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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1919년 5월 20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출생.

1939년 중국 할빈과 서울의 여러 극단 연극배우로 활동.

1945년 8. 15이후 서울예술극장 연극배우로 활동.

∙ 1950년 조선인민군에 입대.

∙ 1953년 국립연극극장(당시) 연극배우로 활동.

∙ 1955년 교통성예술극장(당시) 단장으로 사업.

∙ 1966년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 영화배우로 활동.

∙ 1989년 3월 6일 사망.

∙ 인민배우.

 

영화배우 황영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혁명연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각색한 예술영화《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나오는 조선침략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하여 갖은 위협과 협잡, 회유기만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한 이등박문의 가증스러운 몰골을 보면서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한다.

배우의 연기가 진실할수록 관객들은 영화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며 그 과정에 나름대로 작중인물을 사랑하거나 혹은 증오하기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어른들도 간혹 길가에서 황영일을 만나면 마치 그가 진짜 이등박문인듯이 랭대하군 하였다.

그때마다 황영일은 그들의 분노가 당연한듯 고개를 수굿하고 걸어가군 하였다.

인민배우 황영일!

사람들은 그가 연기를 진실하고 특색있게 한다고 감탄하였지만 50이 넘은 나이에 참다운 연기형상창조의 첫걸음을 떼였으며 인생말년에 창조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때 영화계를 떠나려고 하였던 황영일을 자랑스러운 영화예술인대오에 세워주시고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키워주신 위대한 사랑의 전설을 세상에 전하려고 한다.

 

위대한 스승과 관록있는 제자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어린 조치로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에서 계속 배우생활을 하게 된 그날부터 황영일의 가슴속에는 한가지 소원이 소중히 자리잡았다.

그것은 먼발치에서라도 장군님을 한번 만나뵈웠으면 하는것이였다.

그이를 뵈오면 허리를 열백번 굽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싶었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혹시 렴치없는 인간이 아닐가. 사실 영화배우치고 나처럼 크나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처럼 바쁘신 장군님을 만나뵙겠다고 욕심을 내다니…)

아마도 말타면 경마잡히고싶다는 속담은 자기를 두고 생겨난 말 같았다.

그는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심정을 가까스로 다잡고 맡은 역인물에 대한 연기형상을 무르익혀나갔다.

그러던 1970년 9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그날 밤 황영일은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던것이다.

흥분한 그는 안해에게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에구, 당신두 참…》

한심하다는듯 혀를 끌끌 차는 안해를 보자 황영일은 아쉬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꿈과 현실은 반대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될줄을 어찌 알았으랴.

다음날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의 창조과정을 지도하시기 위해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창작가들을 만나주시다가 문득 황영일을 알아보시고 《아, 황동무도 왔구만.》라고 하시며 반갑게 손잡아주시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손등을 꼬집어본 황영일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그이께 삼가 인사를 올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번에도 부정인물인 천대산대장역을 맡아하지 않았는가고 다정하게 물으시였다.

황영일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씀드렸다.

천리혜안의 예지를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한마디 대답에서 황영일을 비롯한 일부 배우들속에 남아있는 옳지 못한 창작태도를 꿰뚫어보시였다.

하지만 장군님의 높은 뜻을 알수 없었던 황영일은 영화에서 부정역형상을 수행하는데 대하여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고 아무런 긍지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에서도 부정역인 천대산비적대장역에 대한 깊은 연구없이 겉발림식의 역형상을 창조하였던것이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황영일의 그릇된 창작태도를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황영일은 비로소 자신의 연기가 그이의 숭고한 미학사상과 비해볼 때 얼마나 뒤떨어져있는가를 깊이 느끼게 되였다.

그는 즉시 새로운 연기안을 세우고 진실한 형상을 창조하는데 달라붙었다.

이렇게 되여 황영일은 불과 얼마 안되는 장면이지만 아주 교활하고 음흉하기 그지없는 비적대장역인물의 내면세계를 창조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다.

1970년 9월 하순 어느날 예술영화 《36호의 보고》수정작업필림을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황영일동무가 연기를 확실히 잘합니다.》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1977년 12월말 예술영화 《보이지 않는 요새》의 두개 필림을 보시였을 때에도 황영일동무가 연기를 잘한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때부터 황영일은 장군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모시고 연기창조에 모든 열정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이께서 밝혀주신 주체적배우연기리론의 높은 경지를 깨닫자면 아직 많은 기일이 걸려야 하였다.

