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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1921년 6월 24일 개성시 북안동(당시)에서 출생.

1943년 한성일보사 기자로 활동.

1946년 민주조선사 편집국 부국장으로 사업.

1947년 《로동자신문》(당시) 부주필로 사업.

1952년 국립영화촬영소(당시) 작가로 활동.

1956년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

1992년 7월 24일 사망.

 

세월은 인정많은 나그네가 아니다.

그 무정한 시간은 서사이래 인류가 남긴 모든 흔적을 망각이라는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버리며 흘러왔고 또 흘러갈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무소불위한 《신》도 한가지만은 지워버릴수 없으니 그것은 인민의 심장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 갈피에는 조국의 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유명무명의 참된 인간들이 남긴 삶의 발자국들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영화문학작가 한상운이 열심히, 진지하게 찍어간 생의 자욱도 그중의 하나이다.

 

 

분 수 령

 

두해째 계속되고있는 전쟁의 불길은 국립영화촬영소(당시)가 자리잡고있는 크지 않은 마을도 무자비하게 삼켜버렸다.

굶주린 까마귀떼마냥 달려들어 마구 폭탄을 퍼붓던 적기들이 퍼그나 가벼워진 기체를 남쪽으로 돌리기 바쁘게 뒤산의 방공호에서 30대의 남자가 제일먼저 뛰여나왔다.

그길로 한 농가의 웃방에 들어박힌 그는 공습때문에 밑진 봉창을 하려는듯 원고지우에 정신없이 펜을 달리였다.

그가 바로 국립영화촬영소 전속작가 한상운이였다.

뒤늦게 방공호에서 돌아온 동료들이 이번 폭격에 누구누구네 집이 불타고 또 아무개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떠들썩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

그 원고는 영화문학 《정찰병》이였다.

얼마전 한상운은 작가, 예술인들이 인민들속에서 나온 수많은 우리 영웅들을 형상할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았다.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저 남쪽에서 한몸조차 건사할길 없어하던 나에게 민주조선사 부국장, 《로동자신문》 부주필의 중임을 맡겨주신 김일성장군님!

이 준엄한 시기에 공화국에서 처음 진행된 전국영화문학현상응모에 특등으로 당선되였던 나의 재능을 귀중히 여겨 영화문학 작가대오에 세워주신 장군님!

그 하늘같은 은덕에 보답하자면 좋은 작품을 많이 써야 한다. 그렇다! 우리 영웅들의 투쟁을 형상한 영화문학을 쓰자.)

한상운은 불타는 열정을 안고 창작에 달라붙었다.

불비쏟아지는 포연속을 헤치며 작품의 주인공-영웅정찰병을 찾아 하루에도 수십, 수백리길을 걸었고 그 과정에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귀중한 이 땅과 이 행복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가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영웅전사들에 대하여 깊이 알게 되였다.

창작의 제일가는 방해군은 가증스러운 미군비행기였다.

적기들은 군사요충지도 아닌 이곳에 때없이 달려들어 줄폭탄을 퍼붓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방공호에 뛰여들어 펜을 달리다가 공습경보해제신호가 울리면 다시 농가로 돌아와 원고를 쓰군 하였다.

하지만 한상운은 주저앉지 않았다.

전쟁이 아닌가. 해빛밝은 창가에서 편안하게 글을 쓴다면 그게 무슨 싸우는 조선의 작가란 말인가.

그는 매일과 같이 반복되는 적기의 공습속에서도 분투하여 작품의 초고를 끝냈고 10여차례나 수정했다.

마침내 적후에서 싸우는 용감한 인민군정찰병들의 투쟁모습을 형상한 영화문학 《정찰병》이 탈고되였다.

한상운은 영화문학을 쓴데만 그치지 않고 촬영집단과 함께 야외촬영이 진행되는 의주지방에 따라가 촬영기를 메고 다녔으며 영화에 동원된 군인들과 한데 어울려 영화제작에 전심하였다.

예술영화 《정찰병》필림이 드디여 나왔다.

그보다 앞서 영화로 실현된 첫 작품은 《비행기사냥군조》였다.

