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상 편
6. 조정에 몸 담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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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년 초여름, 강은천은 지방순시길에 올랐다.
대궐안에서 문서에만 파묻혀있다가 궁성밖 시골바람을 쐬며 걷느라니 정신이 거뜬하고 기분이 상쾌해났다. 산기슭 찔레꽃덤불에서 풍겨오는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길 왼켠으론 신록이 무르녹는중인데 오른켠으론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펼쳐져 초록색산자락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내미홀(해주)쪽으로 뻗어간 길을 따라 경쾌하게 말을 몰아가는 은천의 머리속에 어제 아침 조회에서 이르던 문하시랑 최승로의 말이 되살아났다.
《이번 순시길에 지방관아들에서 조정의 새 시무책이 원만히 시행되는가를 놓치지 말고 장악하도록 하게. 내미홀 관아의 강장자네 부자가 조정의 시무책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네. 시시콜콜히 캐여내서 보고들은 그대로 가져오도록 하게.》
내미홀 관아의 강장자부자라면 그 고을 토배기두령 강식과 그의 아들 강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강식은 후기신라 말기부터 고려국성립이후까지 내미홀 수양산아근의 이백리 땅을 타고앉아 주인노릇을 해오고있는 토착령주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강식의 조상은 고구려때 수양산성 성주였다고 한다. 몇백년전부터 틀고앉아 살아오는 그 가문의 터세가 지금도 여간 아닌 모양이였다.
강식의 아들 강조는 고려군 6위의 한갈래를 쥐고있는 장수이다. 강조는 고려의 2대왕 혜종(왕무)과 3대왕 정종(왕요)때 대광 왕식렴과 손을 잡고 간신 왕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합세한 부친 강식의 후광을 입어 조정의 각별한 신임속에 무장으로 승진일로를 걸어온 패기만만한 쾌남아였다.
례성강 건너 백주(배천)와 염주(연안)를 지나서부터는 내미홀이서지역이 모조리 강식과 강조의 관할지역인탓에 지금도 이곳은 조정의 령이 홍시라고 해도 강식이나 강조가 오얏이라면 오얏으로 통하는 판이다.
은천이 최승로에게서 받은 기본임무는 부포(강령)와 월포(은률)에 개축확장하게 되여있는 접객소건설형편을 료해하고 마무리하는것이였다.
고려로 들어오는 송나라 장사치들이나 사신일행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벽란도포구로가 아니라 부포나 월포로 들어오는 때가 적지 않았다. 하여 이곳 포구들에 사신일행을 맞이하는 접객소들을 림시로 설치하였었는데 설비가 한심하여 고려조정의 체면이 깎이우는 일들이 벌어져 송악조정에서는 이를 타개할 결심을 내린것이였다.
이해 정월초에 임금으로부터 문하시랑 평장사라는 정2품의 벼슬을 받아안은 최승로는 조정부서를 총괄하는 문하시중 다음가는 제2의 총리대신격인 막중한 자기 소임을 다하려고 여간 고심하지 않았다.
꼴꼴한 인재는 걷어쥐는 족족 자기 수하에 끌어다 일거리를 짊어지우는 판이였다.
젊고 영민한 강은천도 최승로의 손탁안에 들었는데 대여섯달 대궐안의 일을 눈에 익히게 하고는 이내 지방료해에 내몰린것이였다.
은천은 조정안에 들어가면 서희와 마주앉을 기회가 많으리라 생각하였지만 사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서희는 임금(성종)의 그림자라고 할 정도로 임금곁에 노상 붙어다니는터여서 좀처럼 마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대궐안에서 그와 마주쳐본것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지난밤에야 은천은 서희가 좀 시간을 내여 오랜만에 그와 마주앉았었다.
서희는 며칠전에 임금으로부터 병관어사로 임명받았었다.
전 임금(경종)때 좌승(종3품)으로 품계를 한급 올려받은 상태에서 그전 임금(광종)때 수행하던 내의시랑일을 계속 주관하던 서희는 다소 생소한 병관어사로 임명받고 몹시 긴장되여있었다.