1973년 10월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촬영현장을 찾아주시였다.

배우들의 연기형상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던 그이께서는 배우들이 출연할 때에는 역인물들이 입는 옷을 그대로 입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황영일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는 그에게 부정인물형상에서 지침으로 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누가 자본가를 형상하는가 하는데 따라 형상목적각도가 달라진다고 하시며 우리 배우들과 부르죠아사회에서 돈에 매인 연기자사이에는 자본가들의 생활을 그리는 목적도 다르고 각도도 다르다, 우리 배우들은 자본가들의 썩어빠진 몰골을 그대로 형상하여야 한다, 배우들은 이러한 요구를 똑똑히 알고 연기를 하여야 한다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배우들이 배역을 맡아가지고 형상단계에 들어가면 그 역인물들의 세계에서 생활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부정인물들의 생활세계에 아무리 깊이 끌려들어간다고 하여도 사상체계가 바로서면 일없다고 가르치시였다.

황영일은 장군님의 교시를 자자구구 따져가며 자신을 더 깊이 돌이켜보았다.

(나는 하필 사람들의 증오를 받는 부정역만 맡아해야 하는가고 좋지 않게 여기고 그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그러한 나를 깨우쳐주시였다.

아, 위대한 스승!

세상에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제자는 없다.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부정역인물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완전히 고쳐야 한다. 완전히!)

그날에 주신 장군님의 교시는 후날 황영일을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날수 있게 한 귀중한 지침이였다.

뭐니뭐니해도 그가 크게 성공한 역인물형상은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이등박문의 역이였다.

이 역을 분담할 때 창조집단에서는 론의가 많았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황영일에게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이등박문의 역을 대담하게 맡겨주시고 그 창조과정을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친히 보아주신 연출대본을 받아안던 날 황영일은 흥분으로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는 장군님의 믿음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다음날부터 황영일은 이등박문의 자료를 수집하였고 역인물의 성격에 맞는 말투와 행동을 수록한 수십페지에 달하는 연기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탐구를 거듭하여도 좀처럼 형상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인물성격의 외적표현인 분장에서부터 애로가 제기되였다.

창작가들과 마주앉아 토론을 거듭하였지만 누구 하나 신통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지금껏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 《북극성》, 《36호의 보고》를 비롯하여 여러 영화들에서 부정역을 맡아하였지만 이번처럼 난감하기는 처음이였다.

(과연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안타까움속에 촬영날자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고심끝에 황영일은 이등박문의 수염을 많이 붙이는것으로 분장을 완성하였다.

그가 분장을 하고 나타나자 창작가들은 역인물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그대로 촬영하자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1978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촬영현장에 찾아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창작과정에 나타난 부족점들을 친히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며 이등박문의 분장을 보자고 황영일을 부르시였다.

그가 장군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서자 그이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분장을 해서 몰라보겠다고, 가까이 오라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분장과 의상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살펴보시였다.

그러시던 그이께서는 그 무엇인가 기억을 더듬으시는듯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이등박문의 분장이 잘 안되였다고, 황영일이 분장한 수염이 그놈의 수염보다 숱이 지나치게 많다고 일깨워주시였다.

황영일은 죄스러웠다.

사실 그것은 이등박문의 사진을 본 표상을 더듬으면서 품을 들여 만든 수염이였다.

그를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력사적사실을 형상한 예술영화이기때문에 그 시대의 인물들을 가식없이 생동하게 그려야 한다고, 그러자면 분장을 잘하여 분장을 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력사물영화에서는 인간이 자연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등장할수 있도록 분장형상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배우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였던 결함을 한순간에 포착하시고 배우는 마땅히 분장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놓쳐서는 안된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황영일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치심을 받는 자기야말로 이세상 그 어느 배우도 지닐수 없는 크나큰 행복을 안고 사는 영화배우라는것을 다시금 느끼였다.

장군님께서 촬영현장을 다녀가신 후 수많은 당대의 력사자료들과 사진자료들이 도착하였다.

황영일은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그 자료들을 가지고 력사적사실에 어울리게 이등박문의 수염을 다시 붙였으며 끝끝내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의 분장을 완성할수 있었다.

다음해 3월 3일이였다.

