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1921년 6월 24일 개성시 북안동(당시)에서 출생.

1943년 한성일보사 기자로 활동.

1946년 민주조선사 편집국 부국장으로 사업.

1947년 《로동자신문》(당시) 부주필로 사업.

1952년 국립영화촬영소(당시) 작가로 활동.

1956년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

1992년 7월 24일 사망.

 

세월은 인정많은 나그네가 아니다.

그 무정한 시간은 서사이래 인류가 남긴 모든 흔적을 망각이라는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버리며 흘러왔고 또 흘러갈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무소불위한 《신》도 한가지만은 지워버릴수 없으니 그것은 인민의 심장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 갈피에는 조국의 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유명무명의 참된 인간들이 남긴 삶의 발자국들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영화문학작가 한상운이 열심히, 진지하게 찍어간 생의 자욱도 그중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 (1)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한여름의 소나기를 비웃듯 제법 소리치며 내리는 마가을 어느날이였다.

한때 동방의 강대한 통일국가로 명성높았던 고려의 옛 도읍지였던 개성의 중심에서 때아닌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녀석, 다시 말해봐라. 뭐 내가 착취자라구?》

《우리 집 재산은 머슴과 소작인들의 피와 땀으로 축적한것이니 아버진 착취자란 말입니다.》

《좋다. 난 이제라도 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줄수 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중학교에 다니겠느냐?》

《…》

《어디 그뿐이냐. 네 어머니와 열씩이나 되는 형제들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

《…》

《그것봐라. 세상일이란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어쨌든 아버진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고있단 말입니다.》

《닥치지 못해? 넌 그래 내가 언제 한번 호강하는걸 봤느냐? 그리고 네 어머니가 종일 부엌데기들과 같이 동자질하는걸 못 보느냐 말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아버지는 갈데 없는 착취계급입니다. 난 차라리 굶고 헐벗어도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았으면 합니다.》

대청마루가 쾅- 하고 울렸다.

《에끼, 이 후레자식같으니… 썩 나가!》

불빛이 환한 고대광실의 솟을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중학생복차림의 청년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이즈음 자주 벌어지는 부자간의 다툼질에 어지간히 습관된 소작인들은 언감생심 방문을 열지 못하고 걱정만 하였다.

《순실이 아버지, 요즘 왜 자꾸 저럴가요?》

《이런 맹추라구야. 그게 바로 거 뭐라드라… 오, 계급투쟁이라는거야. 》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아들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춘부장한테…》

《그래서 식자우환이라는거지.》

그사이에 청년은 갈수록 세차지는 비발속을 뚫고 씨엉씨엉 걸어갔다.

별안간 먹물을 뿌린듯 캄캄한 중천에서 몇마리의 《황룡》이 구불거리며 지나갔다.

그 창백한 섬광에 청년의 얼굴-이글이글 불타는 두눈과 날이 선 코, 꾹 다물린 입술이 드러났다.

그가 바로 한상운이다.

아버지와 다투고 결김에 집을 뛰쳐나오긴 하였지만 야밤삼경에 자기가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있는 그였다.

명백한것은 백리주변의 앙상한 초가들을 위압하듯 불빛이 휘황찬란한 그 집 처마밑으로 다시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는 무춤 멈춰섰다.

부지불식간 분노와 결단으로 충만된 오늘을 넘어 어쩔수없이 맞이해야 하는 암담한 래일이 생각난것이였다.

(반년만 있으면 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와 의절한다면 공부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문득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귀전을 울렸다.

《세상일이란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한상운은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내그었다.

쇠집게로 조이는것처럼 아파나는 머리속에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읽던 맑스주의의 신비한 세계와 피할수 없는 현재의 처지가 세차게 충돌하고있었다.

입안으로 흘러든 비릿한 비물을 퉤- 하고 내뱉은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맑스의 《자본론》을 구해다 준 중학교동창생의 집쪽으로 향하였다. …

한상운은 이 땅우에 망국의 비운이 한층 짙어가고있던 1921년 6월 개성시 북안동(당시)의 부유한 상인가정에서 10남매중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개성지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부호였다.

한상운의 조부는 선량하고 순박한 선조들이 물려준 구슬픈 유산-가난을 그대로 감수할수 없을만큼 피끓는 남아로서 갖은 노력끝에 행상군으로 되였고 나중에는 대도매상으로 솟구쳐오른 사람이였다.

