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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1919년 5월 20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출생.

1939년 중국 할빈과 서울의 여러 극단 연극배우로 활동.

1945년 8. 15이후 서울예술극장 연극배우로 활동.

∙ 1950년 조선인민군에 입대.

∙ 1953년 국립연극극장(당시) 연극배우로 활동.

∙ 1955년 교통성예술극장(당시) 단장으로 사업.

∙ 1966년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 영화배우로 활동.

∙ 1989년 3월 6일 사망.

∙ 인민배우.

 

영화배우 황영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혁명연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각색한 예술영화《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 나오는 조선침략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통하여 갖은 위협과 협잡, 회유기만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한 이등박문의 가증스러운 몰골을 보면서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한다.

배우의 연기가 진실할수록 관객들은 영화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며 그 과정에 나름대로 작중인물을 사랑하거나 혹은 증오하기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어른들도 간혹 길가에서 황영일을 만나면 마치 그가 진짜 이등박문인듯이 랭대하군 하였다.

그때마다 황영일은 그들의 분노가 당연한듯 고개를 수굿하고 걸어가군 하였다.

인민배우 황영일!

사람들은 그가 연기를 진실하고 특색있게 한다고 감탄하였지만 50이 넘은 나이에 참다운 연기형상창조의 첫걸음을 떼였으며 인생말년에 창조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때 영화계를 떠나려고 하였던 황영일을 자랑스러운 영화예술인대오에 세워주시고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키워주신 위대한 사랑의 전설을 세상에 전하려고 한다.

 

 

갈림길에서

 

1970년 5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군사물영화창작에서 기적을 안아오실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를 찾으시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군사물영화창작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장군님께서는 촬영소의 창작가, 예술인들의 명단을 료해하시다가 배우 황영일의 이름이 없는것을 보시고 그의 이름이 왜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때 황영일은 지난 기간 연극창조활동을 하면서 저도모르게 몸에 배인 도식적인 틀과 과장된 연기와 같은 신파적인 요소를 없애지 못하여 영화배우로서는 전망이 없는것으로 평가받고있었다. 더구나 출연한 영화도 불과 한두편인데다 맡은 역형상조차 대체로 부정인물인것으로 하여 본인도 영화배우생활을 포기하고 연극부문으로 보내달라고 제기한 상태였다.

촬영소일군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못내 서운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그 동무는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매판자본가역도 괜찮게 창조하였다고, 그는 영화배우로서 전망이 있는 동무라고 하시며 배우단에 그냥 있게 하고 영화배우를 시키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며 그가 가지고있는 배우적재능을 보지 못하고 망탕 처리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될수 있다고 다시금 강조하시였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장래에 대한 위구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던 황영일은 뜻밖에 그 말씀을 전달받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 장군님! 이 몸을 한품에 안아주고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될수 있다고 믿어주신 그 은덕에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단 말입니까.)

뜨거운 격정속에 그는 지나온 반생을 돌이켜보았다.

1919년 5월, 함경남도 홍원군의 어느 한 농가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장남이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는 써레기담배를 뻐금뻐금 빨다가 이름을 영일이라고 지었다.

해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였다.

그러나 악착한 왜놈세상에서 제명을 절반이라도 살면 다행이였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사코 이름을 영일이라고 지은것은 자기는 황씨문중의 묘지기를 하면서 근근득식하는 촌부이지만 그래도 아들만은 밝은 세상에서 복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소박한 소원때문이였다.

황영일은 머리우에 새벽별을 떠이고 집을 나갔다가 어깨우에 달빛을 얹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거친 손길과 춘하추동 손에 물기가 마를새없이 삯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한숨섞인 애무속에서 자라났다.

각박한 세상은 그가 꼭 부여잡고 다니던 어머니의 포근한 치마자락을 놓아버리기 바쁘게 무거운 호미를 쥐여주었다.

황영일은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 불을 놓고 죽기내기로 돌과 나무뿌리를 들춰냈다.

10대의 황영일에게는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화전농사가 그야말로 고역이였다.

