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상 편

 

5. 은천이 과거에 급제하다

 

임금(광종)이 병으로 죽고 그뒤를 이어 임금이 된 왕주(경종)는 5년밖에 룡상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해인 980년에 원로 최지몽을 조정으로 돌아오라 령을 내리였다. 태조를 받든 개국공신들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지몽을 더이상 초야에 묻혀있게 할수 없다고 판단한것이였다.

최지몽은 스스로 청하였던 귀양살이를 끝내고 11년만에 송악으로 돌아왔다. 하여 강은천의 아버지 강궁진도 다시 돌아와 본래의 직무에 복귀하였다.

임금은 최지몽에게 선대임금때처럼 조정의 최고정무부서인 내의성의 내의령으로 있도록 임명했다.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체 송사건을 정리하여 제출하고 조언을 주는것은 물론 임금의 잘잘못까지 조목조목 따져가며 아뢰고 바로잡아주는 중임중의 중임자리였다.

임금은 즉위한 즉시 대사령을 내리여 귀양갔던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혔던 사람들을 내놓아주었다. 흠있는 사람은 벗겨주고 억울하게 관직을 빼앗겼던 사람들은 복직시켰으며 적재적소를 가려 승진발탁시키기도 하였다. 백성들의 채무를 덜어주고 조세와 공납을 감해주었으며 림시로 설치했던 감옥들을 헐어버리고 참소한 글들을 불살라버렸다. 림시감옥이란 선대임금인 광종이 말년에 아첨하는 간신들의 말만 듣고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던 나머지, 감옥이 모자라 림시방편으로 설치했던것을 말한다.

하지만 임금은 이태후인 978년에 장인인 정승 김부가 병으로 죽자 탕개가 풀려 정사를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김부는 왕주가 아직은 태자로 있을 때에 벌써 자기 딸을 태자비로 정하게 하였고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그의 정사를 진심으로 뒤받침해준 은사였었다. 이런 김부였기에 그의 죽음이 임금의 떡심을 풀리게 하였던것이다. 정사는 뒤전에 밀어내치고 좋아하지 않던 오락에 심취되더니 이어 주색에 빠지고 바른소리하는 신하들을 멀리하던 임금은 귀양가있던 최지몽을 돌아오게 한 이듬해인 981년 6월 병이 들어 7월에 림종을 앞두고 4촌동생 개녕군(왕치-태조의 넷째아들 왕욱의 아들)을 불러들여 왕위를 넘겨주고 죽었다.

(재위년수 6년, 향수 26세, 시호를 헌화, 묘호를 경종이라 정하고 개경 남쪽 고을산기슭에 장사지내니 릉호는 영릉이다. 《고려사》)

 

강궁진은 10여년간 손을 놓았던 군기감의 직분을 손색없이 감당해가느라 다시금 눈코뜰새없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임금의 부고를 철주(평안북도 철산)고을 쇠부리터에서 접하고 이틀을 밤낮으로 달려 개경에 도착하였었는데 장례를 치른 뒤에 새 임금 왕치는 강궁진에게도 다른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품계를 한등급 높여주었을뿐아니라 군기총감의 관직까지 주었었다.

새 임금은 강궁진이 반년나마 북변의 고을들을 종횡무진하면서 쇠를 벼려 병쟁기를 다량 만들어놓은것을 찍어서 치하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근래에 이르러 고려를 위협하는 거란의 행위가 이모저모에서 더욱 두드러져서 왕위계승으로 분주한 고려조정에 여간 골아픈것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강궁진이 개경 남쪽이 아니라 앞으로 전쟁마당이 될수 있는 변방가까이로 쇠부리터를 확장하고 앞으로 싸움때 쉽게 날라갈수 있게 현지가까이에 병쟁기를 저장해놓은것은 실로 선견지명있는 대책이 아닐수 없었다.

이 시기 임금은 선관어사로 있는 최승로를 특히 총애하였다.

최승로는 신라에서 원보벼슬을 하다가 경순왕 김부가 투항해올 때 따라와 고려조정에서 일한 최은함이란 사람의 아들이였다. 그는 938년 11살의 어린 나이에 총명하기 이를데 없다는 소문이 나서 왕건이 손수 불러 여러가지 문답을 해본 뒤에 상으로 주는 염분(소금생산지)을 받았고 원봉성의 학생으로 들어가 말과 안장, 매년 스무섬의 량곡을 국왕의 특혜로 받으면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벼슬길을 걸었었다.

임금으로 즉위한 다음해인 982년 3월에 관제를 개정하면서 최승로에게 준 선관어사란 관직자체가 문신관료들의 임명과 조동, 해임, 상벌과 작위, 명예칭호를 주관하는 부서의 실무책임자자리였으니 그에 대한 임금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히 짐작할만 하였다.

게다가 이해 6월 임금은 5품이상의 모든 관리들에게 국가정책조정업무와 관련한 시정방안을 제기하게 하였는데 관리들이 제출한 여러 안들가운데서 최승로의 제안이 제일 우수한것이여서 또 한번 임금을 탄복케 하였다.

