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상 편

 

4. 곡절은 있었어도

 

(2)

 

여러척으로 구성된 사신단행렬은 벽란도포구를 출발하여 바다길로 사흘만에 산동해안에 닿았고 하루밤낮을 쉬고 다음날 륙로로 사흘만에 송의 도읍 개봉에 들어갔다.

서희를 수석으로 하는 고려사절단의 송나라방문은 예상외의 성과를 올리였다.

송나라조정은 고려사신단의 수석이 서른고개에 방금 들어선 젊은이인데 우선 놀랐고 그가 송나라 황제의 치적을 극구 찬양하는데 더없이 만족해하였다. 황하의 용용한 흐름과 더불어 중원대륙의 주권과 번영 또한 영원하리라는 그의 말에 송황제 이하 대신관료모두가 차렷자세로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데 이르렀음에랴.

서희는 송이 거란을 지금 당장에 공격한다 해도 그것은 송의 전신인 후주때 수도를 침범당하였던 치욕에 대한 보복이므로 그것은 침략이 아니라 정당행위로 인정된다고 피력하여 또 한번 박수갈채를 받았고 고려는 선행한 동족의 국가인 발해를 거란이 타고앉은 점에서는 어느때건 거란을 몰아낼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고 지금 당장에 고려가 거란을 먼저 공격하기에는 대외명분이 애매하므로 거란이 고려의 현재 지경을 침범하는 때를 노려 반공격하는것이 합당한 처사라고 밝혀 송이 고려에 동시협공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사전처리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서희는 송나라의 문물을 되도록이면 많이 보여달라고 청하여 지방편답까지 하였다.

서희의 송나라체류일정이 지체되고있는 이런 리유를 알수 없는 은천은 집안에 닥친 불우한 처지만 감수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는것이였다.

《도련님, 그간 편안하셨소이까?》

도련은 산에서 내려오는 은천을 보자 엎어질듯 달려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도련동생이 아니냐?》

반색하며 도련을 부여잡아 일으킨 은천은 다시 얼굴을 흐리였다.

《너 고생이 여간 아니였던게로구나.》

도련은 눈물이 글썽해서 품속을 뒤지더니 봉서 한개를 끄집어내였다.

《지몽어르신이 보내는겁니다.》

《지몽어르신이?!》

은천은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기러기떼 나는것 보고 세월감을 알지어늘

초당의 높은 글소리에 후일념려 더 안하리

 

세월이 가는줄 모르지 않거니와 학문탐구에 전심전력하는 그대 은천이 이 나라의 주역이 될것이기에 마음을 놓는다는 믿음과 기대를 뜻하는 시구였다.

아, 최지몽원로님!

은천은 부르짖었다. 선배들은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약해지거나 주저앉는것을 바라지 않고있었다.

은천은 주먹을 부르쥐였다. 그리곤 목책 하나를 바꾸어들고 다시금 산으로 올라갔다. 그의 손에는 병법책이 들려있었다.

가을에 접어들무렵 은천은 귀국한 서희와 상봉했다. 그로부터 송나라실태를 적지 않게 전해들었다.

은천은 송나라조정이 밀고나가는 시책들이 고려와 류사한 점이 많은데 놀랐다. 지방을 장악하는데 유리하게 중앙의 기구들을 늘이고 보다 세분화해가고있는것, 군사지휘체계를 보다 중앙집권화하였으며 군대를 수도주위에 집결시키고 지방관리들에게 군권을 주지 않음으로써 지방할거세력이 자라날수 있는 온상을 없애도록 한것 등이 특히 그러했다.

고려가 태조때에 왕건의 송악군사와 수군 그리고 왕건이 직접 장악하고있던 마군을 중앙군으로 하고 령주들이 거느리고있던 군사들을 보군으로 부르면서 지방군으로 격을 떨구어 지위를 규정해놓은것을 지금까지 크게 변경시키지 않고 유지해오고있는것처럼 송나라도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을 금군이라 칭하여 제일 상등급으로 취급하고 황제가 장수들을 통하여 수도주위에 주둔시켜 통솔하는 군사들을 상군이라 칭하여 두번째 등급으로, 지방령주들이 가지고있는 군사를 향군이라 칭하고 세번째 등급으로, 변방의 소국종족들의 군사를 번군이라 칭하고 제일 하급으로 취급하고있었다.

특히 이들은 금군과 상군의 통솔자들을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부단히 옮겨놓아 따로 지반을 닦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고려에서 취하고있는 방식과 꼭같았다.

임금이 개국공신들을 비롯한 나이많은 장수들을 점차 제약하고 젊은 인재들로 신진관료세력을 형성하여 조정을 쇄신해나가는것도 송나라와 일맥상통했다.

조금 차이난다 하면 송나라가 지방관리들을 문인들로 전면 교체하는 중문경무(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경시하는것.)정책을 펴고있는데 비해 고려는 학자들과 장수들을 차별을 두지 않고 적당히 배합하여 지방장관으로 앉혀놓고있는 점일뿐이였다.

