 오래전 이야기이다.

아버지 강궁진이 원로 최지몽의 귀양살이를 함께 가서 겪고있던 때라 초당에서 웃음소리를 들어보기 힘든 시절이였다.

고향 금천에서 올라와 얼마간 초당에 같이 있던 부엌녀 봉선이가(그는 이후에 말구종 도련이와 가정을 이루었다.) 송죽이 대신 은천의 속옷빨래를 해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송죽의 노여움을 살줄이야…

은천은 고향에 있을 때에도 가끔 봉선이가 빨아서 다려주는 버선을 받아신군 하였던지라 례사롭게 여기였는데 송죽은 이것을 색다르게 단정해버린것이였다.

자기가 빨아줄 때에는 아무소리없이 받던 은천이 봉선이에게는 고맙다거니 수고했다거니 칭찬을 아끼지 않는건 말할것도 없고 씨익 웃어주기까지 하니…

코옥- 가슴이 찔려오는듯싶은 아픔에 저도모르게 신음소리까지 내였던 송죽이였다.

하지만 은천은 송죽의 그런 내속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오히려 봉선이가 송죽의 일손을 덜어준다고만 생각하고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고있었다. 그런 고마운 생각에서 웃어보이며 칭찬도 해준것이나 송죽은 그것을 은천이 자기보다 봉선이를 더 고와하는것으로 생각한것이였다.

그것은 은천을 마음속깊이에 묻어두고있는 송죽이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였다. 사랑하는 마음이 빚어낸 일종의 질투심이랄지…

그날부터 밥도 안 먹고 앵돌아져있던 송죽은 어느날 저녁 방바닥 돗자리를 물걸레질하다가 초불을 켜고 글을 쓰는 은천의 옆을 잘못 스쳐 탁자모서리에 놓여있던 벼루를 다쳐놓았다.

먹물이 찰랑찰랑 고여있던 벼루가 떨어지며 꺼먼 먹물이 순식간에 은천의 옷자락에 쏟아지였다.

어마나!-

송죽은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어서 옷을 벗어주세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은천은 걱정 말고 어서 자, 옷은 래일 봉선이가 빨게 할테니 한다.

내 그럴줄 알았어!

픽 돌아서는 송죽의 눈귀에 찔끔 눈물이 돋아나왔다.

《가만, 그 걸레는 인줘. 돗자리에 묻은 먹물을 씻어야겠어.》 하며 손을 내밀던 은천은 얼굴을 감싼채 꼼짝 않고 서있는 송죽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니, 송죽아! 너 우는게 아니냐?》

은천은 송죽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리운 그의 손을 내리려 했다.

《다치지 말아요!》

송죽은 매섭게 쏘아붙이며 은천을 밀쳐버리고는 종달음쳐 나가버렸다.

그런데도 은천은 저 애가 왜 저럴가 하고 열려진 문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번 기웃해보고는 다시금 골똘히 붓질에만 정신을 팔았다.

다음날 아침.

《송죽이가 조반을 또 건너띄였니?》 하고 상을 물린 은천이 한마디 하자 봉선이가 빨갛게 물든 얼굴을 숙이며 잦아드는 소리로 대답하기를 《네, 벌써 삼일째오이다.》 한다.

《뭔가 사달이 났구나. 어디가 아파 그런다던?》

《저…》

《체증이 난게 아니냐?》

은천이 자기 배를 가리켜보이자 봉선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런게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가봐요.》

《머리가?…》

은천이 더욱 의아해하자 봉선이는 황황히 건너방으로 갔다 되돌아오더니 단정히 포갠 옷가지를 내여밀며 떠듬거렸다.

《나리님! 송죽아씬… 나리님옷을 남이 빨아주는걸 좋아하지 않사와요. 꼭 자기가…》

《그럼 봉선이 너는 남이란 말이냐?》

《그런게 아니라… 아이참, 나리님도… 그렇게도 모르시겠나이까? 송죽아씬… 나리님을… 어서 받으시와요. 송죽아씨가 밤새 빨아 다린 나리님옷이오이다.》

봉선이는 웬일인지 제사 똘랑 눈물을 떨구며 황급히 옷을 은천에게 안겨주고는 자기도 머리를 외로 꼬며 돌아섰다.