게다가 생계를 위하여 짬짬이 칡뿌리를 캐고 송기도 벗기였으며 갖가지 나물을 뜯었다.

어느날 지칠대로 지친 황영일은 호미를 집어던졌다.

《아버지, 다른 애들은 학교에 가는데 난 왜 땅을 뚜져야 하나요?》

당돌한 그 물음에 아버지는 자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수걱수걱 밭김을 매였다.

속이 내려가지 않은 황영일은 그 대답을 찾으려는듯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것은 크고작은 산들과 이따금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풀숲으로 날아드는 한가한 꿩들뿐이였다.

하기야 아무리 령험한 산신령이라고 한들 망국의 운명이 강요한 그 고달픈 인생을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얘, 그러다 해가 질라.》

황영일은 아버지의 꾸중에 입을 나팔주둥이처럼 내밀고 마지못해 호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작은 가슴에 넘치는 울분을 토하듯 땅에 호미날을 박고 와락와락 긁어댔다.

온종일 허리가 휘도록 부대기를 일구고 곤죽이 되여 집으로 내려온 그가 몸을 대충 씻고 노전바닥에 웅크리고 앉으면 멀건 강냉이죽이 차례졌다.

열그릇, 스무그릇을 먹어치워도 성차지 않는 그 한사발의 강냉이죽에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가 아낌없이 덜어주는 죽을 합쳐가지고 단숨에 마셔버린 황영일은 인차 곯아떨어졌다.

그속에서도 그는 한문과 신학문을 배우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눈치빠르고 재간좋은 그는 붓글씨를 아주 잘 썼다.

그래서 한집두집 립춘글(옛날 립춘날에 집대문이나 기둥에 써붙이는 글)을 써주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문이 온 면에 퍼져 수백호의 립춘글을 써주느라 쩔쩔매군 하였다.

동네사람들속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저놈은 결코 촌에서 썩을 놈이 아니요.》

《혹시 우리 동네에서 인물이 나올지 알겠소?》

총각애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여도 그치지 않는 기분좋은 칭찬은 그에게 엉뚱한 꿈을 심어주었다.

(그래, 난 도회지에 나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다!)

그때부터 황영일의 가슴에는 도시에 대한 동경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날이 갈수록 사춘기소년에게는 쉬지근한 두엄냄새와 언제부터 나있는지 모르는 우불구불한 소로길을 따라 속절없이 굴러가는 소달구지가 역겨워났다.

공상에 잠긴 두눈에는 대도로를 따라 씽씽 달린다는 물매미같은 승용차며 전기불이 환히 비친다는 도회지의 눈부신 전경이 별천마냥 안겨왔다.

다 자란 매는 가난하고 우매한 생활의 조롱을 박차고 문명의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그 시각은 평범한 날처럼 례사롭게 닥쳐왔다.

어느해 1월초였다.

그날 황영일의 아버지는 먼곳에 일을 하러 떠났고 어머니와 누이도 남의 집에 일손을 도와주러 가고 없었다.

강냉이이삭들을 부엌아궁이에 집어넣고 슬슬 굴리던 황영일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그의 두눈에서 섬광같은것이 번쩍 빛났다.

(이때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 황영일은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낡은 장농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손에 아버지가 건사해둔 갑계(나이가 같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무은 계)자금이 든 헝겊주머니가 쥐여졌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세여보니 145전이였다.

많다고는 할수 없지만 세상물정을 모르는 17살 난 총각이 모험을 하기에는 충분한 돈이였다.

돈주머니를 품속에 간수한 황영일은 태를 묻고 자란 생가-가난과 굶주림을 숙명처럼 가져다준 농가에서 뛰쳐나와 눈보라속으로 주저없이 몸을 던졌다. 만약 그 결단이 없었더라면 황영일은 평생 손에서 호미를 놓지 못하고 밭을 뚜지는 부지런한 촌부로 살았을것이다.