한편 그는 누리는 향락보다 자신의 피와 땀으로 마련한 돈을 차근차근 세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 좋아하였는데 그 만족감을 비단옷처럼 걸치고 강낭밥에 된장찌개를 달게 먹다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섭섭치 않게 닫은 인간이기도 하였다.

조부로부터 근검절약을 재부축적의 비방으로 넘겨받은 한상운의 아버지 한종수는 선대처럼 수수하게 입고 먹으면서도 요대와 면사 등을 비롯한 의류잡화들과 주단, 포목으로 더 큰 밑천을 잡은 다음 서울과 평양, 부산을 제 집처럼 나들면서 기업을 넓힌 상업계의 거물이였다.

당시 개성에 있던 덩지 큰 백화점과 주요 인삼포전들, 주단포목점, 수십만평의 토지가 그의 소유였다고 볼 때 그 재산의 규모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었다.

금상첨화라고 한종수는 돈과 재산을 불쿠는 재간외에도 미구에 열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보금자리가 될 고래등같은 기와집의 설계와 시공을 직접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강도적인 《한일합병조약》이 날조되자 기울어진 국운을 통탄하며 3년동안 상복을 벗지 않은 우국지사였다. …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마련이다.

아버지를 더하지도 덜지도 않게 닮은 한상운은 대나무처럼 성정이 바르고 물들이지 않은 무명천처럼 마음이 깨끗한 청년이였다.

비록 부자간에 모순이 격화되여 가끔 승부없는 말싸움이 일어나군 하였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아버지가 셋째아들에게 장차 자기의 대를 이어 행운을 지닌 상인이 되라고 이름을 상운이라고 지은것을 보면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한상운은 개성지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의 아들로 태여났지만 사치와 랑비의 세계와는 담을 쌓은채 순진한 유년시절을 꿈처럼 흘러보냈다.

어린 소년은 글을 깨우치자마자 손에 아버지의 때묻은 주산이 아니라 보풀이 허옇게 인 력사책들을 들고 정신없이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애국명장들의 무훈담은 작은 가슴속에 하나, 둘 의문을 남겨두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은 신묘한 지략으로 수백만의 외적을 물리쳤다는데 왜 지금은 그런 장군이 없는가, 그랬더라면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것이 아닌가, 또 리순신장군은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데 어째서 우리것은 없고 왜놈들의 큰 배들만 뚜- 하고 달리는가…

그 의문점들은 점차 무서운 향학열로 바뀌여졌다.

원체 머리가 좋고 아는것이 많은 한상운은 개성제1공립보통학교시절 학업순위에서 언제나 첫자리를 차지하군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서 고중에 입학하였다.

그 시기로 말하면 학생들속에서 맑스의 명제들을 줄줄 외워야 똑똑한 청년이라는 인식이 류행처럼 떠돌던 때였다.

승벽심이 강하고 감수력이 뛰여난 한상운은 맑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리념서적들을 열심히 탐독하면서 선진사상에 공감하였고 당대 사회의 불합리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의식변화는 그가 주동이 되여 진행한 비밀독서회조직과 일제의 황국신민화교육정책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로 이어졌다.

한상운의 주위에는 각사탕에 달라붙은 개미들처럼 숱한 동료들이 묻어다니였다. 따라서 총명하고 재력까지 겸비한 이 호남아는 군계일학과도 같은 존재일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텅텅 비여버린 중학교에 왜놈경찰이 나타났다.

후각이 발달한 왜놈들은 동맹휴학의 주동인물이 바로 개성에서 소문이 뜨르르한 부자집의 셋째 도련님이라는것을 인차 밝혀냈다.

한상운의 아버지는 범 무서운줄 모르고 날뛰는 하루강아지같은 자식의 발목에 소름끼치는 족쇄가 채워질가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그무렵 번창하던 가세도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아버지는 한상운에게 이렇게 토설하였다.

《셋째 너까지만 돈을 대주겠다. 그아래는 더 공부시키지 못하겠다.》

그러면서 상업이 아니라 의학공부를 꼭 하라고 오금을 박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상업대신 의학을 전공하라고 이른것은 자못 놀라운 일이지만 알고보면 그 말에는 늙은이다운 타산이 들어있었다. 그는 뜻밖의 방향전환으로 자식의 가슴속에 웅크리고있는 위험한 《좌익소아병》을 능히 고칠수 있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 훈시는 한상운에게 있어서 울고싶은데 뺨치는 격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아버지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다.