《!…》

은천은 그제사 깨도가 되였다.

《되였다, 어서 밥을 먹으라고 일러라! 원, 애두 참…》

어이없어 허거픈 웃음을 짓던 은천은 자기가 이제는 송죽에게 명백한 대답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였다.

전해 정초 대보름날 저녁에 자기는 일생 은천과 함께 살고싶다고 한 그 사랑의 고백을 받고서도 해를 넘긴 오늘까지 묵묵부답이였으니 송죽의 속이 여간 탔으랴.

송죽이! 너와 나사이에 무슨 언약 같은걸 꼭 해야만 맛이냐?!

사실을 말하면 둘 사이에 꼭 찍어 언약은 안했어도 한지붕아래 한가마밥을 먹기 시작한 그때부터 둘사이의 사랑은 이미 소리없이 움터왔고 지금은 향기를 머금은 꽃망울이 금시 피여나려 하고있는중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귀양지에 가있지만 않았다면 송죽의 머리는 이미 얹혀졌을것이였다.

그런데 생뚱같이 아니할 생각을 하다니…

은천은 그날 저녁 송죽의 손을 꼬옥 쥐고 말없이 뜨락을 거닐었다. 바로 지금의 이맘때였다.

무슨 더 할 말이 있으랴.

은천은 때마침 눈앞을 감도는 반디벌레를 닁큼 잡아가지고 담장우에 피여있는 호박꽃 한송이를 따서 그안에 넣고 꽃불초롱을 만들어 송죽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방그레 웃던 송죽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송죽은 은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온몸을 바르르 떨었었다.

그날 그밤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은천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송죽의 그 타는듯 한 눈빛을 은천은 영원히 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귀중한 사람, 송죽이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귀양지에서 돌아온 부모님의 축복속에 백년가약을 맺고 귀여운 옥동자를 연줄 낳아준 송죽이건만 그는 세번째 자식을 낳은 그해에 산후탈이 도져 몸져누웠다가 영영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날은 은천의 어머니가 돌아간 해인 993년 동지 전날이였다.

그때 송죽은 금천(시흥)본가에 내려가 은천이 대신 묘소를 지키며 가사일도 돌보는중에 해산을 하였었다. 거란과 한창 싸움을 벌리고있는 때여서 은천은 송죽이 해산뒤에 산후병으로 위급한 고비에 들었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몸을 뺄 경황이 아니여서 내려가보지 못하였다.

조금만 견디여다오. 싸움이 끝나면 한달음에 달려갈것이니…

은천이 이렇게 빌었으나 송죽은 그 고비를 끝내 넘기지 못하였다.

은천은 서희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온 다음에야 부랴부랴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그때는 이미 송죽이 땅에 묻히고난 뒤였다.

은천은 식음을 전페한채 사흘을 통곡하고나서 되돌아섰다. 아들애는 젖어멈을 구하게 하고 도련과 봉선에게 가사일까지 겹쳐서 떠맡겨놓은채 개경으로 돌아온 은천은 더는 다른데 눈 팔지 않고 조정일에만 전념하였다.

송죽이를 먼저 보낸 쓰라린 마음속 고통을 말없이 묵새기며 일에 파묻혀버렸다.

이런 불행이 어찌 나 하나만 당하는것일소냐. 전장에서 죽어 돌아오지 못한 남편들과 아들들을 그리는 이 나라 녀인들의 슬픔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가 있고야 가정도 있는 법이거늘, 송죽이! 부디 날 용서해주오!

은천은 맘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강잉히 일어섰었다.

송죽은 비록 갔어도 그의 넋은 은천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었다.