《비행기사냥군조》(1953년)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비행기사냥군조운동을 활발히 벌린 인민군군인들의 투쟁을 반영한 작품이다.

1953년 5월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영화 《비행기사냥군조》를 몸소 보아주시고 영화가 좋다고 하시면서 비행기사냥군조원들의 용감성과 대담성을 잘 보여주었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6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새로 나온 예술영화 《정찰병》을 보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영화가 좋다고, 인민군정찰병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었다고 못내 대견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에 좋은 장면들이 많다고 하시며 마을로인이 적들의 추격을 받는 인민군정찰병을 구원하는 물방아간장면, 주인공이 적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늪에 오래동안 들어가있는 장면 등이 좋다고 하시였고 주인공을 적들의 사단중심에까지 들어가게 한것도 잘하였으며 정찰병들의 대담성을 잘 보여주었다고 치하하시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정찰병들이 적후에서 활동하는 지역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기때문에 자막을 주어 알리게 하여야겠다고 일러주신 다음 영화가 괜찮게 되였으니 빨리 전선과 후방에 보내여 돌리도록 하라고 가르치시였다.

그후 수령님께서는 최고사령부에 문화선전상(당시)을 부르시여 예술영화 《정찰병》을 다량 복사할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또한 영화촬영에서 애로되는것이 없는가를 알아보시고 자동차들이 폭격에 마사지고 화물자동차 1대로 영화를 찍고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고 하시며 즉석에서 해당 부문에 전화를 걸어주시였다.

다음날 2대의 화물차가 수령님께서 보아주신 《정찰병》의 첫 필림을 싣고 필림복사작업이 진행될 후방으로 떠나갔다.

은정어린 자동차들을 바라보는 한상운의 가슴은 세차게 들먹이였다.

(《정찰병》은 몇몇 창작가들과 배우들이 만든 영화가 아니다. 장군님께서 아니시였다면 어떻게 가렬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수 있었겠는가. … 앞으로 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여 그이께 기쁨을 드리리라.)

얼마후 예술영화 《정찰병》은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대절찬속에 상영되였다.

영화에 대한 반향은 폭풍같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창조된 6편의 예술영화들가운데서 제일 많은 관람자들을 기록하였다는것, 영화를 본 수많은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인민군정찰병이 될것을 탄원하여나선 사실이 말해주고있다.

예술영화 《정찰병》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전사들이 발휘한 대중적영웅주의를 생동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조선영화발전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평화시기도 아닌 전쟁시기에 내놓은 두개의 작품으로 한상운은 영화문학이라는 거대한 은막우에 자기의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이 조선인민의 승리로 끝나고 전후복구건설이 시작되였다.

조선은 백년이 가도 일어서지 못한다고 한 미제의 궤변을 함마와 곡괭이로 짓부시며 날마다 기적과 혁신을 창조하던 그 시대는 조선인민의 영웅적인 투쟁모습을 담은 영화를 요구하고있었다.

이 시기 한상운은 예술영화 《어떻게 떨어져 살수 있으랴》(1957년 양재춘과 합작), 《그가 가는 길》(1958년), 《북두칠성은 보이건만》(1959년 류기홍과 합작), 《새로운 나날》(1959년) 등의 영화문학을 창작하여 조선영화의 화원을 풍만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어떻게 떨어져 살수 있으랴》를 비롯한 여러편의 작품은 조국통일주제의 작품들이였다.

해방후 남쪽에 있을 때부터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분렬을 강요한 미제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을 금치 못하였던 한상운이였다.

하기에 그는 그 작품들에서 끊어진 혈맥을 잇지 못하고 신음하는 겨레의 아픔과 고통을 피타게 절규하였으며 전체 조선민족이 한사람같이 떨쳐나 조국통일을 앞당겨오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갈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그는 관록있는 작가로서 련속 성과작들을 내놓았으며 특히 천리마시대정신을 구현한 현실주제작품창작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때 우리 인민들은 어버이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따라 사회주의의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달리고있었다. 가는 곳마다에서 소극과 보수가 극복되고 세인을 놀래우는 기적이 일어나고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례외없이 시대가 낳은 영웅들-천리마기수들이 서있었다.

