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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상 편

 

8. 거란의 1차침공을 물리치다

 

5

 

중랑장 대도수의 얼굴은 온통 피칠갑을 한채로였다. 갑옷차림은 형체만 남아있을뿐 등허리, 앞섶 할것없이 이리저리 찢겨 너덜거리고 몇개 안되는 쇠비늘이 겨우 붙어서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충혈진 눈자위에선 금시 피줄기가 뿜어져나올상싶은데 갈라터진 입술사이로 무슨 말인가 애를 쓰는 모양이나 종시 말소리는 울려나오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같은 모양의 군사 대여섯이 그를 둘러싸고 서로 의지한채 가쁜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싸움이 시작되여 사흘째 되는 날 저녁무렵이였다.

성둘레로는 적 보군이 꽉 들어차서 두세겹, 어떤 구간은 세네겹으로 진을 치고 술렁거리고있었다.

첫날 싸움에서 그토록 막대한 죽음을 내고도(첫날 죽은 적병수는 3만을 헤아렸다.) 다음날 두차례나 공격을 가하여 고려군 수비군사를 절반이나 줄여놓았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적군은 무려 네차례나 공격을 단행하여 저녁무렵에는 성을 완전히 《함락》해버렸다.

지금 적들이 성 중가운데 솟아있는 봉우리를 그냥둔채 기슭으로 밀려나있는것은 적아를 막론하고 엉켜붙어 굳어져버린 량쪽의 죽은 군사들의 시체가 세네겹으로 층층이 더미를 이루고 쌓여있어 발붙여볼 틈사리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살아남은 고려군사 일곱명은 다른 병사들이 숨이 지면서도 그대로 방패막이가 되여준 덕에 기적같이 살아남은 사람들이였다. 이들은 동료들의 시체더미속에 파묻힌채 겨우 적의 눈길을 피할수 있었다. 지쳐버린 적들도 시체더미속에 묻혀있는 이들만은 발견하지 못한채 싸움을 끝내버린것이였다.

하지만 놈들은 산등성이정점에 저들의 지휘관기를 꽂아놓는것만은 잊지 않았다. 지금 대도수는 바로 저 적의 군기를 끌어내리라고 부르짖고있었다.

《적의 군기를… 끌어내리라. 끌어내려 찢어버리라. …》

안깐힘을 다해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를 입놀림을 보고 알아차린 군사들이 하나, 둘 기발쪽으로 기여올라갔다.

대도수는 끌어내린 적기발을 이발로 물고 부욱- 찢어당기였다. 나머지 군사들도 한입씩 물고서 두발을 뻗치며, 몸을 뒤채며 있는 힘껏 물어당기였다.

한참동안 모지름을 써서야 적의 군기는 갈가리 찢겨져나갔다.

그런 뒤에 대도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우리는 군령을 집행하였다. 분부대로… 사흘을 지켜내고야말았구나. 장하다, 군사들…》

그리고는 스르르 두눈을 감아버렸다.

《중랑장나리!…》

《눈을 뜨소이다. 나으리께서 이러시면 우린 어떡하나이까!》

군사들은 대도수를 그러안고 몸부림을 쳤다.

어느새 주위는 먹물을 뿌린듯 캄캄나락으로 되여버렸다.

적들은 사방에 불을 피워놓고 뭔가 끓이느라 분주탕을 피우며 돌아갔다. 싸움은 저들이 이긴것으로 여기고있는지라 우선 주린 배를 채우고볼 심산인것 같았다.

《도리깨야, 너 명부는 잘 간수하였느냐?…》

다시금 눈을 뜬 대도수는 가까스로 입을 놀려 도리깨라는 별호를 가진 군사를 찾았다.

《잘 간수하고있소이다, 나으리!》

그 군사가 도리깨란 별호를 가진것은 그가 적을 잡을 때 철장을 잘 쓰기때문이였다. 편곤명수인 그는 철장대를 휘두르는것이 장끼였다. 길이가 아홉자반 되고 무게가 무려 스물세근이 나가는 무거운 철장대를 그는 지팡막대 다루듯 가볍게 휘둘러대여 적병들을 콩단 두들기듯 패서 죽이는 특기를 소유하고있었다.

그에게 대도수는 안융진수비군사의 명부를 간수하게 했던것이다.

부하들을 친동기처럼 아끼는데 버릇되여있는 그는 이번 싸움에서 수하군사들을 거의다 잃어버린것을 여간만 통분해하지 않고있는것이였다.

《견뎌내야 한다. 인츰 지원이 올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자. 절대로 자면 안된다. 이 추위에 빈속으로 잠들어버리면 영낙없이 죽는다. 다들 알아들었느냐?》

《알아들었소이다, 중랑장나으리!》

군사들은 입속말로 속삭이며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중군사 서희나리는 반드시 지원을 보내올것이다. 견지하자, 견지하…》

대도수는 말끝을 맺지 못한채 다시금 눈을 감아버렸다.

와!-

갑자기 마른 하늘에 생벼락치듯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뒤이어 불뭉치들이 솟구쳐오르며 한무리의 기마군종대가 밀려왔다.