일명 《최승로 시무책》이라고 전해오는 이 제안의 서두에서 최승로는 이전 다섯 임금대의 정사처리정형을 객관적시각에서 두려움없이 분석평가하였는바 태조는 후기신라왕 김부와 후백제왕 견훤, 발해왕자 대광현을 너그럽게 포섭하여 국토통일의 성업을 이룬 공적외에도 통합후 절약과 검소에 힘쓰고 상벌을 공평하게 하여 나라일을 편안케 한것이 평가할만 하나 국초의 바쁜 사정으로 국가의 제반 제도를 정비하지 못한것이 흠이라 하였고 혜종은 태자때 스승과 관리들을 겸손하게 대하였고 즉위후에는 배다른 동생인 정종과 광종에 대해 참소하는것을 물리치고 그들을 믿으면서 정종에게 왕위를 주저없이 넘긴것은 좋으나 왕규의 암살미수사건 이후부터 신하들을 의심하고 상벌을 무질서하게 한것이 약점이라 하였다. 또한 정종은 서경에 있던 5촌숙부 왕식렴을 불러들여 왕규일당을 처단하고 왕실을 보호한것이 공적이나 서경건설을 과도하게 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가증시켜 민심을 잃은것이 잘못이고 광종은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신진세력을 적극 등용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데 힘을 기울인것은 괜찮은 정치이나 쌍기(후주사람)를 등용하여 과거제도를 맡아보게 하면서 귀화인(주로 후주사람)들을 우대하고 재위 후기에 옳고 그른 소리를 가리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인것이 실책이고 경종은 즉위하자 남을 헐뜯는 문건들을 소각하고 옥에 갇혔던 사람들을 풀어놓아 백성들의 찬양을 받았으나 이후에 상벌을 공평하게 하지 못하고 음악과 녀색에 빠진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최승로는 28개 조항으로 된 현행시무대책안을 제기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지방통치체제를 강화하여 조정의 지위를 높이고 국가의 방위력을 강화하며 잡다한 불교행사를 제한하여 재정류실을 막고 절간과 중들이 늘어나는것을 막으며 백성들에 대한 지나친 부담을 감소케 하고 다른 나라의 풍습을 모방하는것을 반대하고 고유한 조상전래의 풍습을 지키게 하는 등 현실적으로 해결을 바라는 문제여서 임금은 물론 여러 재신관료들의 호평을 받았다.

은천이 조정에서 벌어지고있는 이러한 사실들을 서희로부터 전해들은것은 다음해의 여름이 막 시작되는 5월 어느날이였다.

《최승로어른께서 선대의 다섯 임금들을 서두에 총평한것은 대담하기 이를데 없고 장한것이라 할수 있네. 평가도 비교적 정확하고… 헌데 동생 보기엔 어떤가? 뭔가 마땅치 못한 대목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서희는 부들부채를 저으며 은천을 응시했다.

《임금께서도 만족해하신 제안인데 제가 어찌 이런저런 반론을 할수 있겠소만… 정종께서 서경건설을 추진시킨것이 잘못되였다 평한것은 조금 빗나간것 같소이다.》

은천이 주저하며 입을 열자 서희의 얼굴이 금시 밝아졌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태조께옵선 건국초기부터 서경을 우리 고려국의 부수도로 정해주었었고 이후엔 개경과 꼭같은 수도의 지위를 부여하시고 유훈에까지 쪼아박아 조상만대의 왕업을 잇는 명맥이라 하여주시였은즉은 서경건설에 품을 넣은것이 그르다 할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되옵니다.》

《백성들의 원한을 사게 하였다 하였는데도?》

《과중한 부담으로 인해 불만이 다소 야기되였을수는 있사오나 방법상에서의 과실로라면 몰라라 건설을 내민 그자체를 잘못이라 하는것은 여간 빗나간 생각이 아니로소이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서북방방비에 국력이 총동원되여야 할 때이오이다.》

《동생이 바로 보았네. 나라방위의 측면에서만 보아도 서경도성을 확장하는 일은 최우선 급선무가 아닐수 없네. 지금의 사정은 그때보다 더 막급한 상태란 말일세. 거란이 언제 쳐나올지 모르는 오늘의 현실을 보는 사람이라면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지나간 일이지만 서경건설자체를 잘못된것으로 평가한건 어불성설일세. 그 대목만은 대단히 잘못된것이야.》

서희는 격해오르는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은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서희는 말했다.

《여보게, 이제 인츰 있게 되는 과거에 응시해야겠네. 뭐 별로 준비할것도 없을거네. 동생의 실력은 내가 아니까. 준비하게.》

서희는 일어섰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은천은 임금이 직접 나와서 보는 복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해에는 지방의 여러곳에서 예비시험을 치고 초시에 합격한 서른명만 골라서 복시를 쳤는데 은천은 초시에서도 장원이고 복시에서도 역시 장원이였다.

임금은 만족하여 은천에게 구슬이 반짝이는 관모를 씌워주고 푸른색 관복과 은백색관띠를 내려주었다.

《군기감 강궁진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도다.》

임금은 은천의 아버지 강궁진이 과로로 병석에 든것을 애석해하면서 위로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대 부친께서 나라의 방위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도다. 부친을 릉가하는 충신이 될지어다. 아무쪼록 고려국의 재목구실을 다하기 바라노라.》

《황은이 망극하오이다.》

은천은 이마가 땅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깊숙이 숙이면서 임금앞에서 하는 큰절인 고두배를 세번 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기뻐하십시오! 이 아들은 내 나라 고려를 지키는 일에 온몸을 불사를것입니다.)

은천은 마음속으로 부모님을 불러보며 맹약을 다지였다.

며칠후 은천은 례부 원외랑(정6품)이 되여 외교업무를 전문으로 담당한 조정관료의 첫걸음을 떼였다. 이때 은천의 나이는 서른네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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