병관어사란 지방관아의 군사업무를 조사하여 임금에게 간하고 그 처리를 맡아하는 직무로서 군사행정실무에 밝지 않고서는 자리지킴을 하기가 조련치 않은 자리였다. 병법과 무예에 밝아야 하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군사지휘실무에도 익히 절어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서희는 정치외교에는 눈이 터있었지만 병권운영을 보고 판단하는 일은 아직 눈에 익지 않았다고 인정하고있는터였다. 그는 인츰 임금과 함께 서경순행에 동행한 뒤에 내처 서북방을 돌아보며 변방의 군사형편을 료해해야 하였다.
서희는 은천에게 룡당포(내미홀)와 부포(강령), 월포(은률)일대의 수군실태를 겸해서 료해해올것을 부탁했었다. 태조때 동양제일을 자랑하던 고려수군이 최근에는 그 강기를 잃었다고 그는 말했었다.
아닌 말로 태조이후에 고려조정은 거란과의 싸움에만 몰두하다보니 륙군보강에만 치중하면서 수군은 거의 외면하다싶이하고있었다. 거란군에는 수군이 없는데도 있었지만 거란이 바다로 쳐들어올 경우란 좀해서 있을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고 어느때 어디서 누구든 바다로부터 고려의 국익을 침해해올지 모르는 조건에서 수군유지에 품을 넣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이 서희의 주장이였다.
은천은 긍정했다. 고려의 안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군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일이였기에…
《나리님! 저기… 노루가?!…》
은천은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말구종의 외마디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말구종이 가리키는쪽을 보니 노루 한마리가 길을 가로질러 보리밭속으로 껑충거리며 뛰여들어가고있었다.
《한살 날려보랍니까?!》
말구종이 어느새 활을 벗겨드는데 《뜀박질해가서 생채로 잡는게 좋을가본데…》 하며 다른 병졸이(은천은 말구종외에 호위군졸을 하나 더 딸리고있었다. ) 말고삐를 채며 금시 달려갈 자세를 취한다.
《먼저 살을 날려보고 거리가 모자라면 추격하거라.》
은천은 살질이든 달음박질이든 자기도 한번 해보고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면서 뛰는 노루를 바라보다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얘들아!》
《?…》
《안되겠다.》 은천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노루들이 새끼낳이하는 때가 아니냐?! 보아하니 저 노루도 금방 새끼를 낳을 놈이다. 자세히 보아라. 둔하게 놀리는게 알리지 않느냐? 뛰는 모양이 여간 거북스럽지 않구나.》
《그놈… 아깝다.》
말구종은 시들해서 활을 내리였다.
《저놈이 새끼를 낳아 퍼친 다음에 잡으면 더 좋지 않느냐. 자, 어서 가자.》
《좋은 점심감을 놓아주었소이다, 나리님.》
말구종은 입을 삐죽 내민채 마지못한듯 말을 돌렸다.
바로 이때 이들의 앞쪽으로 말발굽소리가 울리며 젊은 사내 서넛이 마주 달려왔다.
맨앞에서 달려오던 갈구리눈의 젊은 사내가 외마디소리를 질러댔다.
《방금 노루 한마리 쫓겨오는거 보지 못했냐?》
무작정 반말을 쓰고나오는 사내놈의 거동에 은천은 어쩌나 보자 하고 머리를 굽석하며 대꾸했다.
《보긴 보았소만 그냥 지나쳐 보냈소이다.》
《지나쳐 보냈다구? 시라소니같은것들! 비켜라!》
사내는 갈구리눈을 부라렸다.
