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1932년 6월 15일 서울에서 출생.
∙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 입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3년 무대예술공연 소개자로 활동.
∙ 1967년 량강도예술단 작가로 활동.
∙ 1987년 피바다가극단 작가로 활동.
∙ 1989년 조선문학창작사(당시) 작가로 활동.
∙ 2011년 3월 11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그리도 가슴가득 안고 산 축원
그리도 가슴가득 넘치던 감사
그리도 가슴가득 품었던 맹세
어이하여 그날에 그이앞에서
한마디도 아뢰이지 못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죄송한 마음, 아쉬운 마음
이리도 이 가슴 파고드는것인가
…
그러나 사람들이여
나를 나무라지 마시라
그이의 사랑이 너무도 깊은
것이여서
그이의 믿음이 너무도 높은것이여서
그이의 배려가 너무도 큰것이여서
참으로 이 세상 그 어떤 말도
찾을수 없었던것을
…
그날에 못 올린
그 모든 축원을 담아
그날에 못 올린
그 모든 감사를 담아
그날에 못 올린
그 모든 맹세를 담아
노래하고 또 노래하리라
목숨이 진할 때까지
온 세상에 소리높이 노래하리라
세월의 끝까지
(최로사의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중에서)
떨어져서는 단 한시도 살수 없는
시인 최로사는 이 시에서 자기 인생의 어버이, 삶의 영원한 생명수를 부어주신
이 나라 수천수만의 생명들이 그러하듯 시인 최로사는 바로
영원한 삶의 생명수 (1)
일찌기 한 철학가는 《좋은 예술가가 되는데는 4가지가 필요하다. 착한 심장, 예리한 눈, 가벼운 손 그리고 언제나 깨끗이 닦은 붓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최로사의 인생사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남다른 창작적재능과 주위세계를 감득할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 그였지만 남조선에서는 도저히 피워볼수 없는 꿈을 가진 그였다.
아버지와 고모도 모두 자기들의 후더운 심장에 문학예술을 안고있었지만 제 나라가 없는탓에 붓대는 꺾이여지고 예술의 넋은 짓밟혀 침략자들의 더러운 롱락물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시고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가시는
아무리 좋은 종자도 불모의 땅에 떨어지면 싹트지 못하고 썩어버리게 된다.
사람들의 재능도 바로 그것을 귀중히 여겨주고 키워주며 내세워주는 다심한 사랑의 손길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최로사가 10대의 어린 나이에 단행한 운명의 선택!
그것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인생의 선택이였으며 태양의 따뜻한 손길에 이끌려 기름진 대지우에 한껏 뿌리를 박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마음껏 피워 알찬 열매를 맺어가는 보람차고 격동적인 나날이였다. 자연계에는 사계절이 있지만 영원한 봄계절만을 아는 따사로운 품, 사회주의조국의 품이 있어 그는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작가로 남아있는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귀중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들의 소원을 초월하여 샘물터의 영원한 생명수로 되여 자기의 생에 빛나는 자욱들을 아로새겨온 시인 최로사.
그의 인생은 인민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며 이끌어주는
한생 붓대를 들고 창작의 길에서 탈선없이 살아온 최로사에게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심장속에 안고 산 글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90년 12월 27일
우리 당건설과 활동에서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크나큰 믿음과 신임이 담긴 그이의 친필은 시인의 높뛰는 심장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전시가요 《샘물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창작생활은 말그대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55년 6월말 어느 한 자리에서 노래《샘물터에서》는 참으로 좋은 노래라고, 전쟁시기 우리 인민군병사들과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불리운 노래였을뿐만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도 많이 불렀다고 하시며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샘물터에서》와 같은 노래를 전후복구건설을 하는 오늘도 많이 불러야 한다고 하시며 그래야 전쟁시기 우리 인민이 지니고있던 승리의 신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힘을 낼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한 처녀병사의 미숙한 습작시에서 작가적인 재능의 싹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활짝 피워 온 세상에 빛내여주신 어버이수령님!
진정 그 사랑, 그 은정은 그대로 최로사의 육체에 피줄처럼 흘러들어 그의 심장을 드높은 창작적충동과 열정으로 높뛰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바로 그 믿음이 있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한 예술단에서 일하던 최로사는 남편과 함께 량강도의 현지작가로 파견되였을 때에도 창작의 나래를 더 활짝 펼수 있었다.
그는 도예술단의 작가로 있으면서 민족가극 《해빛을 안고》를 비롯하여 음악무용대본들과 수십편의 가사들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바로 이 나날에 최로사는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1972년 6월초,
얼마나 뵈옵고싶던 그이이신가!
이날 공연무대에 올린 종목들중에는 최로사가 창작한 노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있었다.
그러시고는 시연회가 끝나자 최로사에게 다가오시며 녀류시인동무, 참 오래간만입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최로사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실가?)
자기의 손을 꼭 잡으시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느라니
최로사는 영광의 이 순간 자기가 그이께 뭐라고 말씀을 올려야 할지, 어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감감히 잊어버리고말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이의 앞에 나서면 자기의 인생을 따뜻한 품에 감싸안아 키워주고 소원대로 작가로 내세워주신 그 은정에 골백번 머리숙여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진 그였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그이를 뵙고나니 꼭 친어머니의 품에 안긴것만 같아 격정의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를 알고계신것은 퍽 오래전부터였다. 최로사는 전후에 중앙예술단체의 소개자로 10여년간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그가 관중들로 하여금 문학예술의 사상예술성을 깊은 예술적감흥속에 받아안도록 하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한것을 잊지 않으시고 소개는 그전에 최로사동무가 잘하였다고 감회깊이 회억하시였다.