의학은 환자들의 병든 육체는 고칠수 있지만 식민지노예의 운명은 고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한상운은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들어갔다.

그에게 문학이라는 고상한 세계는 가물끝에 찾아든 단비와도 같았다.

망국노의 굴욕을 쓰겁게 감수하며 성장한 열혈청년은 실력으로 사무라이후손들을 짓눌러버릴 결심을 품고 문학의 신비한 세계속으로 뛰여들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옆에는 세계적인 영화들을 상영하는 이름난 영화관이 있었는데 한상운은 약차한 금액을 요구하는 관람이였지만 하루가 멀다하게 외국영화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조선영화가 나아갈 앞길을 모색하였다.

오전에는 강의, 오후에는 영화관람때문에 바삐 돌아치는 속에서도 그는 밤이면 《공산당선언》, 《자본론》과 같은 도서들을 파고들었다.

한상운은 정세추이에도 민감한 청년이였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국면이 저들에게 불리하게 되자 전쟁의 부담을 덜기 위한 저축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목터지게 부르짖으며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전쟁대포밥으로 내몰려고 발악하였다.

원래 일제는 1938년 2월 《륙군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수 있도록 하였다.

거듭되는 참패로 병력자원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일제는 1940년대에 이르러 급기야 야만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렇게 떠들고있었다.

《우리 정예황군이 남방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있는 대동아전쟁하에서 반도청년들에게 대동아건설의 성업에 용약 참가할 길을 열어주는 조선청년체력검사는 작 1일부터 전조선 272개소의 검사장에서 일시에 개시…》

어느 한 중학교의 일본인교장은 이렇게 지껄이였다.

《에또,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내지의 동포로서, 내지의 반려로서 내지와 더불어 공존공영, 영욕부침을 함께 할 민족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애초에 따로 있었던것이 아니다. 에또, 강역이 린접해있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동조동근 한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민족인것이다. 그러므로 현하 조선인으로서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옥쇄하는것은 최대의 영광이고 무상의 행복이 아닐수 없다. …》

식민지조선에서 징병제가 독을 쓰고있을 때 일본에서는 전쟁열기가 최대로 폭발하고있었다.

전쟁의 세례를 겪어보지 못한데다 본토를 사수하겠다고 악악거리는 부녀자들의 모습에서 강한 충동을 받은 일본청년들은 《아까가미》(붉은색징집령장)를 받으면 두말없이 전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화살에 멱을 꿰인 일본이라는 여우가 숨통이 끊어질 날은 바야흐로 다가오고있었다.

그러한 때에 조선청년으로서 왜놈들을 위해 열대의 쟝글에서 딩굴다가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총알에 맞아 죽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한상운은 대학졸업식을 하루 앞둔채 귀국하고말았다.

고향인 개성이 아니라 서울에 간 그는 한성일보사 기자로 취직하였다.

일반적으로 기자는 정의와 량심의 대변자라고 하지만 식민지조선에서는 총독부의 관제라는 끈에 든든히 매여있는 가련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신문사에 키가 늘씬하고 단아하게 생긴 처녀가 나타났다.

그 처녀는 주필을 만나러 왔었는데 한상운은 상대를 보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후두둑 떨리는것을 느꼈다.

알고보니 처녀는 리화녀고를 졸업한 민행녀였다.

총각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아니면 처녀쪽에서 먼저 그랬는지 알수 없지만 그후 두사람은 자주 만났고 인생의 반려로 이어지는 사랑의 오솔길을 어깨나란히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관계가 무르익어갈무렵 민행녀는 총각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처녀는 편지라는 서신거래가 얼마나 편리한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며 밤새워 고른 동서고금의 금언들에 애정을 담아 또박또박 적어보냈다.

며칠후 한상운한테서 회답편지가 날아들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속지를 펼치던 민행녀는《아!-》 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처녀의 손에서 방바닥에 떨어진 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있었다.

《조선글로 쓰시오.》

유명한 리화녀고졸업생이라고 해도 역시 처녀는 처녀였다.