《가을에 잡으려구 그랬는걸요. 금방 새끼를 낳을 놈이던데…》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네. 산에 들에 널려있는게 노룬데 그놈이 새끼를 낳지 않으면 잡을 노루가 없을가봐 걱정이냐? 얘들아! 어서 쫓아가자!》
《가만, 보아하니 수놈은 벌써 잡았구려! 그거면 족하겠는데 그만 돌아서시지요.》
은천은 갈구리눈이 탄 말잔등에 얹혀있는 수노루를 띄여보고 돌아서라 일렀다.
《성가시다. 이게 웬 참견이야?》
갈구리눈은 솥뚜껑같은 손바닥을 휘익 내둘렀다.
그 순간 앗! 하는 비명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이게 무슨 변이냐? 우리 나리님이…
말구종은 찔끔 감았던 눈을 간신히 뜨고 앞을 살피다가 태연히 앉아있는 은천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목을 빼들었다. 길바닥에 나떨어져 눈을 띠룩거리는 갈구리눈을 그제사 본것이였다. 은천이 머리를 잽싸게 뒤로 비켜버리는통에 갈구리눈은 허공에 손을 휘젓고는 내처 제풀에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졌던것이다.
《형님네들, 고집부리지 말고 곱게 돌아서시는게 좋겠소.》
호위군졸이 웃옷자락을 너풀거리며 한마디 던지였다. 그가 옷자락으로 부채질하는 모양을 올려다보던 갈구리눈은 호위군졸의 배허벅에 주런이 꽂혀있는 뽐창살들이 눈에 띄우자 한쪽눈을 찌프렸다. 허름한 옷을 걸친 저 체소한 선비꼴의 중년사내를 너무 얕잡아보았다는 생각에 갈구리눈은 다시한번 이마살을 찌프렸다. 제 몸 건사는 할줄 아는 사람들이라는것을 알아차린것이다.
《어디 두고보자.》
갈구리눈은 옷을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가자!》
그의 외마디소리가 떨어지자 놈팽이들은 비실비실 말머리를 돌렸다.
먼지를 일구며 달아나는 사내들에게 눈을 주며 호위군졸은 입을 쩝 다셨다.
《한손 나가는걸 겨우 참았소이다.》
《강쇠, 약속한걸 지켜야지. 자, 우리도 어서 가자!》
은천은 길을 재촉했다.
은천이 길떠나기에 앞서 이들과 약속한것은 신분을 드러내지 말자는것이였다.
은천의 호위군졸로 따라나선 강쇠란 총각은 평양성밖 쇠부리터 야장쟁이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진 죄를 씻겠다며 자청하여 군사가 된 젊은이였다. 아버지가 진 죄란 관청에서 녹이라는 구리를 녹이지 않고 쇠를 녹였다는것이였다. 련무장에서 부탁한 창을 먼저 보장하고 볼 심산으로 일을 내밀다가 관가의 령을 어겼다는 죄를 들쓴것이였다.
강쇠는 독특한 무예술을 갖추어 인차 개경수비군사로 뽑혀왔고 은천의 호위로 이번 걸음을 같이하고있었다.
말구종의 이름은 개암이, 이전에 은천의 아버지 강궁진의 말구종이였던 도련의 아들이다. 제 아버지처럼 희멀끔한 얼굴이고 차리고나서면 제 아비때처럼 상전과 종을 삭갈리기가 일쑤여서 별명도 《새끼도련》이다.
개암이의 아버지 도련은 은천의 고향집 부엌녀 달래와 가정을 이루고 지금은 고향 금천(시흥)에서 은천의 조상묘소를 지키는 산지기가 되였다. 은천의 아버지 강궁진이 작고한 이후에 자진하여 산지기로 눌러앉았다.
강궁진은 지난해 여름 압록강 못미처 있는 철산고을 쇠부리터확장공사장에서 과로로 잘못되였다. 조정에서는 강궁진을 조부 강여청과 꼭같이 삼한벽상공신으로 칭하고 나란히 묘를 쓰게 하였다.
은천은 자기의 첫 스승인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아버지의 념원이자 자기
조정에 들어온 이후 더더욱 절감하고있는바이지만 지금 나라형편은 편안한편이 못되였다.
