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상 편
9. 변방을 다지다
2
995년에 들어와서도 고려는 북방요새구축에 여전히 몰두하였다.
서희는 설을 쇠고나서 며칠 안 있어 다시금 압록강으로 올라갔다. 수만의 군사를 기동시켜 그곳 지형에 숙달시키고 조련을 하게 하였고 안의, 흥화 두 진에 성을 보강하게 하였다.
이해 봄, 은천은 임금의 허가를 받고 서희가 가있는 압록강계선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서희와 동무하여 성축조일을 도왔고 지형을 파악하였다. 서희가 손수 작성한 병력배치도를 펼쳐놓고 거란군의 앞으로의 공격에 대처한 가상모의작전안을 짜보기도 하였다.
달포가 지나 서희와 헤여진 은천은 돌아오는 길에 역참과 봉수대들을 점검하면서 겸해서 기동로상태를 료해하고 병부에 대책하였다. 그리고 안북부성에 들려 그곳 군사들로부터 거란군과 싸우던 가지가지의 무훈담도 들었고 태조때에 터를 닦은 운남(녕변), 성주(성천), 청새진(희천), 구주(구성) 등의 성들을 들려보며 선대조상들의 자취를 더듬기도 하였다.
은천이 평양성에 들어선것은 서희와 헤여져 보름이 지난 3월 중순이였다.
은천은 이곳에서 명성만 들어온 맹장 대도수와 상면하였다. 대도수는 평양성 방어군사를 책임진 장수(장군-종3품)로 임명되여있었다. 그와 함께 먼저 장대재 남쪽둔덕에 세워져있는 단군과 주몽의 사당(지금의 숭령전)을 찾아 향을 피워올리고난 뒤 평양성 사방 여덟곳의 지휘처들을 돌아보고 평양8경의 주요명소들도 겸해서 유람하였다.
둘은 이미전에 서로 상대의 명함들을 익히 새겨두고있던지라 대번에 구면지기로 통했다.
《례부시랑께 한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사온데 들어주시겠소이까?》
상면 첫날 저녁 술자리를 빌어 하는 대도수의 청인즉은 안융진싸움에서 전사한 자기 부하 500명의 유가족에 대한 문제였다.
《그간에 조정에서는 거란군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희생된 안융진 순국렬사 500명을 포상하도록 조처하고 그들의 위패를 안융진성사당에 안치하고 제사지내도록 하여주었소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 순국자들의 유가족들에게 자영경작지를 주어 생계를 돕도록 제의한것이 아직 결실이 없사와 속히 조처해주도록 주선해주셨으면 하오이다.》
《그런 미결건이 있었소이까?》
《군사들의 가족들은 하등으로 매겨서 가족당 4결(1결은 알곡으로 100짐 정도)을 주도록 했고 군교들은 중등으로 매겨 8결로, 랑장 유방을 상등으로 매겨 20결을 주기로 요청하였사온데 군교들만 8결로 주자하고는 그마저 아직 실행하지 않고있사옵니다. 지금까지 군사들에겐 자영지를 준적이 없었다며 아예 잘라버리려는듯 하온데…》
《그들의 순국은 여느때와는 다른것이옵니다. 이번 거란군침입을 막아내는데서 그들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지 않았던들 승리를 이루어낼수 있었겠소이까? 종래의 규례만을 따지면서 순국렬사들을 외면하다니요. 일이 안되였소이다. 페하께서 일단 포상을 하라 하셨으면 하여야지 무슨 층하를 두면서 사람가림을 한단 말이외까. 이 일은 상서 공부의 소임이라 내 꼭 페하께 다시 상주해서 풀어드리겠소이다.》
《고맙소이다. 희생자가족들의 거처지가 대체로 서경이북지역이라 호족들의 땅 말고도 국유지는 얼마든지 있는것이고 황무지라도 주기만 하면 자비로 개간할수 있사오니 조정에서 분부만 내리면 될 일이옵니다.》
《내 꼭 조처해드리리다. 헌데 랑장 유방에게 20결이면 좀 작지 않소이까?》
《그의 선대분인 3중대광 유금필이 평주와 개경주변에 식읍으로 받은 세습지가 적지 않으므로 그 정도로 해도 일없을것이오이다. 문제는 땅이 없는 군사들의 가족들에게 자기 땅이 있게 하자는 목적이올시다.》
《알만 하오이다.》
《하지만 유방에게 할당한 땅을 더 늘이자는 의향이면 난 반대없소이다. 그가 살아있으면 정말 한몫 단단히 할수 있는건데… 아쉽기 그지없소이다.