임금은 고려가 선 뒤 처음으로 과거시험을 쳐서 인재를 선발등용하는 제도를 세워놓았지만 학문을 기본내용으로 과거시험을 치면서도 군사병법과 무예를 완전히 도외시하게 하지는 않았고 문과를 기본으로 취급하면서도 무예에 문외한이면 애당초 과거시험대상으로 취급하지조차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문과와 무과를 구별하여 정해놓고 인재를 선발하는 송나라와 차이나는 점이였다.

고려가 송나라와 반거란동맹을 형성하기로 약조하였다는 사실앞에서 은천은 저으기 긴장해졌다. 동맹을 약조한 사실자체가 충격적이여서가 아니라 거란과의 싸움이 국가와 매 개인의 생사를 건 피할수 없는 숙명적인 과제라는데서였다. 자신을 포함한 고려사람모두가 바로 이 반거란항전을 착실하게 준비하는데로 지향되여야 할것이였다.

《동생도 이제는 과거를 보도록 하세. 하루빨리 조정에 들어와서 시야를 넓혀야 하겠네.》

서희는 은천에게 과거시험을 독촉했다.

하지만 은천의 생각은 달랐다.

《형님! 과거보는것은 급한것이 아닌듯 하오이다. 지금처럼 형님슬하에서 배우며 견문을 더 넓혀가겠나이다. 적어도 형님만큼 실력을 다진 다음에 나서겠소이다. 현재 부친께서 관직을 내놓고계시는 때인것도 고려해보아야 할것이고요.》

《그건 문제될것이 없다만… 하기는 내속이 중요한것이지. 그까짓 형식이야 아무때 갖추건 상관없는 일이네. 그건 자네 생각대로 하세.》

서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미리감치 관리의 경험을 터득하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지만 기본은 실력을 다지는것이기때문이였다. 준비된 인재는 아무때건 두각을 나타내기마련이고 써먹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것이였다.

서희는 믿음이 한껏 어린 눈길로 이윽토록 은천을 바라보았다.

《참, 자네도 이제는 장가를 들어야지. 어디 봐둔 처녀가 없나?》

서희는 은천의 나이가 어느덧 스물을 넘기고도 네살을 더 먹었다는데 생각이 미쳐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부모님들이 외지에 내려가계시는데 그런 생각을 할 경황이 되오이까?》

은천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부모님들은 인차 올라오시도록 조처해보겠네. 부모님의향은 어떨는지 몰라라 내 보기엔 저… 송죽이가 적합해보이던데…》

《예? 우리 송죽이를요? …》

은천은 두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나? …》

《그 앤 내 동생이오이다.》

《하지만 친동생은 아니지.》

《친동생은 아니지만 난 송죽이를… 친동생 이상으로 여기옵니다.》

이렇게 대답하던 은천은 저도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것 보게. 자넨 이자 송죽이를 친동생 이상으로 여긴다고 했네.》

《아니, 그건… 그런 뜻이 아니오라… 원, 형님도 참…》

은천은 그만 얼굴이 확 달아올라 머리를 젓고말았다.

《하하하… 내가 면바로 찌른셈인가?!》

서희는 통쾌하게 웃어제끼고나서 정색해서 말을 이었다.

《송죽인 용모도 마음씨도 샘물같이 정갈한게 난 좋네. 게다가 늘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을 좀 보라구. 말수더구가 적은 자네에겐 그런 명랑한 녀자가 맞네.》

서희는 얼굴이 수수떡처럼 붉어져 허둥거리는 은천의 등을 툭 쳐주었다.

서희와 헤여져 집으로 돌아오는 은천의 머리속엔 줄곧 송죽에 대한 생각이 맴돌고있었다.

자기가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그 말, 자기는 송죽이를 친동생 이상으로 여긴다고, 친동생 이상으로!…

내가 언제부터 송죽이를 친동생 이상으로 여기게 되였던가.

은천은 부지중 송죽이가 처음 집에 들어서던 날을 상기했다. 은천이 열세살 잡히던 해였다.

《이제부터 송죽인 우리 집 식구다. 자, 오빠에게 인사해라!》

어머니 을녀가 이렇게 말하며 아홉살난 송죽이를 자기에게 떠밀자 뽀르르 앞에 달려와 잠간 바재이다가 오빠! 하고 청고운 소리로 부르고는 생긋 웃으며 살며시 제 옷섶에 매달리던 송죽이였다.

그날부터 은천의 집엔 이전보다 더 생기가 넘치였다.