그날 야외촬영장에서는 초대조선통감 이등박문이 서울 남대문거리로 입성하는 장면을 촬영하고있었다.

이등박문으로 분장한 황영일은 사륜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네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남대문을 향하여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황영일은 매국배족의 무리들의 미친듯 한 부르짖음에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답례하였다.

무심결에 촬영기쪽을 보던 그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글쎄 위대한 장군님께서 촬영기구도경을 들여다보고 계실줄을 어찌 알았으랴.

나라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느라 분망하신 그이께서 귀중한 시간을 내여 창조과정을 지도해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그였다.

다음순간 자신의 미숙한 연기로 하여 그이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았는가 하는 초조감이 뒤따랐다.

그는 가슴을 조이며 소식을 기다렸다.

얼마후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등박문의 분장이 잘되였다고, 이등박문의 역을 잘했다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황영일은 그만 목이 꽉 메였다.

(내가 놓친 이등박문의 분장은 물론 연기형상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깨우쳐주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다. 그이가 아니시라면 어찌 오늘을 생각할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이께서는 모든 성과를 나에게 돌려주시니 이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극도로 오만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침략괴수의 몰골에 민족의 피가 저절로 끓게 하는 인상깊은 연기형상, 참으로 그것은 한편의 영화를 통해서도 시대와 력사의 진모가 심오히 밝혀지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신 장군님의 탁월한 령도가 낳은 명화폭이다!)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세상에 나오자 폭풍같은 반향이 일어났다. 특히 이등박문의 역을 형상한 황영일은 일약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던 1979년 4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황영일은 뜻밖에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황영일에게 인민배우의 명예칭호가 수여된 소식을 친히 알려주시며 《축하합니다. 늙지 말고 계속 좋은 형상을 창조하시오.》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1980년 5월 한 일군이 황영일을 찾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하며 일군의 뒤를 따라 어느 한 방에 들어서던 황영일은 우뚝 굳어졌다.

눈앞에 희한한 생일상이 차려져있었던것이다.

그는 해당 일군을 통하여 장군님께서 자기의 60돐생일상을 차려주도록 하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다.

원래 그의 60돐생일은 이미 지나갔었다.

한해전에 아들, 며느리들은 그의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떨쳐나섰지만 황영일은 절대로 차리지 못하게 하였었다.

사실 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이등박문연기를 잘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하나하나 이끌어주시였기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큰일이나 했다고 생일상을 차리는가?

그가 얼마나 엄하게 말렸는지 자식들은 생일상을 차릴 엄두를 내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그에게 이처럼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신것이였다.

감격에 목이 멘 그의 눈앞으로 지나온 나날들이 눈굽을 적시며 안겨왔다.

청산벌에 농촌지원을 나갔을 때 자기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보시고 몹시 다쳤는가고 걱정하시는 장군님앞에서 어깨를 떨며 흐느껴울던 일, 예술영화 《우리 동무들》의 작업필림을 보시다가 화면에 비쳐진 자기의 얼굴을 보시고 머리가 다 나았는가고 하시며 보내주신 귀한 약을 받아안고 어쩔바를 몰라하던 일,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손목시계를 받아안고 그 사랑에 높은 실력으로 보답하리라 굳게 마음다지던 일…

그가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치는데 항일의 로투사가 다가와 늙지 말고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만들라고 하신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해주는것이였다.

순간 황영일은 참고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 장군님! 한때 영화계를 떠나려고 하였던 저를 한품에 안아주시고 관록있는 인민배우로 내세워주신것만도 분에 넘치는데 오늘은 또 생일상을 차려주시고 고무의 말씀까지 안겨주시니 이 사랑, 이 은정을 무슨 말로 다 전해야 합니까!)

그때 그는 60고개를 넘어서고있었다.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황영일은 위대한 스승께서 안겨주신 크나큰 믿음과 청춘의 열정으로 예술영화 《전초선》, 《첫 보안서원들》, 《새 정권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편의 예술영화들에서 다양한 인물형상을 특색있게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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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노래로 빛나는 삶 -인생의 노래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성장의 나날-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위인의 손길에 이끌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1. 노래로 빛나는 삶aa-노래속에 꽃피는 생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갈림길에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위대한 스승과 관록있는 제자-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노력과 열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소원과 계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분수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aa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생의 메아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항거-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을 위하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고마워라, 내 안겨사는 어버이품이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이여 어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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