후날 황영일은 그때의 일이 가슴에 걸려 고향을 찾아갔었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대신 마을뒤산에 있는 낯설은 봉분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황영일은 아들의 속죄를 영원히 받아줄수 없는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며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영일은 갑계금을 품속에 간직한채 자기의 꿈을 향하여, 도회지를 향하여 씩씩하게 걸어가고있었다.

생활은 그가 립춘글을 써주면서 공상속에 그려보던것처럼 랑만적인것이 아니였다.

이틀도 못 가서 돈주머니가 텅 비여버렸다.

제일 급한것은 이미전부터 쓰려나기 시작한 위주머니를 달래는것이였다.

누구도 가난한 총각에게 호떡 한개라도 그저 집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큰사람이 될수 있다!)

이런 결심을 곱씹느라면 지금의 고생은 별치않은듯이 생각되였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중 다부진 체격의 덕에 홍원군의 어느 한 국수집 화부로 들어갔다.

그 국수집은 중학교옆에 있었는데 앞길로 자기또래 학생들이 보란듯이 머리를 쳐들고 다녔다.

석탄덩이와 다름없이 까만 얼굴을 수굿한 황영일은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보군 하였다.

가슴속에서 향학열이 다시금 타올랐다.

(나도 공부를 하자!)

황영일은 이웃에 사는 중학생에게 교과서를 부탁하였다.

《화부인 주제에… 넌 한평생 불이나 때는게 좋을거다.》

중학생은 석탄가루가 묻을가봐 멀찌감치 서서 소년화부를 놀려주었다.

황영일은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

종시 두손을 든 중학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낡은 교과서들을 황영일의 발치에 던져주었다.

그는 속이 불끈거렸다.

(공부를 못하면 말았지 이런 모욕을 참는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 중학생을 보기 좋게 멨다꽂고싶었다.

불현듯 동네좌상로인이 옛말삼아 들려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이름난 기술자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관가노비의 아들로 태여난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천한 신분을 숙명으로 타고난 장영실은 동네아이들의 버림을 받은 외로운 아이였다. 그는 늘 혼자서 개울에 나가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장난감들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내군 하였다. 장영실은 어떤 물건이든지 그저 스치는 일이 없었으며 한번 손에 넣기만 하면 뜯어보고 리해가 되여야만 내놓았다.

장영실은 10살때 관가노비로 되였다.

으리으리한 관가의 대문을 넘어서던 날 어린 소년은 더는 바깥세상구경을 못한다는것을 깨닫자 소리내여 울었다.

그러나 주먹으로 눈굽을 훔치는 작은 가슴은 차돌처럼 단단했다.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대문을 다시 넘으리라!)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기술자였다.

장영실의 손이 가닿으면 못쓰게 되였던 농기구들과 무기창고에 수북이 쌓여있던 고장난 무기들이 새것처럼 고쳐졌다. 또한 수레와 배를 뭇는 일에서까지 그가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으니 점차 관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되였다.

어느날 현감이 그를 불러 칭찬하며 소원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어머니를 한번 뵙고싶소이다.》

하여 장영실은 관노는 죽을 때까지 가족을 만날수 없다는 관가의 법을 깨뜨리고 10살때 헤여진 후 그처럼 그립던 어머니와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노비의 멍에를 벗어버릴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어느해 왕가물이 들었을 때 장영실은 현감에게 일러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 논밭에 댈 대담한 안을 내놓아 현내의 적지 않은 논밭들을 가물피해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세종왕은 관청노비를 등용시키는데 대하여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였지만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 (왕의 의복류들과 궁중의 일용품을 대주는 일을 맡아보는 관리)로 등용하였다.

마침내 그는 울면서 넘어섰던 관가의 대문을 웃으며 넘어서게 되였다.

그후 장영실은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고 50고개에는 내린 비량을 측정하는 세계최초의 측우기를 만들어 세종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

물론 당대의 뛰여난 기술자와 석탄이나 주무르는 국수집 화부를 대비한다는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였다.

