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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상 편

 

8. 거란의 1차침공을 물리치다

 

6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두번째 닭울음소리가 먼 농가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바로 그때에 서희의 군막으로 말 한필이 달려와 멎었다.

《중군사나으리께 아뢰오!》

《무슨 일이냐?》

《안북부성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였소이다.》

《그렇다?! 상군사나리께선 뭐라 하시더냐?》

서희는 박량유의 전령에게 급히 물었다.

《안북부쪽으로 주의를 끌려는 속내가 뻔하니 계획대로 밀고나가자 하셨소이다.》

《알았다고 전해올려라.》

전령을 되돌려보낸 서희는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이때 군막자락을 젖히며 대도수가 들어섰다.

《중군사나리!》

《아니 중랑장, 왜 벌써 일어났소?》

《이젠 다 회복되였소이다.》

《무슨 소릴, 상처가 아물려면 아직 멀었는데.》

《다행히 뼈는 일없소이다. 자, 보시오이다.》

대도수는 팔과 다리를 마구 휘저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 그러오이다. 지금 성루에… 우리 안융진성루에 거란 수장기가 꽂혀있다 하오이다.》

《거란 수장기? 소손녕의 지휘기 말이요?》

《그렇소이다.》

《아니…》 서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가 여기 안융진에 나오다니, 그럴수 없소.》

《그야 물론 그렇지요. 우릴 야료하느라 그러는것이겠지요.》

《놀림을 당하는게 분하다 그거요?》

《그렇소이다. 내가 그제 적장의 지휘기를 끌어내려 찢어버렸는데… 이번엔 수장기를 꽂아놓고 약을 올리고있지 않소이까.》

《그까짓, 이제 곧 진격해나갈것인데 무얼 그러오? 제꺽 성을 차지하고 끌어내리면 그만인걸 가지고.》

《좀 있으면 날이 밝겠는데… 혹여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가보아 그러오이다.》

《그럴수 있겠소.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오십명만 주시오이다. 제가 적 수장기를 끌어내리고 나의 지휘기를 날리겠소이다.》

《적들도 저희들 수장기를 지키자고 할터인데…》

《어림없소이다. 내 지휘기가 꽂혀야 할 성인데… 일각이 새롭소이다. 어서 승낙해주사이다.》

《좋소이다. 하지만 힘에 부칠것이요. 기발을 꽂기도 힘들것이지만 지켜내기는 더우기 헐치 않을것이요.》

《걱정마소이다.》

《성루에 우리 기발이 날리면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는데도 좋은 보탬이 될것이요.》

서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철기군에서 백명을 솎아가시오. 싸움이 길어지더라도 지탱해야 하오. 무사하기 바라오.》

《알겠소이다.》

대도수는 벌씬 웃어보이고는 되돌아나갔다.

날이 푸름푸름 밝아올무렵에 대도수는 휘하군사 백명을 이끌고 안융진성루에로 불의에 기습해들어갔다. 결국 이날 싸움은 대도수의 적 군기습격전으로 시작을 뗀셈이 되였다.

안융진성을 가운데 두고 각기 좌우로 5리가량 벌려선 량측군사들은 아직 공격명령이 내리지 않았는데 성루쪽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함성소리가 터져오르자 일제히 그쪽에 시선을 모았다.

성으로 기습해들어가는 고려군은 대도수를 가운데 두고 다섯겹으로 둘러싼 원형대형을 짓고있었다. 대도수의 앞뒤좌우에는 방패를 든 호위군사들이 틈없이 둘러섰고 북과 바라, 대각을 든 취타수들이 군악을 울리며 기세를 올렸다.

와!-

함성소리와 함께 기습조는 성루우로 일제히 돌진해 올라갔다.

이어서 한동안 적아가 뒤섞여 돌아가더니 마침내 적 수장기가 기울어지고 고려군 지휘기가 꽂혀졌다. 적 수장기는 다시 솟구치며 이리 기울, 저리 기울 바람맞은 갈대처럼 기우뚱거리다가 성루아래로 밀려내려가고말았다.

와!-

적과 서로 대치하고있는 고려군서렬속에서 함성이 터져올랐다.

둥 두둥둥둥-

고려군쪽에서 먼저 북을 울리며 거란군서렬을 짓조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란군도 만만치 않았다. 성루아래로 밀려내려갔던 적장기가 다시금 휘우뚱거리며 성루우를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보정도 밀려났던 거란군서렬도 다시금 기세를 올리며 맞받아나왔다.

하지만 적 수장기는 성루마루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계단어방에서 안깐힘을 쓰고있었다.

고려군서렬뒤에서 다시한번 북소리가 울려나오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고려군은 다시금 전진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더 나오지 못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안융진성루우에는 여전히 량쪽의 군기가 날리고있었다. 하지만 고려군기는 성루우에서, 거란군기는 성벽 중허리에서 날리고있었다. 고려군은 우에서 굽어보고 거란군은 밑에서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고려군이 우세를 보이고있는것이 방불하게 펼쳐지고있었다.