오늘 밤 반디벌레가 제스스로 만들어놓은 꽃초롱을 보면서 은천은 가슴속깊이에 묻어두고있는 그리운 님의 넋을 다시금 어루만지고있는것이였다.

《중추원나리께서 왕림합시오.》

뜨락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은천은 저도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강조가 우리 초당엘 오다니?! 은천은 황황히 의관을 바로잡으며 뜨락아래로 내려섰다.

강조는 새 임금으로부터 중추원사로 임명받았다.

원래 중추원은 성종 초기에 국왕숙위만을 담당한 부서로 발족하였었다. 궁중안의 경비와 내전호위, 특히 임금의 신변호위를 기본임무로 하였는데 성종 말기에는 왕명의 전달임무가 첨부되고 군사기밀보장임무까지 맡겨지면서 기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목종대에 들어서면서 군기시의 임무와 왕명하달, 임금에게 제출할 보고서나 기타 서류작성임무까지 걷어안은 핵심부서로 격이 높아졌다.

중추원에는 판사, 원사, 지원사, 동지원사, 부사 등의 순위로 서렬이 내리정해있는데 그중에서 원사와 부사는 두명을 두었다. 강조는 군기시와 궁중호위 즉 군사업무를 관할하는 원사가 된것이였다.

성종때에는 겨우 병마판관자리에 오르는데 그쳤던 그가 새 임금의 등극과 더불어 껑충 개구리뜀을 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새 임금 왕송이 아직 개량원군(태자)으로 봉하여지지 않았을 때 성종은 서희와 함께 내미홀(해주)로 지방순시를 가면서 열세살난 그를 데리고갔었다. 그때 성종은 최승로가 살아있을 때 강조가 반역할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을 하였던것을 생각하면서 그의 승진을 여러번 보류하였었는데 거란의 침공에 대비한 준비를 점검하는 순시길에 내미홀의 강조를 한번 만나보려고 작정한것이였다.

최승로와는 달리 서희는 강조를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었다.

성종은 서희의 이런 립장을 알고는 시원히 만나서 그의 됨됨이를 직접 가늠해보리라 생각했었다. 어린 왕송을 데리고간것은 그저 그의 눈을 틔워주리라는것외에 다른 목적은 특별히 없었다.

그때 강조는 성종이 최승로의 입김에 녹아 자기를 눈에 차하지 않는다는것을 알고있던지라 네 좋을대로 생각하여라 하는 태도를 로골적으로 취하여 성종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어린 왕송에 대해서만은 여간 곰살궂지 않았다. 순시길에 성종에겐 묻는 말에나 건성으로 대답하는 반면 그에게는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식으로 자상히 설명을 해올리면서 성종을 시답지는 않지만 공경은 한다는 자기 심정을 에둘러 표시했다.

허나 어린 왕송은 그때 강조에게 대단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강조가 쇠벼림터를 보여주는 곳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창날을 이발로 물고 입바람을 냅다불어 쇠를 식히는 재주를 보여주자(강조는 약간의 기합술도 소유하고있었다.) 너무도 신기하여 손벽을 치며 그 동작을 두번, 세번 다시 해보게 하기까지 하였었다. 강조에게 완전히 반하였던것이였다.

이후에도 왕송은 여러번 강조를 찾아가서 그가 하는 기합술을 배합한 수박치기나 발뒤꿈치타격으로 황소의 대가리를 까서 쓰러뜨리는 장끼를 넋을 잃고 구경하다 오군 하였다.

그런 왕송인지라 임금이 되자 두말없이 강조를 자기곁에 불러들인것이였다. 강조는 단번에 정4품에서 종2품으로 뛰여올랐다.

아직 18살밖에 안되는 어린 임금은 강조에 대한 환상이 꽉 차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온 나라가 거란의 재침공을 우려하여 밤낮으로 설렁이는 때라 임금은 강조에게 군권을 아예 다 맡겨버리고싶은것을 겨우 누르고있는것이였다.

강조는 기세가 등등하여 맹활약을 하고있었다.

