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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상 편

 

1. 꼬마명궁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의 한귀퉁이에 대추나무로 둘러싸인 돌기와집 한채가 자리잡고있었다. 키낮은 돌담을 두른 이 집 안뜨락엔 짚검불 한오래기 볼수 없이 반반하다. 첫눈에도 농군의 집은 아닌것 같았다. 중대문도 없고 청기와를 올린 추녀높은 집도 아닌것으로 보아 세도대가 집은 더욱 아닌것 같았다. 집꾸밈새나 가꿈새로 보아서는 가장이 선비인듯 짐작되고 한입 보태면 안주인의 손끝이 류달리 영글고 성품이 정갈하리라는 느낌이다.

집처마밑에 매달린 제비둥지에선 어미제비가 새끼제비들을 불러들이느라 분주한데 건너집에선가 저녁을 먹자고 아이를 찾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집도 뒤울안 굴뚝모서리에선 저녁밥을 짓는 모양 연기가 늠실대며 흘러나왔다. 하지만 밥먹자고 아이를 찾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혹시 아이가 없는 집일가? 하지만 그건 아니였다.

바로 그 시각에 이 집 사랑채안에선 주인장이 아들애를 앉혀놓고 무언가 꾸지람을 하고있는중이였다.

아비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밖에서는 잘 알아들을수가 없다.

안채 부엌문을 빠끔히 열고 오리목을 한 이 집 계집종아이가 겨우 알아들은 말은 《고만한 일에 눈물을 흘리냐? 사내답지 않구나.》 하는 질책에 이어 조금뒤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아비의 말끝에 《알아들었소이다.》 하는 꼬마아들애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그런 뒤에 문이 열리며 꼬마사내애가 튀여나왔다. 그 서슬에 찔끔 놀란 계집종아이는 급히 부엌문을 닫아버렸다.

토방마루로 나온 꼬마애는 손가락으로 이마전을 꼭꼭 눌러보고는 아무 일도 없은듯 태연하게 안뜨락을 가로질러 안채에 잇달려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마님! 도련님이 주인나리에게서 꾸중을 들은가보오이다.》

어느새 안방으로 새여들어간 계집종애가 이 집 안주인에게 종알종알 일러바친다.

마님으로 불리운 쉰고개의 녀인은 계집종아이가 고해바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단정히 앉은 모양새 그대로 골똘히 자기 생각에만 잠겨있다.

이윽해서 자리를 일은 녀인은 조용히 꼬마사내가 들어간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깍지를 낀 손등우에 턱을 고인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사내애는 어미가 방안에 들어서자 무릎을 굽혀앉으며 자세를 바로했다.

등잔불에 비쳐진 사내애의 이마에 밤알만 한 혹이 난것이 얼핏 보이였다.

《이마에 웬 혹이냐?》

《…》

어미의 물음에 사내애는 머리만 외로 꼬았다.

《건너집 병술이와 또 다투었니?》

사내애는 어미가 거퍼 묻자 마지못한듯 대꾸했다.

《수박놀이에서 내가 또… 졌소이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단 말이냐?》

《애들앞에서는 울지 않았소이다. 병술이 그 애를 골받이로 넘어뜨려 이겼는데 그 애 형 갑술이가 자기 동생편을 들어 나를 허궁 들어메치는통에… 그 애 형한테 진것이 분해서 집에 돌아오면서 혼자 울었소이다. 마침 담장문밖에 서계시던 아버님 눈에 띄워 그만 꾸지람을 들었소이다.》

《갑술이야 너보다 다섯살이나 우가 아니냐. 아직은 이기기 힘들지. 눈물까지 흘리며 분해할 일이 아닌것 같구나.》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오이다. 글방할아버지도 다섯살차이는 동무지간이라고 하였소이다.》

되알지게 내뱉는 아들애의 대꾸에 어미의 눈이 잠간 감겼다 떠지였다.

《지내 욕심을 부리는게 아니냐?…》

아들애와 동갑인 병술이도 아들애보다 머리 둘은 더 큰것이다. 동네에서 그 나이또래중에 병술이가 제일 큰 반면에 아들애는 제일 작았다. 제일 작은 애가 제일 큰 애를 이기고도 그우에 형을 이기지 못한것이 분하다고 우는 아들애가 기특하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어미였다.

《뚝심으로 이기는건 진짜 이기는게 아니니라. 지혜를 겨루어서 이기는것이 진짜로 이기는거란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소이다.》

《어서 저녁을 먹자꾸나.》

어미가 일어서는데 아들애가 머리를 들었다.