지엄한 삼강오륜이 두눈을 부릅뜨고있던 세월에 아무리 신식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처녀쪽에서 먼저 애정의 편지를 쓴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그래도 용기를 내여 편지를 보냈는데 단마디로 면박을 받았으니 그 창피감이란 사품치는 강물속에 뛰여들어 죽고싶을 정도였다.

분해서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있느라니 어느결인가 그 감정은 사라지고 한상운의 름름한 모습이 안겨오는것이였다.

《조선글로 쓰시오.》

그때로 말하면 서신거래는 물론 일상 대화에서도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물고 따귀까지 맞아야 하는 험악한 세월이였다.

그런데 한상운은 버젓이 조선글로 쓰라고 요구한것이였다.

그속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 자기 민족이 창조한 아름다운 문화에 대한 높은 자긍심이 넘치고있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을수록 한상운이라는 청년이 돋보이고 나중에는 대단한 혁명가처럼 생각되였다.

며칠후 그들은 다시 만났다.

대범한 한상운은 처녀의 잘못을 더 꺼들지 않았다.

민행녀도 총각의 관후한 인품앞에 고개가 숙어졌다.

두 청춘은 의미심장한 눈길들로 서로 화해하였고 사이좋게 거리를 거닐었다.

그날의 화제는 민행녀의 질문으로 시작되였다.

《상운씨, 왜놈들이 과연 망할가요?》

한상운은 자신에 넘친 목소리로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것을 구체적인 자료를 들어가며 분석하였다.

민행녀의 가슴속에는 사랑의 불길이 점점 더 세차게 타올랐다.

순간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자기 이름의 《행》자와 한상운의 《운》자가 합쳐지며 부각된 《행운》이라는 두 글자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듯이 여겨지면서 아직은 처녀의 가슴속에 소중히 묻어둔 꿈이지만 필경 현실로 될 자기들의 미래를 그려보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몇달 지나 한상운과 민행녀는 자기들의 소중한 모든것을 기꺼이 합쳤다.

력사적인 8월 15일의 아침은 례사롭게 밝아왔다.

그날 오전까지도 서울은 여느때처럼 흘러가고있었다.

신문사에 나갔던 한상운은 점심을 먹으려 집에 왔다가 습관적으로 라지오를 켰다. 당시 정세가 뒤숭숭하였던것이다.

그는 인차 긴장해졌다.

라지오에서 왜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잡음이 섞여서 잘 알아들을수 없었지만 그는 대뜸 그것이 항복선언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벌떡 몸을 일으킨 한상운은 옆에 있던 안해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여보, 왜놈들이 망했소!》

안해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듯 되물었다.

《왜놈들이 망했다구요?》

한상운은 흥분하여 더 크게 소리쳤다.

《나라가 해방되였단 말이요.》

그제야 그것이 사실임을 안 안해는 물기젖은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쩜… 당신의 말이 꼭 맞았군요.》

그때 밖에서 《조선해방 만세!》의 함성이 터졌다.

거리로 뛰쳐나간 한상운부부는 파도처럼 흐르는 대렬속에 끼여들어 《조선해방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그날 밤 한상운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여난 셋째아들, 력사책에 넋을 묻어버렸던 소년시절, 일본에서의 류학, 징병을 피하여 단행한 귀국…

(그 행로우에 나는 무수한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나 망국의 세월은 큼직한 비자루로 쓸어버리듯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다. 있다면 굴욕과 비탄속에서 찍은 희미한 자욱뿐이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그렇다. 래일부터 새삶의 자욱을 힘차게 찍어갈것이다!)

다음날 신문사로 나간 한상운은 동료들과 마주앉았다.

인차 신문사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였고 발기자인 한상운은 그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우선 우리 글자로 된 신문을 발행해야겠소.》

자치위원회 위원장의 첫 요구였다.

온 신문사가 떨쳐나섰다.

한상운과 동료들은 낮에 밤을 이어 작업하였다.

드디여 구성이 다양하고 조형성이 풍부한 조선글자로 찍은 첫 《인민일보》가 세상에 나왔다.

신문을 본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이것 보게. 우리 신문이구만.》

《우리 조선글자가 간사한 왜놈글자보다 얼마나 더 보기 좋은가.》

그러던 어느날 일본군고급장교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자치위원회 위원장 한상운은 그들에게 신문사밖으로 나갈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칙쇼!》

일본장교는 서슬푸른 군도를 뽑아들고 베여버릴것처럼 다가들었다.