강은천이 같은건 한참 비켜서라 하는 정도의 높이에 오른 강조가 은천의 쑥내나는 초당을 다 찾으시다니…

례외도 보통 례외가 아닐수 없었다.

 

제비야 깃을 차고 창공을 날고지고

둥지에서 뛰쳐나와 만리대공 날고지고

 

강조는 돌담길을 올라오다말고 시를 읊어 은천을 찾았다.

《원사나리께 문안드리오.》

은천은 롱인지 진담인지 알쑹달쑹한 자세를 취하며 황황히 강조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와하하, 우리 제비 깃을 꺾고 둥지아래 사렸으니

초년의 그 기개 어디 가서 되찾을고》

강조는 호호탕탕 웃어제끼며 은천을 한껏 조롱한다.

《하늘의 은총 입어 그 기개 장하려니

락타야 어서 와서 네 친구 태워가라》

은천도 시로 맞받아 야유했다.

《락타야 어서 와서 네 친구 태워가라?! 그러니 내가 거란친구란 말인가? 으하하하… 일어서게, 강시랑! 꼴이 그게 무어요? 감히 페하와 엇나다니, 될번이나 한 일이요?》

강조가 짐짓 정색을 하고 꾸지람을 하자 은천은 말없이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임금의 령은 하늘의 뜻이거늘…》

《하늘의 뜻이라면 내 이러겠소이까?》

은천의 얼굴엔 이루 말할수 없는 비애가 어려있었다.

강조가 말하는 임금과 엇났다 하는것은 은천이 임금의 분부를 따르지 않아 임금의 노여움을 산 일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어제그제 련 이틀째 은천은 임금으로부터 거란왕에게 보내는 축서를 쓰라는대로 쓰지 않고 버티기를 하다가 종시 된꾸중을 듣고말았다.

거란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이 들고갈 임금의 축하편지를 쓰라는 어명을 받은 은천은 그 일이 내키지 않아 첫날은 온종일 붓방아만 찧다말았고 두번째 날에는 쓴것마저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욕을 먹었다.

도대체 내키지 않는 일을 어떻게 억지다짐으로 꾸며댄단 말인가?

은천은 임금의 소행이 여간 불만스럽지 않았다.

아무리 외교상전례를 따르는것이라 해도 싫은것은 싫은것이다.

임금은 등극후 두달만에 합문사를 거란에 보내여 자기가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통고하였다. 거란왕은 고려의 새 임금이 앞서 임금들과는 달리 자기 나라를 대하는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량순하다는 느낌이 들어 반신반의하다가 달포후에 목종의 생일을 계기로 야률적렬이란 장수를 보내여 축하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려와 거란의 왕들사이 관계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수 없었다. 서로간에 축하서신이 오고가며 언제 싸웠던가싶게 우의가 무르녹는 판국이 조성된것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우려하였으나 일부 간신들은 태평세월이 올 징조라며 극구 찬양하는 추태까지 부리였다.

거란의 본심을 모르지 않을진대 일신의 안일과 향락만을 추구하여 덮어놓고 현명하다 추어대는 간신들의 그 꼴이란 눈 뜨고 보아주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조정안팎을 통털어 누구 하나 이를 그르다, 지나치다 간언하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우질 않았다.

앞서 거란왕 생일축하서신도 그러했다. 거란왕이 먼저 고려왕의 생일을 축하하였으니 맞대응하는것이라 축잡힐 일은 아니라 하겠지만 글줄의 모양새에서야 어찌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올려섬기는 투로 하여야 하겠는가. 은천은 이런 생각에서 서로가 동등함을 시종 강조한것인데 그런 표현이 임금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아, 서희대감이 계셨더라면 이런 꼴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것인데…)

은천은 서희가 그리워났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두루 주위를 살펴보는 은천의 눈에 얼핏 강조가 띄였다.

