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상 편
8. 거란의 1차침공을 물리치다
1
고려조정에서는 송나라에 거란의 침공소식을 알리느라 서두르지 않았다. 이전의 관례로 보아서는 그들에게 거란을 함께 치자고 협공을 요청할수도 있는것이지만 조정에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여러모로 보아 그들이 고려의 요청에 응해나오기가 몹시 난감하리라는데서였다. 송이 거란과 금방 싸우지 말자고 약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는데도 있었지만 고려가 단독으로 거란을 대항하여 본때를 보여주려는 생각도 없지 않은 배심에서였다.
거란의 침입에 대응하는 나라민심은 예상외로 격양되여있었다. 한강이북이 본래 고구려땅이였던지라 고구려의 후손들인 이 지역 사람들은 동족의 나라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이 이제 고려마저 먹으려드는데 대해 도저히 용납할수 없다는 강한 적개심으로부터 그 어느 지역보다 반거란항전의식이 높았다.
청천강이북의 서북방주민들과 군사들의 항전의식이 더 높았다. 이들은 거란이 쳐들어온다는 기별을 받자마자 익히 손에 절은 병쟁기를 꼬나들고서 제가 속하였던 부대를 찾아갔다.
이 지역 주민들속에는 특히 발해의 조락과 함께 고려로 이주해온 발해유민들과 그 후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거란을 치는 싸움의 일선에는 응당 자기들이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망국노의 한을 남긴 치욕을 씻을 다시없는 기회라고 내놓고 말하고있었다.
여름내 압록강대안까지 꾸역꾸역 밀려온 거란군은 10월에 들어서면서 드디여 압록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거란군과의 첫 싸움은 봉산성(구성 동남쪽 15리지점)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압록강가 흥화진을 은밀히 에돌아 순식간에 백리 넘게 쳐내려온 거란군과 맨 처음에 맞다들린 불리한 조건에서도 봉산성 군사들은 덤빔이 없이 침착하게 공세를 취하여 거란군의 선봉부대를 보기 좋게 막아내였다.
발해유민출신들이 과반수를 넘는 이 부대는 주민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워 사흘간이나 거란군을 붙잡아놓음으로써 고려군주력이 청천강계선에 방어진을 치도록 귀중한 시간을 보장해주었다.
봉산성방어군은 1 500명의 병력으로 3만이 넘는 거란군 선봉부대와 싸워 1만 5천여명의 적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고 성에서 철수하였다. 희생자가 너무 많아 더이상 성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성을 일시 차지하였던 거란군은 다음날 서희가 지휘하는 고려군주력의 반격을 받고 하루만에 쫓겨나고말았다.
서희는 되찾은 봉산성을 정리하는 한편 부대들을 봉산성배후에 위치한 성들에 전개시켜 거란군이 더는 남하하지 못하게 차단해버렸다.
고려임금은 시중 박량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인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하여 고려군을 출병시켰었다. 그리고 저
그런데 이때 봉산성방어전을 지원하러 맨 선두에서 진격하던 고려군의 선봉부대가 봉산성을 포위하고있던 거란군의 선제기습을 받고 좌절된 끝에 급사중 윤서안을 비롯한 선봉부대 군사 여럿이 포로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들은 서희가 봉산성방어군의 손실을 줄이고 성을 공격하는 거란군에 장애를 조성할 목적으로 먼저 떠나보낸 부대였었다. 이들이 봉산성밖에 진을 치고있던 거란군 경계력량에게 사전에 부딪쳐 랑패를 본것이였다. 서희는 봉산성을 타고앉을 때까지도 이들이 나타나지 않아 몹시 걱정하였었다.
이들의 소식을 들은 임금은 적들의 불의적인 기습이 있을수 있으므로 전방에 지휘처를 두는것은 위험하다는 수행한 대신들의 권고를 따라 평양성으로 되돌아오고말았다.
한편 서희는 봉산성을 타고앉아 적군의 차후동향을 지켜보면서 이후에 대처할 방도를 궁냥하고있었다.