한상운은 끄떡않고 서서 그자를 노려보았다.

수많은 조선사람들의 피가 묻은 군도를 틀어쥔 일본장교였지만 해방된 조선의 청년-당당한 지식인의 기개앞에서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일본은 패망했소. 그러니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한상운의 추상같은 호령이였다.

일본장교는 자기가 패전국의 일개 장교라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는지 맥없이 경례하고 돌아가버렸다.

그 장면을 지켜본 동료들은 모두 통쾌해하였다.

《제놈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별수없지.》

《아무렴, 이제야 해방이 됐는데 뭘 무서울게 있나?》

그러나 그들은 해방조선의 푸른 하늘가로 서서히 밀려드는 민족분렬의 검은구름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 조선인민혁명군과 쏘련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앞에 일본군이 급속히 무너지자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당황해났다. 미국은 1946년에 가서야 도꾜를 점령할것을 계획하고있었던것이다.

교활한 미국은 극동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조선을 타고앉자면 저들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타산하였다.

하여 군사적으로 아무런 의의가 없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미증유의 핵버섯구름이 피여올랐다.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선포하자 트루맨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오끼나와의 미24군단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현지에 도착하여 남조선을 견지할데 대한 지시를 주었다.

맥아더는 8월 19일 비행기로 전시첩보부 요원들을 서울에 파견하고 그들을 통하여 8월 20일 총독부에 틀고앉아있던 조선총독 아베에게 《현지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할것이며 만일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에는 엄격히 추궁》할것이라는 《특별명령》을 전하였다.

한편 미24군사령관 하지는 관하부대들에 승선명령을 내리고 비행기로 남조선에 《포고문》을 살포하도록 하였다.

《포고문》에서 그는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게 된다는것을 선포하고 《주민의 경솔,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없이 인명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도 황페화될것》이니 《장래의 남조선을 위해서는 동란을 발생시킬 행위가 있어서는 절대 안되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9월초 미24군의 선견대가 패전국의 국민답게 허리를 갑삭갑삭하는 일본인들의 물길안내를 받으며 인천에 상륙하였다.

카빈총을 멘 양키병사들이 나타나자 해방의 열기로 들끓던 서울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인민들의 창의로 수립되였던 서울시인민위원회가 강제로 해산되였고 새 조선건설을 지향하는 민주인사들과 애국적인민들은 해방전에 자기들을 괴롭혔던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로 또다시 끌려갔다.

그 와중속에 미군정청은 적산이라는 구실로 앞잡이들을 내몰아 신문사를 점거하였다.

24살의 한상운은 신문사 2층 사무실창문을 까고 뛰여내렸다.

처가에 은신한 그는 억이 막혀 방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해방자》라고 믿었던 미국이 침략자라는것을, 조선사람들의 머리우에 다시금 망국의 비운이 드리워졌다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위험은 시시각각 다가들었다. 미군정청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위기일발의 순간 한상운은 북녘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없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주고 왜놈들이 가지고있던 공장, 기업소들을 인민의 소유로 만든 인민의 세상, 참다운 언론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그 별천지는 학생시절부터 그려본 꿈같은 세상이였다.

가자, 북으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사를 펴시는 그곳으로!

한상운은 애국적이며 량심적인 지식인들을 불러주신 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서울에 온 일군(그는 장인의 옛 친구였다.)을 따라 38°선을 넘었다.

임신한 안해도 남편을 따라섰다.

바늘따라 실간다는 범속한 례절때문만이 아니였다.

베벨 아우구스트(도이췰란드사회민주로동당의 창건자)가 감옥에서 쓴 《녀성과 사회주의》를 한장한장 번지며 남편 못지 않게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그는 온 겨레가 추앙하는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면 참된 인민의 세상을 보게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던것이다.

한상운이 안해를 부축하며 자유롭고 행복한 민주조선의 대지에 재생의 첫 자욱을 찍은것은 1946년 7월이였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노래로 빛나는 삶 -인생의 노래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성장의 나날-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위인의 손길에 이끌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1. 노래로 빛나는 삶aa-노래속에 꽃피는 생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갈림길에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위대한 스승과 관록있는 제자-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노력과 열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소원과 계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분수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aa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생의 메아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항거-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을 위하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고마워라, 내 안겨사는 어버이품이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이여 어서 오라-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