워낙 자식이 귀한 집이여서 은천의 부모들은 송죽이를 끔찍이도 귀해하였다. 전장에 나가계시는 아버지 강궁진은 가끔 인편에 송죽이가 잘있는가 물어오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은천의 어머니는 《네 아버지는 우리만 있을 때에는 일년 가도 소식 한번 알아보시지 않더니 송죽이가 온 다음부턴 쩍하면 편지를 보내는구나.》 하며 웃군 하였고 그런 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색다른 음식상을 차려 송죽이를 더 위해주었다.

송죽이는 부모를 잃은 슬픔을 이내 가시고 친부모의 정을 주는 은천의 부모들을 따랐고 특히 오빠인 은천을 몹시도 따랐다.

낮에는 은천이 글방에서 련무장으로 오가는 길목을 지키고 앉아있다가 별이 총총한 밤길을 서로 손목을 꼬옥 잡고 나란히 돌아오고 밤에는 등잔불아래 글공부에 여념이 없는 은천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앉아 종알종알 따라외우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기도 하고…

옆집 병술이가 제 동생 계집애를 업어주는것을 보고는 자기도 업어달라고 졸라 은천의 등에 업히기도 하고…

어느날엔가는 조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송죽이 낮에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배를 쪼그리며 오빠, 나 여기 아파 하는통에 은천은 언젠가 체기를 받았을 때 어머니가 해주던대로 송죽이의 배꼽 웃쪽을 꼭꼭 누르다가 내 손은 약손이다 하고 노래가락까지 붙여가며 살랑살랑 비벼주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이 일을 자랑삼아 일러바치는 송죽의 말을 들은 은천의 어머니는 말없이 송죽이를 업고 의원집에 갔다와서 은천을 아래방으로 불러들여 붓을 들리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쓰게 하였다.

《이 글의 뜻을 너는 알테지?》

《남녀 일곱살이면 한자리에 같이 있기를 삼가해야 한다는 뜻이오이다.》

《그래, 남자와 녀자는 어릴 때부터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니라. 너도 이제는 열살이 넘었으니 남녀의 구별쯤은 가릴줄 알아야 하지 않겠니? 물론 제 동생이 아파하니 경황없이 그랬으리라 본다만… 너도 그렇지만 그 애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다.》

《말씀의 뜻을 알겠소이다, 어머니.》

은천은 얼굴을 붉히며 뒤더수기를 긁었다.

그 이후부터 은천은 송죽이의 응석을 덮어놓고 받아주지 않았다. 손목을 잡고 걷거나 더우기 업어주는 일따위는 다시는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남녀의 구별은 송죽이 먼저 알아 가리였다. 한두살 더 먹고나서부터는 같이는 다녀도 매달리지도 않았고 수집음도 곧잘 탔다.

처녀애들은 참 별난데가 있어. …

은천은 날이 가면서 송죽의 몸에서 이상야릇한 향기까지 풍기는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은천에게 송죽은 그저 정겨운 동생일뿐이였다.

그런데 지난 대보름날 저녁 마당에 나와 달구경을 하다말고 송죽이 한 말이 그만에 은천의 마음을 휘저어놓을줄이야. …

그날 은천은 치면 떵그렁 소리가 날듯싶은 놋양푼같은 둥근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송죽이, 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면서 자기 소원을 말하면 틀림없이 그대로 된다고 했어.》 하고나서 《난 아버지, 어머니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소원해. 넌?》 하고 물었었다. 그러자 송죽은 《나도 그걸 소원했어요. 그리고 또…》 하고는 더 말이 없다. 은천이 《그리고 또 뭐니?》 하고 궁금해서 묻자 송죽은 잠시 주저하다가 《난… 난 이다음에도 지금처럼 내내 오빠하고 살고싶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흥, 그럼 너 시집은 안 가고?》 은천이 이렇게 핀잔을 주자 송죽은 은천의 등뒤로 얼굴을 가리우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금천마을에 살 때 병술오빠랑 하던 말이 생각나요. 나보고 오빠한테 시집왔다고 하던…》

《그건 그 애들이 널 놀려주느라고 한 말이구…》 하던 은천이 그만에 흠칠했다.

《넌 그 말을 정말로 믿니?》

은천이 당황해하며 묻자 송죽은 《정말 그렇게 되면 나쁜가 뭐. …》 하고는 집안으로 종종걸음을 놓아버렸다.

아니, 그럼?!…

은천은 갑자기 한방망이 맞은듯 뗑해있다가 정신을 수습했다.

송죽은 자기와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것이였다.

은천은 후드득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하지만 웬일인지 송죽의 그 말이 싫지 않은것이 또한 이상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둘사이는 서로의 행동거지가 여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이런 둘사이의 속내를 서희는 어느새 알아차리고 은근슬쩍 부채질을 한것이였다.

그래, 난 송죽이를 친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고있어. 난 송죽이를 사랑하고있은지 오래. 아버지, 어머니가 송죽이를 집에 데려온 그날부터였는지도 몰라.

은천은 자기의 가슴속에 송죽이가 이미 소중하게 자리잡혀있다는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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