드디여 안북부성에서 지원군사들이 오고있는것이였다.

자정의 밤공기를 째며 병쟁기 부딪치는 소리,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성을 둘러막고있던 적군서렬의 한쪽귀때기가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적들은 캄캄야밤중에 고려증원군이 별안간 기습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있었다. 보군이 절대적인 적군은 고려기마군의 불의기습에 얼혼이 나가 갈팡질팡했다.

고려군증원부대는 삽시에 성 한쪽측면을 절반나마 감싸버렸다. 하지만 그 이상은 더 내밀지 못하고 멈추어서고말았다. 증원해온 고려군 수는 대치한 거란군의 삼할도 되나마나했다. 그 력량으로는 더이상 밀어내기 힘들었던것이다.

거란군은 성 한쪽귀때기를 떼운채로 버티기를 할수밖에 없었다.

고려증원군은 성중심인 산마루까지 가까스로 진공해들어간 뒤 중랑장 대도수를 찾아내오고는 일단 방어진을 펴는것으로 그쳐버렸다.

싸움은 날이 밝은 다음에 하는것이 서로가 다 유리하였기때문이였다.

새날이 잡혀 어둠이 가셔지는 그 순간에 싸움은 다시금 시작되였다.

고려군은 먼저 기마군으로 거란군앞서렬을 쪼각쪼각 휘저어놓은 뒤에 보군으로 백병전을 들이대였다. 같은 방법으로 두번째 서렬까지 허물어놓자 그뒤에서 마주 나오던 거란군은 허둥거리다가 뒤돌아 내빼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추격전으로 넘어갔다. 도망치는 적군의 머리우로 고려기마군의 칼날들이 춤추듯 오르내렸다.

고려군이 5백보가량 되게 추격하여 적군을 한절반 쓰러뜨린 때였다. 얼마간 거리를 두고 전개해있던 네번째 적서렬이 움씰움씰 접근해오더니 고려군과 정작 마주치는무렵에 와서 웬일인지 여러 쪼각으로 갈라져나갔다.

이놈들이 무슨 잔꾀를 쓰려는거야? 이런 생각으로 잠시 머뭇거리는 고려기마군을 마주 향해서 이번엔 거란기마군이 역습해나오기 시작했다.

이 기마군은 온밤 성을 둘러싸고있던 거란보군과는 달리 기력이 왕성했다. 안북부성쪽에 둔치고있다가 뒤늦게 이동해온 이놈들은 어지간히 맥을 뽑은 고려기마군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멈추어세워놓았다.

고려기마군은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황은 역전되였다.

이쯤 되면 고려군도 새로운 기마군을 투입해야 했으나 고려군은 예비가 없었다. 할수없이 고려군은 얼마 안되는 보군으로 기마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효과적인 대응이 못되였다. 고려군은 밀리고밀려 안융진성 뒤쪽 본래의 자리까지 와서야 거란군을 겨우 멈춰세웠다.

거란군도 더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기운이 빠지기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던것이다. 거란군은 잠시 숨을 돌리고볼 심산인것 같았다.

이 시각 거란군 괴수 소손녕의 심중은 여간 복잡한것이 아니였다. 그가 보기엔 고려군주력이 안융진으로 쏠린것이 분명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가 바란바인데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고있는것이 여간 이상스럽지 않다는데서였다.

소손녕이 고려군을 안융진성으로 끌어내오려 하는것은 공성전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기때문이였다. 고려군은 원래 조상인 고구려때부터 공성전의 능수라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성에 의거한 상대측의 방어를 깨자면 적어서 세네배의 력량은 투입해야 되는데 그것은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만 하는게 일반적인 통례였다.

거란군은 대체로 평지전에 익숙되여있어 공성전을 기본방식으로 하는 고려군과의 싸움이 여간 말째지 않았다. 봉산성에서 붙어보아 아는 사실이지만 천오백명정도의 고려군에게 거란군은 무려 만오천의 전사자를 내였다. 3만이 달라붙어 절반을 잃으면서도 성은 탈환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일시 차지했었지만 역포위해들어오는 반타격에 또다시 무수한 손실을 내고 물러서고만것이였다.

안북부성공략을 포기한것도 실은 이때문이였다. 그래서 숱한 기마군을 죽이면서도 안융진을 공격하여 그곳을 타고앉아서 잘되면 안북부를 뒤로 쳐서 포위해놓고 맥을 뽑은 뒤에 함락시키는것이고 그보다는 평지인 안융진성앞 벌판으로 고려군주력을 끌어내여 손에 익은 저들의 기마전으로 이겨보려 한것인데 고려군이 정말로 제가 바라는대로 움직여주고있었던것이다.

그까짓 기마군 3만을 잃은것은 문제가 아니였다. 기마군은 아직 10만이 있었던것이다. 그보다는 고려군이 평지로 끌려나왔다는데 있었다.

물론 안북부성도 고려땅의 일반지세로 보면 평지에 속하는 땅이였다. 하지만 그곳은 높지는 않으나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이 연줄연줄 이어져있어서 지세는 낮아도 따져놓고보면 산지라 하는게 더 정확했다.

