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상 편

 

8. 거란의 1차침공을 물리치다

 

3

 

《겨울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간다 하더니만 그 말이 사실은 사실이였구려. 이 란리통에 안방에 은둔이라니 내의시랑어른께서 뭔가 잘못 되신게 아니요?》

개경에 슬그머니 나타나서 은천을 찾아온 강조는 의례 그 비양기를 버리지 못하고 반말로 코를 떼였다.

《안방에서 낮잠자기는 강조장수께서도 마찬가지시구려. 지금쯤 전방에 나가계시리라 생각했었는데 개경행차라니 웬말이시오?》

은천은 점잖게 응수하며 차잔을 권하였다.

《불러주지도 않는 곳을 제스스로 찾아가서 생색을 내란 말이요? 이 강조가 그렇게 눈치가 무딘 사람인가 하시오? 이따위 분내나는 물일랑 집어치우고 속이 뜨끔 열리게 찹쌀 고은 뜨물이나 한대접 주시오.》

강조는 씩씩거리며 트집거리가 더 없나 하는 눈빛으로 방안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 집엔 솔가루를 우린 뜨물밖에 없는데… 송화주 말이요.》

《송화주면 송화주, 선비들이나 마시는 이따위 알량한 차물보다야 낫겠지, 흥!》

은천은 술동이를 빼앗아 통채로 기울이는 강조를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강조의 출현이 내심 반가와서였다.

조정에서는 이번 서북방출병에 강조를 넣지 않았었다. 한것은 서경쪽의 장수들만으로도 지휘를 감당할수 있는데다 강조의 부대를 개경방위에 더 필요하다고 보았기때문이였다. 강조자신도 그쯤한것은 짐작되였는지 부대를 기동시켜 례성강중류어방에 전개해놓고는 죽은듯이 배겨있었다. 하지만 좀이 쑤셔 못 참겠는 모양 개경으로 스며들어와 은천을 찾은것이였다. 그도 임금이 되돌아선것을 알고서 온것이였다.

《각자에겐 다 때가 있는것 아니겠소이까. 페하께선 강조장수를 익히 관심하고계시더이다.》

《침발린 소리 마시오. 흥, 내가 어전뜨락속내를 모르는줄 아시오? 최승로대감의 입김이 아직 날고있는걸 난 다 알고있소.》

강조는 며칠전 은천이 임금에게 강조를 병마판관으로 등용하자고 다시금 주청한걸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때 임금이 아직 더 두고보자 한것을 어느새 전해들은것 같다.

귀신 한가지로구나, 엉큼하기란…

은천은 강조의 심중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전방에 나가고싶어하는것이였다. 때가 오면 가만 안 있는다 주먹을 부르쥐던 그가 아닌가.

은천은 이전에 내미홀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열변을 토하던 강조를 다시금 그려보았다.

그렇다, 지금의 이 국난앞에서 강조는 자기의 설자리가 전방이여야 한다는것을 절감하고있는것이였다.

자기가 전방의 지휘군사로 뽑히지 못한것을 수치로 여기고 분해하고있는 강조를 은천은 위로하고싶어졌다.

《거듭 말하거니와 장수에게는 각기 때가 있는것이옵니다. 싸움은 오늘만 하고만답디까? 두고보시오. 이후에 익히 무거운 짐을 지게 되리다.》

《흥, 례부의 머리가 되시더니 말이 늘었군. 그건 그렇고, 그래 강시랑! 조정에 거란과 화친하자 조잘대는 작자들이 파리 끓듯 한다는게 사실이요?》

강조는 드디여 본론에 들어갔다.

《적지 않소이다.》

《적지 않다?! 그게 대체 어느 작자들이요? 내 당장 목을 뽑아치우겠소. 그러지 않아도 지금 우리 군영에 개들이 먹이가 없어 울고있소. 어느 작자요, 빨랑 대시오.》

강조는 목에 피줄이 불끈하여 방바닥을 두드리며 목청을 돋구었다.