서희가 봉산성을 탈환한지 이틀이 지나서 거란군쪽에서 전령을 띄워 봉서 한개를 보내여왔다. 봉서를 보낸것은 이번 고려침공을 총지휘하는 거란군수괴인 소손녕이였다.
《우리 거란은 이미 고구려의 옛 령토(발해를 말함.)를 령유하였다. 그런데 고려는 우리 땅(실지는 고구려의 옛 령토, 대동강이북땅을 말함.)을 강점하였으므로 토벌하러 왔다. 우리는 천하통일을 목적하는 나라로서 아직까지 우리에게 귀순하지 않은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것이니 속히 투항할것을 권고한다.》
봉서의 내용인즉은 이러했다. 마디마디가 오만무례하고 횡포무도하기 짝이 없는 글이였다.
서희는 적장의 편지를 임금에게 가지고왔다.
《우리가 거란땅을 강점하였다?! 이런 언어도단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따위 글쪽지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시오이다. 제 생각엔 적장이 첫 싸움에서 어지간히 기가 눌린것으로 보이나이다.》
서희의 말에 임금은 턱을 내저었다.
《이렇게 무작정 투항하라 삿대질인데도?!》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접어들노릇이지 왜서 글싸움을 걸어오겠소이까.》
《거란군의 수가 얼마라고?》
《흥화진에서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대략 40만으로 추측되옵니다. 지금도 압록수를 넘어서는 부대들이 있기는 하옵는데 대부분이 락타를 끌고오는 화식보장병력이라고 하오이다.》
《정예군사가 40만이면 우리 군사보다 10만이 더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우리야 그보다 더 많은 예비군이 있지 않소이까. 한수(한강)아래 지방향군이 아직 발령을 받지 않고있소이다.》
《거란도 예비군은 더 있을터인데…》
《하지만 병력이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글싸움을 하자고 나선 그 속대가 벌써 가늠이 가는바이오이다.》
《적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게 아닌가?》
《그렇다고 과대평가해도 아니되오이다. 페하! 제 생각엔 적의 글싸움에 우린 말싸움으로 마주나가봄이 어떨가 하나이다.》
《어쨌든 적을 멈추어놓았으니 말싸움이면 말싸움, 우선 그네들의 속내를 타진해보면서 차후책을 세워나가세. 서희 그대 공로가 크오. 봉산성을 빼앗았으니 말이지 그대로 쳐내려왔다면 어쩔번 했소. 그런데… 누구를 보내면 좋을상싶은가?》
《이전에 거란사절을 맞아본바 있는 례빈소경 리몽전이 합당할가 하나이다.》
상군사로 임명된 시중 박량유가 인물을 골랐다.
《그게 좋겠군. 그럼 리몽전이 가보도록 하오.》
《화친을 제의한다는것이오이까?》
박량유가 되묻자 임금은 끄덕끄덕했다.
《먼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다 웃는 낯을 지어보이면서 거란의 속내를 타진하는것이요.》
《그러하겠나이다.》
리몽전이 부랴부랴 거란진중에 찾아간즉은 말을 붙여보고말고 할것도 없이 단마디로 호령하기를 《고려국왕은 빨리 거란군진영에 와서 항복하라.》였다. 몽전이 어렵사리 겨우 한마디 《대체 거란의 고려침공리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소손녕은 《너희 나라에서 백성구제가 허술하다기에 처벌하러 온것이다. 만일에 화의를 구할 생각이거든 우선 항복부터 하라!》 하고는 이어서 《방금 우리 군사 40만이 또 압록수를 넘었다. 이제 80만이 한번 진군을 하면 고려는 그예 멸하고말것이니 그리 알아 하라. 래일 아침까지 기다리겠다.》 하고는 군막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몽전은 더 어째보지 못하고 돌아오고말았다.
거란군사가 80만이라는 소리에 누구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중과부적이로구나. 어쩌면 좋을고.》
임금은 대번에 한숨을 토했다.
《우선 페하께옵서 급히 개경으로 되돌아가는것이옵니다. 여기는 대단히 위험하옵니다.》
박량유가 먼저 임금의 행선지부터 정하고나서자 대신 하나가 기다렸다는듯이 뒤를 달았다.