서북방너머 료동땅에서 지루하게 벌어지고있는 송과 거란, 돌궐의 각축전은 수시로 고려지경에 불찌를 튕겨오며 정세를 계속 불안케 하고있었다. 거기에 압록강, 두만강이북의 사처에서 번창하고있는 대여섯갈래의 녀진족무리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는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는지 거란이나 돌궐쪽으로보다 고려지경으로 더 자주 침입해 들어왔다.
녀진족무리들의 침입은 산도적들이 마을을 들부셔놓고 달아나는 정도의 작은 소란에 불과한것이지만 그대로 놔두어버릴 일은 결코 아니였다. 새앙쥐가 뚝을 무너뜨린다고 이들의 잦은 출몰이 국부전으로 번져지고 전면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키 어려웠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북방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인적물적자원을 총동원할수 있게 장악정비하라는 조정의 령이 무수히 내려가지만 현지에서는 그 일이 원만하게 실행되지 못하고있었다.
나라에서 변방주민들의 조세를 절반으로 덜어주고 탐관오리들을 징계처분하는 등 왼심을 써주고있으나 사정은 달라지는것이 없었다. 군사일에만 부역을 동원케 되여있으나 지방관리들은 쩍하면 저희들의 관청일에도 부역을 동원했다. 군사일이 아닌 부역은 사역으로 규정하고 엄중처리한다고 아무리 을러메도 지방관리들은 제할일을 다하고있는 판이였다.
지금처럼 민심을 안정시키지 못하고있다가 미구에 국난이 닥쳐오면 어떻게 타개해나가려는지…
서희가 이 점을 누구보다 안타까와했고 이번 북방걸음에 꼭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벼르고있었기에 은천은 자기도 이번 걸음에 민심을 안정시키는데서 소득있는 일을 하리라 작정하고 떠난 길이였다.
은천이 내미홀 고을거리에 들어선것은 해가 중천에 떠있는 정오무렵이였다.
《우리 간단히 요기나 하고 갈가?》
마침 주막거리를 지나던 참이였다.
《그러시와요.》
강쇠와 개암이는 기다렸다는듯 응수했다.
셋은 울긋불긋 차일을 친 마당주막 하나를 골라잡았다.
개암이는 차일풍막 버팀줄이 휘감겨있는 느티나무기둥에 말고삐를 매여놓고나서 주막주인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청하느라 수군덕거리고 강쇠는 갈노전바닥을 손바닥으로 썩 쓸어보고는 은천을 앉으라 권하고나서 어느 틈에 노전바닥귀퉁이에 내팽겨져있는 부들부채를 찾아쥐고 은천에게 부채를 부치려 했다.
《아서라, 왜 자꾸 대감모시듯 하려 하느냐. 내 신분을 숨기라 하지 않았느냐.》
《뭐, 이런것쯤이야…》
은천은 머뭇거리는 강쇠에게 나직이 일렀다.
《개암이에게 말해라. 셋이 꼭같게 제일 하등으로 내오라고.》
《그렇게야 어떻게… 좌우간 알았소이다.》
강쇠는 개암이쪽으로 다가가 어물어물하더니 이내 주인과 함께 음식상을 챙겨내왔다.
더운 장국밥 세그릇에 농군들이 즐겨 마시는 탁배기 세대접 그리고 거기에 잣죽 한보시기에 청주가 한잔 끼였다.
《어서들 드시오이다. 내미홀아근에 우리 집 온반만 한게 없소이다. 이 온반이라는게 하등으로 치는 음식이지만 그 맛은 상등식 못지 않소이다.》
주막주인은 귀맛 좋게 주어대며 탁배기단지를 열었다.
《어디 온반 맛 좀 봅시다. 그런데 개암아, 이 잣죽과 맑은 물은 왜 껴들었냐? 이건 내가거라.》
은천이 개암이쪽에 눈을 주며 턱을 젓자 개암은 목을 옴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