《좀 자중하시오. 화친이라 해서 그게 매모조리 역적질인줄 아시는가보군요.》

은천의 이 말에 강조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숙적 거란과 화친하자는게 역적질이 아니면 도대체 어느게 역적질인가?…》

《문구로는 화친이라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경계요. 다만 그들과 담을 쌓고만 있을것이 아니라 상종을 하면서 말로 사리를 따질것은 따져가며 관계를 유지함이 화친의 본목적이란 말이요.

서로 대등한 높이에서 실체를 호상 인정하고 공존하는 정도의 화친은 나라간에 취하는 통례란 말씀이요. 아무리 적국이라 해도 겉으로는 최소한 대화를 해야 함이 례의를 지키는것이 되고 적국에 언질을 잡힐 틈도 안 생긴다 그 말이요. 그런 일을 할 때 가선 하라고 외교란 소임이 있는것이고.》

《례부가 썩었구나! 저런 소갈머리를 해가지고…》

강조는 사리를 펴는 은천에게 금시 찌를듯이 손가락을 겨누고서 일으켜세운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겉으로든 속으로든 적국과 마주앉아 상통에 화색을 그리는 꼴을 보이겠다는 그 생각자체가 역적질이다!》

《그게 페하의 뜻이라면 어쩌겠소.》

《페하의 뜻이라구?!…》 강조의 울대뼈가 꿈틀했다.

《그렇다면 페하께서 그렇게 가도록 몰아간 례부 너희들이 역적이다.》

《헛참…》

은천은 손을 내저으며 주저앉고말았다

《앉소이다, 장수나리.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나를 야료하지 말라. 난 장수가 아니다.》

강조는 여전히 선채로 은천을 노려보았다.

그가 자기는 장수가 아니라는 말뜻은 정3품의 위계를 차지해야 《장군》으로 불리우던 당시의 관직명사용규례를 빗대고 하는 소리였다. 중랑장(종4품)이하의 군사지휘관은 장수(장군)라고 부를수 없기때문이였다.

강조는 아직 정4품으로서 정3품이상의 관리들만이 군사를 쥐였을 때 불리우게 되는 장수(장군)라는 호칭을 쓸수 없었던것이다.

여느때는 장수라 불러주면 모르는척 넘기던 강조이지만 지금의 이 자리에서는 그것마저 트집거리가 되고있었다.

《앞서 말하였거니와 페하께서도 외교관례를 고려하셔서 화친이 어쩌고 하는 일을 외면하지 않으시는것이외다. 실은 페하께서도 싸움을 주장하시오. 거란이 웃으며 접어들 때는 그에 맞게 대응하도록 하시였고 이번처럼 싸움을 걸어올 때는 맞받아치라 하신것 아니요? 이번 싸움의 사령탑을 보시오. 어떤분들로 꾸려주셨나.》

그 말에 강조는 조금 수그러져 털써덕 주저앉았다.

《박량유시중과 문하시랑 최량은 주전파가 확실하오. 그런데… 서희는 잘 모르겠어.》

《서희어른을 모르다니요. 그가 주전파가 아니면 페하께서 친히 병관어사로 명하시여 북방을 순찰케 했겠소이까? 아닌 말로 그가 서북방에 나가서 그만큼 준비를 해놓았기에 지금 싸움이 순조로이 돼가는것 아니외까. 어제도 좋은 소식이 왔소이다. 봉산성에서 첫 싸움이 잘 치르어지고난 뒤 지금 안융진성에서도 적군을 크게 이기고있다 하더이다.》

《그까짓 적병 몇놈 죽였다는 소리 아무리 들려와도 난 인정하지 않소. 애초에 적군이 압록수를 넘어오지 못하게 했어야지. 청천수까지 들여다놓고 이제와서 몇놈 죽인걸 가지고 좋은 소식이라. … 병부라는게 영 맹탕이요. 이 고려땅에 산중엔 호랑이가 많은데 인총중엔 시라소니뿐이란 말이요.》

《강조어른이 있지 않소이까.》

《날보고 호랑이라 하면 페하께 상주해달란 말이요. 진짜 호랑인가 한번 보시게 해올릴테니.》

《그러지요. 내 꼭 그리하리다.》

은천은 정말 그럴 생각을 다시금 굳히며 강조에게 술병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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