이로부터 한상운은 천리마시대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구가하는것을 기본형상과제로 내세우고 여기에 주되는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무렵 어버이수령님께서 강원도 수산부문당열성자회의에서 하신 간곡한 교시가 작가들에게 전달되였다.

(수령님께서 우리 청년들을 바다로 부르신다. 하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 바다를 정복하고 개척하는 청년들의 보람찬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문학을 쓰자.)

그는 곧 동해안의 어느 한 수산사업소를 찾아갈 준비를 다그쳤다.

동료들은 저마다 걱정하였다.

《처음 가는 길인데 사전료해를 해보고 떠나는게 좋지 않겠소?》

《건강치도 못한데 천천히 가라구.》

한상운은 마음의 탕개를 조이듯 취재가방을 추슬렀다.

《난 한시가 새롭소.》

평소에는 성품이 온화하였지만 일단 결심하면 앞에 산이 있든 강이 있든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그였다.

다음날 현지에 도착한 한상운은 청년들로 무어진 배인 《청년》호에 올랐다.

흔히 취재라고 하면 수첩부터 꺼내드는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그는 가방속에 넣은 취재수첩은 꺼낼념을 않고 후렁후렁한 어로공옷을 빌려입은채 청년어로공들속에 끼웠다.

배를 처음 타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도 배멀미때문에 혼났다.

처음 얼마동안은 작가라는 체면때문에 애써 참았는데 배가 세차게 흔들리자 속이 메슥메슥하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더 참을수 없어 급기야 선체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바람에 작가선생을 환영하여 풍성하게 차린 점심식사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아깝게도 물고기먹이로 되고말았다.

미리 준비하였던 흙주머니도 루미날과 같은 진정제도 소용없었다.

바다는 그의 의지를 시험하듯 오래동안 들볶았다.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는 그가 어찌나 불쌍했던지 선장은 마침 포구로 돌아가는 다른 배에 옮겨타라고 권고하였다.

한상운은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고통을 겪고서야 그는 밉살스러운 멀미를 겨우 떨구어버릴수 있었다.

《우리 배에도 기자들이 몇번 왔댔는데 견디여내지 못하고 도중에 가버렸습니다. 헌데 작가선생은 다르군요.》

선장의 투박하고 솔직한 이야기였다.

그의 등뒤에는 여러명의 청년들이 서서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한상운은 자기가 그들한테서 합격증을 받았다는것을 알았다.

거칠고 무뚝뚝하던 배사람들은 그가 영화문학을 쓰기 위하여 온 작가가 아니라 같은 선원이기라도 한듯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한상운은 어로공들과 꼭같이 아침일과에 참가하여 인민보건체조를 하고 갑판청소도 하였으며 바쁠 때면 그물도 당기군 하였다. 때로는 배사람들과 어울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술도 들이키군 하였다.

미끄러운 갑판우에서 그물가득 물고기를 끌어올릴 때의 장쾌한 기분, 만선기를 휘날리며 황금노을이 불타는 포구로 돌아오는 흐뭇한 저녁, 경쾌한 손풍금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씩씩한 노래가락…

참으로 바다는 용감하고 진취적인 청년들의 더없는 활무대였다.

작가의 눈앞에는 작품에 그려질 청년들의 모습이 생동한 화폭으로 안겨왔다.

드디여 원고지우로 펜이 날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선체가 한옆으로 기울어지건 말건 식사종이 울리건 말건 남들이 잠들건 말건 한상운은 모든 심혈을 원고에 쏟아부었다.

어로공들은 난생처음 보는 작가의 창작모습이 신기해서 그저 《야, 야!》 하고 감탄사만 련발하였다.

불꽃튀는 창작전투는 선실에서도, 어항에서도 계속되였다.

몇달후 불룩한 취재가방을 메고 창작사로 돌아온 한상운은 자신만만해서 초고를 내놓았다.

