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상 편
8. 거란의 1차침공을 물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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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를 바래우고난 뒤 은천은 다시금 주저앉아 붓을 들었다.
은천은 임금(성종)으로부터 거란왕에게 보낼 편지초안을 써오라는 분부를 받고 그 일에 몰두하고있던중이였다.
거란왕에게 사신을 띄우자고 제기한것은 은천이였다.
거란이 고려와의 화친을 목적한다면 지금까지 추구해오던 국교수립정책을 계속 밀고나가야지 어째서 싸움을 걸어왔는가를 따지자는것이였다. 화친을 하자면서 일개 적장으로 하여금 한 나라의 임금에게 감히 항복하라, 말라 호통치게 하는것이 례의에 닿는 일인가를 들이대자는것이였다.
거란왕의 진짜속심이 무엇인가를 타진해보고 이후 대책을 취하자는데도 목적이 있었다.
문제는 거란이 화친의 명목하에 고려를 저들의 제후국으로 되게 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하는것이였다. 지금까지 거란이 집요하게 고려의 문턱을 두드린것은 동등한 자격에서의 두 나라 관계수립이 아니라 고려를 조공의 나라로 만들려는 목적에서였고 그것으로써 송나라를 제압해보려는 속심에서였다.
거란의 이러한 속심은 송에 있어서 대단히 거슬리는것이나 송은 거란과의 마찰을 피할 심산인듯 지금까지도 모르쇠를 하고있었다.
고려는 송과의 동맹관계로부터 이런 상황을 통고해주고 보조를 맞추도록 의뢰할수도 있었지만 일시 자제하고있는 송의 립장을 리해하고 그만두어버렸다. 어떻게든 고려자체의 힘으로 거란을 제압하여 송이 따분하지 않게 하면서도 거란을 눌러놓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거란과의 조정수뇌급담판으로 고려의 안전을 지키자면 우선 고려의 군사적우위를 보장하는것이 선차였다. 거란의 침공에 무력으로 대항할뿐아니라 침공을 저지시키고 거란
임금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안북부까지 진공한것은 바로 고려의 이러한 결심을 거란이 알게 하자는것이였다.
고려의 이러한 결심이 실현되자면 지금 벌리고있는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거란의 코대를 꺾어놓아야만 하였다. 청천강계선에서 벌어진 고려 대 거란의 싸움은 반드시 고려가 이겨야만 하는 결정적문제였다.
서희형님에게 먼저 문의를 하자, 반드시 거란군을 격퇴소멸해야 함을 강조하고 그다음 상황에서 적이 어떻게 나올것인가를 예상해서 의논이 된 다음 편지를 써도 늦지 않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은천은 즉시 강쇠를 불러들였다.
《안북부성에 가서 서희어른을 만나고 와야겠다. 이틀밖에 시간을 줄수 없구나. 파발을 띄울수도 있지만 도중에 잘리운 구간이 생길수도 있어 그러는거다. 역마를 제때에 갈아대주지 못하는 역장들은 즉석에서 목을… 아니, 그들은 최선을 다해줄것이다. 자, 떠나라!》
《알겠소이다.》
강쇠는 그 즉시 떠나갔다.
이틀만에 되돌아온 강쇠가 전해준 서희의 편지를 보는 순간 은천은 아차 하고 신음소리를 내였다.
《싸움이 하루이틀에 끝날리 만무한데 어찌하여 성급히 거란조정의 문을 두드리려 하는가? 적의 팔 하나 부러뜨린데 불과한 이때 서신이라니, 오히려 적으로 하여금 우리 고려를 얕보고 더 승이 나서 달려들게 할뿐이노라.
조만간에 이 청천수가에 적의 무덤을 쌓아놓을터이니 그때 가서 큰소리치며 무릎 꿇고 나오라 편지해도 늦지 않으리라.》
서희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군사적우위를 차지해야 적과의 담판도, 이른바 화친도 제대로 될수있으리라는것까지는 생각했지만 그 시기가 아직은 이르다는것을 모르고있은것이였다.
서희는 싸움의 결말은 개의치도 않고 무작정 빌붙는 방법으로 눈앞의 위기만을 넘겨보려는 일부 대신들의 경향을 단호하게 차단묵살하라고 편지에 당부했다.
굴욕적인 정화로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되도록이면 자기가 돌아와서 형세를 따져본 후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자고 거듭 부탁했다.
(서희형님! 나는 아직 멀었소이다. 부디 성한 몸으로 돌아오시오이다.)
은천은 서북방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례부시랑이 내사시랑에게 비밀특사를 파하였댔다며?!》
임금의 어조에는 노여움이 가득 실려있었다.
은천은 서희로부터 편지를 받고난 뒤 그 다음날에도 초안이 되지 않았다며 어전출두를 끌다가 당장 대령하라는 어명을 받고 지금 임금앞에 부복한채 나무람을 듣는중이였다.
《페하! 서희어른이 보낸 이 편지를 보면 사연을 알수 있을것이오이다.》
은천은 임금에게 서희의 편지를 들어올렸다.
《보나마나 뻔하지. 내가 자네들 속을 몰라서? 서희 그 사람은 아마 적장의 목쯤은 따놓은 뒤에라야 거란왕과 상종을 해도 하라는 소릴 했겠지. 안 그런가?》
《그쯤 되오이다. 적장의 목까지는 거들지 않았소오만 무릎굽힘을 하고나서 거란조정의 문을 두드려야 할것이라 하였소이다.》
《그럴테지. 아직은 적기가 아니라는 소리야. 내 그런것쯤 가리지 못할가보아 그러는가? 기특들두 하지. …》
임금은 쓴웃음을 짓고있었으나 밉지는 않다는 표정이였다.
《긴말말고 어서 편지를 써오게. 언제 보내는가 하는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알아들었소이다.》
은천은 황황히 돌아섰다.
임금의 배짱이 일부 대신들과는 달리 그리 얄팍한편은 아니라는 생각에 우선 안도의 숨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