《군사를 푼푼히 갈라내여 페하를 안전하게 모셔가야 하옵니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적을 막을 수나 내놓으시오.》
임금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제 생각에는…》 대신 하나가 한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페하대신에 누구든 한분이 장수와 더불어 적장을 찾아가서 그들의 요구조건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본 뒤에 적당히 흥정을 붙여서 들어줄것은 더러 들어주어 그들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구슬려봄이 어떨가 하옵니다.》
《그거야 투항하자는 소리가 아닌가?!》
시중 박량유는 단박에 퇴를 놓았다.
《투항도 어떤 투항인가 하는것이지요. 발등의 불을 끄고 보자는것이라 위기모면책으로 잠시 거짓투항을 해볼법도 한것 아니오이까? 페하께옵선 화해를 붙이라 하시지 않소이까?》
《뭐라구?!》
박량유는 서슬이 퍼래서 그 대신을 쏘아보았다.
《가만있게, 화의를 붙여보는 방도가 또 없겠는가?》
임금이 박량유를 제지시키자 또 다른 대신이 나섰다.
《화의를 하자면 먼저 싸우기를 아니해야 하옵는데 그 담보는 적이 요구하는대로 투항을 표시하는것이 어쩔수 없는 순서라고 보오이다. 페하께서 화의를 하라 하심은 적이 더 쳐나오지 못하도록 우선 싸움을 멈추어놓고 그다음에 적당히 구슬려서 그들의 입에 뭐든 조금 물려주고 되돌려세워 종당에는 국가를 보존하자는 뜻이 아니겠소이까.》
《그들의 입에 무엇을 얼마나 물려주어야 할것 같은가? 그냥은 되돌아갈리 만무한거고…》
임금이 이쯤 나오자 또 다른 대신 하나가 대담하게 머리를 내여밀었다.
《서경이북땅을 그들에게 준다 하면 어떻겠소이까? 진짜로 주자는건 아니고 후에 기회를 봐서 되찾을셈치고…》
《말도 되지 않을 소리!》
박량유는 탁자를 탕 치며 한걸음 나섰다.
《한번 주면 다지 땅이라는게 그렇게 오늘 주고 래일 찾을수 있는 물건인줄 아는가!》
《시중나으리! 서두에 말했지오만 진짜 주자는게 아니고 우선 말로 준다하는것이오이다. 어제 내사시랑(서희)이 말싸움을 해보자 했사와 지금 그 요령을 의논하는게 아니오니까?》
《말싸움을 하랬다 해서 땅을 주니마니 혼빠진 소리까지 해야 한단말인가? 조상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간 큰일났다고 땅을 차고 일어나겠다. 그대는 지금 제정신을 가지고 말을 하는가?》
박량유는 자제력을 잃고 소리쳤다. 그의 부르쥔 두주먹이 후들후들 뛰였다.
《누군 뭐 밸이 없어서 이런 말까지 하는줄 아오니까? 주는것이 있어야 받는것도 있다고 조금 떼주고 나라사직을 지키자는것인데 혼빠진 소리라니…》
《그만해라! 병부판사의 말을 좀 들어보자.》 임금은 대신의 말을 중둥무이시키고 왼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대는 우리가 싸워서 이길상싶은가?》
《지고 이기는건 붙어봐야 알 일이지만 소신의 임무는 싸우는것이지 투항하는것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승산이 보이지 않아 이러는게 아닌가. 80만 대 30만이네. 거의 세배에 가까운 적을 꽤 이길수 있을가?》
임금의 저조하고 미지근한 태도에 병부판사는 조금 죽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대신들 말대로 서경을 일단 내여준다 하오면 우리 군사는 황주로부터 절령까지 계선에 진을 치고 그 이남으로는 절대로 퇴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오이다. 가급적으로 삼남의 군사를 총 징발해서 개경 앞쪽에 2선방어진을 쳐야 할것이고…》
《그게 좋겠소이다. 서경이남 황주와 절령계선을 국경으로 하자 하면 거란은 쉬이 응해나올수 있을것이오이다. 그렇게 해서 일단 적군을 주저앉혀놓고 기회를 보다가 적들이 방심하고있을 때 우린 힘을 더 모아서 다시 밀고올라가면…》
《그 안이 그래도 그중 맞춤한것 같다. 더 생각은 해보겠지만… 가만, 이 서경국고에 쌀이 얼마나 있다고?》
《벼가 5천석하고 보리와 조, 콩, 수수, 기장쌀이 만석을 넘는걸로 아뢰오.》
《량곡이 적지 않구나. 창고를 털어서 빨리 백성들에게 다 나누어주도록 하라!》
《백성들에게 준다 해도 다 처리하기는 힘드오이다.》
《그러면 군량미만 남기고 나머지는 대동강에 처넣으라! 만일에 거란군이 서경으로 들어오면 그들 배를 채우라고 놔둘수야 없지 않느냐.》
《알아들었소이다.》
공부판사가 급히 읍을 하고 돌아서는찰나였다.