그러나 합평회에서는 작품에 그려진것처럼 바다생활이 그렇게 힘들면 도대체 누가 바다로 진출하겠는가라는 심각한 의견이 제기되였다.

한상운은 한동안 원고를 밀어놓았다가 랭정한 눈으로 다시 보았다.

그러고보니 확실히 그런 의견이 나올만 하였다. 영화문학을 본 사람들은 제쳐놓고 우선 자기부터도 그처럼 힘든 바다생활에 뛰여들 의욕이 나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해야 작품이 살아나겠는가?)

불현듯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영화문학 《정찰병》을 창작하는 과정에 만났던 인민군정찰병들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상운은 정찰병이라고 하면 날래고 힘이 세지만 대신 거칠고 무자비한 사람들로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정작 대상해보니 그들처럼 정서가 깊고 락천적인 사람들도 없었다.

한 정찰병은 틈이 나면 흥얼거리며 오선지우에 곡상을 옮겨놓군 하였고 또 다른 정찰병은 폭탄에 파헤쳐진 고지에서 수집한 광석을 내보이면서 앞으로 학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취미와 희망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말끝마다 《우리가 승리하면》 혹은 《승리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말을 자주 외우군 하였다.

그처럼 승리에 대한 확신과 락관이 있었기에 그들은 적들의 총구가 도사리고있는 위험한 적진으로 두렴없이 용약 뛰여들수 있었고 한건의 정찰자료를 위해 귀중한 목숨을 서슴없이 바칠수 있었다.

어찌 정찰병들뿐인가.

한차례 전투가 끝나면 누런 탄피가 수북이 쌓인 전호바닥에 모여앉아 흥에 겨워 화선악기를 타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인민군용사들과 고지우로 탄약과 식량을 나르며 《밭갈이노래》를 부르던 후방인민들도 승리의 신심에 넘쳐 락천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바로 그런 랑만이, 그런 양상이 부족하였다. 작품이 살자면 청년들의 락천적이고 시적인 바다생활을 그려야 한다. 그러자면… 바다로 또 가자!

다음날 한상운은 몇달전에 현지체험을 하였던 수산사업소로 떠나갔다.

《청년》호 선장과 선원들은 마치 그가 어디 잠간 갔다오기라도 한듯 스스럼없이, 그러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번에도 한상운은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어로공옷을 입고 청년들속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과정에 그는 청년어로공들의 성격과 생활이 자기가 일전에 본것보다 더 명랑하고 밝다는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한상운은 무릎을 툭 쳤다.

(그렇지. 극에서는 손해를 좀 보더라도 이들의 락천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데 형상의 초점을 집중하자.)

결국 수정된 원고에는 바다생활의 랑만과 청년들의 환희, 사랑과 투쟁의 세계가 재치있는 극작술과 밝은 양상으로 생동하게 형상되였다.

몇달후 바다를 정복하고 개척하는 미남, 미녀들의 모습을 형상한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이 세상에 나왔다.

1961년 2월 28일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을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좋은 영화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1961년 3월 16일호 신문 《민주조선》은 《랑만에 찬 바다의 화폭》이라는 제목밑에 이 영화는 천리마의 기세로 내닫는 바다의 주인공들인 젊은 어로공들의 현실생활을 폭넓게 그리고 진실하게 묘사한 훌륭한 작품이라는데 대하여 크게 소개하였다.

영화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폭발적이였는가 하는것은 당시 《갈매기호청년들》을 본 수많은 청년들이 작가에게 《바다가 정말 그렇게 랑만적인 곳입니까?》라는 질문을 담은 편지를 수백통이나 보내온데서 알수 있다.

언제인가 TV에 출연한 대형고기배 영웅선장은 《나는 그때 예술영화 <갈매기호청년들>에 넋이 빠져 바다로 진출하였습니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한상운은 더욱 박차를 가하여 천리마현실을 진실하게 보여준 예술영화들인 《용해공들》(1961년), 《처녀중대장》(1964년)을 련이어 내놓았다.

한상운은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생의 발자국을 성큼성큼 찍어나갔다.