《참, 어머니! 난 래일부터 글방을 필한 뒤에 련무장을 거쳐서 오겠소이다.》

《련무장조련은 네가 좀더 큰 다음에 하자고 아버지와 의논이 되여있지 않느냐?》

아들애가 같은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가 어방없이 작은지라 이 집 주인내외는 아들애의 련무장조련은 뒤전에 미루고 글을 깨치는 일을 먼저 앞세우고있었다.

《키가 작다고 무예를 익히는 일을 미루고싶지 않소이다. 아버지에게 여쭈어주시오이다.》

그 말에 녀인은 잠시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그럼 네가 아버지에게 여쭈어보렴. 아버지가 군말없이 승낙하시도록 궁냥을 잘해서 하거라.》 하며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알겠소이다.》

사내애는 잠시 두눈을 꼭 감고 무언가 생각을 굴리더니 방긋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게 어떻소이까. 내가 아버지와 활재주를 겨루어서 이기면 내 청을 들어주도록 말이오이다.》

《그건 안되겠다. 네가 아버지 활재주를 당해낼수 있느냐?》

어머니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목표를 정해놓고 아버지만큼 맞히면 이기는걸로 하면 될게 아니예요?》

《네가 아버지만큼 맞힐수 있겠니?》

《어머닌 내 솜씰 보시고서도…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안다 했소이다.》

아들애는 며칠전에 자기 어미가 동네녀인들과 활로 동전쏘기를 하는 짬을 비집고들어가 솜씨를 보인것을 다시금 상기시키고있었다.

《그땐 네가 소경 문고리잡은 격으로 얼결에 맞힌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닌게아니라 아들애는 그 나이에 그만하면 활을 잘 쏘는 축이였다. 눈썰미가 여간 아닌 아들애는 무엇이나 한번 보고들은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한번 마음먹으면 못해내는 일이 없는 신동이였다. 활쏘기로 말하면 걸음마를 뗄 때부터 손에 익힌 아들애다.

아들애의 소청을 들은 아비는 군말없이 응해나왔다.

《네가 이 아비와 감히 활재주를 겨루자 한단 말이지?!…》

조금전의 시무룩했던 기색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당돌하기까지 한 아들애의 거동앞에 아비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좋다, 래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뜨락에 나가서… 아니, 래일 아침까지 기다릴것도 없지. 지금 당장에 겨루어보자. 자신있냐?》

《좋소이다.》

《아버진 화살로 초불을 끄겠다. 너는 무엇을 맞히겠니?》

《나도 초불을 끄겠소이다!》

《초대를 다치거나 넘어뜨리면 안되니라.》

《…》

자신없으면 다른 목표를 정해도 된다.》

《아니, 나도 아버지와 똑같은 목표를 쏘겠소이다.》

《아버진 이 단궁으로 쏘겠다.》

아비는 벽에 주런이 걸려있는 활들가운데서 박달나무로 만든 활을 가리켰다.

《난 동개활로 쏘겠소이다.》

《동개활로?!…》

동개활은 주로 기마수들이 쏘는 활이다. 활이 조금 작고 화살도 짧으나 기술은 더 높아야 맞힐수 있었다.

《좋다. 네가 아직은 손힘이 딸릴테니 그렇게 하여라.》 하면서도 아비는 머리를 기웃했다.

동개활이 아무리 작다 해도 아이들이 놀음삼아 련습용으로 가지고다니는 활보다는 크다. 아들애가 자기 힘에 맞게 만들어가지고다니는 련습용활로 쏘겠다고 할줄 알았는데 제법 어른들이 쓰는 활을 그것도 기술이 높아야 맞힐수 있는 동개활로 쏘겠다는게 좀 미타했던것이다. 하지만 그건 겨루어보아야 알 일이였다. 아비는 아들애가 남달리 활을 잘 쏜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던지라 한번 눈으로 확인해볼 심산이였다.

《자, 그럼 시작하자. 나부터 쏠터이다.》

아비는 두대의 초대를 맞은켠 벽쪽에 세워놓게 하고는 단궁을 들고 살을 메우고는 시위를 약간 당기였다가 별로 조준하는것도 없이 살을 날리였다.

핑!- 소리와 함께 폭!- 하고 초불이 꺼져버렸다.

《맞았다!》 하고 손벽을 친 아들애는 자기도 동개활을 들고 모지름을 쓰며 힘껏 시위를 당겼다가 놓아버렸다.

핑!-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머지 초불도 꺼져버렸다.

《맞았다!》

아들애는 탄성을 올리며 강둥강둥 뛰였다.

《괜찮구나!》

아비도 어미도 감탄의 빛을 숨기지 않았다.

