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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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있었다.
말몰이군소년시절 자기의 깁고 기운 바지며 왈렌끼 한컬레로 발이 커져서 더 들어갈수 없게 될 때까지 쑤셔신던 그 가난을 눈앞에 그려보았던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쏘련에서도 가장 빈곤한 벽촌의 이름없는 농군의 아들이라면 이분은, 나의 앞에 앉아있는 바로 이분은 반세기전부터 국가수반의 아들로
생활해왔고 벌써 오래전에 후계자로 지목되여오신분이시다. 지금 하시는 말씀 그것만으로도 이분은 얼마나
그가 알고있건대
야조브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여전히 상념속에 잠겨있었다. 인민들이야 어떻든 별장짓기, 자동차바꾸기놀음에 여념이 없던 이전 쏘련의 력대의 집권자들, 미국에서 얻어입은 승냥이털외투를 걸치고 으시대던 무능한, 뭇사람들이 그처럼 저주하여마지 않는 남조선괴뢰에게서 딸라를 뢰물로 받아 감추었던 도덕적저렬한… 바로 이들때문에 레닌, 쓰딸린당이 인민들로부터 고립되고 배척을 받아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았던가.
오, 고대로마가 망한것은 덕이 부패했기때문이거늘! 하고 야조브는 마음속에 써넣었던 오늘일기의 구절을 되뇌이였다.
그러자 덕의 화신인
야조브는 문득 물었다.
《…》
이 아침 바쁜 시간을 내여 그와 마주앉기로 한것은 그에게 말할것을 말해주어야 할 때가 되였다고 보시였기때문이다.
야조브가 우리 나라에 온지도 시일이 흘렀다. 운명의 기로에서 자총까지 결심했던 그는 우리 나라 현실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과 락관을 가지게 되였다.
그를 동행했던 심철범이나 당 국제부 일군들의 보고자료를 통해 그 사실을 료해하신
그런데 화제가 뜻밖에 달리 돌아갔다.
《나는 언젠가 학생시절에…》
《이딸리아의 작가 캄파넬라가 1600년대에 감옥생활을 하면서 창작한 공상소설 〈태양의 도시〉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칼 맑스가 활동하기 250여년전에 벌써 캄파넬라는 소설에서 놀랍게도 사회주의사회의 면모와 그 사회에 살게 될
《예, 좋습니다.》 하고 야조브도 따라 일어서려고 몸을 일구다가 비칠하였다. 역시 나이는 나이였다. 오래 앉아있었던탓에 오금을 인차 펴기가 힘들었던것이다.
큰 도로에 나서서 동명왕릉쪽으로 발걸음을 떼시였다. 첫 새벽이여서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하였다. 어데선가 피여난 안개가 도로상에서 늠실거리고있었다.
《동유럽나라사태를 계기로 공산주의에 대한
《예, 그렇지요!》
야조브는 대번에 모든것이 리해되는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야조브의 자총사건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리념에 대한 회의, 불신, 좌절이기 전에 그자신이 이미 느끼고있는것처럼 공산주의를 위해 피를 뿌리고 쓰러진 선렬들에 대한 변절이며 배신이다.
그것은 리념에 대한 배신이기 전에 도덕의리적저렬성, 타락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바로 야조브에게 이것을 인식시키고 도덕의리적으로 재생시키며 나아가서 공산주의리념의 절대적인 신봉자, 선전자, 관철자로 되게 하여 쏘련의 재생운동에서 앞장에 서도록 해주고싶으시였다.
그
청년시절 뜨로쯔끼는 로동운동에 얼굴을 내밀었다가 인차 짜리당국에 체포되여 씨비리류형을 언도받게 되였다. 그전부터 레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온 그는 류형지에서 탈출에 성공하자 레닌을 찾아 런던으로 갔다.
1902년 뜨로쯔끼는 런던에서 새로운 창당준비에 여념이 없던 레닌의 접견을 받았다.