하지만 황영일에게 힘과 고무를 준것은 비록 천한 노비였지만 자기의 운명에 도전한 장영실의 장한 기개였다. 그렇다. 서푼짜리 자존심보다 더 귀중한것은 래일에 대한 희망이다. 그것만 있으면, 큰사람이 될수만 있다면 이런 모욕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군말없이 교과서들을 모아가지고 돌아온 황영일은 자습을 시작하였다.

공부시간은 따로 없었다. 헐치 않은 화부일의 쉴참이 그 시간이였고 찬물을 뒤집어쓰며 잠을 덜어 얻어내는 시간이 곧 공부시간이였다.

어찌나 자습에 열중하였던지 어떤 날은 석탄불이 죽은줄도 모르고 교과서에 매달려있다가 하마트면 국수집에서 쫓겨날번 하였다.

교과서를 독파한 황영일의 눈길은 길거리에 있는 책방으로 향했다.

그 책방은 더 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습득할수 있는 편리한 곳이였다.

그는 몇푼 안되는 월급을 타면 주린 배를 맹물로 달래고나서 책방으로 뛰여가군 하였다.

그 과정에 마음씨 고운 책방주인의 동정을 사게 되였고 그의 소개로 한 극작가를 알게 되였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문학이라는 새로운 오솔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쉐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에트》, 《햄리트》, 《오쎌로》, 쉴레르의 《오를레앙의 처녀》, 《윌헬름 텔》 등은 그가 화부로동의 고달픔도 잊고 밤을 새워가며 읽고 또 읽은 희곡들이였다.

문학의 세계는 신비하고 감미로웠으며 황영일은 때로 자신을 오쎌로나 윌헬름 텔과 같은 사나이로 착각하군 하였다.

다음해인 1937년 11월 그는 1년나마 잡고있던 탄삽을 미련없이 내던지고 그동안에 사귄 작가들을 따라 서울로 갔다.

도중에 평양에 들린 황영일은 그곳에서 작가 김사량을 만났다.

당시 김사량은 첫 단편소설 《토성랑》(1936년)을 발표한 후 문단의 주목을 받고있던 재능있는 작가였다.

그는 황영일에게 우선 직장을 구하고 습작도 하면서 문학공부를 하라고 고무해주었다.

그후 황영일은 어느 한 료리점에서 그릇닦는 일을 하며 그곳에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사귀게 되였다.

그들은 식민지조선에서는 연극을 할수 없으니 만주에 가서 연극활동을 하자고 열에 떠서 이야기하였다.

황영일은 김사량을 찾아갔다.

《만주에? … 그 주장이 옳은것 같소.》

김사량의 말이였다.

《그래, 영일군은 어떻게 할 생각이요?》

황영일은 정색해서 대답하였다.

《전 선생님이 하라는대로 하겠습니다.》

《음, 난 군이 그들과 같이 가는게 좋을것 같소.》

김사량의 지지를 받은 황영일은 1939년 7월 중국의 할빈으로 건너가 연극배우 한진섭과 미술가 김용환, 작가 엄시우, 서만일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극단 금강을 설립하였다.

그때의 극단이라는것은 그 어마어마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한명의 작가와 한명의 연출가, 서너명의 배우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단체에 불과하였는데 황영일은 극단배우가 되였다.

이것은 운명의 극적인 전환이였다. 다시말하면 한때 국수집 화부였던 한미한 사나이가 일약 연극배우로 된것이였다.

황영일은 비밀독서회사건으로 체포령을 받고 류랑극단 금희좌에 피신한것이 계기가 되여 연극배우가 되였다는 한진섭의 방조를 받으며 연기훈련을 하였고 무대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극단은 인차 막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만성적인 경영난으로 하여 극단성원들이 사분오렬되였던것이다.

한진섭은 조선으로 또 누구는 일본으로 뿔뿔이 헤여졌다.

황영일은 선배인 한진섭을 따라나섰다.

다시 서울에 나온 황영일은 극단 황금좌에 부연출로 들어갔다가 박학 등이 있는 극단 태양으로 옮겨갔다.

그무렵 그의 인생에서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

해방을 몇달 앞두고 같은 극단의 얌전한 녀배우와 가정을 이룬것이였다.