노래 《샘물터에서》의 명가사를 쓴 이름있는 시인, 관중들의 심장을 틀어잡았던 인기있는 소개자…
오래전부터 심중에 새기고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던 최로사였기에 그이께서는 그의 자그마한 창작성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기뻐해주시며 그에게 더 큰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는것이였다.
사령부의 귀틀집 불밝은 창가에
장군님은 이밤도 지새우시네
내 어이 밤길이라 지체하리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떠나렵니다
아 천리라도 만리라도 떠나렵니다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
산악인들 바다인들 못 넘으리까
장군님의 전사로서 임무받은 몸
가시덤불 길이라도 두려우리까
아 가시덤불 길이라도 못 넘으리까
1968년에 창작한 이 가사에는 어버이수령님을 인생의 영원한 은인으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참된 진리로 새겨안고 끝까지 따르려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이 담겨져있었다.
이날 최로사는 자기가 안겨사는 조국의 품이 얼마나 넓고 따사로운가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날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차례지는지 다는 알지 못했다.
1976년 7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당시 최로사는 마음속에 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있었다. 곁에서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창작의 밤을 함께 패워가던 사랑하는 남편인 김준도가 불치의 병으로 사망하였던것이다.
일군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이윽고 그이께서는 심중하신 어조로 일군에게 최로사동무는 열여덟살 어린 나이에 병사로 복무하였을뿐아니라 전쟁의 불길속에서 《샘물터에서》와 같은 명가사를 창작한 재능있고 공로있는 작가라고 하시며 앞으로 그의 사업과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인간과 생활에 대한
참으로 최로사가 걸어온 인생의 갈피갈피에 흐르는 생의 활기는 그대로 은혜로운 어버이께서 부어주신 호흡이였으며 박동이였다.
그의 미흡한 작품을 귀중히 여겨주시고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며 시대의 명곡으로,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내세워주신
1982년 4월의 어느 봄날
주제가 《새별》은 최로사가 1966년에 창작한 작품이였다. 그러나 영화는 높아가는 인민들의 문화수준을 민감하게 반영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상영되지 못했다.
그때부터 세월은 흘러 이제는 주제가의 가사를 쓴 작가나 작곡가의 기억에서도 그 노래가 희미하게 사라져가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그이께서는 이 노래는 가사도 좋고 곡도 좋은데 영화때문에 파묻혔다고 말씀하시며 못내 아쉬워하시였다.
일군들의 놀라움은 컸다. 온 방안은 격정의 파도로 설레였다.
가사의 구절구절을 세심히 훑어가시던 그이께서는 친히 몇구절을 수정가필하여주시고 곡도 두군데나 수정해주시였다.
저 하늘에 별들이 많고많아도
마음속에 빛나는 새별은 하나
별이여 비쳐다오 등대와 같이
우리 앞길 찬란히 비치여다오
원래 가사는 《밤새도록 비치는》으로 되여있었는데
새별처럼 청춘을 빛내이자고
굳은 맹세 다지며 그대 떠났네
별이여 전해다오 나의 노래를
사무치게 그리운 나의 님에게
일군들은
이렇게 되여
그뿐만이 아니다.
최로사는 바로 그 사랑, 그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이의 문예정책을 받드는 길에서 언제나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로 살기 위해 피타는 창작활동을 벌렸다.
그는
그는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노래인것만큼 가사를 밝고 명랑하게 생활적으로, 통속적으로 쓰리라고 마음먹었다.
우리 세월 좋아 백년가약 좋아
축배 축배 축배를 들자
즉 최로사는 《우리 세월 좋아》라는 한구절에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에서 인민이 누리는 행복한 생활을 다 담고 이런 좋은 세상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청춘들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내용을 다 담아보려고 하였다.
우리 세월 좋아 로동당이 좋아
축배 축배 축배를 들자
이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는 순간 최로사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올리였다.
(내가 구가하자고 생각한것 즉 우리가 사는 로동당시대, 우리 사회주의제도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청춘남녀들에 대한 축하이자 이 행복을 안겨준 은혜로운 사랑의 품, 우리 조국에 대한 다함없는 칭송의 사상감정이 얼마나 빛나게 형상되였는가!)
최로사는 짧은 가사에서 《우리 세월 좋아》라는 시구이상 더 좋은 표현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2절과 3절의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최로사는 2절 부분에서 《금딸이겠네》라고, 3절에서는 《사랑만은 오늘처럼 젊어있으리》라고 썼었다.
그러나
신랑신부 웃음꽃이 활짝 폈으니
첫아기는 틀림없이 옥동자라네
…
신랑신부 검은머리 백발되여도
변함없는 사랑속에 젊어있으리
…
노래가 완성되였을 때 최로사는 몇번이고 가슴속으로 이렇게 웨치고 웨쳤다.
《참으로 우리 장군님은
그는 천재적인 예지와 열화같은 사랑으로 평범한 시인이 창작한 한편의 노래가사까지 이처럼 훌륭히 완성시켜주신
정녕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길데 없는 이런 믿음과 은정속에서 최로사는 작가로서의 영예를 더욱 빛내이게 되였다.
이렇듯 자애롭고 인자한 품에 안겨 만복을 누려가는 그였기에 어느해 정월초하루 남녘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 《내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
어머니슬하를 떠나
내 안긴 은혜로운 품
이 품속에서
내 어머니 그토록 주고파도 못 주던
만복을 한껏 누리며
내 어머니 그토록 바라시던
나의 소원 나의 희망 꽃으로 활짝 피여
영광으로 이어온 내 삶의 하루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