순국한 500명 부하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잠이 오지 않소이다.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소이다!》
대도수는 눈물이 글썽해지며 목이 메여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대장수! 그만 고정하시오.》
은천도 목이 메였다.
《아, 거란!… 어디서 불쑥 나타난 이 짐승같은 족속들로 해서 우리 발해가 멸하고 겨레가 년년이 수난을 당해야 하니… 이가 갈려 참을수가 없소이다.》
이그러진 대도수의 안면근육이 푸들푸들 뛰였다.
정말 그랬다. 거란, 이 족속들은 왜 하필이면 드넓은 본래의 땅을 떠나서 부디 우리 조상이 물려준 이 땅을 한사코 먹자고 하는가.
이 족속들은 본시 돌궐족, 선비족, 몽골족보다도 더 먼곳, 만리밖 곤륜산너머 서쪽끝에서 떠돌이하던 야인무리라 하였었다. 제 족속들이 하던 풍속대로 드넓은 초원과 산야에서 양무리나 좇으며 살아도 될 일이언만. …
하기는 같은 모양의 뜨내기종족들에게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면서 본래의 거처지에서 쫓겨난 처지이니 해뜨는 동쪽을 바라고 생존을 위해 칼부림 하나로 이날 이때껏 말발굽을 울려온 이 족속들에게 무슨 사리와 분별이 있으며 인정의 여유가 있으랴. 무지막지한 이 족속들에게 하늘마저 잠시잠간 실수하였는지 얼떨결에 운이 틔운 꼴이라 그만에야 갑작스레 용을 쓰더니만 좌충우돌끝에 돌궐, 선비, 몽골족은 코흘리개로 보는 정도요 지금은 거국 송과 자웅을 겨루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쯤 되고나니 이 족속들은 이제는 감히 고려를 내려다보며 함부로 해라를 붙여대고있는것이였다. 보다싶이 거덜이 날 정도로 얻어맞고도 아직 무서워하는 기색이란 찾아볼래야 볼수가 없다.
《두고보시오만… 이 대도수 하늘을 우러러 맹세컨대 저 거란오랑캐들과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말것이요.》
《저도 같은 생각이로소이다. 거란은 말로써는 해결이 되지 않을 존재로소이다. 처방은 오직 하나 주먹으로 대하는것이요.》
은천의 목소리는 비장하였다.
《내 시랑어른께 비밀을 하나 말하리다.》
대도수는 조금 진정이 되는듯 화제를 바꾸었다.
《무슨 비밀이오이까?》
은천이 귀를 강구자 대도수는 히죽이 웃으며 《지나가는 말로 들으시오이다. 새겨듣지는 마시고…》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저 거란땅에 내 7, 8촌 되는 장수들이 여럿 있소이다.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사오나 그들이 거란군사로 있다 그 말이오이다. 발해의 천적인 거란군에 들어가 그것도 벼슬까지 한다는게 이상하지 않소이까?》
《딴은 그렇군요. 역적으로 봐야 하는것 아닐가요?》
《그렇게만 볼것이 아니라서 하는 말이외다. 나하고 8촌계렬이 되는 대연정과 대연림은 우리 발해태조 대조영의 11대 직계손자벌이 되는데 이들이 조상의 넋을 그렇게 저버릴수 있을가요?》
《어쨌든 지금은 적국에 복무하지 않소이까? 무슨 벼슬을 한다 하더이까?》
《대연림은 동경 발해군이란 부대의 수장 다음자리를 차지하고있다 하더이다. 그의 아우 대연정은 종사관격으로 있고요.》
《동경 발해군이라면 거란 료양성(동경) 수비군사를 말하는것이오이까?》
《시랑께서도 알고계시는군요. 옳소이다. 발해인 후손들로만 무어진 부대지요. 거란이 이태전에 우리에게 혼쭐이 난 뒤에 쫓겨가서 새롭게 하는짓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이를테면 이족포섭책이라고 할는지. 발해인들을 벼슬을 주어 끌어당기고있는것이지요. 그놈들은 귀순해온 몇안되는 송나라관리들도 쓸 놈, 못쓸 놈 가리지 않고 매모조리 말단관직을 주어 코를 꿰놓고있지요. 한족과 고려족을 적극 포섭한다는걸 시위하는 꼴이지요. 유독 녀진족만은 죽기로 배척하고있지오만… 녀진인은 저희들 거란인들처럼 야인들이여서 통하는 구석이 더 많을것인데도 이상하게 그들과는 더 상극으로 엇나가고 발해인들은 그러안는쪽을 택하고있지요. 거란은 나라를 세운 초기에 벌써 발해인들을 료동지역에 대대적으로 이동정착시키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우리 발해사람들이 거란의 회유책에 넘어간것으로 보는것이요?》
《현실이 말해주고있지 않소이까. 거란은 이전에는 자기 상비군에 발해사람을 절대로 끼우지 않았소이다. 발해인들속에 병쟁기를 들려주면 저희들을 칠가보아 두려워서였지요. 오직 농사일과 장공일만 하게 한거지요. 그런데 이제는 군사로 써먹으려 하고있소그려. 세월이 좀 지나니까 이제는 자기 사람이 다된것으로 알고있는지…》
《그렇다면 이건 정말이지 방관할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거란이 재차 침공해올 때에 발해인들까지 달고오지 않는다 장담할수 없는 일 아닌가요?