차천명이라는 그 녀자는 춘천태생이였는데 14살때 가난한 집살림에 보탬을 주기 위해 친척의 소개로 극단 청춘좌에 들어왔고 여러 극단으로 자리를 옮기다가 이곳 극단에서 자기보다 7년이나 우인 황영일을 알게 되여 그와 일생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사립학교 교원들이였던 부모의 좋은 교양을 받으며 자란 차천명은 살림은 가난하였지만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녀성이였다.

그는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보다 연극에 온넋이 빠져 정신없이 돌아가는 남편을 십분 리해하였고 려염집녀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자기의 가냘픈 어깨우에 마구 쏟아지는 부담을 말없이 이겨나갔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여 나라가 해방되였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해방인가. 이제부터 새 조선의 연극을 마음껏 하게 되였구나!)

황영일은 뜻이 맞는 연극인들과 함께 서울예술극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조령출과 박학 등과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였다.

《새 조선의 연극을 하자!》

이것은 진보적연극인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였고 지향이였다.

그러나 철갑모를 쓰고 투박한 군화를 저벅거리는 미군병사들이 남조선을 강점하자 그 꿈은 물거품처럼 되고말았다.

어느날 새로 창작한 연극을 상영하려는데 곤봉을 든 미군헌병이 불쑥 나타났다.

《중지!》

황영일은 한발 나서며 물었다.

《왜 중지하라는거요?》

미군헌병은 한마디 설명도 없이 곤봉으로 황영일의 가슴을 쿡 찔렀다.

《까뗌!》

그자가 손짓하자 뒤에 서있던 깡패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배우들을 치고 차더니 소도구와 무대장치물들을 사정없이 짓부셨다.

황영일은 억이 막혔다.

(제 나라에서 연극도 마음대로 못한단 말인가. 하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을 주기라도 하듯 《헤이, 헤이!》 하고 징그럽게 웃고있는 미군헌병의 몰골이 어지럽게 안겨왔다.

허탈감에 빠진 황영일은 집에 돌아오자 이불을 뒤집어썼다.

며칠후 겁에 질려 뛰여온 안해가 진보적인 연극인들에 대한 체포소동이 벌어지고있다고 알려주었다.

(음!-)

비로소 황영일은 미국이 《해방자》가 아니라 왜놈을 대신한 침략자이라는것, 외세가 틀고앉은 남조선에서는 새 조선의 연극을 할수 없다는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격분으로 몸을 떨던 그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동료들도 그의 뒤를 따라 진보적인 연극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그 결과로 차례진것은 감옥행과 은둔생활이였다.

1949년 6월 황영일은 경상북도 대구에 진보적인 극단을 조직하려고 내려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여 서울로 압송되였다.

악착한 원쑤들은 임신중인 그의 안해도 붙잡아갔다.

감옥에 갇힌 황영일은 주먹으로 철창을 힘껏 두드렸다.

(아, 언제면 이 땅에 밝은 빛이 비쳐들겠는가?)

그의 감방에는 북에 갔다온 《죄》로 붙잡힌 한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후 평양은 새 조선 연극창조의 중심지로 되였다.

극장들에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형상한《조선빨찌산》, 《뢰성》, 《백두산》 등과 해방후 토지개혁을 통하여 땅의 주인으로 된 농민들을 형상한 《바우》, 《비룡리농민들》, 《성장》을 비롯한 연극들이 성황리에 공연되고있다. 또한 《리순신장군》, 《심청전》, 《춘향전》 등 력사물주제의 연극들도 창조공연되고있다.

진정으로 연극을 하려면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으로 가라. …

황영일은 눈앞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쳐드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새 조선의 연극활동이 힘차게 펼쳐지는 공화국의 현실이였다.

(언제면 나도 그 품에 안길수 있단 말인가?)

몇달 지나 감옥에서 놓여나온 그는 반동적인 연극단체에 출두하라는 우익깡패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두문불출하였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무력침공을 단호히 물리치고 서울을 해방한 인민군대가 보무당당히 나타났다.