그러나 거란군은 기가 죽지 않고있었다.

5백보정도까지 뒤로 밀리웠던 거란군은 조금 주춤거리는 모양이더니 이번엔 밀집방진대형을 지어 공격해나왔다. 송나라와 싸울 때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전법이였다.

이 전법은 공성전에서는 쓰지 못하고 평지전에서 주로 쓰는것인데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이 빼곡이 들어찬 네모진 대형으로 상대측을 밀고나가는 방식이였다.

대형의 너비는 작게는 오백명 정도로, 크게는 천 내지 천오백명정도로 들어선 규모인데 종심은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깊게 정하였다. 대체로 정면보다 깊이가 더 큰 대형이였다. 앞에 군사가 쓰러져도 뒤에서 즉시 메꾸어치우면서 네모진 덩어리로 상대측을 짓밟아버리는 위압적인 대형이였다. 머리수가 많은 적들로서는 마침 싸움판도 벌판이겠다 얼마든지 적용할수 있는 방식이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그에 조금도 위압되지 않고있었다.

서희의 신호에 따라(이무렵에 서희는 전장에 직접 나와 지휘하였다.) 고려군은 쇠붙이로 온몸을 감싼 철기군서렬을 투입하였다.

방진대형의 거란군과 부딪친 고려 철기군은 전진하지는 않고 버티고 선채로 방패를 이어붙여 인공철벽을 만들어놓았다. 그뒤에서 고려보군은 철기군의 다리와 허리사이로 장창을 내뻗쳐 창질로 적군을 찔러댔다. 그러면 철기군은 적병들이 쓰러지는 족족 시체를 밟고 올라서며 한걸음두걸음 전진해나아갔다.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속에 고려군이 느릿느릿 전진을 계속하자 거란군은 고려 철기군뒤에 있는 보군을 향해 화살질을 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방진대형의 중간중간에 락타들을 끼워놓았는데 적병들은 락타우에서 고려군 뒤서렬에 대고 화살질을 해대고있었다.

락타우에서 쏘아대는 눈먼 화살에 고려군사들이 하나, 둘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고려군은 거차(반발적으로 던지게 되여있는 수레)를 끌고나와 거란군대형안에 끼운 락타들을 겨누어 불붙는 기름단지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기름불을 들쓴 락타들이 혼뜨검이 나서 들고뛰는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적군대형이 얼마간씩 비칠거리군 하였다.

하지만 워낙 대형이 큰데다가 머리수를 믿고 밀어붙이는 적군의 진격은 멎어설줄 몰랐다.

어느새 해는 하늘중천에 떠서 땅우에서 벌어지고있는 거대한 무리의 끈질긴 밀고당기기를 기이한듯 내려다보고있었다.

안융진성루우에서는 더는 북소리도 함성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량측의 지휘기가 그냥 날리고있는것으로 보아 아직 그쪽에서도 결판이 나지 않고있는것을 짐작할수 있을뿐이였다. 혹은 다 죽고 기발들만 꽂혀있는것은 아닌지. …

하지만 그 시각 안융진성루우에서는 대도수를 위시한 고려군결사대가 죽지 않고 살아서 기적적으로 버텨내고있었다.

거란군지휘기 호위군사들도 다 죽지 않고있었다. 죽지 않았을뿐아니라 력량을 보강하면서 아득바득 톺아오르기를 거듭하고있었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땅우에서가 아니라 시체더미우에서 벌어지고있었다. 쌓이고쌓인 시체가 열겹을 넘고있었다.

대도수를 옹위하고있는 고려군은 방패로 촘촘히 아래우를 둘러막고있어서 마치 거대한 거부기 한마리가 성루우에 올라가앉아있는 형국이였다. 거부기잔등 한가운데에 대도수의 지휘기가 솟구쳐올라서 갈가리 찢겨진 기발자락을 여전히 펄럭이고있었다.

거란군사들은 숨이 턱에 닿아 올라와서는 거부기잔등 한귀때기를 칼이나 창으로 쑤셔대다가는 방패사이로 맞받아 내찌르는 고려군의 창끝에 찔리워 성아래로 굴러내려가군 하였다.

한편 서희는 서켠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며 가슴을 조이고있었다. 적이 차지하고있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맵짠 바람이 고려군사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치고있었다. 정오가 지나서부터 바람세가 더 세차지고있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는 가운데 드디여 적진쪽 멀리에서 화염이 솟구쳐오르기 시작하였다. 지난밤 자정무렵에 적진너머로 떠나보낸 화공부대가 일을 시작한것이였다.

화염은 점점 크게 타래쳐오르며 때마침 거세여진 서북풍을 타고 적군의 뒤를 무섭게 덮쳐들었다.

순간 적군대형 뒤쪽에서 괴상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거란군대형의 뒤쪽이 갈가마귀떼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드디여 온 대형이 수라장으로 되여버렸다.