25살의 한창 나이이지만 피골이 상접하고 생기라고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는데다가 당장 입마저 건사할 처지가 못되는 뜨로쯔끼를 만난 레닌은 의사소통보다 동정이 앞서 자기의 소지품을 팔아 얼마간의 용돈도 쥐여주고 거처지도 알선해주었다.
당시 레닌도 망명생활을 하는 처지에서 맹물에 빵 한쪼각으로 끼니를 에우거나 그것마저 번지는 때가 많았다.
따뜻한 인정미에 감복이 된 뜨로쯔끼는 그날 밤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레닌은
뜨로쯔끼는 감동한 나머지 레닌의 품에 안겨 울면서 《가장 현명한 스승이며
그 이튿날부터 뜨로쯔끼는 레닌을 도와 밤낮으로 혁명적출판물발간에 열중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능란한 언변으로 런던에 망명하여온 로씨야운동가들과 맑스주의신봉자들에게 레닌의
기회주의자들은 남달리 언변이 좋은 뜨로쯔끼에게 자기들편에 넘어오면 새로 조직하게 될 당의
1903년 로씨야사회민주로동당 제2차대회에서 뜨로쯔끼는 어제날의 스승이며
《레닌동지, 저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용서해주실수만 있다면 잊을수 없는 런던의 그 밤처럼 다시한번 은혜로운 그 손길을 저에게 주십시오.》
뜨로쯔끼의 얼굴에서는 죄책의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혁명의 결정적시각을 앞두고 레닌은 또다시 그에게 공산주의자로서의 아량과 믿음을 베풀었다. 그는 볼쉐비크당에 들어오게 되였고 그후 당과 국가의 중책을 맡게 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의 훌륭한 언변을 황홀하게 쳐다보는 군중들을 볼 때마다 일시 숨죽였던 직위욕이 기름에 달린 불길처럼 타올랐다. 게다가 레닌이 병상에 들무렵 자기의 후계자로 10월혁명의 공로자이며 원칙성이 강한 쓰딸린을 지목하게 되자 배신자는 마침내 분별을 잃고 반레닌, 반쓰딸린, 반혁명책동을 광신적으로 벌리기 시작했다. 배신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레닌의 프로레타리아독재와 사회주의건설에 대한 리론이 불가능하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레닌은 림종전야에 뜨로쯔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뜨로쯔끼의 본명은 원래 부른 스타인이였다. 나는 여기서 세번째이름을 달아주려고 한다. 그는 유다 뜨로쯔끼이다.》
쓰딸린은 레닌의 서거후 뜨로쯔끼에 대한 매장을 당의 과업으로 선포하고 원칙적인 투쟁으로 그를 출당시키고 국내에서 추방하였다.
악랄한 배신자는 그후 서유럽자본주의나라들에 가서는 도망간 민족주의자들, 맑스-레닌주의 변절자들, 기회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이른바 《제4국제당》이라는것을 조직하고 로씨야혁명의 승리를 확대하기 위한 로동계급의 투쟁에 도전하여나섰다.
하여 그는 1940년 외국에서 죽은 후에도 사람들로부터 《국제반동》, 《세계적으로 공산주의망신을 시킨 추악한 배신자》라는 락인을 영원히 벗을수 없었다.
그는 가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배신자로서 공산주의도덕의 파괴자로 악명을 떨치였다.
쓰딸린을 헐뜯다 못해 그의 시신마저 불사른 흐루쑈브, 자기를 키워주고 후계자로까지 내세워준 호네케르의 발뒤축을 물어메친 민주도이췰란드의
공청 제1
이윽고 좀 긴장된듯 한 어조로 그러나 근엄하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상한 도덕의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어떻게 되겠는가? 망하겠는가? 안 망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야조브는 자기자신의 운명과 직접 관련된 문제, 조선의 사회주의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다른 누구가 아니라
사회주의조선의 권위와
선대수령과 후계자사이의 국가관직에 대한 교대 하나를 두고도 그토록 깊이 생각하시는 그
오, 덕의 나라 조선은 불패하리라! 야조브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웨치였다.