《페하! 쌀을 처리하는 일은 그다지 급한 일이 아닌줄 아옵니다. 그냥 두어두면 후에 다시 쓸것이옵니다.》
서희가 드디여 입을 열었다.
《서경을 내여준다 하면 적군이 쌀을 다 먹어치울것인데 어떻게 후에 쓴다는거냐?》
《제 말은 설사 서경을 내여주었다 하더라도 즉시 되찾아야 하며 반드시 그 쌀도 되찾아 우리의 군량으로 써야 한다는 뜻이오이다.》
《그러면 내사시랑은 내처 싸울것을 주장하오?》
《그렇소이다. 싸움의 승패는 병력의 크고작음에만 달린것이 아니라고 신은 생각하나이다. 봉산성싸움만 놓고봐도 우리 군사 1천 5백이 적군 3만을 대상해서 1만 5천을 죽이지 않았소이까. 물론 봉산성의 우리 군사는 거의다 멸하였지만… 이십배나 되는 적과 싸워서 그 절반을 죽였으니 이거야 사실 대승이 아니오이까. 그들의 령혼앞에 죄되는 일이라 생각되매 더더욱 결사항전을 주장하게 되오이다.》
《첫 싸움에서 우리가 진것은 물론 아니네. 그런데 적이 40만이 아니고 80만이라니… 승산이 안 보여 이러는거네.》
임금은 다시금 이마살을 찌프렸다.
《상대가 아무리 거인이라 하여도 약한 구석은 반드시 있을것이니 그걸 노려서 일격을 가하면 이길수가 있는것이 아니겠소이까?》
《좌우간 그러면 쌀은 당분간 그냥두게 하세. 그런데 내사시랑 생각엔 적의 어떤 구석이 약한 곳이라 생각되는가?》
임금은 자리를 고쳐앉으며 서희를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지금 적군은 병력은 많지만 저희들 땅에서 하던대로 정면 한곳으로 밀집대형방식의 싸움을 해오고있사옵니다. 적군이 그 많은 무력을 가지고 사방으로 산개해서 여러 방향으로 공격해오면 우린 정말이지 방책이 없습니다. 하오나 적은 아직 그 점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외곬으로만 골받이해오는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군사들이 적의 옆구리와 뒤통수를 들쑤셔대면 적의 력량을 상당히 약화시킬수가 있사옵니다.》
《우리 군사가 얼마나 되게 적을 옆구리로, 뒤로 쑤셔댄단 말인가?》
《서북계변방에 널려있는 성들의 수비군사는 우리 군사가 아니오이까? 흥화진(의주), 녕안진(녕변), 청새진(희천) 등 열여덟곳의 군사를 다 합치면 우리 군사 총수자의 삼할이 되옵니다.》
《아무리 삼할이래도 적에 비하면 너무 적어. 그래, 적의 약한 곳이란게 그건가?》
《또 한가지는 적군이 내든 대의명분이 엉터리없는것이로소이다. 우리 고려는 단지 제 조상의 땅을 되찾았을뿐인데 그게 저희들 땅을 강점한것이라 억지를 쓰는것이 우선 사리에 맞지 않는것이요, 생뚱같이 우리 고려가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 하며 토벌을 운운하는것 역시 남의 내정에 무슨 자격으로 훈시질인지 도대체 격에 맞지 않는 처신이라 그것 또한 사리에 맞지 않는것이니 고려왕이 투항해야 할 아무런 명분도 없거니와 그들에게 땅을 떼주며 화의를 구해야 할 명분은 더욱 설수 없다 그 말이오이다.》
《딴은 그럴듯한데…》
《거란과 땅을 론한다면 동족의 땅 발해를 타고앉은 거란이 되려 우리 고려에 땅을 바쳐야 할것이오이다. 죄를 따져야 할 원고는 우리 고려인것입니다. 거란이 일단 말을 붙여온 이상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말씨름을 걸어서 배지기를 뜨든 안걸이를 하든 해야 할것이오이다.》