《좋다. 래일부터 은천이는 글방공부와 련무장조련을 다같이 하도록 하자.》

아비는 흐뭇하여 아들의 소청을 승낙한다는것을 선포했다.

《여보, 어서 저녁상을 들여오오!》

아비는 아들애가 부어주는 약주잔을 손에 든채 이윽토록 아들애를 바라보다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아비어미가 오래도록 자식이 없다가 마흔이 넘은 뒤에야 너를 낳고서 너무도 기뻐서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 너를 내려주었다고 은혜 은자에 하늘 천자를 따서 은천이라 네 아명을 지었지. 키가 남보다 크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였다만 오늘 보니 속대가 여간 단단하지 않구나. 조상앞에 부끄럽지 않을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단숨에 잔을 비운 아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무예를 익혀서 이다음 크거들랑 내 나라 고려를 지키는 기둥구실을 꼭 해야 하느니라.》

《아버님 분부를 명심하겠소이다.》

어른스레 맹세를 하고있는 아들애 은천은 이제 겨우 열살이였다.

코물이나 겨우 씻는 나이의 아들애에게 거목의 구실을 하라고 당부하고있는 이 집 주인어른의 이름은 강궁진, 그는 이름자 그대로 활재주에선 금천고을(경기도 시흥)아근은 물론이요 고려지경안에서도 다섯손가락안에 넣어주지 않으면 섭섭하다 할만큼 당대의 명궁으로 소문난 장수이다.

범이 범을 낳지 어찌 시라소니를 낳으랴, 나라에 외란이 나면 선참으로 변방으로 말을 달려 아낌없이 몸을 던지군 하는 이 성실한 장수에게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이제 어린 강은천이 아비의 그 넋을 이어 사랑하는 이 강토, 이 겨레를 지키는 무훈의 일화를 펼쳐보일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강은천에게는 아버지 못지 않은 또 한명의 스승인 어머니가 있기때문이였다.

은천의 어머니 을녀는 은천의 할아버지와 함께 전장을 누빈 장수의 딸이다. 적과의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는 마지막시각에 을녀의 아버지는 은천의 할아버지에게 자기 딸을 잘 키워달라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은천의 할아버지는 부탁대로 을녀모녀를 제 집식구처럼 돌봐주었고 을녀가 처녀가 된 다음에는 아들 강궁진과 짝을 무어주었다. 을녀는 아비없는 설음을 모르고 자랐고 글공부도, 무예도 사내애들 못지 않게 잘하여 은천의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주었었다.

다음날 은천은 련무장조련을 가는 자기를 바래주며 하는 어머니의 당부를 들으며 새삼스레 어머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제 련무장에 가면 너보다 체통이 큰 아이들과 어울려야 할것이니 그들과 대적하는 묘리를 잘 터득해야 하느니라.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약한 구석은 있기마련인만큼 너는 그 약한 고리를 찾아 일격하는 기술을 련마해야 할것이다. 수박의 묘리가 그러하거니와 너는 작고 연약한 자기 체질을 명심하고 상대의 손에 팔이나 다리를 되도록이면 잡히지 않도록 몸놀림이 민활해야 할것이고 일단 잡혔다 해도 즉시 상대를 제압하고 떨어져나오는 기술을 숙달해야 할것이니라.》

상대보다 팔다리가 짧은 까닭에 가까이 붙지 않고서는 타격을 가할수가 없으므로 기필코 바투 붙게 되는지라 상대에게 붙들리기 쉬우므로 그 점을 특별히 류의하라는 뜻이였다.

이런 조언을 아비가 아니라 일개 아낙에 불과한 어미가 주는데는 어린 은천이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싸움은 머리로 하는것이니라. 병졸간의 몸싸움도 육신보다는 정신이 앞서야 하는것이고 더우기 장수는 지략이 기본인만큼 너는 무예와 함께 글을 우선시하고 병서를 터득하는데 기본을 두고 공부해야 할것이니라.》

어린 은천은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나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신단 말인가!

자고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훌륭한 인걸의 뒤에는 그에 못지 않은 부모가 있는 법이어늘 은천의 경우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자식의 첫 스승은 그를 낳아키운 부모이다.

훌륭한 부모의 슬하에서 걸음마를 뗀 자식은 대체로 일생을 헛걸음하지 않는 법이다.

은천은 열살의 어린 나이에 남보다 연약한 체질의 흠을 가진 그대로 작은 가슴에 큰 포부를 안고 당당하게 자기의 걸음을 떼고있었다.

958년(고려 광종9년) 여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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