거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가는 그가 왜 이런 꼴을 보고도 묵묵부답인가? 새 임금이 중추원사로 가까이 불러들이니 그게 고마와서 할 말도 아니하는 시라소니가 되고만것인가? 강조가 그 드센 배짱을 꺼내서 당반우에 올려놓고만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중에 발볌발볌 중추원으로 찾아가본것인데 강조는 모르쇠를 치며 업무에 태만이니 뭐니 하며 임금을 편들어 훈계가 랑자하다.

에익, 너마저 그 꼴이니 판은 쉬여진 판이다, 퉤! 하고 속으로 침을 뱉으며 붙잡는 강조를 뿌리치고 아예 궁성밖을 나와버린게 엊그제 일이였다.

그런데 뭔가 죄스러운 구석이 느껴졌는지 조반상을 물리기 바쁘게 강조가 찾아온것이였다.

《강시랑! 어서 일어서시오. 나와 함께 갑시다. 그러다 밥통 떨어지겠소.》

강조의 시까스르는 소리에 은천은 벌컥 화를 내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 밥통을 내놓으려던 참이였소. 사람이 없는것도 아닌데, 흥!》

은천은 머리를 외로 돌리며 코웃음쳤다.

《페하께서 찾으시오. 례부가 지금 최시랑 혼자서 여간 볶이우지 않는가보오.》

최시랑이란 또 한명의 례부시랑을 말한다. 시랑은 각 부에 두명씩 있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이 오죽 많아서요. 다른 사람을 앉히라 하시오이다. 난 재주도 없거니와 이제는 몸도 여의치 않아서 아니되겠소이다. 부담만 끼칠바에는 미리감치 물러서는것이오이다.》

은천은 그냥 왼새끼를 꼬았다.

《강시랑! 난 뭐 맘이 편해서 이 모양을 떠는줄 아오? 그대 말마따나 거란의 삽살개란 욕을 먹으면서 말이요.》

강조의 어조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어리신 페하께서 나를 믿고 나라군사를 맡겼는데… 자네도 그렇지, 페하께서 심지가 나약하다 판단했으면 어떻게든 배심을 보태드릴 생각을 해야지 덮어놓고 막무가내로 꽁무니를 사릴 생각부터 하면 나라는 어떻게 되는것이오? 강시랑!》

그 말에 은천은 흠칫했다.

나라일, 조정일을 보좌하라고 국록을 타먹고 사는 내가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나라위해 한몸 바치겠다 맹약하고 나선 이 길에서 비위에 조금 거슬린다 해서 이런 무례한 처신을 하고있다는게 얼마나 되지 못한짓인가.

돌아가신 부모님이 이 일을 아셨다면… 그리고 나를 믿고 이끌어준 최지몽원로와 최승로 그리고 서희형님이 이런 나를 보았다면…

은천은 소스라쳐 일어섰다.

(이 사람도 대수 볼 사람이 아니다.)

은천은 강조의 속내를 알고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강조의 말이 옳았던것이다.

임금이라고 어찌 만사형통이랴. 더우기 새 임금은 아직 성년의 나이도 아니지 않는가. 세상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임금으로서는 이런저런 말들에 쉽게 기울어질수도 있는것 아닌가. 머리 큰것들이 수두룩해가지고 그른소리는 밀막아버리고 바른소리만 가려듣도록 페하를 보좌해드릴 생각은 아니하고 이 무슨 죄된짓이냐!

은천은 부지불식간에 자책감에 휩싸이고말았다.

《중추사나리! 내 생각이 짧았던듯 하오이다.》

《강시랑! 강시랑이 물러서면 아니되오. 지금 조정의 뒤안속을 좀 보오. 무슨 꼴이 되여가는가! 뭐 에돌것 있소? 천추태후(헌애왕후 황보씨)가 지금 조정을 이 모양 만든것 아니요? 이게 난사란 말이요.》

강조는 녀종이 들여온 보리차를 꿀꺽 마셔버리고 말을 이었다.