그렇게 되는 경우 동족끼리 싸우는 비극이 빚어질수도 있지 않겠소?》
《그게 될번이나 한 일인가 말이오이다.》
《그걸 막을 방도는 오직 하나 발해인들
《나는 그런 경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하고 다만 한가지…》
여기까지 말하고 대도수는 잠시 궁싯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한가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 동경발해군을 밑천으로 해서 발해군사를 확장한 다음 거란군과 한판 붙어보자는것이요.》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요?》
《반란뿐이겠소이까? 료동에 발해국을 재건하는거지요.》
《그렇게 되면 작히나 좋은 일이겠소이까. 헌데 력량대비가 될는지요. 료하일대의 발해인을 다 모아도 삼사십만밖에 안되겠는데 그가운데서 군사가 나와야 얼마나 나오겠소이까. 10만은 바랄수 없는것이고 5만정도 나오겠는데 거란군은 그의 20배는 될것인즉…》
《우리 고려군이 있지 않소이까.》
《그래도 모자랍니다. 대비가 안되옵니다. 대비가 되는 일이면 우리 고려가 이태전 그해에 거란군을 압록수까지 몰아내고말았겠소이까. 그 기세로 연경까지 들이쳐 거란을 아예 타고앉아버렸을테지요.》
《나는 발해군이 거란전체를 먹자는게 아니고 료동을 되찾자는것이지요. 거란의 동경땅을 빼앗아내자는겁니다. 일단 타고앉기만 하면 죽기로 지켜낼수가 있을가본데요.》
《불가능한 일로는 볼수 없는것이나 그러하자면 상당한품을 들여야 할것이지요. 준비를 품놓고 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바로는 그들 대연림과 대연정에게 손을 뻗쳐 한 5년이나 10년쯤 힘을 키우도록 도와준 후에 기회를 보아 들고일어나도록 하자는것이지요.》
《진뜻은 발해를 수복하자는것인데… 우선 그 뜻과 기개에 감복하지 않을수 없소이다.》
《생각은 그지없이 장하나 가당치 아니하다 그 말씀이시군요.》
《현재로서는 그러하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되여야 할 일인것만은 사실이라 그 말이오이다.》
《소원이오이다. 내 나라 발해를 다시 일으켜세우는것이… 그리고는 우리 고려와 합쳐서 더 큰 고려국을 보란듯이 일떠세운다 이겁니다.》
《일이 그렇게 되도록 하자고 해도 당장은 거란의 고려침공을 막는것이 순서입니다. 고려가 있어야 발해재건도 가능하니까요.》
《옳은 말이로소이다. 결국은 꿈 한바탕 꾸고 깨여난셈이군요.》
《하지만 그 꿈은 싫지 않은 꿈이오이다. 반드시 현실로 이어져야 할 꿈이 아니오이까.》
《더 말할 여지가 있소이까? 난 이 꿈을 계속 꾸렵니다. 이제 두고보시오. 내 이 꿈을 꼭 실현하고마는걸…》
《나도 그 꿈을 같이 꾸겠소이다. 힘자라는껏 돕겠소이다.》
《그래야 하구말구요.》
둘은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대도수의 이 꿈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였다. 종당에는 그 꿈을 실현코저 외곬을 타다가 력사에 본의 아닌 흑점을 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