하지만 안북부성에서 백리도 채 못되는 이곳 안융진성은 드넓은 개활지대에 외로운 봉우리 하나가 계집애 젖무덤모양으로 솟아오르다만 형국이여서 거란군이 기마공격전을 하기에는 여간 맞춤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싸워서 이길 승산이 있었다. 바라는바가 너무도 수월하게 이루어지고있는것이 수상쩍기 그지없는것이였다.

듣기에는 고려에 난다긴다하는 맹장들이 수두룩하다 하였는데 그들이 그저 몸이나 잘 놀리는 필마단창들이였단 말인가? 그럴리가 없겠는데…

소손녕은 머리를 싸쥐였다.

소손녕이 우려하는것은 다른 하나 고려군이 력량을 절반 갈라 저들의 퇴로를 완전차단하고 장기전으로 넘어가 저들의 진을 뽑아놓고 두손들게 할수도 있다는 바로 그것이였다.

하지만 소손녕이 알고있는 고려군의 병력수로써는 그런 시도를 할수 없었다. 고려군은 개경이북에 전개되여있는 30만이 그대로 고려전체의 병력수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손녕은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고려는 거란군이 서경까지도 에돌아 개경으로 직행할수도 있다고 보았기에 개경이남의 지방군은 발령을 내리지 않고 예비로 장악하고있지 않는가. 그들은 청천강계선에서 어떻게든 자기들 거란군을 막으려 할것이였다.

문제는 고려군주력을 이 청천강가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려야 하는것이였다. 속전속결로 고려군을 소멸제압하고 고려임금의 항복을 받자는것이 소손녕의 그리고 거란왕의 결심이였다.

(고려군이 우리뒤를 막자고 할수는 없다고 확신하는 이상 그리고 그들이 내가 바라는대로 안융진벌판으로 나오고있는 이상 여기에, 바로 이 안융진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

소손녕은 이렇게 생각하며 일단 불안을 털어버리였다.

내가 안할 걱정을 하고있다, 안북부쪽에는 약간의 견제력량만 남겨두고 안융진, 여기서 고려군을 소멸해버리자. 이렇게 생각을 굳힌 소손녕은 급히 수하장수들을 불러들였다.

《안융진성루에 나의 지휘기를 꽂으라!》

《수장께서… 적진에 들어가겠다는것이요?》

거란장수들은 밑도 끝도 없이 호통치는 자기 수괴를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안융진성은 저들이 차지한것 같지만 실은 고려군과 대치한 경계선이라 하는게 더 정확했기때문이였다.

《내가 꼭 청천수를 넘어가야 할텐가?》

《하오면?…》

《고려군사들을 심리적으로 제압하자는것이다, 한편으론 고려군장수들의 약을 올려주자는것이고. 내 기발을 보고서야 그들이 덤벼들지 않고 견뎌배겨?》

《알만하오이다.》

적장들은 그제야 깨도가 된다는듯 히죽거렸다.

그 시각 고려군진영에서는 이상한 차림을 한 기마부대들이 적진쪽으로 접근해가고있었다. 말우에 탄 기마수는 물론 말까지도 몽땅 백포를 휘감고있는것이였다. 그리고 기마수들은 등에다 둥그런 항아리따위나 배가 불룩한 가죽부대같은것을 지고있었다. 일부 기마수들은 항아리따위를 그물망태기에 넣어서 말잔등우에 걸쳐매기도 하였다.

이들은 화공습격대였다. 서희의 발기로 급히 조직된 부대였다. 서희는 안융진으로 기동해오는 거란군의 배후를 화공으로 들이칠 착상을 한것이였다.

항아리나 부대짝안에는 송진을 끓여낸 솔기름 아니면 주변의 주민가옥들에 호소하여 모아온 콩기름, 깨기름, 분지기름, 역삼기름 등 먹는 기름들이 들어있었다.

겨울초입이여서 북서풍이 주로 불어오는것을 보고 적의 등뒤를 화공으로 들이칠것을 결심한것이였다. 주변은 온통 벌판이라 마른 풀이 한벌 깔린것이 좋은 불감이 되는것이였다. 게다가 적들이 진을 치고있는 서북쪽계선은 청천강하류지대여서 갈숲이 키를 넘게 우거져있었다.

고려군쪽으로 화염이 쏠리겠는데 아군이 더 불리해지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였지만 그것은 이내 부정되였다. 산불이 아니여서 불붙는 시간이 길지 않을것이므로 한두시간만 땅을 조금 파고 엎디여있으면 불길은 얼마든지 지나쳐버릴수 있다는데서였다. 시험삼아 적은 구간에 불을 놓아보기까지 하고 결심한것이였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군은 철기군을 특별히 무어놓고있었다. 적군의 우세한 기마공격을 좌절시키기 위한 부대였다. 적이 보군을 앞세우고 먼저 화살전을 벌리다가 길을 틔여주면 그뒤에서 기마군이 튀여나와 공격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하고있는데 대비해서 취한 조치였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량측은 서로 제각기 다음날 벌어질 싸움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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