《쥐새끼같은 김치양이 조정의 기둥뿌리를 뽑으려 하는 판이 되였으니… 어이구, 이런 꼴을 보고도 뻐꾹소리 한마디 못하고있는 강조 이놈아, 너 지금 살았냐 죽었냐!》

방바닥을 내리치는 강조를 바라보는 은천의 마음은 여간 착잡한것이 아니였다.

김치양이란 임금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외사촌오래비간이 되는자이다.

경종임금(고려 제5대임금)의 셋째비였던 천추태후는 대종(태조 왕건의 넷째아들 왕욱)의 딸로서 왕송을 낳아 기르다가 성종 9년에 그가 개령군(태자)으로 봉하여지자 안하무인으로 처신을 그르치던 나머지 자기의 외사촌오래비인 김치양과 치정관계를 가지는데 이르렀다.

김치양은 성격이 간교하고 품행이 문란한자로서 가짜중이 되여 머리를 깎고서 천추궁에 드나들며 천추태후를 릉욕하였다.

천추궁이란 죽은 경종이 생존시에 들어있던 침전으로서 그가 죽은 후 헌애왕후가 그냥 눌러있던 별궁이였다. 임금의 어머니를 천추태후라 부르는것도 바로 이 천추궁에 있는 태후라 해서 붙여진것이였다.

이 천추궁에서 치양과의 간통사실이 세상에 드러나자 당시 임금이였던 성종은 대노하여 치양을 먼 바다섬으로 귀양을 보내버렸었다.

그러하였던 치양이 왕송의 등극과 더불어 살 때를 만났다.

천추태후는 제 아들이 임금이 되자 즉시 치양을 돌아오게 하여 처음부터 큰 벼슬을 련이어 내리게 하였다.

첫바람에 합문통사 사인으로 임금의 조회의식을 비롯한 궁중례식때 임금의 어명을 되받아 소리쳐내리는 노란자위를 차지하게 하였다가 한해 지나서는 우복야 겸 판삼사사로 세등급이나 뛰여올라 정2품의 대신반렬에 올려세웠다. 우복야란 상서령 다음가는 품계로서 상서성의 두번째 자리요 나라행정집행관리로서는 말로는 두번째라 하나 실제상으로는 일인자였다.

상서령이란 자리는 대개 왕족의 나이든 로인들이 명함으로나 가지고 소일거리삼아 차지하고있는 상징적인 자리였기때문이였다.

판삼사사라는 자리도 상서성의 여섯개 부서장인 판사들을 포함하여 일체 관리들의 임면을 주관하는 권력의 핵심자리였다.

이쯤 되는 자리를 타고앉아 조정의 실권을 틀어쥔 꼴이 되였으니 그의 심복들로 요직들이 메꿔지리란건 불보듯 자명한 일이였다. 든것없이 발라맞추기에만 능한 요사한 무리들이 궁중에 끓이게 된것은 물론이요 그자신이 300여칸이나 되는 대궐을 지어놓고 하늘아, 저리 비켜라 큰소리치며 삿대질이 랑자하여 어전의 숨소리마저 쥐구멍을 찾는 지경에 이르렀음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였으니 은천이 어찌 대궐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을수 있으랴.

하지만 강조의 말마따나 그만큼 조정에서 도를 닦은 머리 큰 존재로서 흔들리는 대궐기둥을 어떻게든 뻗쳐야 하였다.

《중추사나리! 군사만은 그자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주사이다. 나라가 죽고 사는 길이 중추사나리에게 달렸다 해서 무리한 말이 아니로소이다.》

은천은 절절히 부르짖었다.

《걱정마오. 강조가 살아있는 한 그 점에 한해선 안심해도 되오. 자, 어서 갑시다. 물러서면 안되오, 절대로 아니되오!》

강조는 턱수염을 부르르 떨며 은천을 재촉했다.

《그대는 쓰다 달다 다른 말 마시고 그저 제자리에 앉아만 있으시오. 나를 동무해달라 그 소리요. 소리는 내가 낼테니!》

둘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초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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