《음…》
임금의 얼굴이 점차 풀어지기 시작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광종임금때에 우리 고려는 그 당시 생녀진이 일시 차지하고있던 압록수하류 이북계선에서부터 지금의 거란 동경계선까지의 5백리 땅을 차지하지 않았댔소이까. 압록수너머에서부터 료동으로 올라가면서 가주, 송성 등에 성을 쌓고 지켰었는데 거란은 그 땅을 우리 고려가 다시 차지할것을 예견하여 미리 막으려고 선수를 쳐나오는것일수 있는것입니다. 거란의 목적은 그 두개 성을 저희들것으로 하고싶어서 쳐나온것인데 우리는 지금 압록수이남까지 탐하려는줄 알고 지레 겁을 먹고 그저 땅을 떼줄 생각만 하는것이옵니다.》
서희는 목이 마른듯 입술을 한번 감빨고 말을 이었다.
《거란이 압록수이북의 발해땅을 타고앉았다 해서 옛 고구려땅을 다 차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것을 그냥 받아준다면 삼각산이북의 개경을 포함한 모든 땅을 다 내놓아야 한다는것인데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고려가 옛 고구려땅을 다 내놓고 백제나 신라땅만 가지고 고려라 할수 있는것이오니까?
한치를 내놓으면 두치를 내놓아야 하고 한번 주기 시작하면 마지막까지 주어야 하는것이거늘 그들의 탐욕을 다 채워주고나면 결국은 나라는 망하는 길밖에 없게 되옵니다. 땅을 떼주다니, 결단코 그것은 아니 될 말이옵니다.》
《하오면 거란과 싸우는 길밖에 없다는게 아니요?》
《싸워야 하오이다. 단 한번 붙어보고 두손 들 필요가 무엇이오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볼판이오이다.》
《그래, 어떻게 싸웠으면 좋겠는지 방략을 한번 내놓아보라.》
임금은 마음을 다잡은듯 서희에게 독촉했다.
《안북부(안주)에 다시 지휘처를 정하고 청천강계선에서 완강한 방어로 넘어가 적군을 이 계선에서 기본상 소멸해버려야 하옵니다. 병행해서 여러 갈래의 우회부대를 편성해서 적의 허리와 뒤꽁지를 모기침 쏘듯 사방 쑤셔서 더는 버틸수 없게 만들어 쫓아버려야 할것이옵니다. 다시는 고려땅을 탐할념을 못하게 만들어놓아야 뒤탈이 없을줄 아옵니다.》
《생각은 그지없이 장쾌한데…》
임금의 얼굴에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켜보면 될것이옵니다. 적장은 우리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었으니 우리가 그때까지 묵묵부답이면 싫든좋든 힘내기로 나올것은 뻔하오이다. 성상께서는 개경으로 돌아가시고 여기는 시중나리이하 우리 지휘조가 하는껏 할터이니 차후 일은 그때 가서 론의해도 될것이오이다.》
임금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서희시랑의 주장대로 하도록 하자. 짐은 돌아갈것이니 상군사 박시중은 전방지휘에 실수가 없도록 전권을 행사하라.》
《알겠소이다.》
박량유와 서희, 문하시랑 최량은 동시에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