물론 야조브는
하지만
이윽고 걸음을 멈추신
어느날 리성계는 왕위를 넘겨줄 셋째아들 리방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버지는 진실로 하늘의 뜻이 있어 왕이 되였습니까?》
아들의 물음에 리성계는 《나를 왕위에 올려세운것은 하늘이 아니라 나를 따른 군사들이다.》라고 말하였다.
리성계는 악인이지만 력사의 교훈을 말했다.
력사의 교훈이 말해주는것처럼 총대를 누가 쥐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
혁명에서 기본이 주권문제라면 그것이 태여나는 근원은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의회가 아니라 명실공히 군대, 총대였다. 동서방의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 세워졌던 국가제도치고 총대신세를 지지 않고 태여난것이 없다.
이전 동유럽나라들에 세워졌던 쏘베트정권들도 총대의 울부짖음의 산물이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나라들의 독립도 총포성의 뒤끝에 이루어진것이였다.
《나는 80년대 중엽에 벌써 몇해 못 가서 쏘련이 해체될것이라는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나는 쏘련당에서 군대의 비사상화를 결정하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8차당대회에서였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야조브가 얼른 대답올렸다.
《그 당대회의 결정을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얼른 대답올렸다. 야조브는
야조브가 떠듬거렸다.
《우리는 그때 쏘련을 매일과 같이 주시하고있었습니다. 이웃집이 무너지는데 어찌 무관심할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나라 속담에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쏘련의 해체를 막아내지 못한 국방상으로서 면목은 없습니다만 저는 지금
《그렇다니 됐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합시다.》
《줴기밥을 들지 않던데 시장하지 않습니까?》
야조브는 《일없습니다.》 《일없습니다.》 하고 황망히 곱씹고나서
《오히려
《저도 일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쏘련의 군부, 붉은군대에 기대를 걸고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부를 주동으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조직되자 일이 바로잡혀지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상적으로 무장해제당한 군대에게 쥐여진 총대란 한갖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나의 견해가 그런
결론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전 쏘련국가안전위원회
고르바쵸브는 군대에 법만 준수하면 된다고 력설하였다. 붉은군대안에 종교가 퍼지고 방탕과 무질서가 만연될무렵 꾸르츄꼬브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고르바쵸브는 붉은군대가 더는 사회주의정권을 지킬 사상의지가 없어지기를 기다려 쏘련의 해체를 정식 표명하였다.
1991년 8월 꾸르츄꼬브는 국가의 안전을 담당한 자기의 본분으로부터 쏘련의 해체를 막기 위해 부대통령과 국방상인 야조브를 비롯한 군부의 상층인물들의 동의를 얻어 그들과 함께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하고 6개월을 기간으로 전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그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는것과 함께 국가안전위원회
그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붉은군대부대들에도 쏘련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음을 알리고 정권을 수호할데 대한 지시를 떨구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부패되여 쏘베트정권을 지킬 능력을 상실한 붉은군대 장병들은 그 지시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조국의 운명에 대하여 가슴아파하지도 않았다. 단지 모스크바교외에 주둔했던 몇개 구분대가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였으나 그들에게는 사정을 보지 않고 배신자들을 쏴제낄 의지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고르바쵸브가 어디까지나 헌법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였던것이다.
붉은군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수 없었던 비상사태위원회는 맥을 놓고 고르바쵸브에게 경거망동을 부리지 말라고 충고를 준 후 배신자를 3일만에 석방하면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해체하였다.
고르바쵸브는 석방되기 바쁘게 이미 바보로 되여버린 군대를 선동하고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비상사태위원회 성원들을 꺼꾸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로부터 며칠후인 12월 25일 크레믈리대회당지붕우에 꽂혀있던 붉은기는 내리워지고 사회주의이름과 함께 쏘련은 해체되여 쏘베트정권은 말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 다음호에 계속 )