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상 편
7. 나라에 국난이 닥치다
993년(성종12년) 5월, 상서성 병부로부터 긴급보고가 올라왔다.
서북계 변방 압록수 하류대안너머에서 한무리의 녀진인들이 건너와 흥화진의 고려군 장수에게 고하기를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계획을 꾸미고있다고 하였다는 내용이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것이 녀진이 고려를 속여넘기기 위한 거짓꾸밈수가 아니겠는가 머리를 기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송나라로부터 외면당한 녀진은 고려까지도 불함산너머로 물러가라 강경하게 나오는게 여간 속이 뒤틀려있지 않으리란 생각이 없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들의 신고가 믿음이 안 가는것은 귀화한 녀진인들속에서 다시 압록수를 넘어가려는 움직임이 여러건 적발된 사실을 놓고봐도 그러하였다.
태조이래 동족의 나라를 찾아 구름처럼 넘어온 발해인들과는 달리 이족인 녀진인들은 귀화하여 와서도 반신반의 낌새를 보아가며 바람따라 돛을 달려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부락을 통채로 끌고들어온 녀진추장들에게는 고려의 말직품계의 벼슬까지 내려주며 믿어주고 돌봐주는데도 이 족속들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기가 일쑤여서 말 한마디에 믿을수가 없었던것이였다.
하지만 녀진인들의 통고는 거짓이 아니였다. 이들도 자기의 거처지를 유린한 거란을 미워하기는 고려사람 못지 않았던것이다. 이들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은것은 실책이였다.
한달이 지나 녀진인들은 다시금 거란군의 고려침공소식을 알려왔다. 군사들이 출병을 하였을뿐아니라 더러는 벌써 압록수가에 도달하였다는 소식이였다.
그제야 조정에서는 사태가 급하게 된것을 알아차렸다. 부랴부랴 병부에 령을 내려 현지에 적정파악을 하러 떠나보내는 한편 각 도에 병마제정사를 파견하고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였다.
은천은 고향 금천(시흥)에서 거란군의 침공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동안 은천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였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 시름시름 앓으시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것이였다. 장례때문에 골아픈 궁중사무일에서 잠시 몸을 빼였던 은천은 황급히 개경에 올라왔다.
《끝내 일이 터졌군요.》
《드디여 때가 왔소. 예견 안한것은 아니였으나 정작 거란이 침공해오니 마음이 여간 무겁지 않소그려.》
은천을 마주보는 서희의 눈빛은 퍼그나 긴장되여있었다.
《거란의 전주맹약에 얼리웠댔소. 놈들이 바로 우리 고려를 먹자고 시간벌이를 하고있는것을 모르고있었으니… 후회막심하오.》
서희는 무겁게 한숨을 토해냈다.
《전주맹약》이란 거란이 송과 맺은 정화 및 불가침에 관한 조약이였다. 서로가 실체를 인정하고 황제국의 지위에서 공존하면서 안정과 교류를 도모하자는 내용이였다. 까짓 송이 거란을 인정하든 안하든 그것까지는 상관할바 아니나 거란이 송으로부터 고려나 녀진과의 동맹을 추구하지 않으리라는 부대조건으로 맹약의 준수성을 담보받은 사실을 알지 못한것이 실책중의 실책이였다.
송이 녀진을 은근슬쩍 밀어던진것을 알았을 때 벌써 송의 속생각을 간파하였어야 할 일이였다. 물론 송의 사정으로 보아 리해할수는 있는 일이지만 그리고 그것이 당면한 저들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것으로서 일시적인 외교전술상의 행동일지라도 이것은 거란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고려를 탐해나오도록 조건을 지어준것으로밖에 달리는 해석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고보면 7년전 화친을 제의해왔을 때 벌써 거란은 고려침공의 시간표를 그려놓고있었다고 봐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때 고려는 송과의 동맹을 더 존중하여 거란사절을 랭대하여 돌려보냈었다. 그보다 먼저 송에서 제의한 거란에 대한 협공제의에 응해나섬으로써 송으로 하여금 거란에 떼운 땅을 일부 수복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준것은 물론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태조이래 거란을 동족 발해를 무너뜨린 숙적으로 대해온 고려로서 송의 눈치를 볼것도 없이 시종일관 배심있게 거란을 다불려왔었다.
거란은 고려성립 초기부터 고려와의 화친을 끈질기게 졸라왔었다. 물론 그것은 진심이 아니고 후당이래 오늘의 송에 이르기까지 한족의 땅을 타고앉기 위해 고려를 제약할 목적으로부터 표방한 거짓우방관계촉구책이였음은 더 말할 여지도 없는 일이였다.
압록수너머 고려땅을 먼저 먹고 황하로 나갈 생각을 몇번이나 한 거란이였음에랴.
하지만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거란이 송과 제휴를 한 상태에서 고려에로 말머리를 돌릴수도 있다는것을 내다보지 못하였다는게 정말이지 리해가 가지 않는 일이였다.
《국록을 먹고 사는 관료로서 도대체 머리를 들수가 없는 일이요.》
서희는 다시한번 자책하였다.
《놈들이 선전포고는 하였소이까?》
은천의 물음에 서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마 첫 접전이 시작되는 시각에 전해오겠지.》
《거란이 우리 고려를 무턱대고 침범한단 말이오니까? 무슨 명분이든 세울텐데요.》
《트집거리가 없을가봐 걱정하오? 그간에 국교를 맺자고 청해온것이 얼마요? 하지만 우린 그에 응하지 않았단 말이요. 적당히 말미만 주면서… 그들이 제법 료제국이니 뭐니 하면서 황제국을 운운하는데 내속을 보면 수교관계에서 우리와 지위를 동등하게 인정할 낌새가 아닌게 문제란 말일세.》
《그들은 이제 우리를 제후국으로 인정하게 하려 할것입니다.》
《옳은 말이요. 하지만 그건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일이요.》
《물론이오이다.》
《난 이미 페하께 청을 올렸소. 누가 뭐라든 난 일선에 나설것이요.》
《나도 함께 나서겠소이다.》
《부탁이 있네, 동생!》
서희는 례외로 직함대신 동생이라 부르며 은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동생은 이번에 나서지 말고 궁중에 있으라구. 란시에 나라모양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잘 살펴보면서 타개책을 궁냥해두란 말일세. 거란과의 싸움은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네. 자네가 싸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내 말뜻을 알겠나?》
《알겠소이다. 그리하겠소이다.》
《박시중은 전국의 향군(지방고을수비군과 호족들의 개인군사)까지 다 동원하자고 하는데 난 반대네. 그동안 서북방방어준비는 대체로 한셈이므로 이번 싸움에서 한번 맥을 볼판이네. 첫 싸움은 개경이북군사들만 동원할것이야. 개경이남군사는 예비로 보존했다가 이후에 써먹어야 할것이야.》
《잘 알아들었소이다, 형님!》
은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태조이래 여섯대를 이어오며 수십년세월을 기다려온 거란과의 전면전이 이제 시작되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