치렬한 계급투쟁속에서 혁명의 전취물을 끝까지 지키고 사회주의제도를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위훈을 세운 은파산의 한 영웅일가의 투쟁모습을 보여준 영화문학《은파산의 일가》(제1부)창작에 달라붙었던것이다.

동시에 조선인민의 마음의 고향인 유서깊은 만경대를 기록영화로 만들데 대한 과업을 받고 그 대본창작에도 착수하였다.

한상운은 젖빛안개 흐르는 수려한 만경봉에 올라 찬란히 떠오르는 해돋이에 매혹되여 일사천리로 대본을 써나갔다.

그 기간은 원고지우에 펜을 달리는 작가로서만 아니라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위대한 수령을 알고 영웅적인민을 아는 인간,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할줄 아는 참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였다.

그러한 나날들이 흘러가던 1968년 1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은파산의 일가》(제1부)를 보아주시고 영화가 잘되였다고, 처음부터 잘 끌고 간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한상운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사랑과 믿음에 가슴들먹이면서 뿜어오르는 기백과 열정을 터쳐 영화문학 《은파산의 일가》(제2부)를 창작하였다.

그해 9월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은파산의 일가》(제2부)를 보시고 아주 잘되였다고, 혁명의 초소를 대를 이어 지키자는 사상이 잘 반영되였다고 평가해주시였다.

그처럼 좋은 작품들을 련이어 써내던 한상운은 몇해동안 이렇다 할 성과작을 내놓지 못하고 침체기에 빠져들어갔다.

일부 일군들은 그의 창작이 한물 지났다고 생각하였던지 그에게 신인들의 작품이나 지도하게 하였다.

한상운은 작가라면 한번쯤 빠지게 되는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손맥을 놓고있었다.

그러던 1971년 9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예술영화 《공중무대》의 두개 필림을 보아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상운의 창작적고충에 대하여 보고받으시고 작가들을 도와줄 방도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작가가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받은것은 우산장에서였다.

밤길을 달려온 일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밤 2시였다.

장군님의 은정깊은 교시를 전달하는 일군도, 전달받은 한상운도 서로 손을 맞잡고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적시였다.

한상운은 자기를 두고 마음쓰시는 장군님의 영상을 그려보느라니 그저 죄스러운 심정이였다.

하지만 새 영화문학을 기다리고계실 장군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가다듬고 창작을 시작하였으나 끝내 꼬나내지 못하고 또 한해를 넘기고말았다.

1972년 8월 어느날 영화문학작가들의 협의회를 지도하시기 위하여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르던 한상운은 그만 의자등받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러는 그를 굽어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작년에 작품을 내놓겠다고 결의하고는 왜 아직도 내놓지 못했습니까? 힘이 모자라면 내가 힘을 주겠습니다.》

한상운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안겨왔다.

(아, 장군님! 대체 제가 뭐라고 이렇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신단 말입니까!)

그의 귀전에는 장군님의 말씀이 운명의 계시처럼 계속 쟁쟁히 들려왔다.

《힘이 모자라면 내가 힘을 주겠습니다.》

한상운은 허리를 쭉 폈다.

답보와 침체, 로쇠로 기운이 진해가던 몸에서 새 힘이 용솟음치고있었다.

그것은 육체적힘의 분출이 아니였다. 지난날 조국과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꽝꽝 써내던 공로있는 작가를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주시려는 위대한 어버이의 사랑이 안아온 정신적힘의 분출이였다.

그는 자기앞에 펼쳐진 래일의 밝은 앞길을 보고있었다. 그리고 이미전에 찍혀진 발자국과 더불어 새 출발의 발자국들이 힘있게, 깊숙이 찍혀지는것도 보고있었다.

그렇다. 작가 한상운은 인생의 분수령을 넘어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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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노래로 빛나는 삶 -인생의 노래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성장의 나날-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위인의 손길에 이끌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1. 노래로 빛나는 삶aa-노래속에 꽃피는 생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갈림길에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위대한 스승과 관록있는 제자-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노력과 열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소원과 계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분수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aa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생의 메아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항거-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을 위하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고마워라, 내 안겨사는 어버이품이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이여 어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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