화염은 하늘땅을 뒤덮으며 무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늘땅은 시뻘건 불천지로 되여버렸다. 불길은 우우 소리를 내며 적군의 머리우로 타번져왔다.

서희의 신호에 따라 징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에 고려군은 량옆으로 좌악- 갈라지며 불길을 에돌아 기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렬가운데에 있던 고려군은 그 자리에 엎드려 불길을 지나보낼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량측이 다 갈팡질팡하는듯이 보였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불길이 맞받아오리라는것을 알고있는 고려군은 당황함이 없이 일부는 엎드리고 량익측군사들은 옆으로 우회하여 적군대형을 포위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불세례를 전혀 예견하지 못하였던 거란군은 대응책은커녕 혼이 쑥 빠져 동서남북을 가리지조차 못하였다.

처음에 거란군은 뒤에서 불길이 덮쳐들자 앞쪽으로 경황없이 내달렸다. 허나 걸음보다 빠른 불길을 피할리 만무여서 불세례를 고스란히 들쓰고서 초벌 얼이 나간채 쓰러지며 뒹굴다가 불이 일단 지나가자 이번엔 저희들이 차지했던쪽으로 본능적으로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물론 불에 타죽고 남은 놈들이였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놈들도 화상으로 온전한 구실을 할 놈이란 별로 없었다. 뛰는 놈은 그래도 운수가 좋은것들이고 뛸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버둥거리는 놈들이 더 많았다. 이런 놈들은 고려군사들의 칼날을 어김없이 선사받았다.

둥 두둥 둥둥둥둥-

추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고려군은 도망치는 거란군을 삼대베듯 쓰러뜨리며 거의 10리길을 뒤쫓아갔다.

퇴각하는 적군을 화공습격대가 기다리고있다가 개패듯 두들겨팼다.

새까맣게 타번져진 들판우에 적의 시체가 한벌 쭈욱 깔렸다.

안융진성 벌판에 들이밀었던 적의 태반이 무주고혼이 되고말았다.

이쯤 되면 소손녕이 아니라 그 하내비라도 두손 들고 나앉지 않을수 없을것이였다.

서희는 징을 울려 추격을 멈추게 하고 전장을 거두게 했다.

적의 병쟁기는 모조리 회수하여 쓸만한것을 가린 뒤 나머지는 드문드문 무져놓고 불을 지르게 하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떼들이 불무지사이로 날아예며 먹이를 쫏느라 분주히 돌아갔다.

서희는 말을 달려 안융진성루우로 달려갔다.

대도수이하 수십명의 군사들은 싸우던 그 자세로 성루우에 굳어져있었다.

《중랑장, 살아있소? 살아있는가?》

서희가 소리치자 거부기갑속에서 갈린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중군사나리! 우리에게 밥을… 먹을걸 좀 주소이다.》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제길… 배고프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이런 인사불성놈들을 보았나. 어서 갑을 벗고 얼굴을 내여밀지 못할가.》

서희는 목이 메여올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뒤따라온 군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이놈들을 몽땅 오라를 지워가지고 가서 볼기를… 밥볼기를 쳐주자!》

군사들이 시체더미를 밟고올라가 대도수네 군사들의 굳어진 팔다리를 펴고 방패를 떼여냈다. 한명, 한명 신고를 해서야 일으켜세울수 있었다.

대도수는 술을 사발들이로 마시고서야 부르르 수염발을 털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중군사나리! 분부대로 적장기를 밀어내고 고려군기를 꽂았소이다.》

《내 다 보고있었네, 보고있었어! 우리 군사들모두가 자네의 지휘기를 보면서 힘을 내여 싸워 이겼네.》

서희는 대도수를 얼싸안았다.

《우리가 분명 이겼지오다?!》

대도수의 눈가에 물기가 번쩍이였다.

《이기고말고. 자, 보게나. 우리가 이긴걸… 대승일세, 대승이야!》

서희는 팔을 쭈욱 뻗쳐 전장을 가리켰다.

연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전장엔 적의 시체가 한벌 쭈욱 깔리고 그우에서 고려군사들이 만세의 함성을 터치고있었다.

조반도 먹는둥마는둥하고 전투에 돌입하여 점심도 건는채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고려군은 거란침략군의 기본집단을 통쾌하게 쓸어눕혀버렸다.

수십만의 정예군을 잃은 거란군은 이제 더는 맞서 싸울 생각을 못하게 되였다.

안북부성으로 돌아온 서희는 박량유와 뜨겁게 포옹하였다.

하군사 최량이 지휘한 적 병참력량기습작전은 씨원한 결과는 맺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만한 정도의 타격으로도 적을 손들게 하는데는 큰 효과를 내였다. 적의 예비군량과 말먹이들이 적지 않게 불에 타버렸고 짐수레들도 어지간히 파괴되였다.

적장 소손녕은 더는 싸울념을 못하고 흰기를 들고 담판을 요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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