김일성장군 만세!》

《인민군대 만세!》

황황히 이불을 차던진 황영일은 미처 옷소매도 꿰지 못한채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보는 군대의 모습이 안겨왔다.

하나같이 름름한 인민군병사들은 굳게 닫겼던 극장문들을 활짝 열었다.

황영일과 동료들은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주춤거렸다.

그때 인민군 군관이 기연가미연가하는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여러분, 인민의 세상이 왔습니다. 그러니 연극을 마음껏 하십시오.》

전쟁의 포성이 멀리 남쪽에서 울려오던 8월 중순 황영일은 군복을 입고 조선인민군예술극장 배우로 입대하였다.

언제 한번 남편과 뜻을 달리해본적 없는 안해도 그를 따라나섰다.

이 시기 연극작품들은 전쟁환경에 맞게 소편대기동공연에 맞는 단막극을 기본으로 하면서 중장막형식을 배합하였으며 그 주제사상적내용에서 군사물이 앞서고 후방인민들의 생활을 반영한것이 결합되였다.

9월 중순 뜻밖에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였다.

황영일부부는 서울에 장모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북행길에 올랐다.

안해는 눈굽을 훔치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황영일도 마음 같아서는 집에 들리고싶었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으로 하여 그렇게 할수 없었다.

후퇴대렬을 따라가면 애국이요, 떨어지면 반역이였다.

황영일은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안해의 손을 꽉 잡고 걸음을 다그쳤다.

이듬해 인민군대를 따라 북으로 들어온 장모가 그들을 찾아왔다.

《어이구, 이 일을 어쩌면 좋나. 글쎄 그놈들이 애들을…》

알고보니 그는 적들에게 체포되여 《빨갱이장모》라고 악착한 고문을 받다가 간신히 놓여나왔는데 그동안 죄없는 두 아들은 무참히 학살되였던것이다.

황영일은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이 원쑤놈들아, 그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는 가슴속에서 화산처럼 끓고있는 분노를 연기형상에 쏟아부었다.

조선사람들의 가슴에 수백년을 두고도 아물지 못할 아픈 상처를 남긴 3년간의 전쟁은 공화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무렵 황영일은 국립연극극장(당시)에 소환되였고 그후 교통성예술극장(당시) 단장으로 임명되여 십여년동안 사업하였다.

1966년 6월 황영일은 조선2. 8예술영화촬영소(당시) 배우로 조동되였다.

연극배우로부터 영화배우로 방향을 전환한 그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

섭섭한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맡은 역이 전부 부정인물이라는 사실이였다.

황영일은 내색하지 않고 역인물형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바쳤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자신심이 사라져갔다.

설상가상으로 동료들속에서 황영일이 나이도 많고 전망이 없다는 소문이 쉬쉬하며 돌아갔다.

황영일은 인생에도 황혼이 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여 고민끝에 연극부문으로 보내달라고 제기하였던것이다. …

그런데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져가는 한 배우의 재능을 알아보시고 이미 50고개에 이른 황영일에게 이렇듯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던것이다.

정녕 장군님은 은막우에서 사라질번 하였던 그를 자애로운 한품에 안고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어버이이시였다.

그러나 황영일은 따사로운 그 손길이 오늘만이 아니라 래일에도 영원히 자기의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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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노래로 빛나는 삶 -인생의 노래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성장의 나날-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1. 노래로 빛나는 삶 -위인의 손길에 이끌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 1. 노래로 빛나는 삶aa-노래속에 꽃피는 생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영원한 삶의 생명수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갈림길에서-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위대한 스승과 관록있는 제자-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노력과 열매-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3. 관록있는 영화배우로 자라기까지 -소원과 계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1)-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분수령-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aa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아버지와 아들 (2)-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4. 그가 남긴 생의 자욱 -생의 메아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항거-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을 위하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고마워라, 내 안겨사는 어버이품이여- 도서 《운명의 선택 5》중에서 ^bb5. 한생 통일을 불러 -통일이여 어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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